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지옥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
파리의 카타콤은 과거 로마 시대에 발견됐으며 이후 채석장으로 사용하다가
1785년에 납골당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세계 최대의 무덤인 파리의 카타콤.
이러한 기괴한 광경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찾아오면서 파리의 관광명소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카타콤에서
실종사건이 발생하기 시작했는데
카타콤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고
이들이 왜,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려지지 않았으며
시신 또한 발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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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 근거로 카타콤에 관한 몇 가지 미스터리를 들었는데
첫 번째로 지하 터널의 미스터리였다.
둘째, 유골 주인에 대한 기록이 확실치 않다는 점이다.
그리고 셋째, 카타콤에 방문한 사람들 가운데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목격했다는 사람들 있다는 점이다.
카타콤의 지옥문에 대한 의혹은 점점 커져갔고,
그러다가 1998년 한 다큐멘터리를 본 사람들은 큰 충격에 빠진다.
1년 전, 취재 허가를 받고 통행금지구역을 조사하던 프랜시스 감독은 바닥에 떨어진 낡은 캠코더를 발견했다.
영상 속 남자는 갑자기 무언가에 쫓기 듯 달리기 시작했고
한참 동안 헤매던 그는 급기야 캠코더를 바닥에 던지고 달아난다.
사람들이 목격한 그 무언가가 바로 지옥의 문지기였다(?)
파리 시 측은 모두 헛소문뿐이라며 일각에서는 영상이 조작됐을 가능성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지만
프랜시스 감독은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다.
한 줄 요약:
파리의 카타콤에 쌓인 600만 구의 유골들
그리고 그곳에 남겨진 한 남자의 기록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파리의 카타콤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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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알 지식 모아 태산▲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예수님은 어떤 기준으로 제자를 삼으셨을까. 열두 제자 중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어부였다.(막 1:16∼20)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에서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똑같이 부르셨다. 그들은 모두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 4:18~22)
도마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과 함께 고기를 잡으러 디베랴 호수로 같이 갔다는 점에서(요 21:2) 어부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빌립도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요 1:43∼44)이라는 점과 벳새다가 ‘어부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갈릴리의 어촌이라는 점에서 어부로 추정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만약에 도마와 빌립이 어부였다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절반이 어부였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고기를 낚던’ 어부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바꿔 놓으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람 낚는 어부는 제자를, 고기를 낚기 위해 던지는 그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의 그물에 잡히는 물고기는 사람을 상징한다.
복음의 그물 던지는 ‘어부’
예수님의 제자들 중 과반수가 어부였고 나머지는 세리와 혁명가 그리고 직업조차 밝혀지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왜 주님은 세상의 엘리트들을 놔두시고 이들을 택하셨을까. 목회자들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해 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을 훈련시켜 사용하신다”고 말한다. 성경도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고 말한다.
세상엔 예수님의 제자를 자처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예수님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돌아보고 나서도 자신 있게 제자라고 말할 사람은 많지 않을 듯하다. 그들이 제자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미국 사우스이스트 크리스천교회의 교육목사인 카일 아이들먼은 직설적으로 “그들은 그냥 팬(fan)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저서 ‘팬인가, 제자인가’(Not a fan)에서 그는 자신이 팬인가 제자인가를 진단하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로만 고백하는지 실제로 따르고 있는지’ ‘예수님에 관해서 진정으로 아는지’ ‘자신의 내면보다 밖의 시선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지’ ‘자기 힘을 믿는지, 성령충만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지’ 등을 물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에 따르면 팬은 관람석에 앉아 팀을 열렬히 응원하는 사람이다. 선수들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고 최근 기록을 줄줄이 꿰고 있지만, 선수들을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한다. 게다가 응원하는 팀이 자꾸 패하면 그토록 좋아하던 마음도 조금씩 식어간다. 심지어 다른 팀으로 옮겨가기도 한다.
“예수님 주변에도 팬이 많다. 팬은 일이 잘 풀릴 때는 예수님을 응원하지만 반대 상황에 이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몸을 돌려 다른 선수에게 들러붙는다. 팬은 안전한 관람석에 앉아 응원만 할 줄 알지 경기장에서 필요한 희생과 고통은 조금도 모른다. 예수님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어도 그분을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한다.”(카일 아이들먼의 ‘팬인가, 제자인가’ 중)
성경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군중 역시 팬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기대하며 이튿날에도 그 장소로 나왔을 것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미 호수 건너편으로 떠난 뒤다. 그들이 예수의 일행을 겨우 따라잡았을 땐 배가 고파서 쓰러질 지경이었다. 이때 예수님은 냉정하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더 이상 떡은 없고 오직 예수님만 남았을 때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가. 성경은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 6:66)고 말한다. 팬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리스도를 따를 생각은 추호도 없는 이들이다. 온갖 혜택을 바라며 예수님의 주위로 몰려들지만, 자신을 희생할 만큼 그분과 가깝지는 않다. 나는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군중 속의 한 명이 아닐까.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진정한 제자란 어떤 사람일까. 폴란드 작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츠가 1896년에 쓴 소설 ‘쿠오바디스’의 마지막 부분이 이를 상징적으로 설명해준다. 기독교도들에 대한 박해가 극심해지자 신자들의 간청으로 로마를 탈출하려던 사도 베드로가 새벽 여명 속에 십자가를 메고 걸어가는 그리스도를 환상 속에서 보고 “쿠오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묻는다. 그리스도는 “네가 나의 어린양들을 버리니, 나는 다시 한번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로마로 돌아간다”는 말씀을 남기고 사라진다. 베드로는 발길을 돌려 로마로 돌아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다.
사도 베드로가 그리스도에게 던졌던 이 절박하고 심오한 물음은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물음이다.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은 속도가 아닌 방향이 중요한 길이다. 예수님이 가신 그 방향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며 제자이다. 카일 아이들먼은 우리 자신이 제자로서 정체성을 가질 때만이 예수의 제자로 살 수 있음을 강조한다. 신앙의 연수(年數)가 아닌 헌신의 깊이가 중요하다.
작자 미상의 기도문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주님, 저로 하여금 죽는 날까지 물고기를 잡을 수 있게 하시고, 마지막 날이 찾아와 당신이 던진 그물에 내가 걸렸을 때 바라옵건대 쓸모없는 물고기라 여겨 내던져짐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
나는 누구인가. 제자인가 팬인가.
▒ 어부에 하나 더
물고기와 그리스도인
물고기는 로마의 카타콤(Catacombs)의 프레스코 벽화에서 발견된 후 고대 그리스도인의 상징이 됐다. 물고기란 뜻의 그리스어 익투스(ΙΧθΥΣ)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고백의 의미가 있다. 예수(Ιησoυs), 그리스도(Χριστοs), 하나님(θεοs), 아들(Υιοs), 구세주(Σωτηρ)의 첫머리 글자만 모아보면 익투스가 된다.
초대 교회 시대에(주후 64년부터 250년간) 로마는 교회를 박해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 등에 숨어 지냈다. 이들은 자신의 신분을 나타낼 때 땅에 물고기를 그렸다. 한 사람이 물고기의 반을 그려 놓으면 다른 사람이 나머지 절반을 그려 넣음으로써 서로의 신앙이 하나임을 확인했다.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프라하에서 남쪽으로 1시간쯤 차로 달리면 따보르(Tábor)라는 작은 도시가 나온다. 이곳은 얀 후스의 종교개혁을 이어받은 저항세력이 군사적 목적으로 건설한 요새 도시이다. 요새라고 해서 뭔가 막 성벽과 무기가 많을 것을 상상하고 갔는데, 지극히 평범하고 조용한 마을이다.
흔히 어떤 조용한 마을을 묘사할 때 ”시간이 멈춘 것 같은“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곳은 진짜로 중세 시대 그대로 멈춘 듯한 고즈넉하고 예쁜 마을이다. 참고로 ‘따보르’는 성경에 나오는 다볼산(변화산)과 같은 지명이다. 자, 우리가 이곳에 왜 가봐야 할까.
보헤미아 지역 신자들의 항전과 개혁운동
후스는 증거가 조작된 불법적인 재판을 받고 허무하게 화형을 당한다. 그렇게 개혁의 목소리를 짓밟아버리면 될 거라고 생각했던 자들은 그날 밤 모든 것이 끝난 것으로 알고 잠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수많은 양심은 격분하였고, 오히려 더욱 크고 체계적인 저항이 일어났다. 그 중심지가 바로 따보르였다.
당시로서는 당연하게도, 따보르는 도시 전체가 반역자로 몰리고 만다. 이제 그들은 황제와 교회의 권세에 반대하는 저항군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신앙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위해 거짓과 속임수에 타협할 수 없었던 순진한 신앙인들은, 끝이 빤히 보이는 싸움에도 물러설 수 없었다. 제국 전체와 도시 하나의 싸움은 누가 봐도 그 결말이 정해진 듯했다. 자신들에게 닥친 임박한 상황을 세상의 종말과 재림 예수가 다시 오실 날로 받아들인 이들이 다볼산에 모여 요새를 구축하고 전쟁을 준비했다. 이들을 이끈 지도자는 쥐시카 장군....
자, 무슨 드라마 시놉시스처럼 읽히지만, 문제는 우리가 쥐시카 장군은커녕, 후스에 대해서도, 그를 따랐던 수백 명의 보헤미안 귀족들에 대해서도, 보헤미아가 어떤 지방인지에 대해서도, 도통 아는 바가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래서 우리가 이곳에 왔다. 우리의 부족한 지식을 꽉 채워줄 박물관이 이 도시의 심장부에 마련되어 있다. 따보르에 왔으면 반드시 따보르 종교개혁 박물관 투어를 해야 한다. 입장료도 저렴하다. 겉모습은 초라하지만, 정말 잘 만들어진 박물관이다. 몰랐던 것을 짧은 시간에 참 많이 깨닫게 된다. 속된 말로, ‘박’이 터진다. 박물관은 주로 전쟁에 관련된 자료와 죽음의 공포를 담은 영상물, 그리고 최고의 전쟁영웅 쥐시카 장군에 대한 기록들 위주로 잘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입구에 들어서면, 상징적인 커다란 나무 통과 그림 한 점이 보인다. 당시 사람들은 이 도시로 이주하면 자신들의 전 재산을 여기 통에 쏟아부었다고 한다. 그러면 시민들은 그것을 모두가 공평하게 나누어, 평등한 삶을 시작했다. 매우 급진적이다. 사실 그들의 이런 행동은 후스가 가르치려 했던 본질과는 크게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사유재산을 모아서 공유하는 모습은 초대교회 교인들이 잠시 그랬던 것인 바, 모든 시대 모든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행할 원칙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어쩌면 홀몸으로 온 유럽과 대항해야 했던 따보르인들은 신앙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진해서 한마음의 공동체가 되었던 것이 아닐까. 극도의 탄압을 겪는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는 종말의 때가 임박했다고 생각하기에 종종 이런 선택을 한다.
이렇게 극단적인 공동체를 형성하는 분파들은 보통 그들을 이끄는 리더가 신비주의자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 보니 내실이 약하고, 시간이 지나서 자멸하거나 외부의 파상 공격에 쉽게 무너지곤 한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따보르는 달랐다. 쥐시카 장군은 흡사 임진왜란의 이순신처럼 단 한 번도 황제군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았다. 엄청난 무공을 보여 준 백전백승의 쥐시카 장군은, 전장이 아니라 집에서 죽었다고 한다.
물론, 전쟁은 결국 황제군의 승리로 끝난다. 물량의 차이를 버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따보르의 저항은 이후로도 계속된다. 30년 전쟁 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으면서 체코는 철저히 로마 가톨릭화됐는데, 그 와중에도 따보르의 저항정신은 계속해서 항쟁의 역사를 써왔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 따보르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체코인’이 아닌 ‘따보르인’이라 부를 만큼 그들의 역사에 자부심이 넘친다.
박물관에 들어가면 먼저 따보르의 역사를 설명해주는 짧은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체코어로 이야기하고 영어로 자막이 나온다. 이어서 박물관 관람을 시작하면 여러분의 입에서 감탄이 절로 나올 것이다. 박물관이라는 공간은 어떤 콘텐츠를 얼마나 유효하게 전달하느냐가 핵심인데, 이곳 따보르 박물관은 필자가 경험한 유럽의 역사박물관 중에서도 탁월했다. 스토리텔링, 레이아웃, 컬러, 조명, 시청각 효과 등 모든 면에서 수준급이다.
쥐시카를 따르던 따보르인들은 훈련받은 전문 군인들이 아니라 그저 농사꾼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농기구를 개조해서 무기를 만들어 싸웠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백전백승을 거두었을까. 당시 전쟁은 단조로운 전법만 사용했다고 한다. 군대들을 모집하고 대열을 갖춘 후 일제히 돌격하여 성을 함락하면 끝이었다. 하지만 쥐시카는 황제군으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지극히 현실적인 전술과 전략을 구사했다. 땅속에 설치한 방어무기들은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높은 기마병의 말에게 피해를 입혔다. 또한 많은 수의 병사들이 몰려와서 백병전을 펼치면 위협적이다. 쥐시카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농산물을 나르던 손수레를 전차로 개조했다. 여러 대의 손수레를 일렬로 배치해서 마치 ‘이동식 성벽’처럼 활용했다. 그 뒤에 숨어 있다가 달려드는 적군을 해치웠다.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도 적에게는 큰 피해를 안겨 주었다. 그리고 좁은 지형을 이용해서 게릴라 전술을 펼치고 심리전을 구사했다. 이렇게 다양한 방책으로 황제군을 당황시키고 패배감을 안겨주는 동시에, 포로들을 학살하지 않고 정중하게 대해주었다. 이 같은 모습은 황제군으로서도 경외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황제군의 사기를 저하시켰던 것이다.
박물관 관람을 마치면 끝이 아니다. 이제부터는 공사현장에서 쓰는 ‘안전모’를 쓰고, 좁은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가게 된다. 지하실에 일종의 ‘카타콤’이 있다고 한다. 어떤 곳일까? 고립된 따보르가 전쟁을 치르면서 살아남기 위해 고안한 것이다. 그들은 지하 암반을 긁어내서 공간을 만들고 노약자를 보호했다. 일종의 지하 대피시설이다. 동굴처럼 뚫린 지하 시설은 꽤 넓어서, 이 도시의 여러 건물들을 지하 통로로 연결하고 있다. 직접 내려가 보니, 높이는 낮지만 사람이 지나다니기에 충분한 크기의 통로가 개미굴처럼 이리저리 꼬불꼬불 이어지고 있었다.
그 안에는 동물농장에서 산후조리원까지... 제법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웬만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어서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 곡괭이 같은 도구로 이 동굴을 파고 손수레로 파낸 돌을 옮기는 그림에서, 카타콤을 건설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을지 짐작이 간다.
지하 동굴을 한참 걸으면 출구가 보인다. 지상으로 올라와보면 깜짝 놀랄 것이다. 박물관 입구가 저 멀리 광장 건너편에 보일 것이다. 이렇게 멀리까지 지하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관광객에게 공개된 코스 외에도 수없이 많은 통로가 이 산 아래에 건설되어 있다 하니, 따보르 사람들의 저항 의지가 얼마나 강렬했는지 알만하다.
우리는 후스에 대해서는 들어봤지만 그 가르침을 따라 초기 종교개혁의 분위기를 형성했던 따보르에 대해서는 너무도 몰랐다. 만약 그 시절에 인쇄술이 더 발전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흘렀을까. 후스의 가르침이 조금 더 일찍 퍼졌더라면 루터의 개혁이 몇 십 년 더 당겨졌지 않았을까... 지하 동굴과 적막한 골목길을 걸으며 생각에 잠겨보자.
따보르는 하루의 절반 정도면 충분히 볼 수 있다. 프라하로 돌아와서 나머지 여정을 마치고, 다음 도시로 떠나보자.
드디어, 루터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황희상 (“특강 종교개혁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