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돼지의 눈과 부처의 눈

황령산산지기 2020. 7. 5. 12:17

돼지의 눈과 부처의 눈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눈으로 본다고 하지만 그 사람의 눈에는 그 사람이 인식한 것만 보인다. 그래서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고 했다.

 

법안은 생겨나는 것

 

눈이라고 해서 똑 같은 눈이 아니다. 금강경에서는 오안을 말하고 있다. 육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을 말한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고 했을 때 육안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범부들은 육안으로 본다. 부처님의 법을 들으면 법안이 생겨난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또한 그 가르침을 설할 때에 존자 꼰당냐에게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S56.11)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진리의 눈(dhammacakkhu)’을 법안(法眼)이라고 한다.

 

법안은 생겨나는 것이다. 없던 것에서 새로 생겨나는 것이다. 이미 있던 것이 열리거나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생겨나다라는 뜻의 우다빠디(udapādi)’를 보면 알 수 있다. 우다빠디는 영어로 ‘arose; originated’의 뜻이다. 한자어로는 발생, 출현, 기원의 의미가 있다. 우다빠디는 우빠자띠(uppajjati)에서 유래한다. 우빠자띠는 영어로 ‘to be born’의 뜻이다. 자띠(jāti)‘birth’의 의미가 있다. 따라서 꼰당냐에게 법안이 생겨났다.(dhammacakkhu udapādi)” 라고 했을 때 이는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난 것임을 의미한다.

 

육안을 제외한 천안, 혜안, 법안, 불안은 모두 생겨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본래 있던 것이 드러난 것이 아니라 수행을 해서 새로 생겨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눈이 생겨나면 보는 눈이 달라질 것이다. 이를 안목이 있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6월 두 번째 금요니까야강독모임 시간에 사람을 보는 눈에 대한 경을 읽었다. 생활속의 명상수행 36번 경으로 앙굿따라니까야 밧싸까라의 경’(A4.187)이 이에 해당된다.

 

바라문 밧싸까라는 부처님에게 일반사람이 깨달은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지에 대하여 물었다. 이에 부처님은 이렇게 답했다.

 

 

바라문이여, 참사람이 아닌 사람이 참사람이 아닌 사람에 대하여 이분은 참사람이다.’라고 알 수 있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불가능합니다.”(A4.187)

 

 

여기서 참사람은 삽뿌리사(sappurisa)를 번역한 말이다. 니까야에서 삽뿌리사는 성자(ariya)와 같다. 일반사람은 아삽뿌리사(asappurisa)라 하여 비성자(anariya)를 말한다. 부처님은 참사람이 아닌 사람, 즉 일반사람이 일반사람에 대하여 이분은 성자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참사람이 아닌 사람이 참사람에 대하여 이분은 참사람이다.’라고 알 수 있다는 것도 타당하지 않고 불가능합니다.”라고 했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고 했다. 일반 범부는 깨달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 인식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은 깨달은 사람을 알아 본다. 인식의 지평이 같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바라문이여, 참사람이 참사람에 대하여 이분은 참사람이 아다.’라고 알 수 있는 것은 타당합니다.”라고 말했다.

 

타심통을 계발하면

 

참사람은 참사람을 알아본다. 성자는 성자를 알아본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다. 성자라고 해서 같은 성자가 아니다. 여덟 종류의 성자가 있다. 이를 사쌍팔배의 성자라고 한다. 수다원 도와 과, 사다함 도와 과, 아나함 도와 과, 그리고 아라한 도와 과를 말한다. 이와 같은 사향사과의 성자에 정신적 수준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길과 경지를 알 때는 그것은 무한적 대상을 갖는다. 그래서 그 경우 범부는 흐름에 든 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한번 돌아오는 님(一來者), 돌아오지 않는님(不還者), 거룩한 님(阿羅漢)의 마음을 알지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거룩한 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안다. 다른 자도 위에 있는 자는 아래에 있는 자의 마음을 안다. 이와 같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Vism.13.110)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는 타심통으로 설명된다. 타자의 마음을 꿰뚫는 앎을 말한다. 선정에서 네 번째 선정을 닦으면 타심통이 계발된다. 범부는 선정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자의 마음을 알 수 없지만, 성자는 선정을 닦았기 때문에 타심통으로 일반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성자라도 깨달음에는 단계가 있기 때문에 바로 위의 성자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아라한이 되어야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은 아라한이기도 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안다고 볼 수 있다.

 

범부는 범부의 마음을 알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행위만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이는 자신 보다 못한 사람에게나 가능한 것이다. 그것도 현저하게 떨어지는 사람을 알아보는 데는 0.5초도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보다 의식수준이 높은 사람을 알아보기는 힘들다. 타심통을 가지지 않는 한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타심통이 없어도 아는 방법

 

우다나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우다나 결발고행자의 경’(Ud.64)에 따르면, 빠세나디 왕은 일곱 그룹의 수행자들과 있었다. 자이나교도, 나체수행자 등 일곱 그룹의 수행자들을 초청한 것이다. 왕은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저들은 세상에서 거룩한 님과 거룩한 님의 길에 들어선 님 가운데 어떤 쪽입니까?”라며 물어보았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왕이여, 당신은 세속인으로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고 북적거리는 수많은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으며 까씨 국에서 나는 전단을 쓰고 화환과 향수의 크림을 사용하며 금과 은을 받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그들이 거룩한 님인가 또는 거룩한 길에 들어선 님인가를 알기 어렵습니다.”(Ud.64)라고 말했다.

 

 

 

세속사람은 수행자의 마음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어떤 수행자가 자신이 거룩한 자라고 말해도 일반사람은 이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타심통이 없어도 알 수 있는 방법은 그들의 행위를 지켜보는 것이다.

 

부처님은 네 가지를 들었다. 계율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은 함께 살아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청정한가는 같이 대화를 해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이 견고한가는 재난을 만났을 때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이 지혜로운지는 토론을 해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그것도 오래 동안 해 보아야 알 수 있다고 했다. 짧은 시간 동안에는 알 수 없고 오래 함께 있어 보아야 제대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일반사람이 수행자를 알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을 견주어 판단하는 것

 

사람을 아는 또한가지 방법이 있다. 이는 부처님을 견주어 판단하는 것이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관찰하는 수행승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읽는지 알지 못한다면, 여래에 대하여 두 가지 관점에서 눈과 귀를 통해서 인식 가능하다는 관점에서 눈이나 귀를 통해 인식할 수 있는 오염된 상태들이 여래에게 존재하는지 아닌지를 관찰해야 한다.”(M47.6)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그사람에 대한 마음은 읽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사람의 신체적 행동과 언어적 행동으로는 파악할 수 있다. 그사람이 얼마나 탐욕이 있는지, 그 사람에게 얼마나 성냄이 있는지는 그 사람에게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드러난 행동을 보고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눈과 귀로 통해서 인식한다고 말한다. 부처님에 대하여 자신의 눈과 귀를 통해서 부처님을 알 수 있듯이,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도 자신의 눈과 귀를 통해서 얼마나 오염되었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어둠이 어둠을 보지 못하듯이

 

일반사람은 수행자를 공경한다. 수행자의 정신세계는 알 수 없지만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보고서 추론할 수 있다. 사람을 알아보는 것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바르지 못한 사람은 어둠과 같고 참된 사람은 눈을 가진 사람과 같다. 어둠이 어둠을 보지 못하듯이 참되지 못한 사람은 결코 참된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고 참되지 못한 사람도 알아보지 못한다. 마치 눈을 가진 사람은 어둠도 보고 어둡지 않은 것도 보는 것처럼 참된 사람은 참된사람도 알아보고 참되지 못한 사람도 알아본다.”(AA.iii.165-166)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서에 실려 있는 주석이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이를 어둠이 어둠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어둠속에서는 참사람아닌 사람과 참사람인 사람이 구별되지 않는다. 그래서 육안을 가진 범부는 참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참사람은 다 알아본다고 했다. 밝고 어둠을 보는 눈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사람은 참사람이라고 알아보고 참사람이 아닌 사람은 참사람이 아니라고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순간적일 것이다. 마치 빛과 어둠을 구분하는 것과 같다. 참사람이 참사람은 사람을 알아 보는데는 0.5초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눈 밝은 사람 귀 밝은 사람은

 

일반사람들은 참사람을 알아보기 힘들다. 앞에 참사람이 있어도 참사람인지 알 수 없다. 걸식하는 자가 참사람일수도 있지만 눈이 없는 자는 알아보지 못한다. 길거리에서 청소하는 자가 참사람일수도 있지만 청소부로만 보일 것이다. 농부가 참사람일수도 있지만 겉모습만으로 판단한다면 볼 수 없다. 왜 그럴까? 참사람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테라가타에 이런 게송이 있다. “눈 있는 자는 오히려 눈먼 자와 같고, 귀 있는 자는 오히려 귀먹은 자와 같아야 한다. 지혜가 있는 자는 오히려 바보와 같고 힘센 자는 오히려 허약한 자와 같아야 한다.”(Thag.501)라는 게송이다. 눈 밝은 자가 장님처럼 산다고 해도 눈밝은 자는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귀 밝은 자가 귀먹은 것처럼 살면 일반사람들은 참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지만 귀 밝은 사람은 알아볼 것이다.

 

참사람이 아닌 사람은 어둠 속에 있는 것 같아서 참사람이 아닌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고 참사람도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참사람은 진리의 눈을 가졌기 때문에 어둠과 밝음을 구분하듯이 참사람이 아닌 사람과 참사람을 구분할 줄 안다. 범부는 깨달은 자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깨달은 자는 깨달은 자를 알아보는 것이다.

 

 

2020-07-0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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