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담마의 맛은 일체의 맛을 이긴다

황령산산지기 2020. 8. 9. 07:18

담마의 맛은 일체의 맛을 이긴다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점심시간이 되면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먹는 재미가 있는 것이다. 이 식당 저 식당 기웃거리며 그날 컨디션에 맞는 메뉴를 골라 먹는다. 탁월한 선택이 되었을 때 만족한다. 다음 배고플 때까지 잊어버린다.

 

세상에 먹는 재미로 사는 사람들이 많다. 시간을 투자해서 근사한 식탁을 차려 놓는다. 혼자 먹기가 아쉬워서일까 인터넷에 공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보는 사람은 그림의 떡이다. “그래서 어쩌라구요?”라는 말이 나올 법하다. 눈으로만 먹을 뿐이다.

 

최상의 맛이 있는데

 

맛은 먹는 것에만 있지 않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먹고 나면 포만감에 쳐다보지 않는다. 배고플 때까지는 아무리 맛난 음식도 한계가 있다. 맛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계가 없는 음식이 있다. 다음과 같은 최상의 맛이다.

 

 

좋은 용품이 내게 필요가 없다.

안락하여 가르침의 맛에 만족한다.

위없는 최상의 맛을 보았으니,

()과는 알고 지내지 않으리.”(Thag.103)

 

 

게송에서 가르침의 맛이 있다. 담마라사(dhammarasa)를 번역한 말이다. 담마에도 맛이 있을까? 게송을 보면 좋은 용품이 필요없다고 했다. 담마의 맛보다 못하다는 말이다.

 

게송은 반두라 장로가 읊은 것이다. 반두라는 부처님 당시 왕궁을 지키는 자였다. 어느 날 부처님이 부처님이 대중을 데리고 정원을 지나는 모습을 보고서 청정한 믿음이 생겨났다. 그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출가했다. 그리고 거룩한 경지에 이르렀다.

 

장로 반두라 존자는 이득과 존경을 얻게 되었다. 장로는 정사와 이득과 존경을 모두 승강에 기증하고 자신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탁발하여 연명했다. 장로가 다른 도시로 가려 하자 수행승들은 이곳에서 지내십시오. 필수품이 부족하면 저희들이 조달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장로는 벗들이여, 좋은 필수품은 필요없습니다. 아무것이든 필수품으로 삽니다. 나는 가르침의 맛에 만족합니다.”라고 했다.

 

장로는 가르침의 맛, 즉 담마에 맛에 만족하며 살았다. 담마의 맛을 알면 다른 맛은 필요치 않음을 말한다. 장로는 담마의 맛에 대하여 위없는 최상의 맛(rassaggamuttama)이라고 했다.

 

가르침의 보시는 일체의 보시를 이기고

 

위없는 최상의 맛은 이것 이상 더 맛있는 것은 없는 맛이라고 할 수 있다. 담마의 맛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법구경 354번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가르침의 보시는 일체의 보시를 이기고

가르침의 맛은 일체의 맛을 이긴다.

가르침의 즐거움은 일체의 즐거움을 이기고

갈애의 부숨은 일체의 괴로움을 이긴다.”(Dhp.354)

 

 

담마의 맛은 일체의 맛을 이긴다고 했다. 그래서 담마의 맛은 위없는 최상의 맛이 된다. 그런데 가르침은 보시는 일체의 보시를 이긴다고 했다. 이 말은 법보시가 재보시보다 더 수승함을 말한다.

 

금강경에서는 법보시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의법출생분에서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로 보시한다고 해도 사구게 하나 알려 주는 공덕만 못하다고 했다. 이 말은 법구경에서 근거한 말이라고 볼 수 있다.

 

법구경 주석을 보면 금강경 의법출생분을 연상케 하는 내용이 있다. 주석에서는법보시 공덕에 대하여 하느님의 세계[梵天界]에 이르기까지 전 우주에 널리 있는 부처님들, 연각불들, 거룩한 님들에게 바나나 나무 잎처럼 부드러운 옷을 아낌없이 보시한다고 해도, 그 보시보다는 가르침을 담은 사행시 하나라도 대중 앞에 외우는 것이 더욱 고귀하다.”(DhpA.IV.74)라고 했다.

 

최상의 보시는 법보시라고 했다. 부처님에게 가사를 보시하는 것 보다 부처님이 설한 게송이라도 하나 대중들에게 말해 주는 것이 공덕이 더 큼을 말한다. 설령 재벌이 커다란 승원을 지어서 보시하는 것보다 사행시 하나라도 대중 앞에서 외는 공덕이 더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아나타삔디까가 기증한 승원이나 마하비하라(Mahavihara)와 같은 백천 사원과 황동으로 만든 궁전과 같은 처소의 보시보다도, 가르침을 담은 사행시 하나라도 대중 앞에 외우는 것이 더욱 고귀하다.” (DhpA.IV.74)라고 했다. 왜 그럴까?

 

보시공덕을 강조하는 스님

 

스님들은 보시공덕을 강조한다. 어느 스님은 법문할 때마다 보시공덕을 강조했다. 특히 타종교와 비교하여 강조했다. 불교인들이 개신교인들 보다 가난하게 사는 것은 보시를 많이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여 열등감을 조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님의 법문을 들어 보면 받아 적을 것이 없다. 그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자신의 신상이야기로 때운다.

 

스님의 법문은 즉흥적이다. 별도로 준비한 것이 없다. 마치 연예인이 애드립으로순간순간 넘기듯이 생각나는대로, 내키는 대로 말한다. 이를 법문이라고 할 수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들어 가야 법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보시공덕만 강조할 뿐 가르침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아무 감동이 없다. 받아 적으려고 잔뜩 벼르고 있지만 한줄도 받아 적을 것이 없었다. 감동도 없고 감흥도 없는 법문이다.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불교인들이 절에 가는 이유는

 

보시공덕을 강조하는 법문보다 왜 사구게라도 한줄 알려 주는 것이 더 효과적일까?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하는 자들은 가르침을 듣고 그렇게 하는 것이지 달리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르침을 듣지 않은 자들은 한숟갈의 죽이나 한 주걱의 밥을 보시할 줄 모른다. 더구나 싸리뿟따와 몇몇 수행승들은 부처님이나 연각불이나 거룩한 님의 도움없이 혼자서 일겁동안 비가 내리면 그 빗방울 숫자도 헤아릴 수 있을 만큼의 통찰을 지녔어도 진리의 흐름에 듦의 경지를 성취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장로 앗싸지와 같은 거룩한 님[阿羅漢]이 선언한 가르침을 듣고 흐름에 듦의 경지를 성취할 수 있었다. 그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서만 수행자의 경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가르침의 보시가 가장 고귀한 보시이고 가르침의 보시가 다른 모든 보시를 이긴다.(DhpA.IV.74)

 

 

불교인들이 절에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과 가족의 안위와 안녕을 위한 사대기도, 즉 건강, 학업, 사업, 치유의 기도가 가장 크다. 이렇게 기도를 하면 기도가 잘 성취되기 위하여 보시를 한다. 그러나 절에서 열심히 기도하세요.”라고 말하며 기도만 강조한다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신도들이 절에서 떠나지 않고 오래오래 다니게 하려면 가르침을 알려 주어야 한다. 부처님이 설한 사구게라도 하나 알려 주어야 그 힘으로 재보시도 하고 공덕을 짓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로지 기도와 보시만 강조한다면 제자리에 머물게 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재보시를 하는 것에 대하여 가르침을 듣고 그렇게 하는 것이지 달리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절에 가는 것이나 선지식을 만나러 가는 것은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이다. 스님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 재가불자들은 생활전선에서 바쁜 삶을 살기 때문에 경전을 접할 시간도 없고 수행을 할 시간도 없다. 교학과 수행을 전문으로 하고 있는 스님들이 부처님을 대신하여 알려 주어야 한다. 신도들이 절에 가는 것은 스님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을 들으러 가는 것이다.

 

사구게 하나의 위력

 

스님들이 하는 말이 있다. 불자들은 보시할 줄 모른다고 말한다. 도시 포교당의 어느 스님은 기독교인과 비교하며 열등감을 조장한다. 그러나 담마를 주고서 보시하라고 말해야 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알려 주면 감화를 받아서 보시 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가르침을 듣지 않은 자들은 한숟갈의 죽이나 한 주걱의 밥을 보시할 줄 모른다.”라고 했다. 사구게 하나라도 알려 주어야 하는 이유라고 본다.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존자는 회의론자였다. 이는 그들의 스승 산자야 벨라뿟따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두 존자가 부처님에게 귀의한 것은 앗사지 존자가 사구게를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새내기 수행승이라 볼 수 있는 앗사지 존자는 부처님에 들은 그대로 전달해 주었다. 그럼에도 진리에 대한 갈증에 목마른 사람에게는 희망의 메시지였다. 사구게를 듣자마자 부처님의 제자가 된 것이다. 이렇게 사구게 하나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다.

 

욕망을 욕망으로 극복할 수 없다

 

한번 맛을 보면 잊지 않는다. 식도락가는 먼 거리임에도 몇 시간을 자동차를 타고 가서 맛을 본다. 그러나 이 세상에 담마의 맛보다 최상은 없다. 담마의 맛을 알게 되면 다른 즐거운 맛은 잊게 된다.

 

세상에 만족할 수 없는 것 세 가지가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만족은 없음의 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잠은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가 있는 것은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성적교섭은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다.”(A3.104)라고 했다.

 

이 세상에서 결코 만족할 수 없는 것 세 가지는 잠, 취기가 있는 것, 그리고 성적교섭이다. 이 세 가지는 아무리 즐겨도 만족하지 않는다. 아무리 마셔도 갈증만 유발하는 것과 같다.

 

욕망을 욕망으로 극복할 수 없다. 왜 그런가? 욕망은 불선업이기 때문이다. 음식에 대한 갈애는 욕망이다. 갈애는 아무리 마셔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 같은 것이다.

 

맛에 대하여 탐착하면 할수록 맛의 노예가 된다. 맛을 맛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음주를 음주로 극복할 수 없다. 성적교섭 역시 성적교섭으로 극복할 수 없다. 세속적 욕망으로 세속적 욕망을 극복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세속적 욕망은 가르침으로 극복할 수 있다.

 

갈애에 의존하여 번뇌를 극복한다

 

음식에 대한 갈애, 맛에 대한 갈애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자양분에 의존하여 자양분을 극복한다고 말한다. 음식에 대한 갈애가 생겼을 때 부처님 가르침으로 극복하는 것이다.

 

음식의 갈애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이는 음식을 섭취할 때 단지 이 몸을 지탱하거나 건강을 지키거나 상해를 방지하고 청정한 삶을 지키기 위해 자양분을 섭취합니다.”(A4.159)라고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이 몸은 자양분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자영분에 의존하여 자양분을 극복한다.”(A4.159)라고 하는 것이다.

 

맛에 대한 갈애, 잠에 대한 갈애, 취기가 있는 것에 대한 갈애, 성적교섭에 대한 갈애는 갈애로 갈애로 극복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출세간적 갈애로는 극복할 수 있다.

 

욕망으로 욕망을 극복할 수 없다. 이는 세속적 욕망으로 세속적 욕망을 극복할 수 없음을 말한다. 반드시 부처님 가르침으로 극복된다. 어떻게 극복되는가? 이는 이 몸은 갈애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갈애에 의존하여 갈애를 극복한다.”(A4.159)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몸은 갈애로 생겨난 것이다. 갈애로 생겨난 몸이기 때문에 욕망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욕망은 번뇌라는 시실이다. 번뇌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갈애에 의존하여 갈애를 극복한다.’라고 했다. 마치 간화선에서 작은 의심으로 큰 의심을 극복하는 것과 같다. 마치 독을 독으로써 제독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나도 반드시 번뇌를 부수고 번뇌없이 마음에 의한 해탈,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현세에서 곧바른 앎으로 스스로 실현하여 성취하리라.”(A4.159)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로 적용하면 어떤 번뇌도 극복할 수 있다.

 

담마의 맛은 일체의 맛을 이긴다

 

세속적 욕망은 세속적 욕망으로 극복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번뇌이든지 가르침으로 극복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담마를 들어야 한다. 그래서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하는 자들은 가르침을 듣고 그렇게 하는 것이지 달리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DhpA.IV.74)라고 말하는 것이다.

 

꾸살라행은 담마를 들었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보시도 담마를 들었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번뇌도 담마를 들었기 때문에 극복하는 것이다.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장엄하여 보시하는 것 보다 사구게라도 하나 알려 주는 공덕이 훨씬 더 크다고 했다. 그래서 가르침의 보시는 일체의 보시를 이긴다고 했다. 보시를 강조하려거든 먼저 담마를 알려 주어야 한다. 세상에 담마의 맛보다 최상은 없다. 담마의 맛은 일체의 맛을 이긴다.

 

 

2020-08-0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