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죽음의 다양한 얼굴들

황령산산지기 2020. 1. 26. 12:54

죽음, 또 하나의 시작

죽음의 다양한 얼굴들

그림, 사진, 영상으로 보는 죽음의 모습

‘생태건축’으로 잘 알려진 고() 정기용 건축가는 2012년 상영되었던 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가>에서 자신의 죽음관을 밝힌다.


 “나이가 들수록 철학 공부를 해야 되는 것 같다. 죽음에 대한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옛것을 추억하고 눈물을 흘리는 그런 것이 아니라, 산다는 게 무엇인지, 나는 누구인지, 어떻게 살았는지, 세상은 무엇인지 하는 근원적인 문제들을 곱씹어 보고, 생각하고, 그러면서 성숙해진 상태로 죽는 게 좋겠다. 밝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죽음과 마주하는 위엄 있는 인간이 되고 싶다.”


그러고는 대장암으로 타계하기 며칠 전 봄 내음을 맡고 싶다며 침대에 실려 가족, 친지들과 가까운 산으로 봄나들이를 간다. 거기서 선생은 이렇게 마지막 말을 남긴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나무도 고맙고, 바람도 고맙고, 하늘도 고맙고, 공기도 고맙고,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죽음을 마주하려면 주어진 삶의 순간들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마지막 단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이 자리에서 몇 편의 그림, 사진, 그리고 영화를 통해 인간이 겪어온 죽음의 여러 모습들을 살펴보고, 우리로 하여금 거기에 담긴 두려움과 허무함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해줄 새로운 시각을 소개하려고 한다.

회화 속에 묘사된 죽음

피테르 브뢰헬, <죽음의 승리(The Triumph of Death)> 1562년, 패널에 유채, 117 cm × 162 cm,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 소장.


인류는 고대로부터 질병으로 인해 고통을 받아왔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질병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렀다. 그중에서도 사망자 수가 가장 엄청났던 사례는 1347년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흑사병이다. 당시 유럽 인구의 1/4, 즉 7,500만 명 이상이 희생됐다고 전해진다.


 그때의 참상이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테르 브뢰헬(Pieter Bruegel, 1525~1569)이 그린 <죽음의 승리>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림 곳곳에는 해골의 모습을 한 죽음이 인간을 괴롭히고 있고, 시체를 태우는 연기가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다.


스웨덴의 영화감독 잉그마르 베르히만(Ingmar Bergman, 1918~2007)의 작품 <제7의 봉인>에는 흑사병이 창궐했던 당시의 상황이 잘 재연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흑사병을 신의 징벌로 여겨 두려움에 떨고, 교회의 성직자들은 세상의 종말이 다가왔으니 회개하라며 으름장을 놓는다.


감염성 질병의 원인이 세균이라는 사실이 1800년대 후반에야 알려졌으니, 그 전까지 전염병의 창궐을 조상이나 신의 노여움으로 여겼던 사람들은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한꺼번에 워낙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다보니 교회에서도 일일이 성직자들을 보내 그들의 임종을 보살필 여유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15세기의 인쇄업자 윌리엄 캑스턴(William Caxton, 1422~1491)은 “성직자의 도움 없이도 건강한 영혼을 위해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자”는 생각에, 죽음과 관련된 의식과 죽음을 잘 맞는 법을 상세히 소개한 책을 펴내게 되는데, 이 책의 제목이 바로 [죽음의 기술(아르스 모리엔디, Ars Moriendi)]이다.


이렇듯 원인 모를 질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분위기로 인해, 중세 유럽에서는 ‘바니타스(vanitas)’ 그림이란 게 등장한다. ‘바니타스’란 인생무상을 뜻하는 라틴어로, 해골과 양초 같은 사물을 통해 삶의 허무함을 표현한 화풍이다.


1630년 피테르 클라스(Pieter Claesz, 1579~1660)의 정물화를 보면 사람의 해골과 촛불 그리고 꽃이 등장하는데, 결국 시간이 흘러 촛불은 꺼지고 꽃은 시들게 마련이므로 그처럼 삶이 덧없고 허무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영국 화가 필즈(Sir Samuel Luke Fildes, 1843~1927)가 1891년에 발표한 그림 <의사>에는, 고열과 호흡곤란으로 신음하는 서너 살배기 아이가 의자 위에 눕혀져 있고, 그 옆으로 왕진 온 의사가 턱을 괴고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


오른쪽 탁자에는 머리를 파묻고 흐느끼는 아이의 엄마가 보인다. 이 작품은 런던의 테이트 미술관에 전시돼 있는데, 귀족이었던 헨리 테이트 경은 필즈의 재능이 뛰어남을 알아보고는, 화가 자신이 그동안 살아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그려달라고 부탁한다.


이에 필즈는 몇 해 전 폐렴으로 죽어가던 자기 아들과, 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 묵묵히 임종의 자리를 지켜주던 의사를 떠올리며 참담했던 그때의 풍경을 그림에 담았던 것이다. 오늘날 진료에 사용되는 산소 치료, 항생제, 인공호흡기 같은 것이 당시엔 없었기에, 폐렴 등에 걸리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

루크 필즈, <의사(The Doctor)> 1891년, 캔버스에 유채, 166.5x242cm, 영국 테이트 갤러리 소장.


죽음을 그림의 중요한 소재로 삼은 화가로는 단연 노르웨이의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를 들 수 있다. 뭉크는 다섯 살에 결핵으로 어머니를 잃고, 열네 살에 역시 결핵으로 누이의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이후 파리에 머물던 1889년에는 의사였던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난다. 가족의 건강과 존속에 대한 불안은 189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인격과 예술적 기질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뭉크는 “불안과 질병이 없었다면 내 인생은 방향타 없는 배와 같았을 것”이란 말을 남긴다. 그는 1894년 발표한 그림 <마돈나>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당신의 얼굴에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과 고통이 넘칩니다. 죽음과 삶은 손을 잡고, 수천의 죽음과 수천의 삶을 연결하는 고리가 지금도 여전히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1895년에 제작한 <뼈가 있는 자화상>에서는, 항상 죽음을 응시해온 화가답게 자신의 모습을 그린 그림 하단에 앙상하게 뼈만 남은 팔을 채워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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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바르 뭉크, <뼈가 있는 자화상(Self Portrait)>1895년, 석판화, 58.3 x 43cm, 노르웨이 뭉크 미술관 소장.

에드바르 뭉크, <창문 옆에서(Self-Portrait by the Window)>1940년, 캔버스에 유채, 84 x 108cm, 노르웨이 뭉크 미술관 소장.


뭉크는 1944년 모든 재산을 오슬로 시에 기증하고 여든한 살의 나이로 평화롭게 임종을 맞는데, 세상을 떠나기 4년 전에 그린 <창문 옆에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자신을 보여준다. 얼굴과 배경의 붉은 색은 옷의 짙은 녹색과 더불어 삶의 영역을 나타내고, 창밖의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풍경은 죽음의 영역으로 삶과 대비가 된다. 살아서 지금 여기 서 있지만 언젠가는 누워서 죽을 날이 올 것임을 표현한 것이다.

사진과 영화 속 다양한 죽음들

사진작가들은 다른 장르의 예술로는 포착할 수 없는 생생한 삶의 현장을 렌즈를 통해 담아낸다. 1936년 발표한 로버트 카파(Robert Capa, 1913~1954)의 <어느 공화파 병사의 죽음>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사진은 날아온 총알에 머리를 맞고 쓰러지는 한 병사의 안타까운 죽음의 순간을 담고 있다. 이 작품 외에도 카파는 세계 여러 나라의 전쟁터를 취재하면서 삶과 죽음의 순간을 포착해냈다. 1954년에는 그 자신 역시 사진을 찍던 전쟁터에서 지뢰를 밟아 사망한다.


<LIFE>지 종군기자 칼 마이단스(Carl Mydans, 1907~2004)의 1950년 사진 <통곡>은 한국 전쟁 -1948년 여수ㆍ순천 반란사건 때 촬영한 작품이라고도 한다-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살해되어 마당에 쓰러져 있는 삼십 대 초반의 남자와 그 옆에서 울부짖는 어린 두 딸과 한 여인을 볼 때면, 그 처절한 시절을 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전쟁이 아니더라도 예고 없이 죽음이 찾아오고 가족은 슬픔 속에 황망히 남겨지는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보게 되기 때문이다.


자연재해로 인한 죽음 역시 그러한데, <워싱턴 포스트지>의 캐롤 구지(Carol Guzy) 기자가 2011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시간이 멈춘 순간>에서는, 2010년의 아이티 지진 현장에서 사망한 여자의 벗겨진 하이힐과 흙이 묻은 두 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우리 모두는 죽음의 순간이 언제 올지 모른 채 살아간다.

캐롤 구지, <시간이 멈춘 순간(The Moment Time Stopped)> 2010년 1월 아이티 지진 현장에서 사망한 여성의 시신을 담았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 실화를 바탕으로 2000년에 제작된 매튜 맥커너히 주연의 영화 <U-571>은 잠수함이라는 좁고 밀폐된 공간에서 구축함으로부터 연속 투하되는 폭뢰로 인해 몰살의 위협을 앞두고 있는 군인들의 엄청난 공포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갑작스런 죽음이나 그로 인한 두려움과는 대조적인 정경을 담아낸 사진도 있다. 미국의 사진작가 유진 스미스(William Eugene Smith, 1918~1978)의 1951년 작품 <후안 라라의 장례식>은 가족과 가까운 친지들에 둘러싸인 채 침상에 누워 조용히 임종을 맞는 한 노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침상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임종의 시간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표정에 아쉬움은 있지만 공포는 보이지 않고, 죽음을 자연의 순리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엿보인다. 중환자실에서 온갖 생명 유지 장치를 주렁주렁 단 채 수십 년 같이 살아온 가족과 격리되어 있다가 쓸쓸하게 세상을 떠나는 요즘 세태와 크게 대비된다.


우리는 <후안 라라의 장례식>에서와 같이 죽음을 대할 수는 없는 것일까?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한 참담함이나 이별과 부재로 인한 슬픔이야 인간으로서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인간의 필연적 조건을 향한 현대인들의 거부와 혐오, 부정의 태도는 꽤나 심각하다. 삶의 순간순간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며 살기 위해서라도 죽음을 바라보는 그와 같은 시각은 극복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그러한 극복이 기존 종교의 교리나 문화적 전통에 근거한 믿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과학적인 탐색을 통해 상당 부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죽을 때 실제로 어떤 일을 겪는지, 그리고 삶의 경계를 벗어나면 인간의 의식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를 알 수만 있다면, 죽음을 향한 혐오나 두려움은 많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더불어 죽음을 미화하거나 찬미하는 시각 역시 사라지리라 생각한다.

죽음 뒤의 삶, 근사체험 연구

히에로니무스 보스, <축복받은 이들의 승천(Ascent of the Blessed)> 1490~1516년경, 패널에 유채, 39.5 x 86.5cm, 이탈리아 도제의 궁전 소장.


지난 수천 년 간 인류는 죽음이 무엇이며, 죽음 이후엔 어떻게 될까를 다양하게 궁구해왔다. 그런데 의술의 발달을 통해 1970년대 중반부터 이에 대한 단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심장과 호흡이 멎은 사람을 되살리는 심폐소생술이 발전하면서, 과거에는 그냥 사망처리 됐을 사람들이 다시 깨어나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났고, 이들 중 일부가 심장이 멎어 있는 동안의 경험인 근사체험 혹은 임사체험(Near death experience)을 보고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경험들이 현대에 와서야 생겨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그림이 있는데, 1500년경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1516)가 그린 <축복받은 이들의 승천>이 그것이다. 이 그림을 보면 근사체험의 여러 요소 중 하나인 터널을 통과하여 빛을 만나는 장면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근사체험에 관해 본격적인 연구의 물꼬를 튼 사람은 미국의 정신과 의사 레이먼드 무디 주니어(Raymond A. Moody, JR.)다. 그는 원래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던 교수였는데, 주위에서 이러한 체험을 한 사람들을 여럿 만나면서 이 분야를 연구하기 위해 의과대학에 들어가 정신과 의사가 된다. 이 과정에서 근사체험자 150명을 8년간에 걸쳐 면담하여 낸 책이 [다시 산다는 것(Life after life)]이다.


또한 스위스 출신의 정신과 의사였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zabeth Kübler Ross, 1926~2004) 박사는 수많은 환자, 특히 어린이 환자의 임종을 지키면서 관찰했던 일들과 그 외에 여러 사람들이 경험한 근사체험을 수십 년간 기록하여 [사후생(, On life after death)]이란 책을 출간한다. 죽음학의 창시자로 인정받는 로스 박사는 우리나라에서 [인생수업], [상실수업], [생의 수레바퀴] 등의 저서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그녀가 제창한 ‘죽음을 받아들이는 다섯 단계’는 유명한 이론으로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로스 박사는 또한 미국의 시사 주간지인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100대 사상가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는 대체로 알지 못하거나 미처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과학적인 연구나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공통적으로 경험되고 보고되는 정보들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요즘에는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미지의 세계들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이해하게 됐다. 사물의 본질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앎은 이제까지 우리를 지배해온 불안이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새로운 인식의 차원으로 이끈다.


로스 박사는 생전에 “인간의 육체는 영원불멸의 자아를 둘러싼 껍질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죽음은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이 있을 뿐이다.”라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다음 번엔 그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사례들과 현재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다양한 연구들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참고문헌
  • 진중권, [춤추는 죽음], 세종서적
  • 한성구, [그림 속의 의학], 일조각
  • 울리히 비쇼프 지음, 반이정 옮김, [에드바르드 뭉크], 마로니에북스
  • 이주헌, [내 마음속의 그림], 학고재
  • 최민식, [진실을 담는 시선 - 우리시대 마이스터 3], 예문

  • [네이버 지식백과] 죽음의 다양한 얼굴들 - 그림, 사진, 영상으로 보는 죽음의 모습 (죽음, 또 하나의 시작, 정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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