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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괴롭거든 세상을 버려라, 멈추면 행복해진다” 사는 것이 힘들고 괴로울 때

황령산산지기 2017. 9. 10. 18:48

괴롭거든 세상을 버려라, 멈추면 행복해진다사는 것이 힘들고 괴로울 때

 

 

전쟁 같은 삶

 

전쟁 같은 삶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하여 피튀기게 싸웁니다. 어느 한편이 항복하기 전에는 전쟁이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전쟁에는 부모와 자식간의 전쟁도 있고, 부부간의 전쟁도 있고, 상사와 부하간의 전쟁도 있습니다. 반면 평화가 있습니다. 아낌 없이 주고, 늘 도움을 주고, 말을 할 때는 사랑스럽게 하고, 눈높이 맞추어 동등한 배려를 해 줄 때 싸움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9월 첫 번째 전재성박사의 강독모임에서는 화합하는 모임과 불화합 하는 모임에 대한 경을 읽는 것으로 시작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불화합 모임은 어떤 것인가? 그 모임의 수행승들이 세상에서 다툼을 하고, 싸움을 하고, 논쟁을 일으키며, 서로 입에 칼을 물고 다툰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모임을 불화합의 모임이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화합의 모임은 어떤 것인가? 그 모임의 수행승들이 세상에서 화합하고, 기뻐하고, 논쟁을 하지 않고, 우유와 물처럼 화합하여, 서로 사랑스런 눈으로 대한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모임을 화합의 모임이라고 한다.”(A2.42)

 




화합하는 모임과 불화합의 모임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말은 서로 입에 칼을 물고라는 말과 서로 사랑스런 눈으로라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견해차이에 따릅니다. 어느 모임에서든지 견해 차이가 없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서로 틀리다고 하여 입에 칼을 물고 서로가 서로를 찌를지 모릅니다. 이런 견해 차이는 부모자식간에, 부부간에, 상사와 부하간에도 발생합니다. 그때 마다 입에 칼을 물고 서로가 서로를 찌른다면 이를 불화합 하는 모임이라 했습니다. 전쟁 같은 삶입니다.

 

눈으로 말하는 자들

 

불화합 하는 모임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박하고 비천한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천박한 모임에 대하여 산만하고, 불손하고, 동요하고, 수다스럽고, 지껄이고, 새김이 없고, 알아차림이 없고, 집중이 없고, 마음이 산만하고, 감관이 거칠다면”(A2.41) 이라 했습니다. 만나서 서로 떠들고 수다떨며 왁자지껄한 것이 연상됩니다. 이럴 때 자신의 견해와 맞지 않으면 서로 틀렸다고 하며 입에 칼을 물 것입니다.

 

화합하는 모임은 눈으로 말하는 듯 합니다. 경에서는 서로 사랑스런 눈으로 대한다면라 했습니다. 눈으로 말하면 말이 필요 없습니다. 서로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탁발에 먼저 돌아 온 사람이 자리를 깔면 됩니다. 나중에 돌아 온 사람이 자리를 게면 됩니다.

 

쓰레기는 먼저 발견한 사람이 치우면 됩니다. 맞벌이 한다면 먼저 온 사람이 밥을 하면 됩니다. 먼저 본 사람이 먼저 하면 이래라 저래라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우유와 물처럼 화합하여라 했습니다. 본래 기름기 있는 우유와 투명한 물은 섞이기 힘듭니다. 서로 견해가 다르더라도 서로 다름을 인정한다면 우유와 물처럼 화합하여 서로 사랑스런 눈빛으로 대화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멈춤에 대하여

 

견해가 다르면 나와 틀렸다고 하여 입에 칼을 물고 서로가 서로를 찌릅니다. 이런 행위는 멈추어야져야 합니다. 니까야강독모임에서 전재성박사는 멈춤에 대하여 이야기 했습니다. 앙굴리말라를 제도한 부처님의 예를 들어 나는 멈추었다. 그대는 멈추어라!”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흉악한 연쇄살인자를 부처님은 멈추게 했습니다. 용기 있는 자라면 감히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런 멈춤에 대한 가르침은 기독교에서 예수가 죄 없는 자 있으면 돌로 쳐라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부처님은 부처님이 멈추게 한 사건이 두 번 있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싸끼야족(석가족)을 멸망시키려는 꼬살라국왕 위두다바(Vidudabha)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가 앞서 언급된 앙굴리말라라 합니다. 부처님은 가르침으로만 세상을 제도한 것만이 아니라 몸소 삶의 현장에서 맨몸으로 폭주하는 자를 멈추게 한 것입니다.

 

출생의 비밀에 분개한 위두다바(Vidudabha)

 

꼬살라국왕 위두다바는 출생의 비밀을 알고 분개했습니다. 위두다바는 출생의 비밀을 알고 나서 석가족을 멸망시키기로 결심했습니다. 출생에 대한 비밀은 법구경 47번 게송 인연담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출생에 대한 비밀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싸밧티 시에서 빠쎄나디 왕은 수천 명의 수행승들이 탁발하기 위해 거리를 지나 아나타삔다까(Anathapindika)와 쭐라 아나타삔디까(Culla Anathapindika), 비싸까(Visakha)와 쑵빠바싸(Suppavasa)의 집으로 가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왕궁에서 수행승들에게 매일 공양을 올려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처님의 허락을 받아 아난다 장로와 그 일행에게 공양을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여드레가 되자 궁중에서는 공양을 소홀히 하는 바람에 수행승들은 떨어져 나가고 아난다 장로만 궁중에 가서 공양을 얻어 왔다. 왕은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는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해서 까삘라밧투 시에 사신을 보내 싸끼야의 공주를 왕비로 삼겠다고 제안했다.

 

싸끼야족은 회의를 열어 왕족 마하나마와 노예사이에서 난 딸 바싸바깟띠야(Vasabhakhattiya)를 공주로 만들어 보냈다. 빠쎄나디 왕은 그녀를 왕비로 책봉했고, 왕비는 비두다바(Vidudabhava)라는 아들을 낳았다.

(법구경 47번 게송 인연담, 죽은 비두다바와 관련된 이야기(Vidudabhavatthu), 전재성님역)

 

 

꼬살라국왕 위두다바의 어머니는 싸끼야족 하녀출신이 낳은 딸입니다. 이는 빠세나디왕은 부처님을 존경한 나머지 싸끼야 족 출신의 왕족여인을 왕비로 맞고 싶은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자존심 강한 싸끼야족들이 그 신분을 속이고 빠세나디왕의 요구를 받아 들여 왕비로 보냈습니다. 그녀의 아들이 위두다바였는데 나중에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자 싸끼야족 정벌에 나선 것입니다.

 

부처님은 싸끼야족이 망하는 것을 막고자 했습니다. 위두다바의 대군이 까삘라밧투를 향해 진격해 올 때 그늘이 없는 앙상한 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를 위두다바가 세존이시여, 왜 그늘이 드리운 보리수 밑에 앉지 않고 앙상한 나무 밑에 앉아 계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대왕이시여, 상관하지 마십시오. 친지의 그늘이 나를 시원하게 해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이 세상에 친척이 없는 사람은 없다라고 설명 했습니다.

 

위두다바는 싸끼야족출신의 어머니에게서 출생했기 때문에 싸끼야족의 친척이 됩니다. 부처님과도 친척이 됩니다. 부처님이 땡볕에 앙상한 나무 밑에 앉은 것은 위두다바가 그늘이 되어 주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은 싸끼야족을 멸망시키려는 위두다바의 대군을 세 번이나 막았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는 어찌 할 수 없었습니다. 법구경인연담에 따르면 네 번째에는 싸끼야 족의 업보인 것을 알고 막지 않았다.”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폭력에 맨몸으로

 

부처님은 출생의 비밀에 분노하는 위두바다의 대군을 세 번이나 멈추게 했습니다. 또 하나 멈추게 한 것이 있습니다. 흉적 앙굴리말라입니다. 주석에 따르면 연쇄살인자 앙굴리말라는 천개에 하나가 모자라는 손가락을 확보 했습니다. 스승이 그를 파멸시키고자 천명의 손가락을 잘라 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딱까씰라 대학에서 지적인 교육을 받은 엘리트 아힝사까(앙굴리말라)는 스승의 아내와 관계를 맺었다는 모함을 받는 바람에 운명이 바뀐 것입니다.

 

앙굴리말라는 숲에서 살며 여행자를 공격하여 손가락뼈로 목걸이를 만들었습니다. 천개에서 하나 모자라는 손가락뼈를 확보 했습니다. 마지막 하나만 더 하면 천개가 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마지막 희생자가 앙굴리말라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것을 신통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를 살해하면 오역죄가 되어 구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부처님은 앙굴리말라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앙굴리말라의 천번째 희생자가 될 운명에 어머니 대신 부처님이 나타났습니다. 그것도 혼자 나타났습니다. 이에 대하여 앙굴리말라는 이 수행자는 혼자서 동료도 없이 생각하건데 운명에 이끌린 듯이 오고 있다. 내가 어찌 이 수행자의 목숨을 빼앗지 않겠는가?”(M86)라며  칼과 방패를 잡고 활과 화살을 메고 바싹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앙굴리말라는 부처님을 따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앙굴리말라가 온 힘을 다해 달려도 보통 걸음으로 걷고 있는 부처님을 따라 잡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부처님이 초월적인 힘을 행사한 것입니다.

 

나는 멈추었다. 너도 멈추어라

 

앙굴리말라는 아무리 힘껏 달려도 마치 제자리에서 달리기 하듯이 보통 걸음의 부처님을 따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앙굴리말라는 수행자여, 멈추어라, 수행자여, 멈추어라.”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앙굴리말라여, 나는 멈추었다. 너도 멈추어라.”라고 응답합니다. 앙굴리말라는 이전에 잘 배운 자였습니다. 부처님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물어 보기로 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이렇게 게송으로 말씀했습니다.

 

 

앙굴리말라여, 나는 언제나

일체의 뭇삶에 폭력을 멈추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살아있는 생명에 자제함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멈추었고 그대는 멈추지 않았다.”(M86)

 

 

부처님은 폭력을 멈추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이 앙굴리말라여, 나는 멈추었다. 너도 멈추어라.”라 한 것은 폭력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앙굴리말라의 이전 이름이 비폭력을 뜻하는 아힝사까(ahisāka: 不害者)’이어서일까 앙굴리말라는 부처님 말씀을 알아 들었습니다. 앙굴리말라는 나에게 진리를 가르쳐준 그대의 시를 듣고 나는 참으로 영원히 악함을 버렸습니다.”(M86) 라며 폭력을 멈추었습니다. 테라가타에서는 진리와 일치하는  당신의 시를 들었으니 참으로 저는 천 가지 죄악을 버리겠습니다.”(Thag.868)로 되어 있습니다. 악함과 천 가지 죄악의 차이입니다.

 

부처님은 폭력에 맨 몸으로 맞섰습니다. 맨몸으로 맞서서 위두다바의 대군과 흉적 앙굴리말라를 물리쳤습니다. 예수 역시 돌로 쳐죽이려는 사마리아여인을 보호 했습니다. 보통사람이라면 무서워서 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그럼에도 부처님이 이렇게 나선 것은 멈추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내적인 탐욕, 분노, 어리석음을 멈추는 것뿐만 아니라 외적인 탐욕, 분노, 어리석음도 멈추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세 가지 세상이 있는데

 

생각이 서로 다르다고 하여 각자 입에 칼을 물고 서로가 서로를 찌릅니다. 부처님은 이런 행위를 멈추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니까야강독모임에서 버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럴 때 멈춤과 버림은 동의어입니다. 어떻게 버려야 할까요? 세상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괴로운 자가 있습니다. 잠시도 이 세상을 살 수 없는 자입니다. 이 자에게 있어서 유일한 탈출구는 세상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살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상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입니다.

 

여러 세상이 있습니다. 상윳따니까야 꽃의 경에서 “수행승들이여,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싸운다. 수행승들이여, 진리를 설하는 자는 세상의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다.”(S22.94) 라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중생들이 사는 세상, 즉 중생계(sattaloka)를 말합니다. 중생계에서 세상에서 진리의 말을 하면 마치 싸움을 거는 것처럼 보여서 세상이 나와 싸운다라 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cakkavālaloka)도 있습니다. 이를 현상계 또는 기세간이라 하여 보통 우리가 말하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서 살다가 죽습니다. 이런 세상에 대하여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여래는 세상에서 성장했으나 세상을 극복하고 세상에 오염되지 않고 지낸다.”(S22.94) 라 했습니다. 

 

또 하나의 세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 즉 조건계(sakhāraloka)를 말합니다. 상윳따니까야 로히땃싸의 경에서 세계의 끝에 이르지 않고서는 괴로움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고 나는 말합니다. 벗이여, 지각하고 사유하는 육척단신의 몸 안에 세계와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과 세계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 있음을 나는 가르칩니다.”(S2.26)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을 버려야 한다라고 했을 때 조건계, 즉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을 버려함을 말합니다.

 

사는 것이 힘들고 괴로울 때

 

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괴로운 자들이 있습니다. 대게 내뜻대로 사는 자들입니다. 모든 것이 내뜻대로 되지 않으면 마구 화를 냅니다. 상대방을 내뜻대로 바꾸고자 합니다. 상대방이 따라주지 않으면 분노가 폭발합니다. 내뜻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세상도 내뜻대로 바꾸고자 합니다. 세상이 내뜻대로 되지 않으면 역시 분노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숫따니빠따에서 어떻게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생각처럼 되지 않습니다.”(stn588) 라는 말이 있듯이, 상대방과 세상은 내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은 버려야 합니다. 그렇다고 눈에 보이는 세상 현상계,즉 기세간을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으로 형성된 세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만들어낸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입니다. 삶이 힘들고 너무 괴로워서 도저히 못살 것 같은 자들인 지금 당장 멈추어야 합니다. 멈추는 것이 세상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멈추면 보인다는 것입니다.

 

흔히 마음을 버리라고 합니다. 탐욕의 마음, 성냄의 마음, 어리석음의 마음 등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더 가슴에 와 닿는 말은 세상을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죽을 정도로 괴로울 때 세상을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그 자리에서 멈추어 버리면 세상은 버려지게 됩니다.

 

세상을 버린 다는 것은 내면의 세계로 들어감을 말합니다. 어디 의지할 데 없는 사고무친의 고아가 내면의 세계로 들어 가는 것과 같습니다. 내면으로 들어가면 호흡이 보입니다. 호흡을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세계가 나타납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니까야강독모임에서 어떻게 버리면서 살 것인가가 가장 안전한 삶입니다.”라 했습니다. 이 세상을 괴로움 없이 안전하게 살려거든 지금 당장 세상을 버려야 합니다.

 

두 가지 출가가 있는데


이 세상에는 두 가지 행복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재가의 삶을 사는 행복이고, 또 하나는 출가의 삶을 사는 행복입니다. 부처님은 이 두 가지 가운데 출가의 삶을 사는 행복이 탁월하다.”(A2.63) 라고 했습니다.

 

또 부처님은 이 세상에는 두 가지 행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매인 행복이 있고 또 하나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읜 행복입니다. 부처님은 이 두 가지 행복 가운데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읜 행복이 탁월하다.”(A2.64) 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는 두 가지 행복이 있다고 합니다. 집착의 대상이 되는 행복과 집착의 대상을 여읜 행복입니다. 부처님은 이 두 가지 행복 가운데 집착의 대상을 여윈 행복이 탁월하다.”(A2.65) 라 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진정한 행복은 출가하는 것이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의는 것이고, 재생의 원인이 되는 집착의 대상을 여의는 것입니다.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출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세상을 버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승단에 들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승단에 들어 가지 못한 자들은 세상을 버리는 것이 출가입니다. 이른바 심출가(心出家)를 말합니다.


멈추면 행복해진다


심출가자들은 세상을 버림으로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멈추어야 합니다. 동요 중에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가 있습니다. 눈도 감지 말고 웃지도 말고 울지도 말고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앙굴리말라여, 나는 멈추었다. 너도 멈추어라.”라 했듯이 지금 괴롭다면 당장 멈추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괴롭거든 사고무친의 고아처럼 멈추어서 내면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내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여 세상과 싸우지만 탐욕과 분노의 세월로 살아 갈 뿐입니다. 설령 내뜻대로 하여 세상사람과 싸워서 이긴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탐욕과 분노로 살아간다면 자기자신에게 진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전쟁에서 백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기는 것보다 하나의 자신을 이기는 자야말로 참으로 전쟁의 승리자이다.”(Dhp.103)이라 했습니다.

 

전쟁과 같은 삶에서 이기려면 세상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동요처럼 그대로 멈춰라라 되어야 합니다. 멈추어 관찰하면 보입니다.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밤낮으로 관찰하라고 했습니다. 9월 첫 번째 전재성박사의 니까야 강독모임을 요약한다면 지금 괴롭다면 세상을 버려라. 여기서 멈추면 행복해진다.”가 될 것입니다.

 


2017-09-1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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