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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산방한담]먹는 일이 큰일 / 법정 스님

황령산산지기 2017. 8. 26. 11:15






먹는 일이 큰일


                                         / 법정 스님


며칠 동안 집을 비우고 밖을 나갔다가 돌아오면
부엌에 들어가는 일이 새삼스럽다.
더 솔직히 표현하자면 끓여 먹으러
주방에 들어가기가 아주아주 머리 무겁다.
버릇이란 이처럼 무서운 것이다.
요 며칠 밖으로 나돌아다니면서
남이 해준 밥을 얻어먹다 보니,
마땅히 손수 해야 할 일인데도
남의 일처럼 머리 무거워진 것이다.

남이 해 놓은 밥을 먹을 때는 그저 고마울 뿐.
밥이 질거나 되거나 혹은 찬이 있거나 없거나,
어쩌다 돌이 한두 개 섞였다 할지라도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면 그게 조금도 문제 될 수 없다.
남이 차려준 식탁을 대할 때의 그 고마움이란,
자취를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하게 느낄 것이다.
사람이 먹는 음식을 놓고 투정을 부리는 것은
결코 복 받을 일이 못 된다.
그런 사람은 남의 수고와 은혜를 모르기 때문이다.

절에서는 음식을 받을 때 다섯 가지를 생각한다.
이를 오관게(五觀偈)라고 하는데,
대충 그 뜻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德行)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에 온갖 욕심 버리고
이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道業)을 이루려고 이 공양을 받습니다.

밖에서 돌아올 때는 될 수 있는 대로
밝은 낮에 닿으려고 일찍부터 서두른다.
그래야 먼지도 털어내고 군불도 지피고
뜰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낙엽을 치울 수 있다.
간혹 차 시간이 맞지 않아 어두워서 빈집을 돌아오면
썰렁해서 영 어설프다.
서둘러 돌아온 자신의 거처인데도 마음이 붙지 않는다.

이따금 느끼는 일인데, 부엌에 들어서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갈 때가 있다.
‘이 짓을 언제까지 하지?’
그러나 순간. 아니지, 하는 데까지 해보는 거다.
미리부터 걱정을 앞당길 건 없어.
수행자는 그날그날을 최대한으로 살면 그뿐이니까.
홀로 있기를 원했으니 또한 홀로 자신을 형성해나가야 한다.
될 수 있는 한 즐겁게 살 것.
이 세상이 즐겁지만은 않으니까
내 자신이라도 즐거움을 만들어가면서 유쾌하게 살 것.
며칠 동안 보다가 보니 배추와 무가 많이 자랐다.
아욱과 상추도 이제는 뜯어먹을 만하게 컸다.
씨앗이 나올 만하면 꿩들이 와서 헤집는 바람에 속이 상했는데,
올가을에 전에 없이 밤이면 산토끼들이 내려와
배추와 무를 여남은 두렁이나 뜯어먹었다.
채소를 가꾸는 것은 사실 먹는 것보다 가꾸는 재미가 더 큰데,
크기도 전에 미리 뜯어먹으니 속이 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사람이 먹이를 가지고 짐승과 다툴 수야 없지 않은가.
같이 나누어 먹으면서 살 수밖에.
먹을 만큼 먹으면 자기들도 염치가 있겠지.

이곳 조계산으로 옮겨온 지 오늘로서 꼬박 7년이 된다.
어느덧 7년! 짧지 않은 이 기간에 나는 무엇을 했는가?
그때 심은 나무들은 몇 길이나 자라
이제는 앞산 마루를 가릴 만큼 컸는데,
나는 무엇인가. 이렇다 하게 해놓은 일도 없이
시은(施恩)만 지면서 세월을 보냈는가 싶으니,
인간사가 새삼스레 덧없고 부끄러워질 뿐이다.
이 산으로 처음 옮겨올 때는 지금 돌이켜보아도
그 기개와 꿈이 대단했었다.
그때의 상량문(上樑門)에는 이렇게 써놓았다.

왕사성에 죽림정사(竹林精舍)가 세워진 이래
출가 수행자들은 적정처(寂靜處)에 집을 지어 도량을 삼았다.
이 암자는 주추가 금강보좌(金剛寶座, 석가모니가 성도한 자리)에
뿌리 내리고 벽은 상락아정(常樂我淨)으로 둘러싸였으며
지붕은 무색계천(無色界天)으로 덮였다.
이런 집이므로 밤에 꿈이 있는 자는 들어올 수 없고,
입에 혀가 없는 자만이 가히 머무를 수 있다.
수십 년 전 비어 있는 자정암(慈靜庵) 터에 이제 새로 집을 지어
그 이름을 불일암(佛日庵)이라 고쳐 부른다.
이곳에 머무는 본분납자(本分衲子,참으로 발심한 수행승)는
오늘같이 흐리고 막막한 세상에
불일(佛日)을 더욱 빛나게 하라는 뜻에서다.
그 소임이 어찌 가벼울 수 있겠는가.
성성적적(惺惺寂寂)한 정진으로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이어받고,
하늘 찌를 대장부의 기상으로써
불토(佛土)를 장엄(莊嚴)해야 할 것이다.
이 암자를 세우는 데에 뜻과 힘을 같이한 여러 이웃들이
이 인연으로 다 같이 성불하여지이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알 수 없는 것은,
그 무렵 어째서 기를 써가면서
집을 하나 지으려고 했던가 하는 일이다.
더구나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주제에.
그때 집을 지으려는 생각이 일기 시작하자
이런 논리도 고개를 들었다.
지금까지 앞서 간 선인들이 지어 놓은 집에서
나는 아무 걱정 없이 잘 지냈는데
그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나도 하나 지어야 하지 않겠는가.
몸담아 살다가 인연이 다해 이 집을 비우고 떠나면
또 아무나 인연 있는 수행자가 와서 살게 될 것이다.
내가 지었다고 해서 결코 내 소유물은 아니다.
앞서 간 선사들이 다 그랬듯이…….

보이지 않는 법계(法界)의 어떤 뜻이
내 생각의 심지에 닿아 그렇게 연소작용을 일으켰을 것 같다.
그러니 우연히 떠오른 한 생각이 어떤 계기를 마련하고,
또한 그에 따른 결과를 낳는다.
그때 스스로 선택한 결단에 조금도 후회는 없다.
그러나 지금 같으면 큰절 귀퉁이에 방이나 한 칸 얻어,
여럿, 속에 섞이면서 일없이 지내는 쪽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흔히 수행승들은 입버릇처럼 생사대사(生死大事)를 말하지만,
허구한 날 손수 끓여 먹어야 하는 처지에서는
생사대사보다도 식사대사(食事大事)쪽이
현실적인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하루 한 끼를 먹건 두 끼를 먹건,
먹는 일을 엄숙한 일과로 삼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밖의 다른 일과는
물을 것도 없이 구멍이 뚫리고 만다.

7년 세월! 한 곳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
타성의 늪에 갇힐 위험이 있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배우고 익혔는가.
그저 부끄러울 뿐.
책상 앞에서 쓰는 안경의 도수가 조금 높아졌고,
쓰잘데기 없는 글과 말로 인해 헛이름만 드러내어
세상 살기가 그  전보다 부자유해졌다.
애초 이 산중에 들어올 때의 그 팔팔하던 서슬과 기상은
모성적인 조계산 덕분인지 많이 누그러졌다.

그래도 얻은 것이 있다면
홀로 마실 때의 향기롭고 그윽한 차 맛을 알게 됐고,
이제는 내 분수를 가늠할 수가 있다.
또 이곳에 들어와 거듭거듭 다진 뜻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큰스님만은 절대로 안 되어야겠다는 결심이다.
지금 숲에는 가을비가 적적하게 내리고 있다.
또 겨우살이 채비를 해야 하는가! 1982

                                      -『산방한담』중에서-

-산방한담(山房閑談) 월간 맑고 향기롭게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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