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죽음의 문턱

황령산산지기 2019. 7. 20. 12:37

황학 임문석

    

*죽음의 문턱* 황학/임문석

 

무의식 속에서 샛노란 옥수수 분말이 수북이 깔린 드넓은 공간을
홀로 굴렁쇠를 굴리며 마구 달리고 또 달리고 있었다
샛노란 분말이 발목까지 빠지게 쌓였는데 눈처럼 굴렁쇠에 자꾸 달라붙어
눈사람처럼 부풀더니 전면이 보이지 않게 가리면서
코와 입에선 삶은 곤 달걀노른자를 먹고 트림을 할 때 나오는 노랗게 썩은 그런 냄새가 났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땅속으로 꺼지는 회색 모래 늪으로 변해 몸이 자꾸 미끄러져 빨려 들어간다
트림할 때의 노란 냄새가 가마솥에다 끓이는 진흙의 회색 냄새인 퀴퀴한 냄새로 변했다.
그러다 가슴이 철렁하게 어둡고 두려운 블랙홀의 소용돌이 속으로 몸이 빨려 들어가버린다
한참 만에 그 소용돌이에서 몸부림을 치다 어떻게 블랙홀을 빠지는가 싶었더니
또다시 노란색과 회색의 변화가 반복하며 블랙홀을 드나드는 그런 과정이
수십 차례 연이어 되풀이되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느닷없이 눈에는 백열등을 켠 듯이 훤하게 밝아져 왔었고
그리고 귀에는 엄마의 반갑고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 아가, 깼니, 아가, 이렇게 오래도록 깨어나지 않으면 배고프지 않으냐!
빨리 일어나 밥 먹으련, 아가 밥 줄까?"라고 내 몸을 흔들며 말씀하신다
그 말씀이 귀에 들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무어든 먹어 보려 했으나
머리는 어지럽고 입맛은 써서 도저히 아무것도 목구멍에 넘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밖으로 뛰쳐나와 시원한 바람을 흠뻑 들이마셨다.
무언가로 답답하던 가슴이 확 트인 것 같아 얼마나 상쾌하던지 살 것만 같았었다.

 
그 훗날 어머니는 내게 그때의 일을 자세히 들려주셨다.
한여름에 자리에 누운 채로 미동도 않고 열이 얼마나 많았던지 혹시라도 죽을까 봐 걱정하면서
(갱그랍)이란 빨간 알약을 가루 내어 숟가락에 개어서 먹였단다
그리고 열심히 마음속으로나마 신령님께 빌고 있을 수밖에 없었단다
바로 얼마 전, 세 살배기 여동생을 그런 식으로 잃어버린 아픔이 있는데다
더구나 육이오전쟁이 막 끝나 내 나이 겨우 다섯 살 적이라서
우리나라엔 병원이나 약방이 거의 없는 때인데다
그곳은 시골구석이고 한약방도 없는데, 어린아이가 열병에 걸려 의식이 없는지라
언젠가 미군에게 얻어 두었던 그 빨간 알약(갱그랍)이 생각나 그거라도
억지로 먹여놓고 지켜볼 수밖에 별다른 방도가 없었단다
그렇게 꼬박 이틀 동안을 의식이 없이 누워있는 아이를 그저 지켜보고 계셨단다.

 
아마도 그동안 나는 열병으로 삶과 죽음의 길을 드나들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녀석이 갑자기 이틀 만에 깨어나자마자 언제 앓았었느냐는 듯 떨쳐 나더니
염려하신 어머니의 만류도 뿌리치고 밖으로 뛰어나가 놀았었단다
샛노란 마당에서 굴렁쇠 굴리면서 역겹던 노란 냄새도 참아 내고
꺼져가는 회색 모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림도 어찌어찌 이겨 내고
온몸이 빨려들던 가슴 철렁한 암흑의 블랙홀도 잘 빠져나온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죽음의 문턱이었다곤 그땐 꿈에도 생각 못했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것이 저승의 문턱이었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지금의 난 이미 육십갑자 한평생을 건강히 살고도
또 두 평생의 길을 가고 있지만, 그때만큼 그런 경험의 기억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때 꿈처럼 앓았던 기억인데, 아직도 생생하게 지워지지 않는다.

 
*유명한 화가 고흐의 작품을 보면서 유난히 노란색과 회오리 같은 표현을 보며
어쩜 작가도 나처럼 죽음의 문턱을 경험하였거나
죽음을 상상하여 그린 그림 같이 느껴져 함께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