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오온이라는 마구니

황령산산지기 2020. 6. 27. 07:02

오온이라는 마구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즐기는 것뿐이다. 즐기는 삶에는 바쁘지만 자신을 향상시키는 삶에는 게으르다. 그런 그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오늘 새벽 불현듯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즐기는 삶을 사는 사람은 마라가 아닐까?”라고.

 

악마의 군대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이 세상을 삼계로 나눈다. 그래서 욕계, 색계, 무색계라고 한다. 욕계는 6도라 하여 여섯 개의 세계가 있다. 육도 중에 욕계천상이 있다. 모두 여섯 개의 천상이 있다. 그 중에서 최상위 천상이 타화자재천이다.

 

타화자재천은 욕계에서 최상층에 있다. 그런 타화자재천은 욕망이 극대화된 세계이다. 직접 즐기는 것 보다 자신이 창조한 대상이 즐기는 것을 보고 즐기는 것이다. 마치 자신의 아바타를 만들어 즐기는 것과 같다.

 

타화자재천의 천주를 빠삐만이라고 한다. 빠삐만을 한역으로 파순이라고 하는데 보통 마왕파순이라고 한다. 빠삐만은 악마의 대왕인 것이다.

 

마왕은 군대가 있다. 악마의 군대를 말한다. 마왕은 부처님의 성도를 방해했다. 부처님이 성도하면 욕계를 파괴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성도하면 제자들이 욕계를 떠날 것이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막고자 했다. 그래서 악마의 군대를 동원했다.

 

악마의 군대를 빠알리어로 마라세나(mārasenā)라고 한다. 한역으로 마군이라고 한다. 마군의 또다른 말은 ‘마구니’라고 한다. 놀랍게도 마구니라는 말은 인터넷 어학사전에도 백과사전에도 실려 있지 않다. 불교집안에서 사용하는 말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불교인들은 흔히 마구니라는 말을 사용한다. 요즘은 일반사람들도 쓰는 경향이 있다. 마구니는 악마와 동의어이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악마의 군대를 말한다. 그런 악마의 군대는 어떤 것일까? 숫따니빠따 ‘정진의 경’(Sn3.2)을 보면 악마의 군대에 대한 설명이 있다.

 

 

“그대의 첫 번째 군대는 욕망, 두 번째 군대는 혐오라 불리고, 그대의 세 번째 군대는 기갈, 네 번째 군대는 갈애라 불린다.”(Stn.436)

 

“그대의 다섯째 군대는 권태와 수면, 여섯째 군대는 공포라 불리고, 일곱째 군대는 의혹, 여덟째 군대는 위선과 고집이라 불린다.” (Stn.437)

 

 

부처님은 성도과정에서 악마의 군대와 싸웠다. 악마의 군대는 모두 팔군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욕망(kāmā), 혐오(arati), 기갈(khuppipāsā), 갈애(taṇhā), 권태와 수면(thinamiddhaṃ), 공포(bhīrū), 의혹(vicikicchā), 위선과 고집(makkho thambho)의 군대를 말한다.

 

악마의 세 딸

 

팔마군에서 혐오와 기갈은 악마 빠삐만의 세 딸 중의 두 딸의 이름이다. 참고로 상윳따니까야 ‘악마의 딸들에 대한 경’(S4.25)을 보면 악마의 세 딸 이름은 땅하, 아라띠, 라가이다. 여기서 라가는 팔군에서 까마와 같은 의미이다. 그래서 악마의 세 딸은 갈애(taṇhā), 혐오(arati), 욕망(kāmā)이 된다.

 

타화자재천의 천주 빠삐만은 부처님의 성도를 방해했다. 자신의 세 딸을 보내서 유혹하고자 했다. 악마는 변신에도 능하다. 악마의 딸들은 백명의 소녀 모습으로 변신해서 유혹했다. 백명의 처녀 모습으로, 아이를 낳은 백명의 부인 모습으로, 백명의 중년 부인의 모습으로, 심지어 백명의 노파 모습으로 변신해서 유혹하고자 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집착을 여의어서 해탈을 이루었기 때문에 유념하지 않았다.

 

사성제의 원리로서

 

악마의 딸 땅하가 물었다. 땅하는 게송으로 “슬픔에 잠겨 숲속에서 선정을 닦고 있구나. 재산을 잃었는가? 뭔가 갖고 싶은가? 마을에서 무슨 죄라도 지었는가? 왜 사람들과 사귀지 않고 누구와도 교제를 맺지 않은가?”(S4.25)라며 물었다.

 

숲속 외딴 곳에서 살면 죄를 지은 것일까? 마을에서 죄를 지어 살 수 없게 되어 숲속에서 홀로 사는 것일까? 이런 땅하의 의문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했다.

 

 

“애착과 괘락의 군대를 부수고 홀로 선정에 들어 나는 기쁨을 찾았고, 목표를 성취했고, 지복을 얻었네. 그러므로 사람들과 사귀지 않으며, 또한 누구와도 교제를 맺지 않는다네.”(S4.25)

 

 

부처님은 지복을 얻었다고 했다. 이는 아라한과를 얻었음을 말한다. 애착과 쾌락의 군대를 쳐부수어 얻은 것이다. 그래서 감각적 쾌락의 화신이라고 볼 수 있는 땅하의 유혹에 넘어 가지 않았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숲에 혼자 살아도 슬프지 않은 것은 해탈의 지복에 대한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 친교를 하지 않아도 외롭지 않고 행복한 것이다.

 

이 게송과 관련하여 앙굿따라니까야 ‘깔리의 경’을 보면 보충설명하는 듯한 구절이 있다. 땅하의 유혹에 대하여 “그 유혹을 보고, 그 위험을 보고, 그 여읨을 보고, 길과 길 아닌 것에 대하여 알고 또한 보고, 그 유혹을 본 까닭에, 그 위험을 본 까닭에, 그 여읨을 본 까닭에, 길과 길이 아닌 것에 대하여 알고 또한 본 까닭에, 목표를 성취하고 마음의 적멸을 얻었습니다.”(A10.26)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은 사성제의 원리로서 감각적 욕망을 극복한 것이다. ‘유혹을 보는’ 것은 괴로움의 발생의 진리를 보는 것이고, ‘그 위험을 보고’는 괴로움의 진리를 보는 것이고,’ 그 여읨을 보고’는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를 보는 것이고, ‘길과 길이 아닌 것에 대하여 알고 또한 보고’는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진리를 본 것이다. 이처럼 어떤 것이든지 사성제의 원리를 적용하면 목표를 이룰 수 있다.

 

선정의 즐거움

 

부처님은 감각적 욕망에서 위험을 보았다. 이는 숫따니빠따 ‘출가의 경’에서도 확인된다. 빔비사라왕과의 대화에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재난을 살피고, 그것에서 벗어남을 안온으로 보고 나는 정진하러 가는 것입니다.”(Stn.424)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태자시절에 철마다 사용하는 세 개의 궁전에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끝을 보았다. 그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이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재난을 본 것이다. 이처럼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재난을 본 부처님이 땅하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괴로움을 철저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괴로움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재난을 보고 감각적 쾌락을 여의는 수행을 한 것이다.

 

선정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읜 상태이다. 선정에서 기쁨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다.

 

 

“마간디야여, 그러한 나에게는 세 개의 궁전이 있어 하나는 우기를 위한 것이고, 하나는 겨울을 위한 것이고, 하나는 여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마간디야여, 그러한 나는 우기의 궁전에서 사는 사 개월 동안 궁녀들의 음악에 탐닉하여 밑에 있는 궁전으로는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나는 감각적 쾌락의 생성이나 소멸이나 유혹이나 재난이나 그것에서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아서 감각적 쾌락의 갈애를 버리고 감각적 쾌락의 타는 듯한 고뇌를 버려서 감각적 쾌락의 갈증을 버리고 안으로 마음의 고요를 성취했습니다. 나는 감각적 쾌락의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감각적 쾌락의 갈애에 사로잡혀, 감각적 쾌락의 타는 듯한 고뇌에 불타,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다른 뭇 삶들을 봅니다. 나는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고 그 속에 있는 것들을 즐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마간디야여, 참으로 그 감각적 쾌락의 착하지 못하고 건전하지 못한 것들을 떠나면, 천상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속에서 기쁨을 누리므로 그 보다 못한 것을 부러워하지 않고 그 속에서 즐거워하지도 않습니다.”(M75.21)

 

 

부처님은 선정의 즐거움은 천상의 즐거움을 능가한다고 했다.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과는 비교 되지 않는다.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은 오감에 따른 거친 즐거움이라면 선정의 즐거움은 잔잔한 즐거움이다.

 

욕망이 개입된 즐거움은 오래 가지 못한다. 일시적인 즐거움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선정은 감각적 욕망을 극복한 즐거움이다. 이는 “감각적인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에서 떠난 뒤,..”(S45.8)로 시작되는 네 가지 선정 정형문에서도 알 수 있다.

 

세 종류의 악마가 있는데

 

숫따니빠따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도 마군이고, 혐오도 마군이다. 심지어 권태와 수면도 마군이다. 인간의 악하고 불건전한 것은 모두 악마라고 볼 수 있다. 경전에서는 모두 세 가지 악마(māra)가 있다.

 

첫째, 사악함의 화신으로서의 악마를 말한다. 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이 빠삐만(pāpiman)이다. 상윳따니까야에서는 ‘마라상윳따’라고 하여 별도의 상윳따가 있다.

 

마라상윳따에 등장하는 악마가 빠삐만이다. 어느 정도로 사악할까? 여러 가지 모습으로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변신하여 수행자의 수행을 방해한다. 그래서 “존자들은 젊고 머리카락이 아주 검고 행복한 청춘을 부여받았으나 인생의 꽃다운 시절에 감각적 쾌락을 즐기지 않고 출가했습니다. 존자들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십시오,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S4.21)라고 말한다.

 

빠삐만은 젊은 수행자들에게 청춘을 즐기라고 했다. 수행은 늙어서 나이 들어서 해도 늦지도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나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인간은 업으로 살기 때문에 언제 어떤 업이 익어서 과보로 나타날지 모른다. 그래서 삶은 확실하지 않다. 확실한 것이 있다면 죽음이다. 그래서 “나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현명한 부처님 제자는 악마 빠삐만이 성직자로 변신하여 말한 것을 알고서는 이렇게 답한다.

 

 

“성직자여, 우리들은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 성직자여,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 성직자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시간에 매이는 것이고, 괴로움으로 가득 찬 것이고, 아픔으로 가득 찬 것이고, 그 안에 도사린 위험은 훨씬 더 큰 것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가르침이며, 시간을 초월한 가르침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가르침이며,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가르침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가르침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S4.21)

 

 

훌륭한 스승밑에 훌륭한 제자가 있다고 했다. 악마 빠삐만이 지팡이를 짚고 콜록콜록 하는 성직자에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고,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 현재에 집중하고 있음을 말한다. 감각적 쾌락의 재난에 대하여 들은 대로 말하면서 부처님 가르침의 탁월함을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자 콜록거리며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여 주며 유혹하려던 빠삐만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 갔다.

 

해탈을 방해하는 자의 의미로서 나무찌(Namuci)가 있다. 나무찌는 숫따니빠따 ‘정진의 경’에서 볼 수 있다. 부처님은 “나무찌여, 이것들이 그대의 군대, 검은 악마의 공격군인 것이다. 비겁한 자는 그를 이겨낼 수가 없으나 영웅은 그를 이겨내어 즐거움을 얻는다.”(Stn.439)라고 했다.

 

 

부처님은 악마 나무찌와 일전을 불사했다. 마치 전장에 임하는 장수처럼 “차라리 나는 문자풀을 걸치겠다. 이 세상의 삶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 내게는 패해서 사는 것보다는 싸워서 죽는 편이 오히려 낫다.”(Stn.440)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오염원과 싸우는 것이다. 그래서 ‘승리의 경’(Sn.1.11)을 보면 “또한 그 아홉 구멍에서는, 항상 더러운 것이 나온다.”(Stn.197)라고 했다. 또 “인간의 이 몸뚱이는 부정하고 악취를 풍기며, 가꾸어지더라도, 온갖 오물이 가득 차, 여기저기 흘러나오고 있다.”(Stn.205)라고 했다.

 

부처님은 마음의 오염원과 싸워 승리했다. 부처님의 제자들 역시 오염원과 싸웠다. 이는 테라가타에서 고닷따존자는 “여법하지 못한 삶과 여법한 죽음이 있다. 여법한 죽음이, 여법하지 못한 삶보다 낫다.”(Thag.670)라고 했다. 감각적 욕망에서 생겨나는 즐거움 보다 감각적 욕망을 즐거움을 여의는 삶이 더 낫다고 한 것이다.

 

이밖에도 사악함의 화신으로서 악마는 검은 자라는 뜻의 깐하(Kaṇha), 끝을 내는 자라는 뜻의 안따까(Antaka), 방일함의 친척이란 뜻의 파라마타반두(pamatta-bhandu) 등이 있다.

 

둘째, 천인으로서 악마가 있다, 이는 욕계 최고 천상인 타화자재천(Paranimmitavasavatti)에 주재하는 천인을 말한다. 이 악마는 중생들이 욕계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이 악마는 범천이나 제석천처럼 대단한 위력을 가졌는데 이는 군대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군대를 마군(魔軍, Marāsena)이라고 한다. 마구니라고도 한다.

 

셋째, 세간적인 모든 존재로서 악마가 있다. 이 악마는 열반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윤회계, 즉 오온을 상징한다. 오온으로서의 악마를 말한다.

 

후대 주석에서는 앞서 경전에서 언급된 악마를 포함하여 (1) 신으로서의 마라(devaputta-māra), (2) 번뇌로서의 마라(kilesa-māra), (3) 오온으로서의 마라(khandha-māra), (4) 업으로서의 마라(kamma-māra), (5) 죽음으로서의 마라(maccu-māra), 이렇게 다섯 가지 종류의 악마를 들고 있다. 이 중에서 번뇌로서의 마라, 오온으로서의 마라, 업으로서의 마라는 자기자신과 관련이 있다. 자신의 내면에 악마가 있다는 것이다.

 

왜 오온이 악마일까?

 

오온이 악마라는 말은 매우 놀랍다. 이는 나 자신이 악마라는 말과 같다. 그런데 오온이 악마라는 말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설법하고 있을 때 갑자기 악마가 땅이 갈라지듯이 무섭고 두려운 큰 소리를 냈다. 그러자 수행승들이 매우 놀랐다. 이에 부처님은 “물질도 느낌도 지각도, 형성과 또한 의식도 내가 아니고 나의 것이 아니니 이렇게 거기서 탐착을 벗어나네”(S4.16)라고 말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님을 안다면 무섭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님을 안다면 두려움이 있을 수 없다. 이어서 부처님은 “이렇게 탐착에서 벗어나 안온하게 모든 얽매임을 뛰어넘은 자는 어떠한 곳에서 찾더라도 악마의 군대가 발견할 수 없네.”(S4.16)라고 말했다. 오온이 내것이 아니라고 여기면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반면 오온이 내것이라고 여기면 악마의 손아귀에 있음을 말한다. 그런 오온은 다름 아닌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의 다발에 대한 것이다.

 

오온에 집착된 자들은 모두 악마의 손아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여덟 종류의 악마의 군대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욕망이라는 악마의 군대에 지배당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행승들이여, 원하고 즐겁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자극하고 애착의 대상이 되는, 시각으로 인식되는 형상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환희하고 환호하고 탐착하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악마의 소굴에 들어가 악마의 지배를 받는 자라고 한다. 악마의 밧줄이 그를 사로잡고 그가 악마의 밧줄에 묶이면 그는 악마 빠삐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한다.”(S35.114)

 

 

오온이 악마의 군대에 지배당하고 있다면 악마가 하자는대로 해야 할 것이다. 경에서는 빠삐만이 하자는대로 하는 것이라고 했다. 마치 물고기가 낚시 바늘에 꽤인 것처럼 악마 빠삐만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그런 악마의 군대 중에는 욕망의 군대나 갈애의 군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놀랍게도 혐오의 군대도 있고 권태와 수면의 군대도 있다.

 

악마가 하자는대로

 

호불호가 분명한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쾌불쾌도 분명하다. 그래서 좋으면 죽어라고 좋아 하고, 한번 싫으면 죽어도 싫어 한다. 그래서 싫으면 혐오한다. 악마의 군대에 지배 받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의 삶은 무료하고 권태롭다. 한마디로 말해서 게으른 삶이다. 삶에 대한 의욕도 없다. 오로지 관심 있는 것은 즐기는 것이다. 그래서 무료하고 권태로운 것을 참지 못한다. 끊임없이 즐길 거리를 찾아 나선다. 즐기는데 있어서는 부지런한 자이다.

 

삶이 심심하고 무료하고 권태로운 자는 먹는 것을 즐긴다. 오감으로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삶을 살아 간다. 이런 자들에는 정신적 향상이나 성장에 관한 일에는 관심이 없다. 산에 가는 사람을 보면 ‘올라 갔다 내려올 것을 무엇하러 올라가느냐’고 한다.

 

게으른 자는 공덕도 쌓지 않는다. 보시는 어리석은 자나 하는 것이리고 보는 것이다. 행위에 대한 과보를 생각하지 않는 자이다. 모든 것이 귀찮고 피고한 것이다. 이런 자가 권태와 수면의 군대에 지배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악마가 하자는대로 하는 사람이다.

 

오온이라는 마구니와의 싸움

 

흔히 말하기를 마음은 본래 깨끗한 것이라고 한다. 본래 마음은 깨끗하고 청정한 것인데 오염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닦으라고 말한다. 마치 거울에 얼룩진 것을 닦는 것과 같다. 거울을 닦으면 본래 모습을 비추어 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하는 것에 대하여 마음을 닦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다르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마음은 오염되어 있다. 그렇다고 본래 깨끗한 마음이 별도로 있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런가? 이는 무명과 갈애로 설명될 수 있다.

 

우리는 윤회하는 존재이다. 왜 윤회할까? 이는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S15.1)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윤회하는 요인에 대하여 무명과 갈애로 보고 있다. 무명이라는 과거의 원인에 의해서 현재가 있고, 또한 갈애로 인하여 미래가 전개된다. 이와 같은 무명과 갈애로 인하여 윤회한다.

 

무명과 갈애는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대표적인 오염원이다. 이는 우리가 오온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 나, 나의 자아라고 여기는 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온에 집착하고 있는 한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를 달리 말하면 오온이라는 악마의 덫에 걸려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오온의 악마에서 벗어나는 것이 수행인지 모른다. 그것은 악마와의 싸움인지 모른다. 부처님이 악마 나무찌와 처절하게 싸웠듯이, 마음속의 오염원과 싸우는 것이다. 욕망의 군대, 혐오의 군대, 기갈의 군대, 갈애의 군대, 권태와 수면의 군대, 공포의 군대, 의혹의 군대, 위선과 고집의 군대와 싸우는 것이다.

 

흔히 수행한다고 말한다. 더러워진 마음을 닦는 것이 수행일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마음속의 마구니와 처절하게 싸우는 것이 수행인지 모른다. 수행은 오온이라는 마구니와 처절한 싸움을 하는 것이라고 본다. 마음의 오염원과의 싸움이다.

 

 

“코끼리 위에 올라탄 악마와 더불어,

주변에 깃발을 든 군대를 보았으니,

나는 그들을 맞아 싸우리라.

나로 하여금 이곳에서 물러나지 않게 하라.”(Stn.442)

 

 

2020-06-2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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