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생멸법(生滅法)을 그칠 수 있다면

황령산산지기 2019. 12. 14. 15:27



무상게가 있다. 한자어로는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이다. 일본 교과서에도 실려 있었다는 이 게송은 불교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또 설산동자의 투신설화로서도 유명하다. 천도재할 때에도 독송되는 필수게송이다. 해석하면 모든 지어진 것은 무상하니, 생겨나고 소멸하는 법이네. 생겨나고 또한 소멸하는 것, 그것을 그치는 것이 행복이네.”(S15.20)라는 뜻이다.

 

새벽이다. 온 사위가 고요하다. 멀리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나지만 이내 사라지곤 만다. 세상은 나와 무관하게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가득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에선가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일어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므로 다시 고요해질 것이다. 모든 조건 지어진 것은 일어나고 사라진다.

 

우주삼라만상은 성주괴공하고, 생명이 있는 유정체는 생노병사하고, 한생각은 생주이멸한다. 우주와 생명체의 생멸은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생멸은 다스릴 수 있다.


탐욕과 분노와 같은 오염원은 일어날 만해서 일어난 것이다. 한번 일어난 것은 반드시 사라진다고 했다. 불같은 탐욕과 분노도 조건이 다하면 사라진다. 조건이 되면 또다시 일어난다.

 

중생들은 탐욕을 먹고 살고 분노를 먹고 산다. 마음의 오염원을 먹고 사는 한 괴로움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마음의 오염원은 윤회의 땔감으로 작용하여 끊임없이 태어난다.


태어나서 죽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무덤이 증대되었다. 일겁동안 윤회한 뼈무더기를 모아 놓는 다면 에베레스트산보다 더 높을 것이다.

 

새벽이 되면 세상이 조용하다. 마음의 오염원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대상과 접하는 순간 깨져 버린다.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난다.


탐욕의 마음, 분노의 마음도 대상이 있어서 일어난 것이다. 마음의 생멸법을 그치게 한다면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생멸하는 오염원의 소멸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라고 했다.

 

 


 

나의 삶은 견고하지 않지만

나의 죽음은 견고하고

나의 죽음은 피할 수 없으니

나의 삶은 죽음을 끝으로 하고

나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하느니라.

 

뭇삶은 행위의 소유자이고

행위의 상속자이고

행위를 모태로 삼는 자이고

행위를 친지로 하는 자이고

행위를 의지처로 하는 자로서

그가 지은 선하거나 악한 행위의 상속자이니라.

 

선행을 하면, 두 곳에서 즐거워하니

이 세상에서도 즐거워하고

저 세상에서도 즐거워하나니

‘내가 선을 지었다’라고 환호하고

좋은 곳으로 가서 한층 더 환희하느니라.

 

! 머지않아 이 몸은

! 쓸모없는 나무조각처럼

의식 없이 버려진 채

실로 땅 위에 눕혀질 것이니라.

 

형성된 것들은 실로 무상하여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이니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의

지멸이야말로 참으로 지복이니라.”

 

(죽음에 대한 새김의 이치, 예경지송)

 

2019-12-1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