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스님은 왜 환속했을까?
강동에 있는 선원이 문을 닫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왜 선원은 폐쇄되었을까? 몹시 궁금했다. 그러나 말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잘 나가던 스님이 만든 선원이다. 그것도 외국스님이다. 미얀마스님의 원력으로 세워진 선원이다. 그런데 왜 폐쇄됐다고 했을까? 그것이 궁금했다.
의문은 풀렸다. 최근 모임을 하나 가졌다. K선생의 출간과 관련된 모임이다. 식사가 끝나고 D선생 댁으로 향했다. 거기에서 차담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바로 그 강동에 있었던 선원에 대한 이야기였다. D선생은 “이샘은 아직도 몰랐어요?”라며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참으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십년공부도로아미타불’이라는 말이 떠 올랐다. 조선중기 생불이라 추앙받던 선사가 기생의 유혹에 무너진 것을 말한다. 그런 일이 21세기에 똑같이 벌어졌던 것이다. 더구나 그 스님은 만나 본 적이 있다. 한국에서 몇 안되는 출중한 초기불교 관련스님이라 하여 일부러 찾아가 공양 올렸다. 당연히 친견기도 블로그에 남겼다. 사진도 함께 찍었다. 그런 스님이 환속했다는 것이다.
수행자를 유혹하는 사람들
스님은 한국에 테라와다불교를 알리는 몇 안되는 스님중의 하나였다. 일종의 전법승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어가 유창한 스님은 젊기도 할 뿐만 아니라 미남형이고 호남형이다.
스님은 누구나 호감을 갖을만 하다. 누구나 좋아할 만한 조건을 갖추었다. 그러나 이런 스님을 여인들은 내버려 두는 것 같지 않다. 어떻게 해서든지 꺽어 버리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숫따니빠다 날라까의 경을 보면 “아낙네는 해탈자를 유혹합니다. 아낙네로 하여금 유혹하도록 하지 마십시오.”(Stn.703)라고 했다.
여인만이 수행자를 유혹하는 것은 아니다. 테리가타를 보면 수행녀를 유혹하는 한량이야기가 있다. 테리가타 삼십련 시집을 보면 악한은 청정해 보이는 수행녀에게 매력을 느낀다. 더구나 수행녀의 눈망울에 반하여 “요정 낀나리처럼 부드러운 눈을 지닌 여인이여, 그대보다 아름다운 여인은 내게 없습니다.”(Thig.375)라고 말한다.
악한에게 있어서 수행녀는 욕망의 대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수행녀는 악한의 의도를 알아채고 신체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눈을 뽑았다. 그리고 “자, 당신을 위해 가지시오.”라며 그 남자에게 건네 주었다. 그 남자의 반응 어땠을까? “즉시 그의 탐욕은 식었다.”라고 했다.
탐욕의 대상은 분리되면 혐오가 된다. 그래서 부정관을 보면 분리해서 보라고 했다. 신체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부위를 분리해서 본다면 더 이상 탐욕의 대상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실험실 비이커에 담겨 있는 특정 신체부위가 매력적인 대상이라고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욕망이 개입되었을 때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대상으로 보일 뿐이다.
아름다운 꽃을 보면 자꾸 쳐다보게 된다. 유행가 가사처럼 한번보고 두번보고 자꾸만 보는 것이다. 그러다가 혼자만 보고 싶어 질 것이다. 그럴 경우 꽃을 꺽으려 할 것이다. 화병에 넣어 방에 가져다 놓으려는 것이다. 수행자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국불교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현상이 있다. 수행을 열심히 하여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었을 때 세상에 나타나는 스님이 있다. 마치 현생인류가 갑자기 출현하듯이, 어느 날 팔방미인형 스님이 출현했을 때 사람들이 몰려 든다. 요즘은 불교방송이나 불교TV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이른바 스타스님의 출현이다.
연예인들은 팬을 몰고 다닌다. 스타스님 역시 팬을 몰고 다닌다. 불교박람회 때 본 것이다. 스타스님이 출현하자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스님의 인기를 짐작케 한다. 잘 생긴 외모에다 학벌도 좋다. 이런 스님이 출현하면 선배스님은 걱정한다. 환속 걱정을 하는 것이다. 여인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것이다.
수행자를 유혹하는 기녀
공부가 된 스님이라면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공부가 덜 된 수행자는 여인의 유혹에 넘어갈 것이다. 마치 아름다운 꽃을 보면 꺽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듯이, 도력 높은 스님 주변에는 늘 꺽고자 하는 여인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일까 초기경전을 보면 수행자를 유혹하는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도처에 있다. 테리가타를 보면 노골적이다.
어느 기녀가 수행자를 유혹했다. 유녀는 “젊어서 그대는 출가했다. 나의 가르침을 따르시오. 인간의 감각적 쾌락을 즐기시오.”(Thag.461)라고 말했다. 기녀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감각적 쾌락을 즐기라는 것이다. 젊음은 즐기기 위해 있는 것이지 시간 지나면 즐길 수 없는 것임을 말한다.
기녀는 계속 유혹한다. 유녀는 평생 먹고 살 돈을 벌어 놓았나 보다. 기녀는 “내가 재산을 주겠소. 정말 그대에게 약속하겠소. 아니면, 내가 불을 가져오겠소.” (Thag.461)라고 말한다. 유녀는 자신의 말을 믿어 달라고 말한다. 환속해도 먹고 살 걱정이 없게 해 주겠다는 것이다. 자신과 함께 살면 일도 하지 않고 즐기는 삶만 살면 된다는 것이다.
기녀는 모든 남자들을 상대한다. 테리가타 이십련시집에 암바빨리 장로니의 게송이 있다. 암마빨리와 관련된 인연담을 보면 부처님 당시 기녀가 된 이유가 설명되어 있다. 이는 “그런데 아름답고, 볼 만하고, 매력적이고, 우아하고, 사랑스런 등의 특별한 덕성이 결합된 그녀를 보고 많은 왕자들이 각자 차지하고자 서로 싸움을 일으켰다.”(782번 각주)라고 했다. 이렇게 왕자들이 서로 차지 하겠다고 싸우게 되자 재판관은 “모든 사람의 소유가 되라.”라고 했다. 그래서 기녀를 모두가 공유하게 된 것이다.
부처님 당시 미모의 기녀는 공유되었다. 그래서일까 하루밤 화대는 엄청나게 많았다. 율장소품에 지바까이야기가 있다. 부처님의 주치의 지바까를 말한다. 그런데 지바까의 생모는 기녀였다는 것이다. 기녀 실라바띠를 말한다. 율장소품에 따르면, 기녀 실라바띠에 대하여 “원하는 사람이 모여 들었는데, 그녀는 하룻 방에 오십금을 벌었고, 이 때문에 베쌀리 시는 더욱 번창했다.”(Vin.II.268)라고 했다.
부처님 당시 미모의 기녀는 공유되었다. 하루밤 오십금을 벌었다고 한다. 오십금은 얼마나 되는 금액일까? 주석에 따르면 황소 네 마리의 값이라고 했다. 이렇게 돈을 많이 벌어서일까 기녀 암바빨리는 부처님에게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원림을 기증했다. 이는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에서도 “세존이시여, 저는 이 원림을 부처님을 비롯한 수행승의 참모임에 바칩니다.”(D16.46)라고 했다.
암바빨리는 부처님의 비구니교단으로 출가하여 장로니가 되었다. 그녀가 남긴 시는 테리가타 이십련시집에 실려 있다. 장로니는 말년에 자신의 늙은 모습에 대하여 표현해 놓았다. 눈에 대해서는 “나의 두 눈은 감청색으로 커다랬으나, 늙어서는 흐리멍덩해졌으니,”(Thig.257)라고 했다. 여러 신체 부위에 대하여 세월의 무상함으로 인하여 망가진 모습을 묘사했다. 그 중에 가슴에 대한 것을 보면 “위로 둥굴게 부풀러 올라 봉긋하여 예전에 나의 두 유방은 아름다웠자만, 물 없는 물주머니처럼 늘어졌으니,”(Thig.265)라고 했다.
불(火神)에 맹세하겠다고
젊음은 한때뿐이다. 나이 들어 쭈글쭈글 해지면 아무도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기녀는 수행자를 유혹한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에서 반을 주겠다고 했다. 한평생 먹고 살 걱정 없게 해 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기녀의 말을 믿을 것인가. 여러 명의 남자가 공유하고 있는 기생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기녀는 불에 맹세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정말 그대에게 약속하겠소. 아니면, 내가 불을 가져오겠소.”(Thag.461)라고 말했다.
어린이 동요에 ‘꼭꼭 약속해’가 있다. 가사 내용을 보면 “새끼손가락 걸어 꼭꼭 약속해”하자고 말한다. 이것도 부족하여 엄지를 서로 맞대어 다시 한번 약속을 확인한다. 어른들 약속은 어떤 것일까? 말로 해서는 믿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한다. 하늘을 보고 맹세를 하기도 한다. 연인들은 달을 보며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기녀는 불의 맹세를 하겠다고 했다.
불의 맹세는 어떤 것일까? 기녀가 ‘인간의 감각적 쾌락을 즐기시오. 내가 재산을 주겠소.’라고 약속한 것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내가 약속한 것을 끝까지 지킨다. 만약에 나를 믿지 못한다면, 나는 불을 가져와 불(火神)에 대고 맹세하겠다.”(테라가타, 1844번 각주)라는 뜻이라고 했다.
기녀의 약속은 믿을 수 있는 것일까? 기녀는 계속 수행자를 설득한다. 수행자임을 감안해서 일까 수행은 늙어서 해도 괜찮다고 말한다. 젊은 시절은 즐기고 나이 들어 늙었을 때 그때 다시 출가해서 수행해도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늙어서 둘이서 지팡이에 의지하게 될 때, 둘이서 함께 출가하면, 두 곳에서 행운의 주사위가 던져지는 것입니다.”(Thag.462)라고 말한다.
기녀는 집요하게 수행자를 유혹한다. 재산의 반을 주겠다고 말하고, 둘이서 나이 들어 출가해도 늦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악마의 속삭임과 같은 것이다. 모든 남자들이 한번 거쳐 가는 기녀가 수행자와 평생 함께 산다는 보장이 없다. 설령 화신에게 맹세한다고 해도 지켜질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늙어서 출가하는 것이다. 고령출가를 말하지만 그때까지 존재할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악마의 속삭임
마라(악마)가 수행승을 유혹하는 장면은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대개 젊은 수행승이 대상이다. 상윳따니까야 ‘많은 수행승들의 경’(S4.21)을 보면 마라는 한 성직자의 모습으로 변신한다. 나이가 들어 등은 구부러지고 콜록콜록 하는 모습이다. 젊어서 출가하여 나이 들면 이런 모습이 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빠삐만(마라)는 젊은 수행자를 유혹한다. 빠삐만은 “존자들은 젊고 머리카락이 아주 검고 행복한 청춘을 부여받았으나 인생의 꽃다운 시절에 감각적 쾌락을 즐기지 않고 출가했습니다.”(S4.21)라고 말한다. 이어서 “존자들은 인간의 감각적 쾌락을 즐기십시오.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 (S4.21)라고 말한다.
니까야에서 누군가 감각적 쾌락을 즐기라고 말하면 이는 악마의 속삭임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감각적 쾌락을 즐기라고 말한다. 이 순간은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젊음은 즐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순간을 즐겨라. 다시 오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이는 악마의 속삭임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이 순간은 즐기는 것이 아니다. 이 순간은 알아차려야 한다. 그래서일까 맛지마니까야 131번부터 133번경을 보면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라고 했다. 이 순간을 관찰하지 못하면 마음은 과거나 미래에 가 있게 된다. 이에 대하여 묶이는 것이라고 했다. 무엇에 묶이는 것일까? 여섯 가지 감역이 욕망과 탐욕에 묶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욕망과 탐욕에 묶이기 때문에 그것에 즐거워합니다.”(M133.18)라고 했다.
마음이 과거나 미래로 가 있는 것은 여섯 가지 감역에서 즐길거리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묶여 있음을 말한다. 욕망과 탐욕의 밧줄에 묶여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는 안전할까?
마음을 늘 현재에 두라고 한다. 늘 알아차림 하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마음은 현재에서 묶일 수 있음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현재상태에 정복된다’고 했다.
현재상태에 정복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경에서는 여섯 가지 감역을 예로 들어 차례로 설명했다. 시각의 경우 “벗들이여. 시각과 형상들 그 양자는 방금 생겨난 것인데, 의식이 그 방금 생겨난 것들에 대한 욕망과 탐욕에 묶이고, 의식이 욕망과 탐욕에 묶이기 때문에 그것에 즐거워합니다. 그것에 즐거워하면, 사람은 현재의 상태에 정복됩니다.”(M133.22)라고 했다.
현재의 상태는 ‘paccuppannesu dhammesu’를 번역한 말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현재 일어난 현상들[法]’이라고 번역했다. 이는 빠알리어 ‘paccuppanna’가 ‘existing; present’의 뜻이기 때문이다. 현재 일어난 법들은 대상과 부딪쳤을 때 발생한다. 탐욕, 성냄, 질투 등 마음부수가 대표적이다. 이와 같은 빠라맛타담마는 알아차림의 대상이 된다.
현재의 상태를 알아차림하지 못하면 현재상태에 정복당한다고 했다. 이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지 않을 때 갈애와 사견에 끌려 다님을 말한다. 위빠사나를 하여 갈애와 사견에 끌려다니지 않을 때 정복당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감각적 쾌락은 재난이라고
악마 빠삐만은 젊은 수행자를 유혹했다. 젊어서는 감각적 쾌락을 즐기라고 했다. 수행은 나이 들어서 해도 늦지 않음을 말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때까지 삶을 보장하지 않는다. 인간의 수명은 알 수 없어서 그때까지 산다는 보장이 없다. 오늘 밤 최후를 맞을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한시가 급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기에 머리가 칠흑처럼 젊은 나이에 출가한 것이다.
현명한 부처님 제자는 악마의 속삭임을 알았다. 그래서 “성직자여, 우리들은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 성직자여, 우리들은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시간에 매이는 것이고, 괴로움으로 가득찬 것이고, 아픔으로 가득 찬 것이고, 그 안에 도사린 위험은 훨씬 더 큰 것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S4.21)라고 했다.
부처님의 젊은 제자는 악마 빠삐만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악마는 늙은 성직자로 변신하여 콜록콜록 하면서 젊음을 즐기라고 했다. 그러나 젊은 수행자는 듣지 않았다. 머리가 칠흑같이 젊은 부처님의 제자는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것은 재난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 가르침은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가르침이며,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 와서 보라고 할만한 가르침이며,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가르침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가르침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했습니다.”(S4.21)라고 말했다.
현명한 부처님의 제자는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가지 않는다. 현명한 수행자 역시 기녀의 달콤한 속삭임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테라가타에서는 “기녀가 합장하여 애원하는 것을 보았다. 장식하고, 좋은 옷을 입었으나, 죽음의 왕이 그물이 펼쳐진 것 같았다.”(Thag.463)라고 했다.
잘 차려 입고 꽃단장을 한 기녀는 두 손을 합장하며 애원하듯이 자신과 살아 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수행자는 기녀의 모습에서 재난을 보았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시간에 매이는 것이고, 괴로움으로 가득 찬 것이고, 아픔으로 가득 찬 것이고, 그 안에 도사린 위험은 훨씬 더 큰 것이라고 안 것이다.
수행자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극복했다. 이는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이 그 때문에 나에게 일어났고 위험이 분명하게 보였고 싫어하여 떠남이 정립되었다.”(Thag.464)라는 게송으로 알 수 있다.
미얀마스님은 왜 환속했을까?
미얀마스님은 왜 환속했을까? 분명한 사실은 여자문제로 인한 범계행위 때문이라는 것이다. 젊고 잘생기고 수행도 열심히 하고 더구나 법문도 잘 하는 스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스타스님이 출현하면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 가는 경향이 있다. 그 중에는 스님을 독차지 하고 싶은 여인도 있을 것이다. 마치 예쁜 꽃이 있으면 꺽고 싶듯이, 청정한 삶을 사는 수행자를 보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보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던 것이다.
스님을 좋아하고 스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많았다. 스님을 보고서 불사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것도 일이년도 아니고 수년 지속된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자메세지를 날려서 환속을 발표했을 때 ‘멘붕’된 것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스님의 환속메세지를 보았다. 돌고 돌아 여기까지 온 것이다. 스님은 참회했다. 한글이 서툴기 때문에 한국인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다는 참회문을 보면 “저의 잘못을 엎드려 참회드립니다.”로 시작된다. 이어서 “불자들의 얼굴을 뵐 수 없을 만큼 부끄럽습니다. 저는 지금 재가자로써 말씀 올립니다.”라고 했다.
스님은 머리 길은 재가자로서 참회의 메시지를 보냈다. 이전에는 스님이었으나 지금은 재가자의 입장에서 쓴 참회문이다. 스님은 먼저 “저의 범계로 인해 직접 상처를 받으신 불자님들께 먼저 진심으로 참회합니다.”라고 했다. 범계가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승단을 떠날 정도로 바라이죄를 지은 것이다.
스님은 참회문에서 모두 자신의 잘못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일찍 사죄드리지 못한 점에 대하여 잘못되었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래 전부터 잘못이 있었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이를 숨기고 대중 앞에서 법문을 하고 수행지도를 했다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 된다. 그래서 “거듭거듭 사죄드리고 용서를 구합니다.”라고 했다.
참회하면 용서가 된다. 그러나 목이 달아날 정도로 큰 죄를 지으면 참회해도 용서되지 않는다. 율장에 참회죄가 있다. 이는 승단추방죄, 승단잔류죄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죄에 해당된다. 참회죄에 대한 정형구를 보면 “여러분, 나는 재가 든 자루로 맞아야 하는, 비난을 받을 만한 악한 업을 지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원한다면, 그 대가를 달게 받겠습니다.” (A4.242)라고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승단추방죄는 목이 잘리는 것을 말한다. 이는 참회나 사과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승단을 떠나야 한다.
미얀마스님이 참회한 것은 재가자의 입장에서 참회한 것이다. 이제까지 오랜세월 자신을 믿고 따라준 사람들에게 죽을 죄를 지었다는 식으로 심경을 고백한 것이다. 그래서 “참회합니다.” “죄송합니다.” “씻을 수 없는 누를 끼치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스님이 아니라 승가에 의지해야
스님은 사람들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했다. 신심있는 사람에게는 신심에서 멀어지게 하고, 심지어 불교를 떠나는 사람도 있게 만든 것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을 믿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출가수행자도 포함된다.
한국불교 삼귀의문을 보면 승보에 대하여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되어 있다. 이는 스님을 승보로 보아서 스님을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로 삼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사람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고 했다. 스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스님을 부처님처럼 보고 스님에게 의지하고 귀의하고 피난처로 삼았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스님도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할 수 있다. 특히 성자의 지위에 올라가지 못했다면 감각적 욕망에 휘둘릴 수 있다. 바라이죄를 저질러 승단을 떠날 수도 있다.
스님에게 의지해서 안된다. 승가에 의지해야 한다. 그것도 자자와 포살이 있는 승가를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로 해야 한다. 그래서 삼보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승가가 되어야 한다. 모두 부처님과 관련된 것이다.
미얀마스님의 환속의 변을 보고서 출가수행자에게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스님을 믿고 따르던 불자들의 상처가 클 것이다.
스님의 참회문을 보면 성자의 흐름에 들어서지 않는 한 인간은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스님은 “다시는 저와 같은 부끄러운 일이 이땅에서 발생하지 않기를 염원합니다. 죄송하고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스님의 참회문을 접하고 참담한 심정이 되었다. 스님을 만나 차담도 하고 스님에 대하여 글을 썼는데 이런 모습을 보게 된 것이 스님 못지 않게 참담한 심정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참회문이라도 발표하는 것에 대하여 진정성 있는 참회로 보았다.
목이 달아날 정도로 범계행위를 저지르고도 이를 숨기고 버젓이 승복을 입고 있는 사람도 있다. 또 머리를 깍고 승복을 입고도 처자식이 있는 경우도 있다. 이에 반하여 잘못을 인정하고 승복을 벗어버린 사람을 보면 반승반속 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미얀마 스님의 환속을 보면서 마음이 착잡해졌다. 스님에게 의지해서는 안된다. 승가에 의지해야 한다.
2020-08-0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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