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空)으로 세상바라보기
부처님이 중도를 설한 이유는
이 세상을 공으로 본다면 모든 것이 공한 것입니다. 공 그자체도 공하여 온통 공뿐입니다. 허무공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있습니다. 그런데 공의 입장에서 본다면 현실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이에 양변을 떠난 것으로 중도론이 나옵니다. 이른바 공, 가, 중 삼제설입니다.
성철스님의 중도론이 있습니다. 백일법문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양극단 또는 양변을 떠난 중도의 가르침을 설했는데 초기경전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상윳따니까야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을 근거로 들고 있습니다.
초전법륜경이 고락중도인 것에 반하여 깟짜야나곳따의 경은 유무중도에 대한 것입니다. 이밖에도 초기경전에서는 단상중도, 불이중도 등 많은 중도가 있습니다. 초기불교에서 중도는 용수의 중론에 나오는 팔불중도와는 다른 것입니다.
부처님은 철저하게 연기법으로 중도를 설명했습니다. 고락중도의 경우 팔정도와 사성제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사성제에서 도성제가 팔정도이고, 팔정도에서 정견이 사성제를 아는 것이므로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그런데 사성제는 조건발생, 조건소멸이라는 생멸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고락중도는 연기법적으로 설명됩니다.
성철스님이 중도를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참고 했다는 깟짜야나곳따의 경(가전연경)은 유무중도에 대한 것입니다. 역시 연기법적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십이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이 등장합니다. 부처님이 유무중도를 설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부처님 당시 외도사상을 논파하기 위함입니다.
“모든 것이 공한 것이여!”
부처님은 조건소멸하는 것을 보고서 영원주의(常見)를 논파 했고, 조건발생하는 것을 보고서 허무주의(斷見)를 논파했습니다. 그런데 성철스님의 공사상에 따른 중도론 말하는 이는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연기 무아를 깨치고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자유로워지신 붓다의 가르침을
깊이 생각해 보신다면
업과 업보가 있다고 보는 것은 상견이지요!!
없다고 보는 것은 단견이고요!!
나와 나의 것이라 할게 없는데 어찌 업인들.”(P법우님)
공의 입장에서 본다면 모든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무(無)자로 시작되는 부정의 행렬일 것입니다. 연기하기 때문에 공이고, 무아이기 때문에 공이라 합니다. 연기와 무아를 한마디로 공이라 합니다. 물론 공은 공, 가, 중 삼제에 따른 것입니다.
“모든 것이 공한 것이여!” 이 한마디면 만사형통, 만사 오케이(OK)입니다. 더 이상 따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공하기 때문에 연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아이고, 무아이기 때문에 나도 공하고 너도 공하고 모두가 공했을 때 업도 업고 업의 과보도 없게 됩니다. 부처님의 업의 가르침이 부정되는 순간입니다.
왜 삼귀의하는가?
깨달은 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떤 행위를 해도 과보를 내지 않습니다. 내생도 없기 때문에 당연히 윤회도 없습니다. 그래서일까 자칭 타칭 깨달았다고 하는 자들은 막행막식하는가 봅니다. 행위에 대한 과보가 없다고 하니 어떤 행위이든지 걸림이 없는 것입니다.
불자들은 삼보에 귀의함로써 비로서 불교인이 됩니다. 오계를 준수해서 불교인이라기 보다 삼보에 의지함으로 인하여 불교인이 됩니다. 당연히 역사적으로 실존하였던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그리고 가르침을 실천하는 공동체에 귀의하고, 의지하고, 피난처로 삼습니다. 그럼에도 깨달았다고 하여 업과 업보를 부정하고, 내생과 윤회를 부정한다면 이는 삼보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불교인이라 볼 수 없습니다.
깨달았건 깨닫지 않았건 불교인이라면 가르침에 의지합니다. 삼귀의 할 때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라고 법회할 때 마다 독송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공사상에 입각하여 중도론을 말하는 자들은 부처님 가르침을 부정합니다. 가르침을 폄하하고 부처님을 능멸하는 훼불행위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도 공(空)을 설했다
부처님도 공을 설했습니다. 그러나 대승에서 말하는 공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마하야나에서는 공사상으로 전혀 다른 종교를 만들어 버렸지만, 부처님이 말씀 하신 공은 모든 것을 부정하는 공이 아닙니다.
파아옥 사야도 법문집 ‘업과 윤회의 법칙’이 있습니다. 공에 대하여 “다섯 무더기들을 실재에 따라 공(suñña)으로 본다. 붓다께서는 공이란 다섯 무더기 등이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모든 것이 환영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622쪽)라 했습니다.
이것으로 분명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공은 오로지 오온만을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삼라만상으로 확대된다면 범위를 넘어선 것이기 때문에 ‘희론’이 됩니다. 또 한가지는 공이라 하여 나와 이 세상이 환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의 눈으로 본 이 세상은 인식된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허깨비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오온에 영원함이 없고, 행복이 아니고, 자아가 없고, 아름다움이 없는 것으로 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공의 가르침입니다.
초기경전 도처에 공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맛지마니까야 ‘공에 대한 작은 경(M121)’을 보면 대승에서 말하는 공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부처님은 공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공하지 않은 것이 있다. 즉 생명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을 지닌 몸 그 자체를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라고 분명히 안다. 그는 거기에 없는 것을 공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이 있으므로 ‘이것은 있다.’라고 분명히 안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그에게 진실하고, 전되되지 않은, 청정한 공이 현현한 것이다.”(M121)
부처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 실재함을 말씀 했습니다. 오온이 조건생하고 조건멸하여 무아이지만 상속으로 인하여 여섯 가지 감각능력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금강경에서 말하는 ‘일체유위법여몽환포영’으로 설명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버려야 할 것은 가르침에 대한 집착
부처님의 가르침은 아라한이 되었더라도 버려서는 안됩니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뱀에 대한 비유의 경에서 뗏목의 비유로도 설명됩니다. 대승 금강경에서는 뗏목은 버려야 하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초기경전에 따르면 저 언덕에 도달 했을 때 “이제 나는 이 뗏목을 육지로 예인해 놓거나, 물속에 침수시키고 갈 곳으로 가면 어떨까?”(M22)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버려야 할 것은 가르침에 대한 집착이지 가르침마저 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대승에서는 아공법공이라 하여 저언덕에 건넜다면 가르침 마저 놓아 버려라 또는 버려라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계는 평생지켜야 할 학습계율입니다. 설령 번뇌 다한 아라한이러라도 오계는 지켜야 합니다. 당연히 구족계도 지켜야 합니다. 물론 아라한에게는 자동적으로 지켜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더 이상 지킬 것이 없다고 버려야 한다면 부처님 제자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언덕으로 건너 간 자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가르침마저 버리거나 놓아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율장의 학습계율 처럼 평생 의지하고 귀의하고 피난처로 삼아야 하는 가르침입니다. 불자라면 누구나 예외없이 삼보에 귀의하고, 법회 할 때마다 삼귀의를 낭송하는 이유입니다. 그것도 한번으로 그치지 않고 삼세번 합니다. 아라한도 예외가 아닙니다.
자아와 자아에 속한 것을 모두 공으로 보기
불자들은 공으로도 살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대승에서 말하는 “모든 것이 공한 것이여!”라며 모든 것을 부정하며, 본래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오온을 공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오온 이상으로 확장되면 대승에서 말하는 공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디까지나 오온을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공으로 보기 첫 번째는 ‘자아와 자아에 속한 것을 모두 공으로 보기’에 대한 것입니다. . 맛지마니까야 ‘동요의 여읨을 향한 길의 경(M106)’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또한 고귀한 제자는 숲속으로 가서 나무 밑이나 빈 집에 앉아서 이와 같이 ‘나는 어디에도 없고, 누구에게 속한 것도 아니고 어떠한 것에도 없다. 나의 것은 어디에도 없고 어떠한 것에도 속한 것이 아니고 어떠한 것에도 없다.’라고 생각한다.”(M106)
나와 나의 것에 대하여 공한 것으로 보기입니다. 파아옥 사야도의 법문집 ‘업과 윤회’를 보면 매우 알기 쉽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수행자가 오온을 공한 것으로 보면, 수행자는 자아, 이를테면 ‘이것은 나의 자아다’는 공하다고 이해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아에 속한 어떤 것, 이를테면 ‘이것은 나의 것’도 공하다고 이해합니다.
좀더 쉽게 설명하면, 수행자는 자아를 자신이 소유한 것(나 자신)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것이 내가 공한 것입니다. 또한 수행자는 자아를 다른 것에 속한 어떤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예를 든다면, 자신의 어머니에 대하여 ‘나는 나의 어머니의 자식이다.’라고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는 형제, 친구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디에도 없고, 누구에게 속한 것도 아니고 어떠한 것에도 없다.”(M106)라는 공의 가르침이 성립합니다.
수행자는 다른 사람을 자신 속의 자아를 가진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자기의 어머니에 대하여 ‘이분이 나의 어머니이다’라고 보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자식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 아이가 나의 자식이다’라고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재산도 ‘이 재산은 나의 것이다’라고 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나의 것은 어디에도 없고 어떠한 것에도 속한 것이 아니고 어떠한 것에도 없다.”(M106)라는 공의 가르침에 따른 것입니다.
공으로 세상바라보기
부처님의 공의 가르침은 매우 이해하기 쉽습니다. 대승에서와 같이 모든 것은 공하다고 하여 아도 공하고 법도 공하기 때문에 업도 없고, 업의 과보도 없고, 내생도 없고, 윤회도 없다는 무책임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로 쉽게 설명합니다. 공으로 보기 두 번째는 ‘공으로 세상바라보기’입니다. 오온에서 바라 본 세상도 공한 것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모가라자여, 항상 새김을 확립하고 실체를 고집하는 편견을 버리고, 세상을 공(空)으로 관찰하십시오. 그러면 죽음을 넘어설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을 관찰하는 님을 죽음의 왕도 보지 못합니다.”(Stn.1119)
숫따니빠따 ‘학인 모가라자의 질문에 대한 경(Sn.5.16)’에 실려 있는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은 학인 모가라자에게 세상을 공으로 관찰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삼라만상 산천초목의 기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과 귀 등 여섯 가지 감각영역에서 만들어진 세상을 말합니다. 그런 세상을 공한 것으로 보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늘 깨어 있는 마음으로 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세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대승의 공사상과 같이 모든 것은 본래 없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까?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은 무상, 고, 무아에 바탕을 둡니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하는 연기법칙에 따릅니다. 생과 멸을 거듭하며 상속해 가는 것이 오온입니다. 그리고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오온에 대하여 영원함이 없는 것으로, 행복함이 없는 것으로, 자아가 없는 것으로,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보아야함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공으로 세상보기 가르침입니다.
공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자아에 대한 견해를 포기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유신견을 내려 놓는 것을 말합니다.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내려 놓았을 때 무아가 되어 죽음을 초월하게 됩니다. 오온의 죽음에 이르렀을 때 죽음의 왕이 아무리 자아를 찾으려 해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왕도 보지 못합니다.”라 말씀 하신 것입니다.
이혼한 전부인을 보는 것처럼
자아를 공한 것으로 보고, 자아에 속한 것도 공한 것으로 보고, 세상도 공한 것으로 보라고 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유신견으로 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자아가 있다는 견해가 사라졌을 때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것에도 휘둘리지 않기 때문에 평온을 유지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파아옥 사야도는 매우 재미있는 비유를 들었습니다. 청정도론에도 언급되어 있는 이혼한 부인의 비유입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 남자가 사랑스럽고, 마음으로 원하는 매력적인 아내와 결혼하였다고 하자. 그리고 그는 그녀 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을 만큼 그녀를 사랑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때 만약 그녀가 다른 남자와 이야기하고, 농담하고, 웃는 것을 보면 불안해지고, 불쾌해지며 편안하지가 않다. 왜? 왜냐하면 그는 ‘그녀는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그의 행복은 오로지 그녀에 의존해 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그녀가 많은 실수를 하자 그는 그녀와 이혼을 하였다. 이혼을 하게 되자 그는 더 이상 그녀를 ‘나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그녀가 다른 남자와 이야기를 하고, 농담을 하고, 웃어도 불안한 마음이 없고, 불쾌해 하지 않으며 오히려 무덤덤해지고 관심이 없어진다. 왜? 왜냐하면 그녀는 더 이상 ‘그녀는 나의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행복이 그녀로부터 독립되었다.”(628쪽)
이 에피소드의 제목은 ‘오온으로 벗어나기’입니다. 나의 오온 뿐만 아니라 그녀의 오온으로부터 벗어난 것에 대하여 이혼한 아내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 것입니다. 이 에피소드는 맛지마니까야 ‘데바다하의 경(M101)’에서 간략하게 소개 되어 있습니다.
여기 애인이 떠난 남자가 있습니다. 한편으로 아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시원하기도 합니다. 때로 모든 것을 포기 했을 때 평온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앞에 둔 자가 태연한 것도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내려 놓았을 때,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평온해 할 수 있음을 이혼한 아내 비유로 알 수 있습니다.
포기 했을 때 평온이
모든 것을 공한 것으로 보면 공병에 걸립니다. 용수의 중론은 테크닉에 불과한 것입니다. 테크닉에 불과한 것을 사상체계로 삼는다면 모든 것이 공한 것으로 보여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핵심가르침인 업과 업의 과보, 내생과 윤회마저 부정하여 삼보를 부정하게 됩니다.
오온에 대하여 무상, 고, 무아로 본다면 더 이상 ‘나’ 혹은 ‘나의 것’ ‘자아’라고 여길만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공의 가르침입니다.
모든 것을 내려 놓았을 때 모든 것을 포기 했을 때 평온이 찾아 올 수 있습니다. 오온에 대하여 더 이상 두려운 것이나 즐거운 것으로 볼 일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하여 상속하는 연기적 존재, 즉 무아로 자아와 이 세상을 본다면 그는 모든 것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되고 그런 것들을 평온하게 지켜 볼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설한 공의 가르침입니다.
2018-04-0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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