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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궁극의 진리에 대하여...

황령산산지기 2018. 3. 9. 07:09

궁극의 진리에 대하여 ... 

The Ultimate Truth.. 
 



 
                             레스트 레븐슨



..서문..





그것을 알게 됨으로써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궁극의 진리는 지금 진리이고 항상 진리였고 앞으로도
영원히 진리인 것입니다. 인간이 이 진리를 만들어 낼 수도 없고
이 진리를 바꿀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발견할 수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이것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기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죠.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넘어서는 지극한 행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한계가 떨어져 나가고 우리는 전지함과 전능함
그리고 기쁨만이 우리의 것이고 이것들이 우리의 자연스럽고 타고난 본성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진리의 독특한 특징은 우리 각자가 자신 스스로 이 진리를 자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책도 대신해 줄 수가 없습니다.
스승과 책들- 경전 - 은 오직 길을 가리킬 수만 있을 뿐이고 개개인은 자신이 그 길을
스스로 가야만 합니다. 
이 진리는 입증되어야만 하고 
우리 각자는 이 진리를..
스스로의 힘으로 증명해야만 합니다.

그저 남들에게 들은 것을 받아들이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을 듣고 그것을 숙고해보고 그리고는 스스로 입증해야 합니다.
진리를 대하는 최고의 태도는 그것을 믿지도 불신하지도 않고,
다만 그것을 확인해보기 위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리하면 - 오직 그리할 때만 우리가 진리를 스스로 입증한 후에
조금의 의심도 없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진리가 스스로를 입증함에 따라 우리는 더더욱 확신을 가지게 될 것이고
그리하면 진리의 증거가 더 쉽고 더 빨리 우리에게 올 것이고
마침내 우리는 절대의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무한의 존재이며 우리의 앎과 힘과 기쁨에는 한계가 없다는 진리 말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생각의 영역에서 생각하는 것부터 시작을 하는 것이죠.
그리고는 우리는 생각의 상태를 지나서 생각-느낌으로 나아가는데
여기는 생각과 생각에 대한 느낌이 있는 곳입니다.
이 과정은 오직 느낌만이 있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이 느낌의 상태가 우리의 행동의 기초가 될 때 우리는 직관적이면서도
세상과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마침내 오직 .존재.의 영역만이 있게 되는데..
이 상태에서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든 것인 .존재.로 보게 되고
타자他者라는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처음에 생각의 영역에서 시작할 때 우리는 마음의 방향을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슬픔과 불행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생각으로 향하게 합니다.
이것이 행복으로 이끌어 줄 것이고 이 행복은 .느낌.의 영역에 있는 것입니다.
이 행복의 느낌이 충분히 커지게 되면 오직 '존재'함만의 행복이 있게 되고
그리하고 나면 우리는 고양된 환희 고요함의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취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상당히 다양합니다.

우리가 이해를 성취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느냐 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하냐에 직접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모든 권위를 렛고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리에 대한 유일한 권위는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 자체에 있기 때문입니다.

권위주의가 있던 그 자리에 다음과 같은 격언을 넣어야 합니다.

“스스로 증명하세요.” 
오직 스스로 증명했을 때라야 우리는 그것을 가지게 되고
그것을 쓸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 알 수가 있습니다.

궁극의 진리는 일상의 것들과는 다를 수도 있습니다. 만약 무언가가 충격적이거나
공격적인 느낌을 주는게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이 확인해야할 것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고정된 개념을 재평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거죠.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들은 더욱 자유로워지게 될 것입니다.



.목표. The Goal.

우리의 목표는 한계 없는 행복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완전한 해방 자유입니다.
즉 한계 없는 무한함을 얻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완전한 자유와 행복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참자아를 깨닫는 것입니다.




.행복. Happiness.

행복은 우리들의 자연스러운 본래의 상태입니다.
행복에 대한 가장 뛰어난 정의는 평화로움 고요함입니다.
행복이란 고뇌 고통 두려움 질투 분노 그리고 증오가 없는 상태입니다.
행복은 사랑함입니다. Happiness loves.
행복은 자유함이며 한계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계에서 벗어날수록 더욱 자유로워지고 더 행복해집니다.
행복이란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들을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행이란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들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결과라기보다 원인이고 희생자라기보다 마스터가 되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하나임의 생각이고 불행은 분리의 생각입니다.
행복은 에고의 동기가 없이 자신을 생각하는 것이고
불행이란 에고의 동기로 자신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행복은 애씀 없는 고요함이고 불행에는 애씀과 노력의 에너지가 있습니다.

주려고 하는 태도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기쁨은 주고자 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사랑. Love.

사랑은 보답을 받으려는 생각 없이 주고자 하는 느낌입니다.
사랑은 조금의 집착도 없이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우리의 타고난 상태입니다. 
오직 사랑함을 통해서만 사랑이 우리에게 옵니다.
우리가 더욱 사랑할수록 사랑이 우리에게 더욱 다가옵니다.
사랑이란 아무런 행위가 없어도 충분한 태도이고 느낌입니다.
사랑은 다른 이를 자유롭게 합니다.
사랑은 다른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사랑은 다른 이를 그들이 그들 자신의 모습 그대로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신뢰합니다. 사랑은 평화로운 느낌입니다. 사랑은 하나됨입니다.
사랑은 다른 이와 하나됨으로써 다른 이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 모두가 모든 행위에서 찾고 있는 그것입니다.
사랑이야말로 모든 문제꺼리들의 해답입니다. 
문제꺼리가 있을 때 우리가 더욱 사랑하게 된다면 그것들은 사라져 버릴 겁니다.

사랑이 온전할 때 모든 문제꺼리들은 즉시 용해되어 버립니다. 
사랑과 이해는 같은 것입니다.
사랑은 함께함이니 사랑은 교류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를 지지해주고 그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다른 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은 그 사람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이에게 행복의 공식을 전해줄 수 있습니다.
사랑은 힘입니다. 사랑이야말로 이 우주의 응집력입니다.

사랑은 끌어당기고 통합하고 만들어 세우는 것이며
그것이 닿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의회가 세상을 바로 잡을 수는 없지만 사랑이 가득한 개개인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에고가 인정받는 것을 사랑으로 착각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만족함이 될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들은 계속해서 사랑을 필요로 하게 되고 요구하게 됩니다.
이것은 좌절만을 가져올 뿐입니다. 
사랑과 섹스는 별개의 것입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다고 하면서 이게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면 거기에는 집착도 가두어두는 울타리도 없습니다.
우리들이 하는 사랑이란 건 다른 이와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게 아니라
단지 자신만의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서일뿐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다른 이와 사랑을 함께 하고자 하는 것이고 더욱 많이 나눌수록 더욱 기뻐집니다.

사랑에는 갈구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갈구함이란 분리를 의미하기 때문이죠.

사랑은 하나됨이고 분리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결혼을 통해서 진정한 사람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결혼이 있기 전에 사랑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것이 이 사람에게는 되고 저 사람에게는 되지 않는 그런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다른 이를 미워하면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더욱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이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사랑일 뿐입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의 원수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직 사랑을 줌으로써 우리는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랑을 구하면 구할수록 더욱 사랑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사랑받으려 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받는 것이란 일시적으로 에고가 으쓱해하는 만족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사랑하게 되면 사랑받으려고 하는 생각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적까지도 사랑하는 것은 가장 높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적들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면 우리의 적들은 우리를 해칠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만약 그 적들이 계속해서 우리를 해치려 한다면 그는 결국 자신을 해치게 될 뿐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사랑을 키워가는 게 아니라 단지 우리의 증오를 없애가는 것일 뿐입니다.
높은 사랑의 경지에서는 우리를 해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우리는 다른 이들이 그들의 존재로 있을 수 있도록 허용해주게 됩니다.

우리가 온전히 사랑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느낌을 받게 됩니다.
온전히 사랑할 때 우리는 오로지 사랑만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할 때 우리는 상처받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에는 개인적인 관점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분이 좋을 때면 우리가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사랑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과 에고는 정반대의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 없음입니다.
사랑은 순결한 것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랑에는 분노가 없습니다. 사랑에는 불안이 없습니다.
사랑에는 외로움이 없습니다.
사랑에는 불행이 없습니다. 사랑은 사랑을 끌어당깁니다.
사랑이 모든 것입니다.

사랑에 대한 보답은 오로지 사랑입니다. 사랑은 자신과 똑같은 것을 끌어당깁니다.
사랑은 널리 퍼져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지적인 이해로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랑의 달콤함은 말로 묘사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경험해야만 합니다.
온전한 사랑은 끊임없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얻게 되면 오로지 사랑만을 느낄 수가 있고
사랑만을 볼 수가 있고 사랑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도 뽐내지도 아니합니다.
사랑은 교만하지도 무례하지도 않습니다. 사랑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내지 아니합니다. 사랑은 옳지 않은 것에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인 것에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소망하며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평화. Peace.

평화는 고요함이며 참자아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완전한 평화가 우리의 가장 높은 상태이며 타고난 본성입니다. 
평화란 완벽한 하모니 속에서 전지함과 지극한 아름다움의 영역에 머무는 것입니다.
평화란 하나됨at-onement이며 다른 것이 없는 것no-otherness입니다.
평화란 저항이 없는 것이며 온전한 받아들임이며 모든 사람 모든 것과 하나됨입니다.
평화란 느낌이며 아무런 행위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평화는 .존재.의 영역입니다.

완전한 평화는 생각의 영역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생각들은 이리저리 동요하는 것들입니다.
완벽하고 온전한 평화를 갖기 위해서는 생각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됨에서는 생각해야 할 다른 것이란 게 없습니다.
평화야말로 우리의 성장을 재어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척도입니다.
명상 속에서 원하지 않는 생각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하나의 생각에 집중하는 것에 의해
평화는 스스로를 드러내게 됩니다.


 


.진리. Truth.

진리란 결코 변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진리가 아니며
환상일 뿐입니다. 진리에 대한 유일한 권위는 진리 그 자체입니다.
진리란 사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만들거나 없앨 수가 없습니다.
진리는 가르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발견하고 깨달을 수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입증할 때까지 어떤 것도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은 외적으로 그리고 내적으로 2가지가 있습니다.

외적으로 진리를 입증하는 것은 그것을 행함으로써입니다.
내면에서 진리를 입증하는 것은 참자아의 전지전능함을 직관적으로 깨달음을 통해서입니다.
진리의 빛 안에서 즉각 용해되지 않는 문제꺼리란 없습니다.
진리에 대한 접근은 지적인 단계 느낌의 단계 그리고 직관의 단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이 3단계를 거쳐 진리로 향함으로써 진리가 스스로를 드러내게 됩니다.
진리는 느낌의 영역에 있는 것이고 말로는 표현될 수 없고 그저 암시를 할 수만 있을 뿐입니다.

이성이 우리를 진리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진리로 향하도록 해줄 수 있을 뿐입니다. 
직관-앎-초의식이 진리를 드러내줍니다.
지적인 이해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진리는 느낌의 영역입니다.
지적인 이해는 지성에서 느낌으로 인도하는데 사용되어지고
결국 느낌이 주도권을 가지고서는 더 이상의 생각을 남기지 않게 됩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순수하게 직관적인 느낌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진리로부터 시작하세요.
말하자면 오직 무한한 하나임만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
거기에서부터 당신의 생각이 나오도록 하세요.
진리는 한계지어진 잘못된 생각들을 렛고우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어질 수 있습니다.

모든 한계 지어진 생각들이 없어지게 되면 남아 있는 것은 우리의 본래의 무한한 참자아입니다.
상대적인 진리는 변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절대적인 진리는 결코 변화하지 않습니다.
절대적인 진리는 변함없는 하나임이고 ..
하나임이 유일한 진리입니다.

진리는 깨달음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깨달았을 때
우리는 그것을 가지게 되고 그것이 되고 그것을 쓸 수 있게 됩니다.
절대적인 진리는 결코 말로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하나임이고 하나임에는 말을 할 다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실재는 하나이고 같은 것입니다.



 



.참자아-신-. The Self-God-.

참자아-신-은 무한하고 완전하고 전부이고 하나이고 완벽하고 나누어질 수 없고
시간을 넘어서 있고 영원하며 변함없고 오직 유일한 하나의 실재입니다.
참자아가 바로 우리의 .존재.입니다. 우리에게 참자아-신-보다 더 가까운 것은 없습니다.
참자아에게는 특성도 없고 행위도 없습니다.
참자아는 특징지어지지 않고 한계지어지지 않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현재 영원하며 한계 없는 참자아이고 항상 그래왔고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참자아에 대한 무지를 없애거나 혹은 참자아에 대한 앎을 키움으로써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참자아-신-와 만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나 I” 혹은 “나 있음 I AM”의 느낌에 다른 어떤 것도 덧붙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 느낌이 바로 참자아이며 내면의 자아입니다.

여기에다 우리가 어떤 것이라도 덧붙이는 순간 -
예를 들어 “나는 좋은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다.”
“나는 가난하다. 부자다.” “나는 큰 사람이다. 작은 사람이다.” 
“나와 그것” - 우리는 “나 있음
 I AM”에 한계를 부과하는 것이 되고 에고를 만들어 내는 것이 됩니다.

참자아-신- 안에서는 탐구라는 것이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참자아는 오직 하나인 존재인데 누가 따로 있어서 그것을 탐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탐구란 오직 참자아가 아닌 에고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에고의 근원이 바로 참자아입니다. 그 근원을 발견하게 되면 오직 참자아만 남기고
에고는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가 참자아에게 한걸음 다가간다면
참자아는 우리에게 아홉 걸음 다가올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됨으로써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참자아-신-입니다.

기쁨이란 무엇입니까? 기쁨이란 다름 아닌 참자아입니다.
모든 욕망들이 충족되어졌을 때 마음은 고요해집니다.
이것이 참자아로 하여금 빛을 비추게 만들어주고 우리는 이것을 기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면의 자아가 드러나게 허용해 준다면 문제꺼리들은 저절로 없어져 버립니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신을 경배할 때는 신을 알 수가 없습니다.
신은 항상 그와는 분리되어 있을 테니까요.
오직 자신이 신인 입장에서 볼 때 우리는 신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신을 우리의 몸에서 발견하게 되는 게 아니라 ..
몸이 신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몸이 점점 더 높이 고양되어짐에 따라 참자아를 가리는 덮개가 점점 얇아집니다.
신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스스로에게 가질 수 있는 가장 높은 개념입니다.
행위를 멈추고 소유하는 것을 멈추고 단지 참자아로 있으세요.
처음에는 당신의 참자아로 있는 것이 일시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연습하면 더욱 더 오래 머물게 될 것이고..
 
마침내 영원히 머물게 될 것입니다.

참자아는 완전한 고요함입니다.
고요함은 참자아로 가는 가장 위대한 길 중에 하나이고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참자아는 하나이고 모든 것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자신이 모든 존재이고 우주의 모든 원자와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참자아 안으로 들어가거나 참자아 안에 머물게 된다면 우리는 생각에서 벗어나
위로 올라가게 됩니다.
생각들은 그저 아래로 가라앉아 버립니다.

우리가 참자아 안에 확고하게 자리하기 전까지는
생각들이 다시 올라와서 주도권을 가질 것입니다.
생각에서 벗어남에 따라 우리는 생각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게 되고
생각들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객관적 관찰이 영속적으로 되면 우리는 완벽하고 영원한 평화와 기쁨에 머물게 됩니다.
완전히 깨달은 존재는 자신을 생각과 동일시하지 않게 되고
그래서 생각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참자아-신-은 법칙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신을 아는 자는 오직 자신이 신 안으로 용해되기 전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진리의 스승. Teacher of Truth.

어떻게 진정한 스승을 선택할 수가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가 따라도 될 진정한 스승이란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진리의 스승이란 내적인 평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가르치는 앎에 대한 경험을 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아는 것을 사랑으로 나누어 주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를 자신과 동등하게 보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평등하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욕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직 신만을 원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가르치는 것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진리는 스승과 관련이 없습니다.
그 누구도 진리를 만들 수도 없고 진리를 없앨 수도 없습니다.
진리에는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스승이 진리를 향하도록 가리킬 수는 있지만...
 
각자가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보고 입증해야 합니다.
만약 스승의 말이나 혹은 누군가의 말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그것은 단지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것뿐입니다.

스승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더라도 확인을 해보기 위해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직 그것을 입증한 후에야 당신의 앎이 됩니다.
스승은 직관적으로 선택될 수도 있습니다. 직관은 내면의 전지함의 근원이 두드리는 것입니다.
느낌입니다. 전혀 생각이 없이 얻어지는 것입니다. 어떠한 생각이라도 거기에 있다면
그것은 직관이 아닙니다.
그것이 올 때 우리는 그것을 알게 될 것이고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스승은 우리를 높은 곳으로 들어올려 높은 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는 우리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데 도움이 되는 정신적인 지지를 우리에게 줍니다.
스승은 다른 이를 자신의 이해의 정도까지 들어올릴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은 아닙니다.

스승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것 중의 하나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에고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에고를 보지 못하도록 스스로 눈을 가림으로써
에고를 렛고우하는 것을 아주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스승은 우리의 마음을 고요하게 합니다.
스승은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방향을 계속 의식하도록 합니다.
 스승은 이 길을 가는 것을 쉽게 해줍니다.
스승은 경전이나 책들 보다 훨씬 도움이 됩니다.






.에고. The Ego.

에고는 하나임에 반대되는 분리된 개인의 느낌입니다.
에고의 출발은 “나는 분리되어 있다.” 라고 하는 느낌입니다.
그리고는 “나는 몸이다.” “나는 한계지어진 몸이다.” 와 같은 한계지어진 생각-
마음이라고 하는-을 만들어 냅니다.
이러한 생각들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이 무한하다고 하는 사실을 망각하게 됩니다.

에고는 개성이라고 불리는 극히 제한된 것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자 애쓰는
우리 자신의 참모습인 무한한 존재에 대한 무의식적인 앎에서 나옵니다.

‘나는 분리된 개체이다.’라고 하는 이 생각이 모든 형태의 - 물질, 아스트랄, 코잘 -
에고의 근원입니다.
매일 매일 우리들은 깨어있거나 꿈을 꾸거나 꿈 없는 깊은 잠을 지나가면서
각각 물질계 아스트랄계 코잘계를 경험합니다. 에고를 없애면 이 3계가 없어집니다.

우리가 완전히 자유롭게 되기 전까지는 다른 이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우리는 거짓된 가면을 쓰고 다른 이를 대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보다는 다른 이들이 바라는 것에 맞게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습관적이고 자동적이며 무의식적인 왜곡된 행동의 패턴을 만들게 됩니다.
이 패턴은 필연적으로 불행을 만드는데
우리가 자신의 진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죠.

이 무의식적인 자동화된 행동은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과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가로막게 됩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를 보아야 합니다.
1- 지금 현재의 사실을 봄으로써 상황을 재평가해야 하고
2- 무의식 속에 있는 생각들을 우리가 렛고우 할 수 있도록 의식으로 떠 올려야 하고..
3- 우리들의 참자아를 알아야 합니다.

거짓된 가면이 에고입니다. 에고는 우리가 사랑을 갈구하는 것에 의해 움직입니다.
하지만 에고가 얻게 되는 것은 좌절뿐입니다.
왜냐하면 오로지 사랑을 함으로써 사랑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에고의 근원을 살펴보면 에고는 사라져 버립니다. 에고가 크면 클수록 고통이 더 커집니다.
고통은 그 근원이 에고가 사랑을 구하고자 애를 쓰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없어집니다.

오직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에고를 만들어 내고서는 그 순간부터 그것에서 벗어나고 애를 씁니다.
에고가 사라지면 오직 신만이 남습니다.
우리의 신적인 부분은 항상 거기에 있습니다. 단지 에고에 의해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애를 쓰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에고입니다.

렛고우하고 신이 하시게 하세요.

신의 모든 힘과 은총이 매순간 우리를 통해서 나오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에고를 옆으로 밀쳐놓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초대 받지 못한 손님은 곧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 The Mind.

 
마음은 한계를 상상한 의식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상상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원래 무한한 존재였습니다.
우리를 제한하는 과정이 점점 더 전개되어지게 되고
마침내 우리는 이것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제서야 다시 되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모든 과정을 거꾸로 되돌려서 생각들을 점점 더 렛고우하게 되고
마침내 완전한 평화와 생각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가 확립되게 됩니다.
우리가 자연의 법칙을 알게 되면 삶이 쉬워집니다.

그것은 바로 인과의 법칙입니다. 우리가 마음 혹은 생각이 원인이 되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결과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의식적으로
자신의 환경을 통제할 수가 있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우리가 창조합니다.
우리가 마음에 지니고 있는 것을 우리는 지속시킵니다.
우리가 마음에서 렛고우하는 것을 우리는 용해시킵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머무십시오. 그 어떠한 것에도 .반대.하지 말고
단지 그것과 반대 되는 것에 .찬성.하십시오.
무언가에 .반대한다는 것.은 당신이 원하지 않는 무언가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그 상황을 지속시키게 됩니다.

모든 생각은 원인이 됩니다. 당신이 마음에 두고 있는 것 당신은 그것이 됩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마음에서 기원한 것입니다.
오직 당신이 원하는 것만을 생각하시면 그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문제를 제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제거한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붙드는 것이 되고 결국 지속되는 겁니다.

생각이 더 많아질수록 문제는 더욱 커집니다.
생각이 적어질수록 완벽함이 더욱 명백해집니다.
마음이란 에고가 창조를 위해서 사용하는 도구에 불과하고 물질 우주에 그것을 반영합니다.
세상은 마음이 외부로 투사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투사되어진 그림을 바꿀 수가 있습니다.
 
마음은 지적이지만 몸은 그저 무생명의 물질입니다.

몸이란 마음이 물질화된 것입니다. 몸은 정확히 마음의 카피입니다.
마음이 올바르게 되면 즉시 몸이 올바르게 됩니다.
몸의 질병은 마음의 불편함dis-ease입니다.
고통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몸이 아플 때 그것은 마음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생각이란 우리의 감정과 욕망들을 합리화하는 것이고 그 근원은 에고에 있습니다.
생각으로 세상이 우리의 주의를 끌어당기는 것을 느슨하게 함으로써 삶을 쉽게 만들 수가 있는데 그리하면 우리의 주의는 보다 더 참자아로 향할 수가 있습니다.

올바른 생각이란 우리로 하여금 건강과 풍요로움으로 이끄는 생각이고 사랑과 평화,
그리고 마침내는 하나됨으로 이끄는 생각입니다.
이 하나됨에서는 다른 것이란 없기 때문에
생각은 불가능해지고 모든 것이 그저 조화롭습니다.

가장 올바른 생각이란 .생각 없음.입니다. 진리는 앎의 영역에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생각이 멈추고
우리가 지금 당장 가지고 있는 전지전능함을 덮고 있는 담요를 벗겨낼 때입니다.
순수한 마음은 생각이 없는 마음이고 그것이 앎입니다.
순수한 마음은 우리에게 전지함과 전능함이 흐르게 허용해줍니다.
진정한 앎은 상대적인 지식인 생각 뒤에 있습니다.

마음은 결코 신을 알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마음은 한계지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한은 결코 무한을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참자아를 보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것은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마음은 
1- 욕망의 생각이 일어나게 하고
2- 그로 인해 집착과 혐오를 일으키게 되고 
3- 속박을 만듭니다.

이 사슬 중에서 하나의 고리만 없애도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습관 때문에 우리는 생각을 멈추는 것이 어렵다고 믿습니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전지함의 상태를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는 어리석고도
불필요하게 생각을 하려고 애를 쓰는 수고를 벗어버릴 것입니다.

생각을 하는 습관이 잠재적인 경향성이고 깨달음에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생각의 습관은 완고하고 단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참자아를 깨닫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렛고우해야 합니다.
지적인 앎이란 단지 테이프에 녹음을 하는 것과도 같지만 진정한 앎은 이해이고
그 결실에 의해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지적인 앎은 에고가 진정한 앎 대신에 사용하는 대체물입니다.
 
마음은 여러 가지 기능의 복합체입니다. 지각과 기억 그리고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분별하는 것이 가장 큰 기능입니다.

진리와 비진리를 구별하고 실재와 비실재를 구별해서 자유로워지세요!
마음은 결코 잊지 않습니다. 단지 그 순간에 되살리지 못할 뿐인 것이죠.
마음의 90%는 무의식입니다. 나머지 10%를 사용해서 이것들을 모두 의식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모든 마음은 방송국의 송수신기와 같습니다. 자신만의 파장을 받아들이는 것이죠.

그 파장을 높이세요. 정신적인 효율성은 집중의 기술입니다.

마음은 모든 방향으로 빛을 방사하는 전구와 같습니다.
그것이 집중되어졌을 때 이것은 강력한 광선과도 같이 됩니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된 마음은 스스로 갈라져서는 진리를 드러냅니다.
집중된 마음이란 한번에 한가지에만 주의를 집중하고 다른 생각이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집중된 마음은 진리를 깨닫는데 있어서 성공의 비밀입니다.

집중된 마음은 또한 세상에 있어서 성공의 비밀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모든 사람들은 마음을 집중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정한 ‘홀로있음’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 안에서 가지는 것입니다.
‘홀로있음’은 집착 없음의 연습을 통해서 얻어집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이라도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평화 속에서 홀로 있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한적한 곳에 사는 사람이라도 그의 마음은 온갖 비참한 생각들로 괴로울 수가 있습니다. 행복한 생각은 상대적인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가장 높고 절대적인 행복은 생각을 넘어서 있는 것입니다.
 
 


.세상.The World.
 
세상에서의 모든 행동은 사랑을 갈망하는 것에 기초합니다.
이 욕망이 우리로 하여금 인정, 받아들임, 주의, 힘, 명성, 재산, 등을 추구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런 식으로 사랑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좌절하고 불행해집니다. 오직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사랑을 찾을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환경의 희생자가 되기로 한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환경을 컨트롤하는 사람이지만 이 사실을 망각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다시 알게 될 때 우리는 환경의 마스터가 될 것이고
의식적으로 주위 환경을 컨트롤하게 될 것입니다.
물질 에너지 공간 그리고 시간은 모두 마음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그것들을 정신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고
우리가 하고자 하는 대로 컨트롤 할 것입니다.

물질에는 지성이 없습니다. 세상은 물질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성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고 이것이 세상을 결정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무의식적으로 세상을 만듭니다.
우리가 깨어나서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의식적인 통제력을 가지게 됩니다.

실재를 지각하게 되면 우리는 통제권을 가지게 됩니다.
창조는 정신적인 투사입니다. 실재reality는 바로 그 뒤에 있습니다!
실재를 본다고 해서 세상이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세상에 대한 잘못된 개념이 사라지는 것이죠.
세상이란 단지 한계만이 있는 학교와 같은 것입니다.
한계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은 우리가 무한하게 될 때까지 그것을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삶은 한계의 영역에 있기 때문에 고통을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마세요!
리가 자신의 생각과 홀로 있는 것을 견딜 수가 없게 될 때 우리는 오락거리를 찾습니다.

오락거리는 자기 자신의 생각들로부터 도망치는 도피입니다.
행복은 오락거리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랑함으로써 행복해지세요.
우리가 더욱 사랑할수록 우리는 오락이 필요 없어지게 됩니다.
사교활동은 잘못된 곳에서 사랑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구하고 사랑을 찾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은 신의 사랑입니다.
신의 사랑은 고요함 속에서 내면으로 들어감으로써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것은 사랑함이지..
사랑을 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얻어지는 즐거움은 일시적입니다. 하지만 진리 혹은 실재에 대한 이해를 통해
얻어지는 기쁨은 영원토록 우리의 것입니다.
 
당신은 세상을 돕고 싶습니까? 먼저 자신을 도우세요.
그렇게 하고 나서야 세상을 도울 수 있습니다.
당신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세상에 우리가 준 것을 다시 받는다는 것이 보상의 법칙-카르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은 알지만 카르마가 행동이 아니라
생각에 의해서 창조된다는 것은 거의 모릅니다.

우리가 행복하고 좋은 삶을 살고자 한다면 오직 행복하고 좋은 생각들만을 하면 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험담을 한다면 그 사람을 해치는 게 아니라 ‘보상의 법칙’에 따라
스스로를 해치는 것입니다. 험담이란 다른 이를 헐뜯는 증오의 한 형태입니다.
우리가 다른 이를 심판하고자 할 때면 에고가 신처럼 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옳고 그른 것을 생각하는 모든 것이 심판입니다.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이 심판입니다.

옳고 그르거나 좋고 나쁜 것은 없습니다.
오로지 실재를 배우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경험만이 있을 뿐입니다.
당신이 세상을 올바른 것으로 볼 때 세상에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세상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원자 하나 하나가
당신의 참자아임을 보는 것입니다.
 
사교와 오락거리는 시간낭비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찾고 있는 영속적이고 무한한 기쁨이 그곳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명상 속에서 릴리스하거나, 이기심 없는 봉사에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장 유용합니다.
이것은 무한한 기쁨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만약 참자아 아닌 것들을 추구하는데 낭비한 시간을 참자아를 추구하는데 사용한다면
깨달음이 곧 따라올 것입니다. 일
을 하거나 행위가 참자아를 깨닫는 것에 방해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의 참자아에 대한 탐구는 항상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집착 없이 ‘행위자가 아니라는 태도’로 일을 하거나 행위를 할 수가 있습니다.
단지 주시자가 되십시오. 그리하면 릴리스하는 명상이 계속 되어질 것이고,
연습을 통해서 항상 하는 것이 됩니다. 밤에 꾸는 꿈이 세상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보기가 됩니다. 우리가 꿈을 꾸는 동안 악몽 속의 모든 고통은 우리에게 현실처럼 보입니다.
모든 세상의 창조물들 등장인물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의 역할 -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꿈꾸는 동안은 현실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깨어났을 때 오직 그때 우리는 그런 일이 결코 있었던 적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모든 것이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서 깨어날 때, 우리는 이것이 있었던 적이 결코 없었고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세상의 뒤에 있는 단일한 실재를 보게 됩니다.
우리가 깨어있는 상태라고 부르는 ‘가장 한계지어진 상태’에서, 우리는
자신이 무한한 존재라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이 ‘깨어있는 상태라고 부르는’ 상태에서 깨어나게 되면,
우리는 자신의 무한한 참자아에 깨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섹스와 결혼. Sex and Marriage.
 
깨달음은 ‘그 사람이 결혼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단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달았는가’가 문제입니다. 결혼을 한 사람이라도
그의 마음을 집중하는 것을 배워서 참자아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집중된 마음은 그것을 해낼 수가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 결혼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다른 이를 필요로 하거나 소유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오직 다른 이를 행복하게 해주기를 원합니다.
결혼은 단지 사랑을 더욱 더욱 키워나감으로써
마침내 완전해지도록 도와주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부모라면..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은 ‘스스로를 도와 가장 높은
사랑의 경지에 가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자동적으로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을 행하게 될 것입니다.

책을 보고 따라하는 것은 그다지 효과가 없습니다. 당신의 배우자와 아이들을
신의 아이들로 보십시오. 결코 “저 사람들은 나의 것이야.” 라고 말하지 마세요.
그들은 신의 자녀들이니까요. 그들에 대한 당신의 비이기적인 사랑을
‘신성한 사랑’이 될 때까지 키워가세요. 우리가 배우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은
그로 하여금 진리에 대해 더욱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에서 옵니다.

당신이 다른 이를 필요로 해서 혹은 소유하고자 해서 결혼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고 결과적으로 불행을 가져옵니다. 가장 행복한 결혼은
각자가 서로 파트너의 행복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목표로 가는데 도움을 주는 결혼입니다.
결혼은 너무나도 섹스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서로 다른 이성끼리 결혼을 하고 섹스를 자유로이 얻게 되는 것이죠.
결혼은 사랑의 결합이어야 합니다.
인간은 섹스에 대해서 혼란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섹스란 남성과 여성의 물리적인 결합이고 생식을 위한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는 가장 큰 집착이 섹스입니다. 인간은, 섹스를 서로 다른 두 가지..
즉 정신적인 것과 영적인 것으로 결합했습니다.
정신적인 측면은 에고를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고, 영적인 측면은 사랑입니다.
인류는 너무나도 ‘정상적인 것’에서 벗어나서,
더 이상 무엇이 올바르고 정상적인 섹스인지 기준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아마도 동물들의 섹스의 목적과 기능을 배워서
자신을 다시 바로 잡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섹스란 생식을 위한 물리적인 행위란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동물보다 더 뛰어나고 훨씬 더 개발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람이란 것을 압니다.
인간만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찾고, 자신을 나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섹스의 정신적인 측면은 에고의 인정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것을 줄 수 있는 파트너를 찾고 있고,
자신에게 계속해서 에고의 인정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찾았을 때
자기가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고, 이 사람을 자신의 짝으로 영원히 가지고 싶어합니다.

그가 이러한 인정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얻게 되는 한 자기가 사랑에 빠졌고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복은 그가 이제껏 경험한 것 중에서 가장 큰 것일지는 몰라도,
어느 정도의 고통스러운 고뇌와 뒤섞여 있습니다.
자신의 파트너를 통해서 얻는 행복은 그것을 더욱 갈구하게 만들고 동시에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기게 되는데..
이 둘 다가 고통입니다.
이러한 고통과 즐거움의 뒤섞임이
자연적으로 완전한 기쁨을 가로막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항상 있으며, 완전히 만족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사랑에 대한 정의와 같이 완전한 의미로 오직 자신의 파트너를 진정으로 사랑할 때
그는 삶의 모든 순간순간에 기쁘고 행복할 것입니다.
인간이 진정으로,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찾고 있는 것은 섹스의 ‘사랑에 대한 측면’입니다.
불행하게도 인간은 이것을 망각하게 되었고
것을 되찾을 때 우리는 항상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섹스에 탐닉하는 것보다는 중용을 지키는 것이 좋습니다.
탐닉은 우리를 아래로 끌어내리고 눈멀게 합니다.
섹스가 육체적인 욕망에 사로잡힐 때 우리를 몸이라는 새장에 가둠으로써 성장을 가로막지만, 섹스가 영혼의 열정으로 솟아오를 때 그것은 확장된 사랑과 자유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섹스는 덫입니다. 섹스는 탄생을 낳습니다.
탄생이 있다면 죽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죽음에서 죽음으로 갑니다.
당신의 불멸을 찾으세요. 섹스에 대한 욕망은 기본적으로 사랑에 대한 욕망입니다.
그리고 섹스로 만족하면 진정한 사랑을 얻고자 하는 열정이 약해져 버립니다.

섹스에 대한 욕망의 힘이 사랑의 통로로 바뀐다면,
그것은 섹스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의 몇 천 배나 되는 기쁨을 줄 것입니다.
섹스가 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기쁨을 얻으세요.
래서 섹스를 하기 위해서 우리가 작은 즐거움을 위해서 더 큰 기쁨을 포기해야 하는
그런 곳으로 가세요.

우리는 진리에 대한 이해가 섹스나 인간의 애정이 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기쁨을 주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기쁨은 사물이나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로부터 오는 것처럼 보이는 기쁨은 사실..
생각들이 고요해졌을 때 참자아로부터 나오는 빛인 것입니다.
섹스는 우리를 참자아-신-에 가까이 데려다 주는 것처럼 속입니다.
이 큰 욕망을 충족시킴으로써 의식적 무의식적인 수없는 생각들이 고요해집니다.
이 생각들이 고요해질 때 당신의 참자아가 앞으로 나오고
당신은 평화와 만족의 멋진 느낌을 느끼게 되는것 입니다.
이 멋진 느낌을 곧장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영원합니다.
 
 


.욕망. Desire.
 
우리는 욕망이 없는 상태를 획득해야 합니다. 우리가 욕망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부족함을 느끼게 되게 한계지어진 세상에 갇히게 됩니다.
욕망은 끝없는 기쁨의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참자아에 대한 앎을 욕망하는 것’ 외의 모든 욕망은 우리를 행복의 반대편으로 밀쳐내어서
한계와 고통 속으로 넣습니다.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서 더 많이 욕망할수록 우리는 더욱 불행해집니다.
욕망과 속박은 같은 것입니다.
욕망을 만족시키려 할 때마다 그것을 더욱 원하게 되기 때문에 속박을 만들어 냅니다.
집착을 가지고 즐기는 것은, 고통과 갈망을 가지고 즐기는 것입니다.
집착 없이 즐기는 것은 자유로이 즐기는 것이고 어떠한 속박도 낳지 않습니다.
집착을 렛고우하는 것은 성장에서 뛰어난 방법입니다.
우리가 소유하는 모든 것이 우리를 소유합니다. 무한한 기쁨으로 가는 길은 욕망을 없애고,
어떠한 집착도 싫어함도 없는 것입니다.
당신의 참자아를 알게 되면 당신은 완전히 만족하고 모든 것을 가지게 됩니다.
 
 
 

.감정. Emotions.
 
감정은 강한 느낌입니다. 그것은 좌절된 의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실제로는 ‘사랑이 없다’라고 하는 느낌이면서 사랑의 부재를 없애고자 하는
욕망과 결합된 느낌입니다. 인간의 감정을 들여다보면..
당신은 항상 좌절된 의지나 욕망이 결부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고자 욕망합니다.
 
우리가 소유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사랑이 영속적인 행복일 수가 없게 하는 요소입니다.

감정은 흥분되고 동요합니다. 그 반대는 침착하고 고요하고 평화롭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것이어서 감정이 아닙니다.
감정은 평화의 반대입니다. 감정은 에고에 속한 것입니다.
감정이 우리를 속박해서 생각을 지각하는 것과 생각의 효율성을 방해합니다.
완전한 자유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감정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감정이 지배하는 정도에 따라 ‘있는 그대로의 것’을 보지 못합니다.
억압된 감정은 우리가 무의식 속으로 밀어 넣어서 의식하지 못하게 된 감정입니다.

모든 억압된 감정과 생각이 충동과 금제를 만들고 잘못된 행동의 습관을 만듭니다.
대부분의 행동은 왜곡되고 억압된 감정과 생각에 뿌리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감정을 억압하지 마세요. 그것들을 충족시킬 필요는 없지만 억누르지는 마세요.
단지 거기에 있다는 것만 알고 렛고우하세요.

과거의 욕망이 현재의 무의식적인 욕망입니다.
현재의 욕망이 미래에 무의식적인 욕망이 됩니다.
반작용reaction이란 과거의 행동에 의해 결정되어진 자동적인 반응입니다.

반작용은 우리가 정신적으로 혹은 육체적으로 고통을 느낀 과거의 사건에 기초한 행동입니다.
지금 현재 무의식적으로 과거의 사건을 생각나게 하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자동적으로 그 고통을 준 과거의 사건이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그 고통을 피하려고 하게 되는 것이죠.
이것에 의해서 지금 현재의 행동이 과거의 상황에 의해 결정되어지고
현재의 상황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 결과 만족스럽지 않은 비효율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를 2가지 이유에서 불행하게 만드는데..
하나는 무의식적으로 고통을 상기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현재의 행동으로 바라는 바를 성취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반작용에 의한 행위는 자유로운 행위가 아닙니다.

자유로운 행위는 그 순간의 상황에 의해서 결정되어지는 행위이고
과거의 사건이나 환경에 의해 조건지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반작용으로 행위 하는 정도만큼 우리는 눈 멀어 있는 것이고,
우리 자신의 색안경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반작용의 행위는 성장을 위한 기회로 접근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반작용을 재평가하고 렛고우할 때마다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모든 반작용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우리는 반작용을 없애게 됩니다.
모든 반작용을 없애고 자유로워지세요!
 

 
.즐거움-고통. Pleasure-Pain.

즐거움이란 우리가 좋아하는 일이 일어났을 때 가지는 느낌입니다.
고통은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일이 일어났을 때 가지는 느낌입니다.
즐거움이란 충족되어짐으로써 생각이 고요해지는 것에서 옵니다.
그래서 우리의 참자아가 좀 더 빛을 비추게 되는 것이죠.
고통은 생각이 많아지는 데에서 오는 것입니다. 생각들은 참자아를 가립니다.
어떤 경우에는 즐거움이 고통을 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정적인 접근이고 무한한 기쁨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허용합니다.
고통은 한계를 자각하는 것입니다. 고통은 습관입니다.
고통은 우리를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자극합니다.

올바른 방향은 우리가 몸과 마음의 마스터라는 것을 아는 방향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방향을 더 많이 보면 볼수록 우리는 그것이
옳은 것이란 것을 알게 되고 고통이 줄어듭니다.
고통은 상황에서 오는 것보다는..
고통의 생각을 붙들고 있는 데서 더 많이 옵니다.

만약 당신이 세상을 렛고우할 수 있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덜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몸의 고통은 한 점에 대해서 지각이 높아진 것입니다.
몸의 한 부분이 손상을 당하면 정신적인 경보가 작동이 되고 고통을 일으킵니다.
만약 마음이 그 경보에 충분히 응답을 한다면 고통은 즉시 꺼져버릴 것이고
몸의 메카니즘은 즉시 작동을 해서 신속하게 치료를 할 것입니다.

과거의 불쾌한 경험 때문에 우리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고
정신적으로 그것에서 벗어나서 도피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그 경보에 충분히 응답을 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 때문에 고통이 머물게 되고 몸의 치유 메카니즘은 지체되게 됩니다.
우리가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고통을 없앨 수가 있고 몸의 즉각적인 치유를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가 있습니다.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고통을 증가시킬 뿐입니다.

이것이 정신적으로 우리를 고통에 빠지게 하고 고통을 느끼게 합니다.
고통을 진정으로 느끼면 그것은 즉시 사라져 버리고 몸은 빠르게 치유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고통 역시도 그것을 자각하고 마주함으로써 없어질 수 있습니다.
정신적인 문제는 충분히 정면으로 마주하면 용해되어집니다. 그것이 불쾌하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서 벗어나 도피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용해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마음에 붙들게 되고 그러므로 고통이 계속됩니다.

즐거움을 찾는 것은 원래의 당신인 무한한 기쁨으로 향하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충동입니다.
 


 

.건강. Health.
 
병든 몸을 치유하는 것과 고장난 포켓북을 고치는 것은 똑같은 원리입니다.
질병과 가난은 둘 다 ‘결핍’입니다. 그리고 결핍은 한계 지어졌다고 하는
관념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결핍의 관념은 오직 우리의 의식에만 있는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렛고우해야 하고 그 자리에 풍요로움과 웰빙의 관념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은 오로지 창조만 한다는 것을 실제로 경험하게 되면
우리는 마음에 오로지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품을 것이고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는 관념들이란, 우리의 모든 생각의 총합이고
그것들 대부분은 지금 현재 무의식입니다.
우리는 잘못된 무의식적인 관념들보다, ‘올바른 관념들’이 더 강하게 될 때까지
올바른 생각들을 계속 붙들고 가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 생각들이 습관이 되고 잘못된 관념들을 대신하게 될 것입니다.

무의식적인 생각들이 그렇게 셋팅이 되면 인생은 아름답고 행복하게 됩니다.
인간의 행동은 약 90%가 무의식적인 생각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것은 과거에 의해 결정되어지고, 지금은 무의식이 된 생각과 개념에 따라
자동적으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이유 때문에 올바른 생각이 효과를 나타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올바른 생각을 계속해서 유지해 나감으로써, 무의식적인 습관을 극복해서
이 생각이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강력한 의도의 힘을 가진, 충분히 강한 단 하나의 생각으로
아주 오랫동안 쌓여온 잘못된 생각들을 없애는 것은 가능합니다.

우리의 풍요로움과 건강은 ‘우리의 풍요로움과 건강에 대한 의식’에 의해 결정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완전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이 지금 나의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마음으로 그리는 것이 그것을 빨리 가져다 줍니다.

그것을 지금 .있는 것 isness.으로 보세요.
원하는 것을 미래에 올 것이라고 절대로 생각하지 마세요.
마음이 그것을 미래에 가져다 놓을 것이니까요.
그것을 보고 느끼고 맛보고 당신의 것으로 지금 가지세요.
그것을 언제가 .올 것 will-be-ness.으로 보지 마세요.
원하는 것을 마음으로 디테일하게 그리세요.
당신이 원하는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을 가지기 위한 돈을 그리지 마세요.
돈으로 한계 지우는 것은 방법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니까요.

남들에게 비밀스럽게 이것을 하세요.
누군가에게 당신이 원하는 것을 말을 하면 열정이 약화될 것입니다.
그것을 성취하고 난 후에 말을 해도 괜찮아요.
반복하는 것은 우리가 충분히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에서는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심상화를 반복하는 것도 좋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할 때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는 완전한 확신이..
바로 그렇게 할 것입니다.

풍요로움은 무한합니다. 경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몸이 아무리 아프더라도
즉시 완벽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욕망한다면
그것은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이 신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란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깨달음을 얻는다면 무언가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우리에게 올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어떤 것도 필요치 않다는 것을 알면
모든 것이 ‘힘들이지 않는 생각’만으로도 우리에게 옵니다.
당신의 직업과 당신의 풍요로움을 결부시키지 마세요.
신이 당신의 무한한 공급원이 되게 하세요.
그리하면 당신의 풍요로움은 이미 보장된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무슨 일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힘의 효율성은 당신이 원리를 아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완전하게 수용적인 것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렛고우하고 신에게 맡기세요. Let go and let God.

풍요로움의 열쇠는 나누어주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자유로이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자유로이 줄 수가 있습니다.
더욱 줄수록 우리는 더욱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치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즉각적입니다.
영적인 치유를 할 수 없다면 정신적인 치유를 해야 하는데 매우 빠릅니다.
영적인 치유란 몸이 완벽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치유는 몸이 완벽하다는 것을 심상화하는 것입니다.
몸의 치유를 받는 것보다는 치유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모든 결핍의 생각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것입니다.
건강과 풍요로움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은 진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영적 성장. Spiritual Growth.
 
우리가 영적 성장의 길로 들어설 때, 강하고 약한 모든 잠재되어 있던 습성과 경향들이
강화되어지고 마스터할 수 있도록 위로 올라옵니다.
우리가 삶의 경험에서 배우지 않는다면 모든 삶의 경험은 헛되이 낭비되는 것이고
단지 무한한 기쁨을 연기시킬 뿐입니다.
모든 불쾌한 일들은 그것 안에 교훈의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장하기를 선택하면 우리의 삶은 세상의 삶과 모순이 됩니다.
그것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어떠한 시도도 더욱 모순처럼 보이게 만들뿐입니다.
우리의 힘은 고요함과 침묵에 있습니다. 고요하게 당신의 성장이 빛을 비추게 하여
그 고요함이 당신이 가는 길의 위대함을 웅변하게 하십시오.
영적 성장은 진화를 거슬러 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수많은 세월동안 계속해서 배워온 한계들을 되돌리는 것입니다.
영적 성장은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장함에 따라 우리는 이전에 배웠던 충동과 억압에 의해 조건지어진 행동으로부터
더욱 더 자유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습관에 기초한 행동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야 합니다.
자유는 우리가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자유로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우리는 선하고자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해서’ 혹은 ‘그렇게 하도록 강요받아서’ 선하게 되는 것은,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기 때문에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큰 장애물은 더 큰 진리로 극복되어집니다.

우리가 성장할수록 모든 것은 단순해져 갑니다. 성장이란 에고를 비켜서게 하고
참자아를 깨닫는 것입니다. 에고가 제로가 될 때 신이 모든 것이 됩니다.
우리는 자신을 영적인 지식의 단계로 올려야 합니다.
영적인 지식이 아래로 내려오지는 않습니다.

성장의 속도는 그것을 얼마나 강하게 열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직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진리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깨달음이란 내면에 있는 진리를 자각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통해서 우리는 성장합니다.
우리가 깨달을 때 우리는 알게 되고, 우리가 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깨달음이란 밝은 전등이 마음에 켜져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항상 거기에 있었고, 우리가 그것을 다시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드러남입니다. 가장 큰 깨달음은 우리가 항상 완전히 깨달은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사실에 대한 무지를 없애는 것뿐입니다.
릴리스가 깨달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릴리스. Releasing.

릴리스는 자신의 참자아-신-을 발견하고 알기 위해서 당신의 생각을 내면으로 향하게
하는것입니다. 올바른 명상은 다른 모든 생각을 배제하고 ..
참자아-신-에 대한 생각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릴리스는 세상의 생각과 소란을 고요하게 해주고, 자신의 참자아를 볼 수 있도록 해줍니다.
릴리스는 수동적이 되는 게 아닙니다.
어떤 것도 들어올 수 있는 공백이 되려고 하지 마세요.

가장 좋은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입니다. 마음에 주어진 어떠한 질문도
우리가 기다리기만 하면 대답이 주어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그 대답이 오는 순간 그것을 거절합니다.
릴리스는 궁극적으로 지복의 평화를 가진 완벽하게 고요한 마음으로 인도합니다.

릴리스는 .그것.과 하나됨으로써 우리를 .그것.에 더욱 가깝고 친근하게 해주는
일상적인 세상과의 분리입니다. 릴리스는 참자아로 하여금 우리 안에 들어와서 머물고,
우리에게 참자아의 영광을 보여주어,
우리가 에고가 아니라 오직 참자아만을 원하게 해달라는 간청입니다.

< 매일 매일 실천할 수 있는 방법들 Practical Methods >
 
올바른 행동을 하기 위해서 알아야 할 2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1. 우리는 모든 존재가 악의 없음을 느껴야 합니다.
2. 자연스러운 것이 올바른 것입니다.
 
이 두가지 규칙을 따름으로써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올바로 인도되어질 것이고,
우리의 성장에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사랑으로 대하세요.
당신에게 일어나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온전히 책임을 지세요.
온전히 책임을 진다는 것은 당신의 생각에서 원인을 찾는다는 것이고,
그리하면 최초의 생각을 찾아낼 수 있고 그것을 없앨 수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인 실재와 변화하는 비실재를 구별하세요. 욕망 없음의 상태를 성취하세요.
구도 어떠한 것도 당신을 방해할 수 없는 곳으로 가세요.
영향 받지 않는 주시자가 되세요.
겉으로 보기에 불완전해 보이는 것을 완벽하게 보는 지점으로 가세요.
모든 사람과 모든 것에서 당신의 참자아를 보세요.
신과 모든 사람에게 끊임없는 감사의 태도를 가지세요.
이렇게 하면 항상 즐거울 것입니다.
다른 이로 하여금 자신으로 존재하도록 허용하세요.

고요하세요. 마음을 집중하세요. 끊임없이 당신의 길과 목표를 의식하세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찾아내고 그들과 성스러운 친분을 유지하세요.
당신의 성장을 도와주는 글들만을 읽으세요. 매일 매일 에고를 렛고우하세요.
에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마시고, 오직 자신의 참자아만을 생각하세요.
에고를 렛고우하시고 그것이 당신 자신의 참자아가 아님을 아세요.
그저 당신이 에고가 아니란 것만을 아세요.
결국 에고는 주목받지 못하고 사라져 버릴 겁니다.

매일 매일이 끝날 때 하루 동안의 행동을 돌이켜 보세요.
모든 것을 사랑으로 대하고, 자신의 행동을 사랑의 빛으로 돌이켜 보시고,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온전히 책임지세요.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대하는 행동을 사랑의 빛으로 돌이켜 보는 것은,
자신의 영적 성장의 정도를 나타내주는 척도이면서 동시에 영적 성장에 도움을 줍니다.

여러분에게 적대시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연습을 하세요.
당신의 감정을 억누르는 게 아닙니다. 만약 반대하는 감정이나 증오심이 있다면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는 태도로 그것을 알아차리세요.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무의식을 의식적으로 만들어주고 그것을 변화할 수 있게 해줍니다.
반작용의 근원을 살펴보고 그것들을 렛고우하는 것은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긍정적인 것을 강조하고 부정적인 것은 줄여가세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잘못된 행동이라도 하는 게 더 낫습니다.
잘못된 행동을 통해서 올바른 행동을 배울 수 있으니까요.

내면의 신이나 내면의 참자아 혹은 밖에 있는 신이나 스승에게라도 내맡기고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세요.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완전히 깨달은 존재이지만, 스스로에게
“나는 이것이 필요해.”, “나는 저것이 필요해.”, “나는 이것에 한계지어져 있어.”,
“나는 저것에 한계지어져 있어.”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지 우리가 한계지어져 있다는 느낌을
그만 멈추고, 우리의 본래 모습인 ‘무한의 존재’로 있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울한 기분에서 행복한 기분으로 가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 대하세요.

결과가 아니라 원인으로 있으세요. 기분에 빠져 있지만 말고 밖으로 드러내세요.
원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원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멈추세요.
그것을 마주 하세요. 어떤 것에도 저항하지 마세요. 모든 것을 받아들이세요. -
당신 자신과 당신의 생각도 포함해서- 신의 도움이 항상 거기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다른 길들. Different Paths.

사람들의 다양한 성품과 경향에 따라 깨달음으로 가는 데에는 크게 다섯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1. “나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
2. 지성과 이해를 사용해서 올바른 이해를 하는 것
3. 호흡 컨트롤을 통한 마음의 컨트롤
4. 신에 대한 사랑과 내맡김을 통한 헌신
5. 인간에 대한 비이기적인 봉사 행위
이 모든 길들은 모두 “나는 무엇인가?” 라고 하는 질문에 대답을 함으로써 끝이 납니다.




.생각. Thoughts.

사실은 당신이 찾고 있는 .그것.이 당신을 더 찾고 있습니다.
이것은 삶의 원인과 목적에 대한 공부이고,
인간은 원래 무한한 존재라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그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화의 목적은 인간이 이렇게 무한한 존재라는 것을 더욱 더 발견해가는 과정입니다.
이 공부의 실질적인 목적은 우리의 한계를 렛고우 하는 것이고,
우리는 점점 더 자유로워지고 건강해지고 행복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무한한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에나 어떤 이에게 그 힘을 주지 않는 한
누구도 우리를 해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높은 존재들의 도움을 바라고 또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한
그 도움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높은 스승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주지만, 우리는 선택하는 대로 그것을 받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상호적인 것입니다.
지구는 우리가 영원한 진리를 배울 수 있는 교실과 같은 곳입니다.
진리-의식에는 어떠한 저항도 없습니다.

모든 경험들에 교훈이 있습니다. 만약 그 레슨들이 어렵다면..
똑같은 어려움이 진리의 빛 안에서 용해될 때까지 반복될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이 바로 여기에 있고 우리의 생각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오직 천국만을 만들 것입니다.
자유로움은 오직 이해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바른 행동은 비록 자유에 도움이 되지만 자유를 가져다 주지는 않습니다.

참자아를 아는 이로부터 확인을 얻는 것은 아주 도움이 됩니다.
그것은 다른 이들이 당신이 틀렸다고 생각을 하더라도 당신이 옳다는 것을 확신시켜 줍니다.
우리가 성장함에 따라 우리는 새로운 사고 방식과 새로운 친구들을 얻게 됩니다.
결국에는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우리의 친구로 보게 될 것입니다.
기쁨이 커질수록 당신은 더욱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습니다. 기쁨은 한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홀로 서야 하고 결코 진리에서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아래로 떨어지게 될 겁니다.

신과 하나됨은 절대적인 안정입니다.

세상에서의 한계들은 쉽사리 렛고우되어지지가 않습니다.
수백만 년 동안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고 -에고를 통해서- 살아남고자 투쟁하기 때문입니다.
전지하고 전능한 존재가 자신이 그러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시간이 필요하겠습니까?
인류는 자신의 한계 없음을 회복하기 위해서 과학과 기계들을 이용해서 ‘물질 에너지, 공간
그리고 시간’을 정복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바로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을 자각할 때 그 결과
투시 투청, 텔레파시, 텔레포트, 염동력 등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불쾌한 말들에 대해서 반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이란 단지
우리의 고막을 울리는 소리 에너지에 불과합니다.
이런 조그만 에너지가 당신에게 영향을 끼치게 내버려 두지 마세요.
누구의 말도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가 뭔가를 해주길 원하는데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아서 상처받는다면
그것은 당신의 책임입니다. 다른 이가 당신에게 상처를 줄 수 없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하는 겁니다.
당신이 상처받은 느낌일 때 그것은 누구의 느낌입니까?
만약 그 느낌이 당신의 것이라면 당신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라면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서 좋은 의도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겁니다.
당신이 무슨 일을 하는가 하는 것은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른 이에게 의존하면서 행복해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드러내면서 표현할 때 행복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을 억누를 때는 불행합니다.
당신의 대답은 “예” 이거나 “아니오”여야 합니다.
“어쩌면”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느니 차라리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게 더 낫습니다.
잘못된 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올바른 행동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 되어야 합니다. 자유롭다는 것은 무언가를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자유는 우리에게 시내를 발가벗고 다닐 수 있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될 수 있습니다.
체포당할 수도 있고 다른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으니까요.
자유를 위해 필요한 것은 그것을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사는 방식으로 사는 것은 부자유입니다.
문제를 바로 잡으려고 하지 마세요.

완벽함을 보게 되면, 이것이 당신의 상상 속에 있는 불완전함으로부터
당신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신은 모든 것이고 신은 완벽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볼 때 우리는 겉으로 보기에 불완전해 보이는 것에서
오직 완벽함만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완벽함만을 생각한다면
오직 완벽함만이 있습니다. 저기 밖에는 당신의 의식 말고 다른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바깥에서 완벽하지 못한 것을 본다면 우리는 내면을 들여다 봐야 합니다.

오직 우리 내면에 있는 것만을 우리는 밖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당신은 저기 바깥에 있는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요?
당신을 바꿔 보세요.
생각이 원인이고 일어나는 일들은 결과입니다.
어떠한 악함도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악함이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제외하고 시간이란 없습니다. 과거는 항상 과거에 있고,
미래는 항상 미래에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의 삶을 렛고우하세요.
지금 이 순간의 진실을 알게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됩니다.
시간이란 현재 순간들의 연속입니다. 시간이란 정신적인 관념일 뿐입니다.
모든 마음들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고통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고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쁨을 생각할 때 우리는 행복하고 위로 올라가고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래로 내려가는 움직임보다 위로 올라가는 움직임이 더 클 때
결과적으로 우리는 위로 올라가게 됩니다.

빛을 이해하기 위해서 어둠을 탐구하지는 마세요.
건강해지기 위해서 질병을 깊이 들여다 보지는 마세요.
풍요로움을 가지기 위해서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지는 마세요.
행복을 이해하기 위해서 불행에 머물지는 마세요.
우리가 소유하는 모든 것이 우리를 소유합니다.

신은 태양처럼 모든 것을 골고루 비춥니다. 식물이 약해지는 것은 태양의 잘못이 아닙니다.
신은 결코 저버리지 않습니다. 인간만이 그렇게 합니다.
신의 은총은 끊임이 없고 온전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받아들입니다.
 
당신의 중심을 창조에서 창조자로 바꾸십시오. 내맡김은 전면적인 것입니다.
헌신은 에고를 기꺼이 가라앉게 하는 것입니다.

에고가 작아질수록 신이 점점 커집니다.
하지만 당신이 “아이 엠 댓 아이 엠 I AM THAT I AM”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자신이 주제 넘은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당신의 타고난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에고가 적어질수록 마음은 더욱 고요해집니다.
마음이 고요해질수록 참자아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마음이 끊임없이 자신의 본성을 탐구해 들어갈 때,
‘마음이란 한계지어진 것’이란 것을 발견하게 되고,
바로 그 마음 뒤에 모든 것을 아는 전지함이 있습니다.
당신이 하나임의 한 부분인 한, 당신은 하나임으로부터 분리된 것입니다.

있다는 것은 .존재.입니다. 오직 하나의 .존재.만이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I AM THAT I AM입니다. “나 I” 라는 단어는 숫자 1과 같습니다.
모든 “나 I”는 하나입니다. 신의 첫 번째 이름이 “나 I”입니다. 바로 당신의 참자아입니다.
홀로 있음Aloneness은 모든 것이 하나됨All-Oneness입니다.

외로움이란 당신이 자신의 참자아로부터 떨어져 있는 정도에 비례합니다.
분리의 느낌을 없애고 “나는 모든 것―모든 사람 동물 사물―이다.” 라는 느낌을 얻으세요.
매일 매일은 당신이 마스터라는 것을 증명할 기회입니다.

실재는 보고 듣는 것 보다는 느끼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의 오감은 제한된 것입니다.
신과 진리는 “가슴 속에 있는 느낌”입니다.
이 느낌이 무르익었을 때 당신은 여전히 세상을 보겠지만
세상을 당신과 분리된 것으로 보는 게 아니라 당신의 참자아로 보게 됩니다.

당신이 바로 세상이고 세상이 바로 당신입니다!
그리하면 세상은 객관적인 것이라기보다 주관적인 것이 됩니다.
당신은 모든 것이 올바르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한계 지어진 삶은 실재의 투영일 뿐입니다.

당신에게 유일한 인간적인 면은 오직 당신 스스로가 인간이라고 믿는 믿음뿐입니다. -
당신은 신입니다.-
이 믿음이 바로 부족함, 질병, 한계, 고통의 매개체입니다.
사랑이 최고의 것입니다. 증오심은 당신을 아래로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사람을 돕는 것은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사람을 돕는 것은 당신의 의지를 강요하는 것입니다.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사람을 돕는 것은 당신의 에고에만 이득이 될 뿐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길을 배우기 위해서 잘못된 길을 가고 있습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영적으로 돕고 자신을 해치는 그러한 상황에 결코 빠지지는 마십시오.
진리를 적용하는 것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이 유익함을 얻어야 합니다.

교육이란 것은 우리에게 한계의 영역에 있는 것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당신의 새장에서 벗어나 성자가 되십시오. Get out of your cage. Be a sage.
우리는 모든 어머니들이 우리의 어머니이고, 모든 아버지들이 우리의 아버지이고,
모든 아이들이 우리의 아이들인 곳에 도달해야 합니다.
언어는 이원성의 도구이고 분리를 가져옵니다.
언어에는 말하는 자와 듣는 자 그리고 말해지는 것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됨에서는 모든 것이 알려지기 때문에 언어는 쓸모가 없습니다.
믿음이란 남에게 얻어들은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신뢰는 믿음보다 강합니다. 확신은 신뢰보다 강합니다.
앎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의심도 없습니다.
가장 높은 아름다움은 그저 존재함입니다.
밖에서 찾게 되면 ..당신은 한바탕 병치레를 하게 될 것입니다.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당신은 생생히 살아 번성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입을 통해 나오는 것이, 입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만약 당신의 의식을 알기를 원한다면 당신 주위에 무엇이 있는지 둘러보십시오.
온전하게 당신의 참자아-신-에게 내맡기는 것이 자연의 법칙,
혹은 신의 법칙을 작동시키는 비밀입니다.
순수한 사랑으로 행한 행위는 미래의 카르마를 만들지 않습니다.
카르마는 성장할 기회를 주는 신의 선물입니다.
인생이 그를 시험하는 사람은 운이 좋은 사람이니,
그는 성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시험이 클수록 그는 더욱 크게 성장할 것입니다. 인간의 곤경이 신의 기회가 됩니다.
우리가 참자아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모든 것은 더욱 아름다워져 갑니다.
영감으로 가득한 기쁨은 다른 어떤 오락거리보다 훨씬 더 큰 기쁨입니다.
영감은 전지함의 영역으로 발을 디디는 것입니다.
당신의 가슴이 올바른 방향으로 향할 때, 당신의 생각이 올바른 방향으로 향합니다.
당신의 주의를 다른 사람의 .존재.로 향하게 하세요.
당신의 조그만 에고를 벗어버리세요.

사랑하는 것은 사랑받는 것보다 더 행복합니다.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훨씬 더 행복합니다.
행복은 내어주려는 정신에 있는 것이지 물건에 있는 게 아닙니다.
진정한 영적인 비전을 보게 되면 그는 결코 예전과 같아지지 않습니다.
그는 더 높은 이해와 사랑의 느낌으로 바뀝니다.

우리의 겉모습은 우리의 시각에 따라 달라집니다. 육체의 눈으로 볼 때
모든 것은 거칠게 보입니다. 정신적인 눈으로 볼 때 모든 것이 미묘합니다.
영적인 눈으로 볼 때 오직 무한한 참자아만이 있고, 모든 것은 하나의 무한함이 됩니다.
깨어있는 상태에서 육체는 펼쳐져 있는 물질 세상을 지각합니다.
꿈꾸는 상태에서 멘탈체가 이름과 형상으로 되어 있는 정신적인 창조물들을 지각합니다.
꿈도 없는 깊은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지각되지 않고 오직 참자아만이 존재합니다.
 
목표를 이루는 데 걸리는 시간은 개인에 따라 아주 다양합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극소수이기 때문에 즉각 성취하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결국에는 이것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에 대해 죽으면 불멸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을 서커스처럼 보세요. 당신 자신은 밖에 있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요.
이성과 느낌이 서로 일치할 때 우리의 내면에서 더 이상 갈등은 없을 겁니다.
당신은 스스로를 도울 수 있는 만큼만 세상을 도울 수 있습니다.
행동함은 소유함보다 더 높은 것입니다.
존재함은 행동함보다 더 높은 것입니다.
생각은 태양이 희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실제로 태양을 희미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최선의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마음이 고요하고 행복할 때에만 결정을 하세요.

지금 현재의 우리는 우리의 과거의 생각들의 총합의 결과입니다.
누군가에게 충고하는 것은 도둑질과도 같습니다.
그것은 다른 이로 하여금 스스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없앨 수도 있으니까요.
당신이 다른 이에게 무언가를 제안할 때, 다른 이가 원하는 대로..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태도를 취하세요.
고통은 우리가 그것을 자각하고 느끼는 순간 꺼져버립니다.
고통의 90%는 고통 그 자체보다 단지 고통의 기억입니다.
하지만 똑같이 느껴지죠. 슬픔은 도둑과 같은 것입니다.

조급함이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지금 당장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동정심은 다른 이의 고통을 느끼고, 그 사람이 있는곳으로 내려가는것입니다.
자비란 다른 이가 겪는 고통을 느끼지는 않으면서도 이해하고
그를 들어올리기 위해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몸이 피곤하다는 것은 사랑의 느낌이 결핍된 것에 의해 몸에 독성이 쌓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갈등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피곤해지지 않습니다.
몸에는 무언가를 할 지성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거죠.
어떤 것에도 물들지 마세요.
우리는 한계 지어진 몸과 동일시할 수도 있고,
무한한 참자아와 동일시할 수도 있는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우리의 것인 기쁨은 무한합니다. 기쁨은 우리 자신의 타고난 본성입니다.
부분의 사람들을, 세상과 사람들에서 기쁨을 찾고 있지만 실망하게 되죠.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는 의도가 가장 행복한 결말을 가져옵니다.

어릴 때는 우리의 의지를 육체의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사용합니다.
청소년 시절 우리는 의지를 올바로 사용하는 법을 배우지 못해서
그것은 맹목적인 것이었습니다. 청소년 범죄를 일으키는 것은 바로
그 맹목적인 의지입니다. 나이가 들어서 우리는 삶의 목적을 충족시키는
채널이 될 수 있도록 지혜를 가지고 의지를 다루어야 합니다.

우리의 의지가 자연의 법칙에 반대될 때면 즉각 저항이 생기지만,
자연의 법칙과 조화를 이루게 되면 아무런 저항이 없습니다.
의지는 위대한 성취자입니다.
당신이 행복할 때면 아무런 의지를 불러일으킬 필요가 없이 ‘있는 그대로 허용’합니다.
고통이란 당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 주위의 것들에 대해서 죽는 것이지 자신에 대해서는 결코 죽을 수 없습니다.
찾는 자를 찾아보세요.
그가 누구인지를 찾게 되면 당신은 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그것이 대답입니다. 기적은 신이 아닙니다.
기적의 근원이 신입니다. 기적은 앎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필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에 앎을 가지는 것이고 그러면 그것이 이루어집니다.
세상 무엇이든 모든 것은 오직 의식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행동에 책임을 져주지 마세요.
그로 하여금 자신의 배움을 통해 성장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지적인 토론이란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의 것인 생각이 떠도는 정신적인 행위입니다.
그것은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고 그저 제자리를 빙빙 맴도는것입니다.
유일한 정신적인 행위는 자신의 마음을 참자아로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의견은 진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독선은 자신의 견해가 받아들여지기를 원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에고가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독선은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리를 발견하는데 전혀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문제를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50% 이상 해결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문제를 자각하지 못하면 어떤 해결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꺼리로부터 도망친다면 우리는 그것을 미래로 미룰 뿐입니다.
밑바닥에서부터 정점에까지 감정을 나열해 본다면 무기력 - 슬픔 - 두려움 - 은밀한 적대감 -
분노 - 무관심 - 받아들임 - 자유 그리고 기쁨입니다.
 
두려워하면 그것이 나타날 것입니다. 두려움을 생각하는 것을 그만 두면
그것은 사라질 것입니다.

‘무언가에 반대하는 어떠한 생각이나 행동’이라도 그것은, 받아들이지 않거나
저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에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됨은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의도하거나 소망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나는 가질 수 있고, 될 수가 있고, 할 수 있습니다.

’ 왜냐하면 나는 나임을 드러내는 무한한 '나' 이기 때문입니다.

성장의 척도 Self-Growth Yardsticks
우리는 오로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나는 완벽하게 평화롭습니까?
나는 어떻게 사랑합니까? 나는 모든 존재를 사랑합니까?
나는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온전히 책임집니까?
나는 집착도 없고 혐오도 없습니까?
나는 자유로이 내가 원하거나 혹은 원하지 않는 것을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까?
나는 다른 이들의 존재를 허용합니까?
나는 내 주위의 사람들과 세상을 받아들입니까?
나는 나 자신을 받아들입니까?
나는 사람들의 생각과 바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습니까?
나는 나 자신을 자유롭고 진실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까?
나는 홀로 있으면서도 평화롭습니까?
나의 삶은 단순합니까?
우리가 하나임으로부터 멀리 떨어질수록 모든 것은 복잡해져 갑니다.
 

 
.카르마. Karma.

카르마는 보상의 법칙입니다. 우리가 뿌린 것은 무엇이든 우리가 거두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거나 행동한 것은 그에게 되돌아옵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미래에 똑같은 일이 생기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이처럼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은 과거에 행해진 무언가에 원인이 있습니다.
카르마는 삶에서 일어날 일이 정확하게 정해져 있다는 의미에서 운명입니다.
우리는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기로 되어 있는 모든 일들은 우리에 의해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모든 행동이 카르마이고 정해진 것이라면, 그 행동을 하게 되는 우리의 의지도
필연적으로 미리 정해진 것일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카르마와 운명을 정복할 수가 있습니다. 자유의지란 게 있습니다. ―
우리의 몸과 동일시할 것인지, 우리의 참자아와 동일시할 것인지,
몸과 동일시하지 마시고 몸의 즐거움과 고통 그리고 행동에 의한
즐겁고 불쾌한 결과들로부터 자유로워지세요.
 당신의 참자아와 동일시하고 지극한 행복의 고양된 상태에서 영원히 머무세요.
 
 


.참자아-신-궁극의 진리에 대한 요약. A Summary The Self-God-Absolute Truth.
 
참자아-신-은 무한하고 한계가 없으며, 하나임이고 분리되어지지 않는 것이며,
완벽하고 변함없고 시간을 넘어서 있고, 시작도 끝도 없으며,
온전하고 전부이고, 전지하며 전능하고 편재한 것입니다.
만약 신이 모든 것이라면 틀림없이 우리도 그러합니다.
만약 신이 대양과 같은 것이고 우리가 바다의 물방울과 같은 것이라면,
각각의 물방울은 바다가 가지고 있는 모든 특질과 자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바다와 마찬가지로 각각의 물방울은 축축하고 습기가 있고
염분이 있고..
H2O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만약 신이 영원하고 시간을 넘어서 있으며 모든 것이라면,
우리 모두는 지금까지 그리고 지금 현재 앞으로도 항상 우리가 찾고 있는 바로 그 신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고는 자신을 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신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이 다만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I AM THAT I AM”이라는 것만이 될 때까지
그 사실에 대한 앎을 넓혀가는 것뿐입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우리가 이제껏 찾아왔던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아야 할 목표는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I AM THAT I AM”입니다.
하지만 이 앎은 단지 테이프에 녹음된 것과도 같은 지적인 앎이 아닙니다.
이 앎은 오감을 고요하게 하고, 마음을 내면의 참자아가 스스로를 드러냄으로써
우리에게 해답을 줄 때까지 안으로 향하게 해서, 참자아를 깨달음으로 해서 경험하는 앎입니다.

아무도 신 혹은 진리를 배울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가 스스로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스승은 단지 방향만을 보여줄 뿐이고,
우리가 직접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모든 진리는 증명 가능한 것입니다.
어떠한 것도 전해들은 말로 받아들이지는 마세요.
우리 각자는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의 절대적인 진리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 하나의 절대적인 진리를 알기 전에는 우리는 상대적인 진리의 거죽만 만지고 있습니다. 이성과 사유 그리고 제한된 감각을 이용하는 것은,
‘마음의 아래 측면’의 레벨에서 작동하는 것이고,
우리를 절대적인 진리에 이르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들을 절대적인 진리의 방향으로 향할 수 있게 이용해야 합니다.
영감, 앎, 초의식이 절대적인 진리를 드러내 줍니다.

사람의 타고난 성향에 따라 5가지의 주요한 방법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쉬운 방법은 
1번째는 사랑과 신에 대한 헌신입니다.
2번째는 이기적인 관심 없이 인류에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3번째는 지성과 이해를 통하는 것입니다.
4번째는 호흡을 통해서 마음을 컨트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5번째는 “나는 누구인가?” 라고 하는 질문을 참자아가 스스로 드러날 때까지
탐구하는 자아 탐구입니다.

우리가 성장하는 속도는 그것을 얼마나 열망하느냐에 비례합니다.
인간은 자신을 몸 마음 그리고 영혼으로 생각합니다.
영혼이 바로 참자아 ― 무한으로 전지전능하며 모든 곳에 현존하는 편재입니다.
마음은 물질적 우주를 창조하고 투사하는데 영혼이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몸은 마음의 창조물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삶이란 원인과 결과의 제한된 영역에 속한 것입니다.
자연의 법칙 혹은 신성의 법칙은 원인과 결과에 조화롭게 작동합니다.
우리가 인생의 창조자가 되고 마스터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그저 우리의 생각이 원인이고,
이 물질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 생각의 결과물이란 것만 알면 됩니다.
 
만약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가 오직 원하는 것들’만 마음에 품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얻는 것’이 될 것입니다.

기억하세요. 마음은 오로지 창조만을 한다는 것을요.
그리고 우리가 마음에 ‘무엇’을 품고 있느냐에 따라,
건설적이거나 혹은 파괴적인 것들을 창조한다는 것을요!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우리가 한계지어진 몸이 아니고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후에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전지하고 전능하며 편재하는,
순수하고 무한하며 영광스러운 참자아’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장입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 세계신문명운동연합
글쓴이 : 빛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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