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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 세상을 버리면 완전히 다른 세계가, 팔정도는 소멸로 이끄는 길

황령산산지기 2017. 9. 24. 09:57


이 세상을 버리면 완전히 다른 세계가, 팔정도는 소멸로 이끄는 길

 

 

버리기 힘든 두 가지 욕구가 있는데

 

종종 공사장에서 사고로 죽은 자들의 뉴스를 듣습니다. 대기업 하청업체 직원이 위험을 무릅쓰고 공사현장에서 일하다가 사고를 당한 것을 말합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지옥에라도 쫓아 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세상에서 더럽고(Dirty), 힘들고(Difficult), 위험한(Dangerous)일에 목숨을 거는 것은 돈이 되기 때문입니다. 소위 3D업종에서 목숨을 걸고 일하다가 목숨을 잃는 경우가 종종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Dvemā bhikkhave āsā duppajahā. Katamā dve: lābhāsā ca, jīvitāsā ca. Imā kho bhikkhave dve āsā duppajahāti.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의 욕구는 버리기 어려운 것이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이득에 대한 욕구와 목숨에 대한 욕구이다.”(A2.117)

 

 

두 가지 욕구가 있다고 합니다. 이익(lābhāsā)과 목숨(jīvitāsā)입니다. 초불연에서는 이득에 대한 희망과 생명에 대한 희망이 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많이 차이 나는 번역은 욕구와 희망입니다. 이는 빠알리어āsā’에 대한 번역입니다. 빠알리어 아사sā)‘wish; desire; hope; longing’의 뜻으로 갈망의 뜻이 강합니다. 탐욕을 뿌리로 하는 욕구입니다. 불선법에 기반한 욕구이기 때문에 선법을 바탕으로 하는 희망이라는 번역어는 그다지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High Risk, High Return)

 

짤막한 이 가르침은 이득과 목숨에 대한 집착에 대한 것입니다. 이익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쫓아 가는데 아무리 목숨이 위험해도 서슴지 않습니다. 이른바 하이리스크 하이리턴(High Risk, High Return)입니다. 한자어로 표현하면 고위험고수익(高危險高收益)’입니다.

 

농구의 경우 골대에서 6.5미터 떨어진 곳에서 슛을 하면 3점으로 인정됩니다. 그러나 골대와 너무 멀어서 들어가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럼에도 3점슛을 시도하는 것은 고득점이라는 이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위험함에도 목숨을 걸고 사지에 나서는 것도 고수익에 대한 매력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목숨만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지에 들어가도 자신만은 죽지 않을 것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득에 대한 욕구도 버리기 어려워 왕을 섬기고, 농업에 종사하고, 양쪽 전열에서 전투로 뛰어들고, 산양의 통로에 많은 투창 등을 꽂아놓기도 하고, 배를 타고 대해로 나가기도 한다. 목숨에 대한 욕구도 버리기 어려워 사람이 죽을 때가 되어도, 자신이 백 년은 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운명을 예감하면서도 측은해 하는 사람이 보시를 베풀고 헌공을 하시오.’라고 말해도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살 것이다.’라는 욕구를 버리지 않고 아무의 말도 듣지 않는다.”(Mrp.II.156)

 

 

주석을 보면 이득에 대한 욕구와 목숨에 대한 욕구는 매우 유사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공통적으로 욕망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이익을 많이 내고 싶다는 욕구를 내었을 때 사막을 건너고 바다를 항해 할 것입니다. 심지어 전투에 뛰어든다고도 합니다. 용병을 들 수 있습니다. 용병이 되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고수익을 올리게 됩니다. 일본에서 도쿠가와 막부 말기 당시 시대의 흐름을 저지하고자 결성된 낭사조직인 신선조(新選組)’도 대표적인 예 중의 하나에 속할 것입니다. 그때 당시 신선조에 모인 자들은 떠돌이 무사들로 검() 한자루에 청춘과 목숨을 맡긴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살아 남았을 때는 급료가 많아 고수익이 보장 되었습니다.

 

장사꾼들은 이익이 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 갑니다. 이익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몰리기 마련입니다. 미국 서부개척당시 골드러시가 일었을 때 일확천금을 꿈꾼 자들이 서쪽으로 서쪽으로 간 것도 고수익에 목숨을 건 케이스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위험한 것은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라 봅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이익에 대한 욕구를 버리기 어려워 배를 타고 대해로 나가기도 한다.”라 했습니다. 이른바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입니다.

 

자신만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배를 타고 멀리 나가야 고수익이 보장됩니다. 네덜란드에서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었을 때 고수익이 보장되었습니다. 그러나 배가 난파될 위험성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먼 바다로 나가 인도네시아에서 향료를  가득 싣고서 유럽시장에 내 놓았을 때 천문학적 수익이 기대되었습니다.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인들도 고수익이 예상되었습니다. 물건을 가득 싣고 거대한 사막횡단에 성공했을 때 몇 배 또는 몇 십 배 이윤을 남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모두 목숨을 담보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전투에 임하는 용병이나 먼 바다로 항해를 떠나는 선원, 그리고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은 목숨을 거는 위험한 여행임에도 자신만은 무사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자신은 절대 죽지 않고 어떤 경우에서라도 살아 남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를 목숨에 대한 욕구라 합니다.

 

이득에 대한 욕구와 목숨에 대한 욕구에 매여 있는 한 어떤 위험도 감수합니다. 이른바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에 올인하는 삶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목숨에 대한 욕망이 지나치면 죽음이 임박해 왔음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집착과 미련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가지고 있거나, 많은 것을 누렸다거나, 많은 성과를 내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내 것이라는 집착 때문에 운명의 날을 예감 하면서도 죽지 않을 것이라 착각한다는 사실입니다.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과 타인을 만족시키는 사람

 

앙굿따라니까야 욕구의 품(Āsāvaggo)’에서는 이익에 대한 욕구와 목숨에 대한 욕구는 버리기 어려운 것이라 했습니다. 반면 같은 품에 만족에 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Dveme bhikkhave puggalā dullabhā lokasmi. Katame dve: titto ca, tappetā ca. Ime kho bhikkhave dve puggalā dullabhā lokasminti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종류의 사람은 세상에서 발견하기 힘들다. 두 종류란 무엇인가?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과 타인을 만족시키는 사람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종류의 사람은 세상에서 발견하기 힘들다.”(A2.119)

 

 

경에서는 두 종류의 사람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과 타인을 만족시키는 사람입니다. 주석에 따르면,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titto)’은 홀로 연기법을 깨달은 자(緣覺乘)나 번뇌를 부처님의 제자(阿羅漢)를 말합니다. 타인을 만족시키는 사람(tappet)’은 이렇게 오신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라 하는데 부처님을 말합니다.

 

스스로 만족하는 자들은 법을 펼칠 수 없습니다. 연각승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런 예는 선불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선불교에서는 할()과 방()을 이용하여 깨달음으로 이끕니다. 언어나 문자로서 설명이 되지 않으니 고함소리와 몽둥이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말보다 주먹입니다. 설명하자니 시간도 오래 걸리고 설명이 되지 않으니 고함을 치거나 때려서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연각승은 스스로 연기법의 원리를 알아 깨달은 자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에 대하여 조리 있게 심오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오로지 부처님만이 가능합니다. 부처님은 경, 응송 등 구분교의 형태로 45년간 언어로서 설법했습니다. 오로지 정등각자이기 때문에 설법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점이 타인을 만족시키는 사람과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의 차이일 것입니다.

 

주어진 조건에 만족할 줄 아는 삶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은 소욕지족(小慾知足)의 삶을 살았습니다. 주어진 조건에 만족하는 삶입니다. 있으면 있는대로 살고 없으면 없는대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탁발음식을 구했다면 한입 먹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구하지 못하면 굶으면 됩니다. 내일 또 탁발 나가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과거를 후회하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 삶입니다. 하루 한끼만 먹고 살아도 감관이 맑고 깨끗합니다. 만족할 줄 아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만족할 줄 모르는 자들은 천만금으로 주어도 양이 차지 않습니다. 법구경에서는 참으로 금화의 비가 내려도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만족은 없다.”(Dhp.186)라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금화의 비는 주석에 따르면 박수소리에 의해 야기된 칠보의 비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칠십년대 통키타 가수 윤형주가 있습니다. 학생시절에 유명해진 그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음악을 그만두고 의학공부에 매진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학업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것은 박수소리를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창 잘 나갈 때 그만 두어야 함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익과 명예와 칭송에 압도되면 만족을 모르게 됩니다. 주어진 조건에 만족하는 자만이 소욕지족의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고작 한줌의 돈 때문에

 

법구경 인연담에 따르면 칠보의 비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족할 줄 모르는 자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법구경 186번 인연담, 불만족한 수행승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 수행승이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 친교사가 모처로 가서 지침을 받으라.’라고 하자 그곳으로 떠나자 그의 아버지가 병이 들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몹시 보고 싶었으나 그를 불러줄 사람을 찾지 못했다. 죽을 때에 막내 아들에게 이 돈을 받아라. 내 아들의 발우와 옷을 사는데 사용하라.’라고 말하고 죽었다.

 

수행승이 집에 돌아오자 막내동생이 두 발아래 엎드려 울면서 존자여,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형에게 주라며 100까하빠나를 남겨주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젊은 수행승은 나는 돈이 필요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집집마다 탁발하면서 사는 삶이 무슨 소용인가? 100까하빠나면 내가 살기에 충분하다. 재가의 생활로 돌아가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불만에 싸여 경의 독송과 명상수행을 포기하자 황달에 걸린 사람처럼 되었다. 사미들이 그에게 물으면, ‘나는 불만으로 가득찼다.’고 대답했다. 이 일을 친교사가 알게 되어 그를 부처님께 인도했다.

 

부처님께서는 그가 불만인 이유를 묻자, 그는 불만을 갖게 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지금 얼마의 돈을 가지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100까하빠나라고 대답했다. 부처님께서는 질그릇을 가져오라.’고 해서 그것으로 그 수행승이 생계에 필요한 충분한 돈을 갖고 있는지를 헤아렸다. 음식을 위해 50까하빠나, 두 마리의 황소를 위해 24까하빠나 등으로 100까하빠나가 턱없이 부족했다.

 

부처님께서는 그 젊은 수행승에게 말했다. ‘수행승이여, 그대가 갖고 있는 돈은 너무 적다. 그 적은 돈으로 그대의 욕망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과거의 전륜왕들은 손짓만하여도 보석의 비를 내리게 해서 땅을 12요자나 높이까지 보석으로 채울 수 있었다. 그들은 서른 여섯 제석천이 죽기까지 왕으로 다스렸다. 그리고 그렇게 오랫동안 신들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했어도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지 못하고 죽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수행승들에게 전생담인 만다따자따까(mandhātājātaka: Jat.258)를 설하고, 곧바로 시로써 참으로 금화의 비가 내려도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만족은 없다. 욕망에는 쾌락은 적고 고통뿐이라. 현명한 님은 이와 같이 안다.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의 제자는 천상의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서조차 즐거움을 구하지 않고, 단지 갈애의 부숨을 기뻐한다.’라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이 끝나자 그 수행승은 흐름에 든 경지를 성취했다.

 

(법구경 186번 인연담, 불만족한 수행승과 관련된 이야기, 전재성님역)

 

 

수행승은 고작 100까하빠나 때문에 수행자의 길을 포기 했습니다. 마치 서부영화 황야의 무법자에서 영어제목 같습니다. 영화의 원제목은 “A Fistful Of Dollars”입니다. 번역하자면 한줌의 달러가 됩니다. 고작 한줌 밖에 되지 않는 돈 때문에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수행승이 손에 쥔 것은 얼마 되지 않는 금액입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불과 몇 백만원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그 돈이면 힘들게 탁발하여 생계를 유지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전륜왕의 재산을 예로 들어 하늘에서 금비가 내려도 감각적 쾌락에 대한 만족을 채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오욕과 오욕락은 아무리 마셔도 갈증이 나는 것처럼 천만금을 주어도 만족되지 않는 것이라 합니다.

 

행복지수공식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자라면 욕망의 근원인 갈애를 부수는 것이 오히려 더 만족하는 삶이라 합니다. 이는 소위 행복지수공식에서 분모에 해당되는 욕망을 최소화 하는 삶을 말합니다. 욕망을 최소화 하면 분자에 해당되는 재산이나 재물이 많든 적든 간에 행복지수는 올라갑니다. 그러나 감각적 욕망으로 가득찬 자는 분자에 해당되는 재산이 천문학적으로 많다고 하더라도 분모에 해당되는 욕망 때문에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지금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자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행복하다고 합니다. 분자에 해당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행복한 것은 분모에 해당되는 욕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소욕지족입니다. 주어진 조건에 만족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하루 한끼 먹고 사는 수행승의 얼굴이 맑고 깨끗한 이유라 봅니다.

 

눈곱만큼도 미련이 없어야

 

9월 전재성박사의 니까야강독모임에서는 두 종류의 사람에 대한 강독이 있었습니다. 끊임 없이 욕망을 추구하는 두 부류의 사람과 욕망을 놓아 버린 두 부류 사람들에 대한 것입니다. 전자는 욕망의 세계에서 살아 가는 자에게 해당되고, 후자는 욕망의 세계를 벗어난 자에 해당됩니다. 공통적 키워드는 욕망입니다.

 

욕망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욕계라 합니다. 그런데 욕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정수행을 하는 자들입니다. 선정수행을 하여 욕계를 벗어나 색계나 무색계에 이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삼계를 탈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장 첫번째로 요구 되는 조건은 욕망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욕계에서 욕망을 내려 놓기가 쉽지 않습니다. 욕망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고 욕망으로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에 욕심을 내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욕망으로 살아가면 세세생생 욕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욕계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요?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이 세상을 버리면 다른 세상으로 들어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이 눈곱만큼이라도 남아 있다면 결코 욕계를 탈출 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점진적인 공부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이른바 돈오점수입니다.

 

욕계의 사람들은 때가 되면 죽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흔적을 남겼기 때문에 그 흔적으로 인하여 또 다시 욕망의 세계를 살아 가야 합니다. 그런데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들은 일체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디. 똑 같은 이세상을 살아가지만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마치 하늘을 나는 새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 때 이 세상을 버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눈곱만큼도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이 없어야 함을 말합니다.

 

이 세상을 버리면 완전히 다른 세계가

 

이 세상을 버리면 완전히 다른 세계가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결코 다른 세계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다른 세계로 들어 가려면 우선 멈추어야 합니다. 멈추어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호흡관찰을 예로 들어 설명했습니다.

 

호흡을 관찰하면 호흡이 점차 느려지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전재성박사의 설명은 초기경전에 근거한 것입니다. 상윳따니까야 까마부의 경(S41.6)’에 따르면 멈추는 현상이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Saññāvedayitanirodha samāpajjantassa kho gahapati bhikkhuno vacīsakhāro pahama nirujjhati, tato kāyasakhāro, tato cittasakhāroti.

 

장자여, 지각과 느낌의 소멸을 성취한 수행승에게는 언어적 형성이 먼저 소멸하고 그 다음에 신체적 형성이 소멸하고 그 다음에 정신적 형성 이 소멸합니다.”(S41.6)

 

 


 

 

 

경에 따르면 장자 찟따는 까마부존자에게 상수멸정에 이르면 어떤 단계로 차례로 소멸되는지 묻습니다. 이에 까마부존자는 가장 먼저 언어적 형성(vacīsakhāra)’이 소멸되고, 그 다음에 신체적 형성(kāyasakhāra)’이 소멸되고, 마지막으로 정신적 형성(cittasakhāra)’이 소멸된다고 했습니다.

 

언어적 소멸은 사유와 숙고를 말하는데 초선정상태입니다. 신체적 형성은 호흡과 관련된 것으로 네 번째 선정에서 소멸됩니다. 호흡을 관찰하여 호흡이 느려져서 마침내 호흡이 사라졌다면 사선정 상태입니다. 멈추어서 관찰한 결과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 간 것입니다. 욕계라는 욕망의 세계를 떠나 색계선정이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갑니다. 이제는 지각과 느낌도 사라집니다. 이에 대하여 정신적 형성이 소멸한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상수멸(Saññāvedayitanirodha)’입니다. 상수멸에 이르면 지각도 느낌도 사라진 상태이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열반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상태에서 열반에 이르렀기 때문에 유여의열반이라 합니다.

 

팔정도는 소멸로 이끄는 길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원한다면 멈추어야 합니다. 이세상에서 사라지기 원한다고 하여 죽으면 끝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죽으면 흔적을 남기기 때문에 재생됩니다. 욕계를 떠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기를 원하는 자, 이 세상에서 완전히 소멸되기를 바라는 자라면 지금 자리에 앉아서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관찰하면 까마부의 경에 실려 있는대로 사유와 숙고라는 언어적 형성이 사라지고, 다음으로 호흡āpana)이라는 신체적 형성이 사라지고, 최종적으로는 지각과 느낌이라는 정신적 형성이 사라져서 이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애착을 갖고 이득과 목숨에 대하여 욕구가 있는 자와 이 세상을 철저하게 버리기 위하여 욕망을 내려 놓는 자가 있습니다. 욕계에서 태어나 욕계를 살아 가는 범부들은 욕망으로 인하여 영원히 욕계라는 세계를 떠나지 못합니다. 욕계라는 감옥에 갇혀 세세생생 살아갑니다. 그러나 욕계라는 감옥을 탈출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이 세계를 탈출하여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도 철저하게 버려야 합니다. 눈곱만큼의 미련도 남아 있어서는 안됩니다. 버리고 버리고 또 버려서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을 때 비로서 다른 세계에 들어 갈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 길이 바로 팔정도라 합니다. 그래서 전재성박사는 니까야강독모임에서 팔정도는 소멸의 이끄는 길입니다.”라 했습니다.

 

 

2017-09-2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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