종교

업(業)의 가르침도 진리가 될 수 있을까?

황령산산지기 2020. 8. 23. 03:44

업(業)의 가르침도 진리가 될 수 있을까?

 

 

파스칼의 내기가 있다. 파스칼의 내기(Pascals wager)는 기독교적 변증법을 말한다. 이는 신론에 대한 것이다. 신의 유무에 대한 논쟁에서 신이 있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말한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반반의 확률이라면 그래도 신이 있다고 믿는 것이 더 이익이라는 말이다.

 

파스칼의 내기는 죽었을 때 적용된다. 평소 신이 없다고 믿었던 사람이 죽었을 때 신이 있다면 얼마나 황당할까? 이럴 경우 차라리 신이 있다고 믿는 것이 반반의 확률에서 이득이 됨을 말한다.

 

반반의 확률이라면

 

불교에도 파스칼의 내기와 유사한 가르침이 있다. 맛지마니까야에 실려 있는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M60)을 말한다. 시기적으로 불교가 먼저 성립되었기 때문에 원조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인간은 몸이 파괴된 뒤의 자신을 안전하게 만들 것이다.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한다면, 이 인간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의 그러한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차라리 저 세상이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여전히 이러한 사람은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내세가 없다고 주장하는 비도덕적인 사람으로서 현자들에 의해서 지금 여기서 비난받는다.

 

그러나 반대로 저 세상이 있다면, 이 사람은 양쪽에서 불운에 떨어진다.

지금 여기서 현자들에 의해 비난받고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여 실천하여 한 쪽만을 충족시키고, 착하고 건전한 것을 버리고 있다.(M60)

 

 

저 세상이 없다고 믿는 사람에 대한 것이다. 내생과 윤회를 부정하는 단멸론자에가 이에 해당된다. 단멸론자들은 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공양도 없고 선악에 대한 과보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다.”(M60)라고 믿는다. 몸이 무너져 죽으면 정신도 함께 죽어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사견을 가진 자들이다.

 

단멸론자들은 정신은 육체에서 파생된 것으로 본다. 육체와 정신은 상호의존적 관계이기 때문에 육체가 무너지면 정신도 무너진다고 본다. 이와 같은 단멸론적 견해를 가진 자들이 죽었을 때 정말 내세가 없다면 다행일 것이다. 그러나 정반대로 내세가 전개 된다면 불운에 빠질 것이다. 악처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대개 단멸론자들은 비도덕적 삶을 살 가능성이 매우 높다.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마음껏 즐기다가 죽자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대신에 업()

 

부처님은 업과 업의 과보를 설했다. 부처님의 업과 업보의 가르침에 따르면 저 세상을 믿는 것이 낫다. 마치 파스칼의 내기에서처럼 신을 부정하는 것 보다는 신을 인정하는 것이 더 나음을 말한다. 다만 불교에서는 신대신에 업()이다. 행위와 행위의 과보를 믿는다면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고 저 세상에서도 행보할 것이라고 했다. 이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한다면, 이 인간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날 것이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의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차라리 저 세상이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여전히 이러한 사람은 올바른 견해를 가지고 내세가 있다고 주장하는 도덕적인 사람으로서 현자들에 의해서 지금 여기서 칭찬받고 있다.

 

만약 저 세상이 있다면, 이 사람은 양쪽에서 행운을 받는다.

지금 여기서 현자들에 의해 칭찬받고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잘 받아들여 실천하여, 양쪽으로 충족하며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버린다.

 

 

업과 업보의 가르침을 믿으면 이 세상에서나 저 제상에서나 행운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업보를 믿는다는 것은 행위의 두려움, 윤회의 두려움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고통을 초래하는 행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착하고 건전한 살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도덕적인 삶을 살게 된다. 이는 죽으면 끝이라고 여겨 비도덕적 삶을 사는 단멸론자와 비교된다.

 

업의 가르침은 정견

 

부처님은 업의 가르침을 설했다. 그런데 부처님의 업의 가르침은 정견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커다란 마흔의 경에서 나는 올바른 견해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한 공덕이 있어도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올바른 견해가 있고,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뛰어넘고, 고귀한 길의 경지에 드는 올바른 견해가 있다.”(M117)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불교에서 정견은 사성제를 말한다. 그러나 이는 출세간적 정견이다.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는 정견을 말한다. 번뇌에 영향을 받는 정견을 세간적 정견이라고 한다. 이를 업자성정견(kammassakata-sammādiṭṭhi)이라고 말한다.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는 것을 말한다.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안다면 함부로 행위 하지 못할 것이다. 행위의 두려움을 아는 것이다. 행위로 인하여 어떤 과보가 발생하는지 아는 것이다. 그럼에도 업보를 무시하는 자들이 있다. 인과를 무시하는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행위를 했음에도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는 단멸론자들을 말한다. 부처님 당시 외도의 스승 아지따 께사깜발린이 대표적이다.

 

케 세라 세라(Que Sera Sera)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안다면 단멸론은 발붙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업보를 인정하는 외도의 가르침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숙명론을 말한다.

 

숙명론은 어떤 이론일까? ‘이교도의 경에 따르면 그 모든 것은 전생이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A.3.61)라고 설명된다고 했디. 이는 인고의 강한 결정론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어떠한 느낌이라도,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체험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전생이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A.3.61)라고 보는 것이다.

 

숙명론에 따르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어떤 행위를 해도 전생의 원인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도덕적 삶을 무력화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살아 있는 생명을 죽여도 전생의 원인 때문인 것으로 본다. 도둑질하는 것도, 음행을 하는 것도 전생탓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오계를 어기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최근 유튜브 ‘5분 뚝딱 철학에서 숙명론에 대한 설명을 보았다. 이는 결정론 :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가?라는 동영상을 말한다. 동영상에 따르면, 숙명론이란 간단히 말해서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숙명론을 한마디로 말해서 케 세라 세라(Que Sera Sera)’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정론과 숙명론은 어떻게 다를까?

 

결정론과 숙명론은 어떻게 다를까?

 

결정론(Determinism)은 미래는 과거와의 인과법칙에 의해서 결정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과거의 어떤 사건이 원인이 되어 미래의 어떤 사건이 결과로서 이미 결종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숙명론(Fatalism)은 그냥 미래가 결정되어 있음을 말한다.

 

숙명론은 인과관계에 의해 결정되어 있든지, 신의 계시에 의해 결정되어 있든지, 우주의 질서에 의해 결정되어 있든지, 아니면 그냥 결정되어 있든지, 어쨌든 그 사건이 일어나도록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결정론과 숙명론의 첫번째 차이이다.

 

결정론과 숙명론의 두번째 차이는 무엇일까? 결정론은 미래가 우연히 그렇게 결정된 것이라는 입장이다. 숙명론은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 필연적으로 일어나도록 결정되어 있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것이 있다. 결정론은 인과법칙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라고 하면서 우연히결정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인과법칙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라면 그 결과는 필연적인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인과법칙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필연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고 말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과법칙 자체가 우연히 결정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빛의 속도나 중력가속도 등 자연법칙 자체가 우연히 생긴 것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정론에 따르면 인과법칙에 의해서 생긴 미래가 우연히 결정된 것일 수도 있다고 본다. 반면에 숙명론은 미래가 그렇게 결정될 수밖에 없다고 보는 입장이다. 필연적으로 그렇게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숙명론에 대하여 막무가내이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왜 일어나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그렇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정론과 숙명론을 비교해 보면 숙명론은 이른바 묻지마 이론이라고 볼 수 있다. 될대로 대라는 이론일 수도 있다. 이는 숙명론에 대하여 케 세라 세라라고 말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본래 케 세라 세라라는 말은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라는 뜻이다.

 

인과론이 인과를 부정할 때

 

부처님 당시의 숙명론은 숙작인설(pubbekatahetuvāda)로 잘 알려져 있다. 니간타교도들이 신봉했던 이론이다. 이와 같은 강한 결정론에 대하여 부처님은 무작설(akiriya)이라고 하여 비판했다. 무작설은 인간의 도덕적인 삶을 부정하는 강한 결정론이나 강한 비결정론을 말한다.

 

도덕적인 삶을 부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업과 업보를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인과를 부정하는 것과는 다르다. 결정론은 인과론으로 되어 있지만 강한 결정론이 되면 오히려 인과가 부정되는 이론이 된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된다.

 

미래가 인과에 의해서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지금 여기에서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을 것이다. 감각과 감정에 충실한 삶을 살면 될 것이다. 배고프면 먹고 목이 마르면 마시고 졸리면 자면 된다. 어느 것도 거리낄 것이 없다. 이는 다름 아닌 동물같은 삶이다.

 

동물의 삶에는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없다. 그래서 동물의 삶에는 도덕이 있을 수 없다. 숙명론적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될대로 되라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래서 도덕적으로 금하는 것도 서슴없이 자행할 것이다. 오계가 없는 삶은 동물적 삶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최악의 삶은 어떤 것일까?

 

막칼리 고살라의 외도 사종 종합선물세트 이론

 

부처님 당시에 수많은 사상가들이 있었다. 초기경전에서는 외도의 스승이라 하여 육사로 설명되고 있다. 외도 스승중의 최악은 누구일까? 앙굿따라니까야 머리털로 만든 옷의 경’(A3.135)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떠한 직조된 옷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가운데 머리털로 만든 옷을 최악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머리칼로 만든 옷은 추위 속에서 춥고 더위 속에서는 덥고, 추하고, 냄새가나고, 거친 촉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어떠한 수많은 수행자의 설법자의 가르침 가운데 막칼리 고쌀라의 가르침을 최악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어리석은 자, 막칼리는 업도 없고 업의 과보도 없고 정진도 없다고 이와 같이 설하고 이와 같이 보기 때문이다.”(A3.135)

 

 

부처님은 외도 스승 중의 최악을 막칼리 고살라라고 했다. 근본적으로 업과 업보의 가르침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왜 막칼리 고살라의 가르침이 최악일까? 이는 부처님 당시 외도의 가르침이 총 망라되어 있기 때문이다.

 

외도 스승 막칼리 고살라의 가르침은 윤회청정설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미 결정된 윤회의 괴로움과 즐거움은 끝나거나 증가하거나 감소하거나 더하거나 덜함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실타레를 던지면 풀려질 때까지 굴러가는 것처럼 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나 똑같이 유전하고 윤회하다가 마침내 괴로움을 끝내게 됩니다.”(D2.21)라고 했기 때문이다.

 

막칼리 고살라의 이론은 인간의 도덕적 행위를 무력하게 만든다는 측면에서는 무작설이다. 팔만사천대겁 뒤에는 윤회가 종식된다는 측면에서는 단멸론이다.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필요성을 거부하는 절대적 결정론적 측면에서는 무인론이다. 정해진 윤회의 기간이 종식하면 청정해진다는 측면에서는 윤회청정론이다. 이렇게 본다면 막칼리 고살라의 이론은 무작설, 단멸론, 무인론, 윤회청정론이 되어서 속된 말로 외도 사종 종합선물세트 이론이 된다.

 

인과법과 연기법은 어떻게 다른가

 

육사외도의 가르침을 보면 반드시 인과의 법칙도 적용된다. 그런데 그것이 강하게 적용되면 결정론이나 숙명론이 된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인과만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인과에다 조건을 더한 것이다. 그래서 여섯 가지 세계를 조건으로 입태가 있고, 입태를 조건으로 명색이 있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가지 감역이 있고, 여섯 가지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있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A3.61)라고 했다. 부처님은 지금 여기서 접촉을 말한 것이다. 접촉했을 때 나는 느끼는 자의 관점에서라고 하여 사성제를 설했다.

 

 

부처님은 느끼는 자의 관점에서 법을 설했다. 느낌은 접촉을 조건으로 한 것이다. 모든 현상은 접촉으로부터 시작된다. 과거 전생이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신의 원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원인도 조건도 없이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오로지 지금 여기서 접촉에 의해 미래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여기서 느낌을 알아 차리지 못하면 연기가 회전된다. 연기의 회전에 따라 업이 생겨나서 업보를 받게 된다. 이는 조건발생이다. 조건발생은 조건만 제거하면 조건소멸된다. 이와 같은 조건이 있기 때문에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

 

오로지 인과만 있다면 어떻게 될까? 원인이 있어서 결과만 있다면 결정론이 될 것이다. 더 강한 결정론이 되면 숙명론이 될 것이다. 오로지 인과만 이야기한다면 인과의 그물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그러나 조건법, 즉 연기법에서는 조건만 달리 하면 빠져나갈 수 있다. 그래서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있는데. 이는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 날 수 있음을 말한다.

 

행위의 무작을 설한 부처님

 

부처님은 작론을 설했다. 이는 업과 업보의 가르침을 말한다. 연기법에 따른 업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업의 가르침은 고따마붓다 한분만이 설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과거세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었던 세존들도 업을 설하고 업의 과보를 설하고 정진을 설하였다.”(A3.135)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과거에 출현하였던 무수한 부처님들도 업의 가르침을 설한 것이다.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진리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진리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사성제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정견에는 사성제와 업보의 가르침이 있다고 했다. 이를 출세간적인 정견으로는 사성제이고, 세간적으로는 업의 가르침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성제가 진리이듯이, 업의 가르침도 진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부처님은 업의 가르침도 진리라고 했다. 다음과 같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

 

 

수행자 고따마는 모든 행위의 무작을 설합니다. 그는 모든 행위의 무작을 시설하면서 세상의 허무주의를 말합니다. 존자여, 그러나 이 세상은 행위를 진리로 하며 행위의 활동으로 유지되는 것입니다.”(A4.233)

 

 

이 말은 바라문 싸까 목갈라나가 부처님의 제자 쏘나까야나가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부처님은 모든 행위의 무작을 시설하면서 세상의 허무주의를 말한다.’라고 했다. 그러나 이 말은 부처님이 마치 허무주의를 말하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이 말은 베란자의 경에서 바라문이여, 나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단멸을 설하고 여러 가지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의 단멸을 설합니다.”(A8.11)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이 단멸을 설한 것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의 단멸이다. 이를 모든 행위의 무작을 시설하면서 세상의 허무주의를 말합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 행위의 무작이란 더 이상 업을 짓지 않음을 말한다. 업을 짓지 않기 때문에 세상의 단멸이 된다. 이는 다름 아닌 열반이다. 그러나 이는 출세간적 방식이다.

 

세간에서는 업을 지을 수밖에 없다. 번뇌가 있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착하고 건전한 삶을 살면 선업을 짓게 된다. 선업공덕으로 인하여 선처에 태어날 수 있게 된다. 세상은 선업이든 불선업이든 행위를 하면 업을 짓게 되어 있다. 이렇게 업을 짓는 것에 대하여 세상은 행위를 진리로 하며 행위의 활동으로 유지된다.”라고 했다. 여기서 행위의 진리는 깜마삿짜(kammasacca)를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업이 진리라고 한 것이다.

 

업을 고유성질로 갖는 업의 진리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업도 진리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다름 아닌 세간적 진리에 해당된다. 출세간적 진리로서 사성제가 있다면 세간적 진리로서 업의 진리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업의 진리에 대하여 세상은 업을 고유성질로 가진 것이다.”(AA.ii.213)라고 말 할 수 있다.

 

업의 진리는 업을 고유성질로 갖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다름아닌 업자성정견이다. 이를 깜맛사까따 삼마딧티(kammassakata-sammādiṭṭhi)’라고 한다. 여기서 삼맛사까따(kammassakata)는 업을 뜻하는 ‘kamma’와 자신을 뜻하는 ‘sakata’의 합성어이다. 그래서 삼맛사까따에 대하여 업자성이라고 한다.

 

업에도 고유성질이 있다. 그래서 업이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바른 견해를 업자성정견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업자성정견은 진리이다. 업자성정견에 대한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뭇삶은 행위의 소유자이고, 행위의 상속자이고, 행위를 모태로 하는 자이고, 행위를 친지로 하는 자이고, 행위를 의지처로 하는 자로서 그가 지은 선하거나 악한 행위의 상속자이다.”(A10.216)

 

 

 

2020-08-2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