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이 삶을 좌절 시킬 때, 방해업에 대하여
청정도론 노트를 만들고
청정도론을 보고 있습니다. 주옥 같은 가르침입니다. 그냥 흘려 보내기 아쉬워서 노트하고 있습니다. 컴퓨터 노트입니다. 엠에스워드(MS Word)에 ‘청정도론노트’라 하여 계속 요점을 써 나가는 식입니다. 현재 20장을 읽고 있는 중인데 노트하다 보니 79페이지에 달합니다. 총 23장으로 되어 있는 청정도론을 다 읽으면 100페이지에 달할지 모릅니다.
청정도론은 이전에도 읽어 보았습니다.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서입니다. 이번에 전재성박사의 번역을 읽고 있습니다. 오자나 탈자 등을 보고 있습니다. 표현이 어색한 부분도 빨간 펜으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거의 오분의 사 정도 읽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 일주일 이내에 다 읽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해하며 읽고 있습니다.
청정도론을 읽다 보면 새겨 놓고 싶은 구절이 많습니다. 그래서 노트를 합니다. 그런데 노트한 것을 글로 만들어 놓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업의 가르침입니다. 청정도론 제19장 ‘의혹에 극복에 의한 청정 (kaṅkhāvitaraṇa visuddhi)’ 에서 ‘업의 윤전’에 대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삼세의 의혹에서 벗어나려면
누구나‘나는 누구일까?’라며 의문해 봅니다. 그런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한 사춘기에 나에 대하여 의문해 보지만 뚜렷한 답을 얻지 못합니다. 그런데 의문의 중심에는 항상 ‘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나(我)는 없습니다. 있다면 명색(名色)이 있습니다.
여기 뭇삶(중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뭇삶은 명칭에 불과합니다. 이는 “마치 모든 부속이 모여서 수레라는 명칭이 있듯이, 이와 같이 존재의 다발에 의해 뭇삶이란 통칭이 있을 뿐이다.” (S5.10)라는 가르침에서 확인 됩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오온의 결합체일 뿐입니다. 그런 오온을 줄이면 명색, 즉 정신과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가 됩니다.
나라는 존재를 해체해서 보면 남는 것은 오온의 덩어리일 뿐입니다. 그 어디에도 ‘나’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있을 때에 뭇삶이나 개인이라는 명칭만이 있고, 하나하나의 사실로 관찰될 때에는 궁극적 의미로는 ‘내가 있다.’라든가 ‘나이다.’라는 집착의 토대가 되는 뭇삶은 존재하지 않는다.”(Vism.18.28)라고 단언 합니다. 궁극적으로 명색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알고 보는 것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의 봄(yathābhūtadassana, 如實見)’이라 합니다.
있는 그대로 보면 ‘나는 과거에 무엇일까?’등 과거, 미래, 현재 15가지 의혹, 즉 삼세의 의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 나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있다면 명색이 있습니다.
지지적 업과 방해적 업에서 막혔는데
청정도론은 매우 방대합니다.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유산이자 제자들의 유산이고 전세계의 위대한 인류문화유산입니다. 그러나 매우 심오하여 사유하여 읽어 나가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업의 윤전’에 대한 것을 읽다가 막혔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그것은 ‘지지적 업’과 ‘방해적 업’입니다. 두 업은 ‘업의 윤전4(Vism19.16)’에 해당되는 것으로 생산적 업, 지지적 업, 방해적 업, 파손적 업 이렇게 네 가지로 분류됩니다.
‘지지적 업(upatthambhaka)’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초불연(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돕는 업’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청정도론에서는 “이숙을 생겨나게 할 수 없고, 다른 업에 의해서 결생이 주어지고, 이숙이 생겨날 때에 생겨나는 즐거움을 지지하고 지속시킨다.”(Vism.19.16)라고만 설명되어 있습니다.
‘방해적 업(upapīḷaka)’이 있습니다. 청정도론에서는 “다른 업에 의해서 결생이 주어지고, 이숙이 생겨날 때에 생겨나는 즐거움을 방해하고 저해하고 지속시키지 않는다.” (Vism.19.16)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 설명만으로는 두 가지 업이 무엇을 말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파아옥 사야도의 법문집 ‘업과 윤회의 법칙’
아비담마를 열어 보았습니다. 아비담마 역시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어서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때 생각난 것이 ‘업과 윤회의 법칙’입니다. 파아옥 사야도가 지은 것으로 업과 윤회에 대하여 가장 잘 정리된 책입니다.
책은 선물 받은 것입니다. 기록해 놓은 것을 보니 2015년의 일입니다. 어느 비구니 스님이 비밀 댓글을 보내 와서 답장을 했는데 그런 인연으로 음악씨디를 보내 드렸습니다. 그것에 대한 답례로 보내 준 것이 파아옥 사야도의 법문집 ‘업과 윤회의 법칙’입니다.
업과 윤회의 법칙을 열어 보았습니다. 궁금한 지지적 업과 방해 업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경전적 근거를 들고 있고, 더구나 인연담까지 실려 있어서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업이숙(業異熟: kammavipaka)과 미투운동
삶은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어떤 날은 꽉 막혔던 것들이 술술 잘 풀리는 날이 있습니다. 반면에 잘 나가다 마치 누가 방해하고 훼방 놓는 것처럼 일이 꽉 막힐 때가 있습니다. 여기에 특별한 원인이나 이유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럴 때 생각 나는 것이 ‘모든 것이 업 때문이다.’라 입니다.
모든 것을 전생 탓으로 돌리면 숙명론이 됩니다. 그렇다고 전생 탓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부처님의 업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전에 지은 행위는 반드시 과보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단지 시간이 걸립니다. 어떤 것은 행위를 하는 즉시 나타나기도 하지만 어떤 것은 한참후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요즘 미투운동을 보면 이런 현상을 실감합니다.
불교인들은 부처님 가르침을 믿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업과 윤회의 가르침입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과보는 반드시 그 즉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조건이 무르익어야 결과로서 나타납니다. 이렇게 시간 차이를 두고 조건에 따라 시간에 따라 달리 익는다고 하여 업이숙(業異熟: kammavipaka)이라 합니다.
하는 일 마다 꼬이는 사람
여기 로또에 당첨된 자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행운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업이숙의 관점에서 본다면 시기가 무르익은 것으로 봅니다. 이전 생에 못 찾은 것을 이번 생에서 찾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말에 반론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는 일 마다 꼬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쳇말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하는 일 마다 실패를 맛 보는데 마치 누군가 보이지 않은 힘에 의해서 방해 받는 듯한 느낌일 것입니다.
로또에 당첨되고 하는 일마다 꼬이는 것이 우연이라 볼 수 있을까? 그러나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고 이유가 있습니다. 설령 지금 여기에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유를 발견할 수 없을 지라도 이전 생, 아니 이전의 이전 생에까지 범위를 확장해 가다 보면 원인과 이유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숙명통과 천안통이 열려 있는 부처님의 경지나 제자의 경지이어야 가능할 것입니다.
청정도론과 아비담마에 따르면 지지적 업과 방해하는 업이 있습니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누군가 나타나 도와 주었을 때 지지적 업이 작용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누군가 훼방 놓았을 때 방해 업이 작용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모두 이전에 지은 행위의 결과가 익어 나타난 과보라 볼 수 있습니다.
지지적 업(upatthambhaka)에 대하여
파아옥 사야도의 ‘업과 윤회의 법칙’에 따르면 지지적 업(돕는 업)에 대하여 “자기 스스로 결과를 만들어내지 않지만 생산업의 결과를 돕는 기능을 한다.”(377쪽)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과보를 받는 기간을 강화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해로운 업은 해로운 업을 강화하고 유익한 업은 유익한 업을 강화한다.”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지지업에 대하여 파옥 사야도는 이렇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예를 들면 보시, 지계 그리고 명상과 같은 유익한 업을 지으면, 건강하고 힘이 있고 오래 살게 된다. 한편 살아가면서 해로운 업이 생산업으로 작용하면 고통스러운 우환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한편 돕는 업은 우환을 치료하는 약의 효능을 저하시키고, 그것 때문에 우환이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파아옥 사야도, 업과 윤회의 법칙 377-378쪽)
오계를 준수하고 베풀고 살며 더구나 명상까지 하면 건강하게 오래 산다고 합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입니다. 착하고 건전하게 사는 것은 선업을 짓는 것인데 여기에 부수적으로 건강까지 따라 오게 됩니다. 건강하게 되는 것이 바로 ‘지지적 업’ 또는 ‘돕는 업’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악하고 불건전하게 사는 자라면 각종 질병에 시달릴 것입니다.
여기 오계를 지키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그는 살생, 도둑질, 잘못된 성행위, 거짓말, 아첨, 음주 등과 같은 불선업을 짓습니다. 그런데 업과 윤회의 법칙에 따르면 “해로운 업을 지으면 신체의 기관이 약해지게 되고 건강은 악화 되고 수명은 짧아진다.”(378쪽)라고 했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잘못된 성행위로 병이 걸렸을 때 건강이 나빠지고 수명이 짧아질지 모릅니다. 이처럼 불선업으로 인하여 건강이 나빠졌을 때 ‘지지적 업’에 따른 것이라 합니다.
방해적 업(upapīḷaka)에 대하여
지지적 업과 함께 ‘방해적 업’이 있습니다. 이 업은 지지적 업과 차이가 있습니다. 업과 윤회의 법칙에 따르면 “좌절하고 방해하는 기능을 한다. 이것은 다른 업의 과보를 좌절시킨다. 자기스스로의 과보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해로운 업은 유익한 업을 방해하고 유익한 업은 해로운 업을 방해한다.”(382쪽)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결과를 내는 생산업에 영향을 주어서 정 반대의 결과를 초래하게 하는 업이 ‘방해적 업’입니다.
파옥 사야도의 ‘업과 윤회의 법칙’책에 따르면 방해적 업에 대하여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소개 되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예나 비유를 들어 설명하면 이해가 쉽듯이 책에서는 빔비사라왕, 천상의 음악가로 다시 태어난 비구들, 아자타삿뚜왕,쿠주따라 여자노예 이야기가 인연담식으로 소개 되어 있습니다.
방해업과 관련된 네 가지 인연담에서 쿠주따라 여자노예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연담을 보면 인과의 법칙이 얼마나 엄정하게 작용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을 좌절시킨 나쁜 업의 예는 여자 노예인 쿠주따라의 경우가 있다. 그녀는 사마와띠 여왕의 노예였다.
그녀는 과거의 생에서 곱사였던 벽지불의 흉내를 낸 적이 있었다. 그 해로운 업이 그녀를 정상적인 인간으로 태어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곱사로 태어나게 만들었다.
가섭부처님 시대에 그녀는 재정관의 딸이었는데 아라한인 비구가 친구였다. 어느 날 쿠주따라가 화장을 하고 있는데 그 비구가 찾아왔다. 마침 그녀의 몸종이 어디가고 없었기에 쿠주따라는 비구인 아라한에게 화장품을 집어 달라고 하였다.
아라한인 비구는 만약 이것을 거절하면 그녀가 악의를 품어 지옥에 태어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어주면 쿠주따라는 하녀로 태어나게 된다.
아라한은 지옥보다는 이것이 낫겠다는 생각으로 화장품 바구니를 그녀에게 건네 주었다. 아라한에게 시중을 들어달라는 쿠주타라의 해로운 업은 그녀가 높은 신분의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을 방해해서 그녀를 하녀로 태어나게 만들었다.”
(파아옥 사야도, 업과 윤회의 법칙 380-381쪽)
쿠주따라 이야기를 보면 방해적 업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선업을 지어서 높은 신분으로 태어날 수 있음에도 한순간의 불선업으로 낮은 지위의 하녀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는 방해적 업이 작용한 결과에 따른 것입니다.
업이 삶을 좌절 시킬 때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누구든지 좋든 싫든 이 세상을 세상사람들과 함께 살아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술술 잘 풀리는 가하면, 또 어떤 때는 누군가 훼방 놓는 것처럼 꽉 막힐 때가 있습니다. 살아 가면서 업이 삶을 좌절 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 가면서 이런 경우는 무수히 많다는 사실입니다. 맛지마니까야 ‘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M135)’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바라문 청년이여, 이와 같이 목숨이 짧도록 만드는 행위는 목숨이 짧은 운명으로 이끌고, 목숨이 길도록 만드는 행위는 목숨이 긴 운명으로 이끌고, 질병이 많도록 만드는 행위는 질병이 많은 운명으로 이끌고, 질병이 없도록 만드는 행위는 질병이 없는 운명으로 이끌고, 용모가 추하도록 만드는 행위는 용모가 추한 운명으로 이끌고, 용모가 아름답도록 만드는 행위는 용모가 아름다운 운명으로 이끌고, 권세가 없게 만드는 행위는 권세가 없는 운명으로 이끌고, 권세가 있게 만드는 행위는 권세가 있는 운명으로 이끌고, 빈궁하게 만드는 행위는 빈궁한 운명으로 이끌고, 부유하게 만드는 행위는 부유한 운명으로 이끌고, 비천한 가문에 태어나게 만드는 행위는 비천한 가문에 태어나는 운명으로 이끌고, 고귀한 가문에 태어나게 만드는 행위는 고귀한 가문에 태어나는 운명으로 이끌고, 우둔하게 만드는 행위는 우둔한 가문에 태어나는 운명으로 이끌고, 현명하게 만드는 행위는 현명한 가문에 태어나는 운명으로 이끕니다.”(M135)
해로운 업을 지은 자는 반드시 과보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설령 그가 지금 유익한 업을 지어 이익과 명성을 누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전에 지은 해로운 업이 익었을 때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요즘 미투운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악한 행위를 한 자가 지금 이익과 명예와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악행의 과보가 익을 때 까지만 입니다. 이에 대하여 업과 윤회의 법칙에서는 방해업에 대하여 “어떤 식으로든지 건강, 재산, 부, 가족과 친구 등의 문제를 야기 시켜 고통을 받게 하거나 실패하게 만드는 해로운 업을 무르익게 한다.”(381쪽)라 했습니다.
논서를 읽으면서 가르침의 진수를
청정도론을 읽어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니까야처럼 술술 읽어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줄 한줄 의미를 음미해서 읽어야 합니다. 내용이 너무 심오해서 메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축약된 내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번에 지지적 업과 방해업이 바로 그런 케이스입니다. 그런데 미얀마의 사야도가 법문한 법문집에는 매우 상세하게 그것도 인연담과 곁들여 잘 설명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불교인으로서 알아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것은 니까야(經藏)와 아비담마(論藏), 위나야(律藏)로 잘 전승되어 왔습니다. 방대한 빠알리삼장을 다 읽으려면 평생가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런데 미얀마의 사야도들은 이를 잘 요약하고 정리하여 하나의 법문집으로 만들었습니다. 파아옥 사야도의 업과 윤회의 법칙이 대표적입니다.
공부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요즘은 훌륭한 가르침이 잘 번역되어 있어서 누구나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업과 윤회의 가르침은 가장 핵심입니다. 사람들이 공부를 하지 않기 때문에, 교리를 모르기 때문에 삿된 견해를 갖습니다. 논서를 읽으면서 가르침의 진수를 맛보고 있습니다.
2018-03-1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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