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비가 와서 좋은 날

황령산산지기 2020. 6. 27. 07:04

나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하다. 장마철 새벽에 떠오른 말이다. 예경지송 추모경송품에도 실려있는 시수념(死隨念)에 대한 문구이다.

 

삶이 불확실하다는 것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정해진 수명이 없음을 말한다. 백세시대를 말하지만 누구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죽을 조짐도 없다. 언제 죽을 것이라고 알려 주지 않는 것이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단서가 있다. 우다나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그때 한 수행승이 세존께서 계신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가부좌를 하고 몸을 바로 세우고 예전의 업이 성숙하여 생겨난 괴롭고 찌르고 아리고 쓰라린 고통을 참으면서 새김을 확립하고 일아차리며 고뇌를 여의고 앉아 있었다.”(Ud.21)

 

 

수행승이 병에 걸린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전의 업이 성숙’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의 삶이 업생(業生)임을 말한다. 과거에 지은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는 것이다.

 

조건이 맞아 떨어졌을 때 과보로서 나타난다. 그래서 업이 익는다고 말한다. 이를 업이숙(業異熟)이라고 한다. 이를 빠알리어로 깜마위빠까(kammavipāka)라고 한다. 업이 달리 익는 것이다. 업이 성숙되면 금생에 받는 것도 있고 후생에 받는 것도 있다. 몇 생 건너 뛰는 것도 있다. 그래서 ‘예전의 업이 성숙(purāṇakammavipāka)’이라고 한 것이다.

 

죽을 요인은 도처에 깔려 있다. 뉴스를 보면 땅이 꺼지듯 바닥이 꺼져서 죽고, 하늘이 무너지듯 천정이 무너져 죽는다. 강풍에 간판이 떨어져서도 죽는다. 아파트에서 투신한 사람이 덮쳐서 죽었다는 뉴스도 있었다. 죽을 만한 요인은 도처에 있다. 앞으로 한시간 후의 일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오늘밤에 죽을 수 있다. 밥 먹는 동안 죽을 수 있다. 한 숟가락 넘기는 기간에 죽을 수 있다. 한호흡기간에 죽을 수 있다. 숨이 들어와서 내쉬지 못하면 죽음이다. 반대로 내쉰 숨을 들이마시지 못하면 죽음이다. 그래서 죽음은 한호흡기에 있다고도 말한다.

 

아떻게 해야 잘 죽을 수 있을까? 최근 읽은 우 조띠까 사야도의 책 ‘마음의 지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저는 죽을 때까지, 마지막 순간까지 수행을 계속할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가는 순간에 어떻게 느꼈는지, 나의 마지막 순간이 어떤지, 내가 죽기 1초 전에 어떤 정신 상태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싶습니다.”(우 조띠까 사여도, 마음의 지도 316쪽)

 

 

우 조띠까 사야도는 마지막 죽음의 의식을 보고 싶다고 했다. 마치 죽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저는 죽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충분히 준비하면 그 일의 반은 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가장 이상적은 죽음은 죽음의 순간에 호흡을 지켜 보는 것이라고 본다. 과연 이렇게 최후를 맞이할 자가 얼마나 될까? 오랫동안 치열하게 수행하지 않으면 최후의 호흡을 보지 못할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이 죽는지도 모르고 죽는다.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서 혼수상태로 있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마지막 호흡을 본다는 것은 수행자가 아니면 꿈도 꿀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떤이는 죽음을 두려워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한번도 죽음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늘 죽음을 생각하라고 했다. 초기경전에서도 마라나눗사띠(maraṇānussati)라 하여 죽음에 대한 새김을 하라고 했다. 한자어로 사수념(死隨念)이다. 사수념은 40가지 사마타 명상주제 중의 하나이다.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한다. 가장 먼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집 밖으로 나갔을 때 죽을 수 있는 요인은 도처에 깔려 있다. 차를 몰고 나가면 한시간 후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최후의 순간을 맞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행동수칙도 생각해 보기도 했다. 과연 호흡을 보면서 최후를 맞이 할 수 있을까?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종종 와선을 한다. 편안한 자세로 누워서 호흡을 관찰하는 것이다. 누웠을 때 가장 강한 대상은 호흡이다. 배의 움직임이 가장 강하다. 배의 움직임을 지켜 보다 보면 코를 고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와선은 어쩌면 죽음에 대한 연습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는 마지막 순간을 관찰하여 아라한이 됨과 동시에 완전한 열반에 든 사람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고디까 존자를 들 수 있다.

 

고디까 존자는 마음의 해탈을 이루었다. 그러나 일시적이었다. 선정에서 나오면 퇴전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퇴전과 불퇴전을 여섯 번 반복했다. 일곱번째 일시적 마음의 해탈을 이루었을 때 칼로 동맥을 그었다. 그리고서는 자신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고디까 존자는 이씨길라산의 검은 바위에서 죽었다.

 

부처님은 고디까 존자의 죽음을 접하고 제자들과 함께 검은 바위로 갔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고 말했다. 고디까 존자는 자신의 죽음을 지켜봄으로 인하여 아라한이 됨과 동시에 완전한 열반에 든 것이다. 한번에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일어난 것이다.

 

죽음과 동시에 아라한과 열반이라는 두 가지를 이루는 것에 대하여 사마시시(samasīsī: 首等)라고 한다. 이와 같은 사마시시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무상에 대한 관찰의 경을 보면 “그는 앞도 뒤도 아니고 동시에 번뇌의 종식과 목숨의 종식이 이루어진다.”(A7.16)라고 했다.

 

네 가지 사마시시가 있다. 질병의 사마시시, 느낌의 사마시시, 자세의 사마시시, 수명의 사마시시를 말한다. 주석에 따르면 “어떤 질병에 걸렸다가 질병의 치유와 더불어 번뇌의 소멸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자를 질병의 수등자라고 하고, 어떤 느낌을 느끼다가 느낌의 지멸과 더불어 번뇌의 소멸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자를 느낌의 수등자라고 하고, 어떤 자세를 취하며 통찰하는 자가 자세의 종료와 더불어 번뇌의 소멸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자를 자세의 수등자라고 하고, 그리고 앞도 뒤도 아니고 동시에 번뇌의 종식과 목숨의 종식이 이루어지는 자를 목숨의 수등자라고 한다.”(Mrp.IV.6-7)라고 설명되어 있다.

 

고디까 존자는 목숨의 사마시시 또는 수명의 사마시시를 이룬 자이다. 중병에 걸려 자결한 박깔리 존자 역시 목숨의 사마시시를 이룬 자이다. 그렇다고 불교에서 죽음을 미화한은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청정한 자의 자결은 인정했다. 이는 고디까 존자가 대표적이다. 또한 중병에 걸린자의 자결도 인정했다. 계행이 청정한 박깔리 존자가 대표적이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산다는 속담이 있다. 그러나 죽을 확률이 더 많을 것이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호랑이에게 잡아 먹히는 순간을 지켜보는 것이다. 차례로 먹혀 들어 갈 때 느낌을 알아차림 하면 단계적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아라한이 됨과 동시에 완전한 열반에 들 것이다. 일종의 수명의 느낌의 사마시시라고 볼 수 있다.

 

잘 죽는다는 것은 자신의 최후의 순간을 관찰할 수 있음을 말한다. 수행자만이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테라가타에 이런 게송이 있다.

 

 

“나는 죽음을 바라지도 않고

나는 삶을 바라지도 않는다.

나는 고용된 자가 보수를 바라듯,

나의 시간을 기대한다.” (Thag.606)

 

 

이것이 아라한의 인생관이다. 아라한은 삶도 죽음도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자아 개념을 놓아 버린 무아의 성자에게 죽음이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은 단지 한호흡기에 있다. 아니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짐에 있다. 몸과 마음에서 찰나생찰나멸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게송은 다음과 같다.

 

 

“죽음을 기뻐하지도 않고

삶을 환희하지도 않는다.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Thag.607)

 

 

수행자는 때를 기다린다고 했다. 최후의 순간을 말한다. 삶과 죽음을 초월한 무아의 성자에게는 하루를 사는 것이나 십년을 사는 것이나 차이가 없다. 하루를 살아도 되고 십년, 이십년, 삼십년을 살아도 된다. 다시는 태어나지 않을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에 삶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죽음을 바라지도 않는다. 최후 순간까지 호흡을 지켜보는 것이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멸현상을 지켜볼 뿐이다.

 

아라한은 죽음도 삶도 바라지 않는다고 하였다. 번뇌가 모두 소멸된 자에게 있어서 삶은 덤이나 다름없다. 남아 있는 삶은 행복 그 자체이다. 죽는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니다. 자아의 관념을 떠나 버린 아라한에게 있어서 육체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 다시 태어남이 없는 아라한은 죽지 않는다. 그래서 불사(不死)가 된다. 이와 같은 아라한의 삶에 대하여 “나의 삶도 축복이고 나의 죽음도 축복이다.”(Ud.45) 라고 말 할 수 있다.

 

나이 들면 슬퍼지는 것 같다. 병이 들면 더욱 슬퍼질 것이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다고 느껴졌을때 두려움과 공포가 일어날지 모른다. 특히 세상에 대하여 애착을 가지고 있을 때 더욱 그러할 것이다. 애써 모은 재산을 가져 갈 수 없는 것에 대한 분함도 있을 것이다. 이제 살만한데 병이 들고 죽음이 찾아왔을 때 죽기가 죽기보다 싫을 것이다.

 

사람들은 죽음의 순간 과거가 파노라마처럼 보인다고 한다. 어떤 이는 암선고를 받았을 때 나쁜 행위를 한 것이 짧은 순간에 파노라마처럼 떠 올랐다고 한다. 수행자라면 현재에 집중하고 있을 것이다. 수행자라면 최후의 순간에도 생멸현상을 관찰하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나이 들고 병이 들면 슬퍼하면서 과거를 회상한다. 그러면서 인생무상을 말한다. 과연 이런 무상을 진정한 무상이라고 볼 수 있을까?

 

누구나 무상을 이야기한다. 세월이 빨리 흘러서 무상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거를 회상하는 무상은 관념일 뿐이다. 기억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에 대한 것이다.

 

인생이 무상하다며 과거를 회상하는 무상은 진정한 무상이 아니다. 자아에 기반을 둔 무상은 슬픔을 야기할 뿐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무상은 무엇일까? 지금 이 순간 생멸현상에 대한 것이다.

 

몸과 마음에서 찰나생찰나멸하는 것이 무상이다. 이런 무상을 관찰하면 집착하지 않게 된다. 생겨난 것은 머물지 않고 즉시 사라지기 때문이다. 생겨나는 것에는 조건이 있지만 소멸하는 것에는 조건이 없다.

 

손바닥을 치면 “딱”소리가 난다. 생겨난 소리는 즉시 사라진다. 사라지는 것에는 조건이 없다. 생겨난 것은 생겨날 만해서 생겨나지만 사라지는 것에는 조건이 없다. 생겨난 순간 사라진다. 다만 기억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지금 여기서 생멸하는 것이 무상이다. 세월타령을 하면서 인생무상을 말하지만 과거 기억에 대한 것으로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미 지나간 것에 대하여 집착한다. 그래서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나의 것이고, 나이고, 나의 자아라고 집착하는 것이다. 집착해서 슬프고 괴로운 것이다. 일어났을 때 단지 알아차림만 하면 그 뿐이다. 계속 생멸현상을 알아차림 하는 것이다.

 

알아차림만 할 뿐 집착하지 않으면 슬픔도 없고 괴로움도 없다. 생각은 언어적인 것으로 실재하지 않는다. 실재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 생멸하는 것이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실재이다. 실재를 관찰하면 현재를 살 수 있다.

 

잠못 이루는 밤이 계속되고 있다. 깊은 잠을 오래 계속 자지 못한다. 짧게 자다가 깨면 잠이 오지 않는다. 억지로 청한다고 오는 것은 아니다. 가장 좋은 것은 앉아 있는 것이다. 앉아서 호흡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연습이 되지 않아서 인지 망상만 날 뿐이다. 그럴 때는 글을 쓴다. 스마트폰 자판을 치다 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오늘도 자판을 치다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장마철이 시작되었다. 비를 맞으면 차가운 감촉을 느낀다. 바람이 불면 시원한 느낌이다. 오늘도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바람 불어서 좋은 날이고 비가 와서 좋은 날이다.

 

 

2020-06-25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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