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삶이 권태로울 때, 삶의 교만이 생겨날 때

황령산산지기 2019. 11. 17. 06:45

따분한 시간이다. 점심을 먹고 2시에서부터 3시대에 이르는 시간은 무엇을 해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커피를 마셔보아도 유튜브를 보아도 무기력하게 앉아 있을 뿐이다. 이럴 때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걸어야 한다. 걷다 보면 기분전환이 된다.

 

석양에 빛나는 단풍은

 

공원에 단풍이 절정이다. 도시의 공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가 대부분이다. 단풍이 햇살이 번들거린다. 그것도 석양에 지는 햇살에 반짝거린다. 단풍이 절정에 이른 것을 보니 떨어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해마다 1120일 전후하여 마치 약속이나 한듯이 일제히 떨어진다.

 

석양에 빛나는 단풍은 찬란하다. 그러나 단풍의 운명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마치 서산에 지는 해가 벌겋게 달구어 진 것과 같다. 노을이 지면 해가 넘어갈 전조이듯이, 단풍이 들면 떨어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울긋불긋 석양에 빛나는 단풍을 보면 아름답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슬프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낙엽의 전조로 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가을비가 내리고 비바람이 치면 그야말로 추풍낙엽이 되어 우수수 떨어진다. 그리고 춥고 외롭고 긴 겨울이 찾아온다.

 

가을은 노년의 계절이라고 볼 수 있다. 봄은 청춘의 계절이고, 여름은 중년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노년의 계절인 것이다. 겨울은 낙엽이 졌기 때문에 죽음의 계절이 된다. 단풍이 울긋불긋 아름답긴 하지만 언제 떨어질지 모른다. 단풍을 보면 인생의 노년기를 보는 것 같다.

 

조안 할리팩스의 죽음을 명상하다

 

어느 노인이 단풍이 절정인 공원에 앉아 있다. 차가운 저녁 햇살에 번들거리는 단풍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어갈까? 인생의 끝자락에 와 있음을 실감할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죽음이다.

 

죽음의 침상에 누워 있는 자가 있다. 그는 손가락 하나 까닥거릴 힘조차 없다. 죽음이 점점 다가올 때 죽을 준비는 다 되어 있는 것일까? 자기가 죽을 줄 안다는 것은 그래도 나을 것이다. 문제는 준비되지 않은 죽음이다. 갑자기 죽음이 찾아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최근 책을 하나 읽고 있다. 그것은 죽음을 명상하다(민족사)라는 책이다. 선승이자 인류학자인 조안 할리팩스가 지은 책이다. 책에서 인상적인 문구를 보았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놀랄 만한 것은 우리 주위에 죽은 사람이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38p)이라는 말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회피하는것인지도 모른다. 대부분 사람들은 죽음은 달갑지도 않고, 생각하기도 싫은 것이고, 심지어 불쾌하게 여긴다. 그럼에도 우리 주변에서는 지금 이순간에도 죽어 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삶의 교만에 대하여

 

사람들은 나 만큼은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는 것 같다. 이에 대하여 죽음에 대한 교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죽음의 교만, 이런 말도 있을까? 초기경전을 보면 죽음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무슨 이유로 나는 죽음에 종속되었으며 죽음을 벗어날 수 없다.’라고 여자나 남자나 집에 있는 자나 출가한 자나 자주 관찰해야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뭇삶들은 살아있는 시절에 삶의 교만이 있는데, 그 교만에 빠져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한다. 그가 그 사실을 관찰하면, 살아 있는 시절의 삶의 교만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버려지거나 약해진다. 수행승들이여, 이런 이유로 나는 죽음에 종속되었으며 죽음을 벗어날 수 없다.’라고 여자나 남자나 집에 있는 자나 출가한 자나 자주 관찰해야 한다.”(A5.57)

 

 

경에 따르면 세 가지 교만이 있다. 그것은 건강의 교만, 젊음의 교만, 삶의 교만을 말한다. 건강의 교만은 질병과 관련이 있고, 젊음의 교만은 늙음과 관련이 있고, 삶의 교만은 죽음과 관련이 있다. 이렇게 본다면 나만은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은 죽음의 교만이 아니라 삶의 교만임을 알 수 있다.

 

삶의 교만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은 문제만 제시한 것이 아니라 해법도 제시했다. 그것은 나 혼자만 죽음에 종속되어 죽음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뭇삶들 또한 오고 가고 죽고 태어나는 한, 그 모든 뭇삶들이 죽음에 종속되어 죽음을 벗어날 수 없다.”(A5.57)라고 새겨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명상, 마라나누사띠(maraānussati: 死隨念)

 

살아오면서 수 많은 죽음을 보았다. 그러나 현대에서는 죽음은 은폐되어 있다. 장례식장에 가 보아도 시체를 볼 수 없다. 그래서인지 죽음은 저 멀리 있는 것이고 나와 관계없는 것이라고 여기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지나 친구 등 나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점차로 떠나고 있다. 이렇게 하나 둘 떠나 갈 때 언젠가 나도 떠나가야 함을 알게 된다. 나만큼은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은 깨지는 것이다.

 

부처님은 죽음에 대하여 계속 생각하라고 했다. 죽음에 대하여 자꾸 생각하면 길()이 생길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가 그 사실을 자주 관찰하면, 길이 생겨난다. 그가 그 길을 섬기고 닦고 익힌다. 그 길을 섬기고 닦고 익히면, 그에게 결박이 끊어지고 경향이 종식된다.”(A5.57)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다름 아닌 죽음에 대한 명상, ‘마라나누사띠(maraānussati: 死隨念)’를 말한다.

 

죽음명상은 40가지 사마타명상주제중의 하나이다. 또한 죽음명상은 10가지 수념 중의 하나이다. 이처럼 죽음명상은 명상주제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미얀마에서는 좌선에 들기 전에 죽음명상을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예비명상이라고 하여 불수념, 자애관, 부정관, 사수념, 이렇게 네 가지 명상을 한다. 이 중에서 죽음명상(死隨念)내가 지금은 비록 살아 있지만 지금 당장, 또는 내일이나 모레 등 어느 순간이라도 죽을 수 있다. 삶은 확실하지 않지만 죽음은 확실하다.”라고 숙고하는 것을 말한다.

 

기대수명에 대하여

 

죽음명상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 이대로 천년만년 사는 것도 아니고 기대수명대로 사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좀처럼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설령 죽는다고 하더라도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나의 수명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조안 할리팩스의 책 죽음을 명상하다에서는 당신이 나이를 먹고, 임종의 자리에 누워 있는 것을 상상하십시오.”(86p)라고 했다.

 

어느 곳에서 임종을 맞을지 알 수 없다. 자연사라면 죽음의 침상에서 임종을 맞을 것이고, 사고사라면 도로나 응급실에서 죽는 줄도 모르고 임종을 맞을 것이다. 전자에 대하여 적시적 죽음이라 하여 공덕이 다하거나 목숨이 다하거나 그 양자가 다해서 일어나는 것이다.”(Vism.8.2)라고 했다. 후자에 대해서는 비시적 죽음이라 하여 수명을 존속케하는 업을 방해는 업으로 일어나는 것이다.”(Vism.8.2)라고 했다. 전생의 업으로 무기에 의한 공격 등으로 상속이 단절되어 죽음이 일어나면 비시적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적시적 죽음이든 비시적 죽음이든 어느 죽음이든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청정도론에서는 조짐이 없음의 관점에서 목숨은 정해진 것이 없고, 확정할 수 있는 것이 없다.”(Vism.29)라고 했다. 이 말은 숫따니빠따 화살의 경에서는 세상에서 결국 죽어야만 하는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다.”(Stn.574)라는 말과 일치한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소개 하고 있다.

 

 

수명, 질병, 죽는 시간, 죽는 장소,

운명의 길의 이러한 다섯 가지는

이 삶의 세계에서는

어떻게 될 것인가의 조짐이 없다.”(Vism.8.29)

 

 

어떤 사람이 나는 이만큼 살다가 죽어야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기대에 지나지 않는 말이다. 보험회사에 말하는 기대수명과 같다. 인간을 포함하여 축생에게는 정해진 수명이 따로 없다. 축생이라면 언제 잡혀 먹힐지 모른다. 인간이라면 사고사 등으로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래서 수명, 질병, 죽는 시간, 죽는 장소에 대하여 조짐조차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죽음명상을 하면 어떤 공덕이

 

청정도론에서는 죽음명상에 대하여 매우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또한 죽음명상 수행방법에 대해서도 설명해 놓았다. 죽음명상을 닦는 자들은 죽음은 닥칠 것이다.”라며 명상해야 하고 또한 죽음! 죽음!”라며 끊임없이 죽음을 새겨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죽음명상을 하면 어떤 이득이 있고 어떤 공덕이 있는 것일까?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그리고 그 죽음에 대한 새김을 닦는 수행승은 항상 방일을 여의고, 일체의 존재에 대하여 싫어하여 떠남의 지각을 얻어, 목숨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악을 꾸짖고, 쌓아 모으지 않고, 필수자구에 대한 간탐의 티끌을 여의고, 무상의 지각을 익힌다. 그것을 새김으로써, 그에게 괴로움의 지각과 실체없음의 지각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는, 죽음에 대한 새김을 닦지 않은 뭇삶이 갑자기 맹수, 야차, , 도적, 살육자에게 공격당하면, 죽을 때 두려움-공포-혼미에 빠지듯, 그와 같이 빠지지 않고, 두려움 없이 혼미 없이 죽는다. 그가 만약 현세에 불사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는 좋은 곳으로 간다.”(Vism.8.41)

 

 

청정도론에 실려 있는 죽음명상은 초기경전을 근거로 한다. 특히 앙굿따라니까야 죽음에 대한 새김의 경1’(A6.19)죽음에 대한 새김의 경2’(A6.20)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 많이 인용되어 있다. 위 문구도 경전에 있는 것을 근거로 한 것이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죽음명상을 하면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특히 무상, , 무아에 대한 지각을 익힐 수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 죽음명상을 익히면 갑자기 죽었을 때 당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려움 없이 혼미 없이 죽는다.”라고 했다.

 

삶이 권태로울 때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지 않은 자 없다. 이 세상에 크나큰 명성을 얻은 자들도 예외 없이 죽었다. 천하를 호령하는 영웅호걸도 죽을 때는 자신의 힘으로 손가락 하나 까닥 할 수 없었다. 수행자도 예외가 아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연각승을 예로 들어서 그들도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벗어날 것인가?”(Vism.8.22)라고 했다.

 

도를 많이 닦은 고승들도 죽음을 피해 가지 못했다. 그렇다면 부처님과 비교하여 어떻게 죽음명상을 닦을 것인가? 이에 대하여 쏟아지는 큰 비를 예로 들어서 그도 죽음의 비가 내리면 즉시 열반에 든다.”(Vism.8.23)라고 했다. 이렇게 부처님과 비교하여 죽음에 대한 새김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닦는 것은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는 자따까에 실려 있는 게송으로도 알 수 있다. 청정도론에 소개 되어 있는 게송중에 하나를 보면 풀잎 끝의 이슬이 태양이 떠오르면 사라지듯, 이와 같이 사람의 목숨도 그러하니, 어머니, 저를 방해하지 마시오.”(Vism.8.12, JA.IV.122)라고 되어 있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의 문제는 반드시 해결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죽음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삶의 의미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어머니, 저를 방해하지 마시오.”라고 했는데, 이 말은 어머니, 저의 출가를 방해하지 마십시오.”와 같은 말이다. 여러 가지 출가이유가 있을 수 있다. 가장 근본적인 출가이유는 죽음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수행승은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출가한 것이다.

 

부처님은 태어나서 죽지 않는 것이 없다고 했다. 태어나는 순간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이다. 더구나 언제 죽을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지금 이순간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목숨은 짧다. 훌륭한 사람이라면 그 목숨을 경시하라. 머리에 불이 붙은 듯 살아야 한다. 죽음이 다가오는 것은 피할 수 없다.”(S4.9)라고 했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목숨이다. 삶이 권태로울 때, 삶의 교만이 생겨날 때 죽음명상을 해야 한다.  

 

 

2019-11-1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