必勝海軍
나는 죽었다. 나는 600×1900×450㎜ 크기 나무 관 안에 누워 있다. 누런 삼베로 만든 수의를 입고 손과 발은 흰색 끈으로 꽁꽁 묶여 있다. 이 생의 마지막 양식이라며 입에 넣어 준 생쌀 한 숟가락은 조금 전에 다 삼켰다. 움직일 수 없다. 옆으로 돌아누울 수도 없고, 무릎을 굽힐 수도 없다. 얼굴이 가려운데 긁을 수도 없다. 캄캄하다. 빛 한 조각 들어오지 않는다. 10분 정도 지났다. 답답함이 아늑함으로 바뀐다. 엄마 자궁 속이 이러했을까? 이때 밖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습니까?” 나는 지금 죽음 체험 수련 중이다. 지난 5월 12일 죽음체험수련원을 운영하는 비영리단체 ‘지구별여행자’(구 ‘아름다운 삶’·대표 김기호)가 진행하는 행사에 16명의 참가자가 모였다. 지구별여행자는 서울 서초구 서초동 능인선원 내 방 한 칸을 빌려 사용하고 있었다. 이날 체험 참석자는 50~60대가 대부분이고, 30대 초중반의 젊은 여성 두 명과 30대 후반 부부도 있었다. 자서전 쓰기, 죽음 명상, 유언장 쓰기, 묘비명 쓰기, 입관 체험 등으로 진행되는 이 프로그램은 4시간30분 동안 진행됐다. 지구별여행자는 매달 한 번씩 죽음 체험 수련을 한다. 개별 신청자도 있고, 기업이나 관공서 등 단체 체험도 한다. 2002년부터 총 1만5000명이 죽음 체험을 거쳤다고 했다. 내가 취재를 위한 체험을 한 이날 미국의 인터넷 매체 VICE라는 곳에서 촬영단이 찾아왔다. 지구별여행자 김기호 대표는 “입관 체험 문화는 한국에만 있어 유럽이나 미국 등에서 신기해 한다. CNN이나 내셔널지오그래피에서도 찾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참가자들에게 동의를 구하고, 자신이 촬영되길 원치 않는 참가자는 미리 얘기를 해 달라고 했다. 최대한 죽음 체험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오후 4시50분. 조용한 음악과 함께 자서전 쓰기가 시작됐다. 출생에서부터 초·중·고등학교 입학과 졸업, 결혼과 출산, 회사 입퇴사 등 내 삶의 결정적인 순간을 만나는 시간이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이력서가 아니라,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 인생의 빛나는 순간들. 빈 여백을 한 자 한 자 채워 가며 내 인생을 슬라이드처럼 돌려본다. 두 번째 자서전 양식이 놓여 있다. 서울 강남구 도곡동 타워빌딩의 조명이 하나둘 켜진다. 바람이 차다. 싸한 공기가 감싸면서 오한이 느껴진다. 내 관 앞에 섰다. 관 속에 들어갔다. 도우미 두 명이 다가와 흰 천으로 손과 발을 꽁꽁 묶는다. 관 뚜껑을 덮는다.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깜깜하다. 잠시 후,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쾅!쾅!쾅!” 관 뚜껑 위에 망치질을 한다. 귀청이 찢어질 듯하다. 이따금 김기호 대표가 질문을 던진다.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습니까?” 그리고 나선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0.34485평의 공간에 누워, 나는 언젠가 내가 가야할 길을 이렇게 먼저 가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20분? 30분? 시간 개념이 무화됐다. 누군가 꺼내 주지 않으면 나는 도대체 관에서 나갈 수도 없었다. “자 이제, 당신은 다시 태어날 시간입니다.” 관 뚜껑이 열린다. 먼발치 도시의 조명에 눈이 부시다. 일어나 앉는다. 봄밤 바람이 피부에 확 닿았다. 새롭다. 바람에 풀꽃들이 한들거리는 것도 새삼스럽다. 나는 가장 짧은 시간에 먼 여행을 다녀왔다. 너무나 강렬한 체험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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