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책!책!

[스크랩] 자아의 감옥에 갇혀

황령산산지기 2017. 9. 17. 17:54


자아의 감옥에 갇혀

 

 

메일 한통 받았는데

 

최근 메일을 한통 받았습니다. 블로그 관련 메일입니다. 메일에는 진흙속의 연꽃님의 자문과 조언을 구합니다.’라는 제목과 함께 간단한 사연이 소개 되어 있습니다. 무엇 보다 메일에 첨부된 파일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것은 pdf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나는 아직도 명상이 어렵다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법우님은 십년전 재가불자로서 수행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십년동안 경험 했던 것을 한권의 책으로 만든 것인데 일종의 수행지침서라 볼 수 있습니다. 모두 166쪽에 달하는 긴 글로서 출간을 앞두고 미리 보여 준 것입니다. 이에 자문과 조언을 구한다고 했는데 부끄럽고 창피할 따름입니다.

 

수행에 대하여 일천하고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진흙 속의 연꽃님 블로그 글들은 제가 교학적인 틀을 다지고 초기 불교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라 했습니다. 올린 글이 도움을 준 것은 틀림 없는 사실 같습니다.

 

지금 그 일이 일어났습니까?”

 

메일을 보내 준 각운님의 글나는 아직도 명상이 어렵다를 음미하며 읽어 보았습니다. 생생한 체험의 바탕위에 작성된 글이기 때문에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었습니다. 기억할 만한 구절은 따로 메모해 놓았습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라는 말입니다. 티벳에서 많이 사용되는 속담이라 합니다.

 

우리 일상에서 고민은 대부분 쓸데 없는 것이라 합니다. 고민 중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것이 40%이고,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것이 30%이고, 질병이나 재난에 대한 우려가 12%이고, 자녀나 친구들에 대한 걱정은 10%라 합니다. 모두 합하면 92%인데 한가지 특징은 지금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노후에 대한 고민도 있을 것입니다.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를 위하여 돈을 모으고 보험을 드는 등 나름대로 대비책을 세웁니다. 이런 일은 출가자라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출가공동체가 붕괴된 한국불교에서 각자도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하여 고민한다면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일이나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일에 고민합니다. 이에 책의 저자는 지금 그 일이 일어났습니까?”라며 반문합니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고민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의 삶을 지켜 나가면

 

현재에 집중하는 것만이 제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마음을 지나간 과거나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두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머물게 하세요.”라고 합니다. 이런 말은 이미 불교경전에 실려 있는 말입니다. 두 편의 게송을 들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나간 일을 슬퍼하지 않고

오지 않은 일에 애태우지 않으며

현재의 삶을 지켜 나가면

얼굴빛은 맑고 깨끗하리.”(S1.10)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

정복되지 않고 흔들림이 없도록

그것을 알고 수행하라.”(M132)

 

 




언제 보아도 마을 차분하고 맑게 해주는 아름다운 시입니다. 마음을 항상 현재에 집중하면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지 않아서 고민이 적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천방지축 날뛰는 원숭이 같습니다.

 

테라가타에서 딸라뿟따존자는마음은 동요하는 것이 원숭이와 같다.”(Thag.1117)라 했습니다. 이 말은 상윳따니까야 배움이 없는 자의 경 1’을 근거로 합니다. 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면 원숭이가 삼림의 숲속으로 다니면서 한 가지를 붙잡았다가 그것을 놓아버리고 다른 가지를 붙잡는 것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마음이나 정신 내지 의식이라고 불리는 것은 밤낮으로 바뀌면서 다른 것이 생겨나고 다른 것은 소멸한다.”(S12.61)라 했습니다. 원숭이처럼 눈을 끊임 없이 두리번 거리며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것이 마음입니다.

 

화가 났을 때 90초만 참으면

 

좋은 생각이 떠 오르면 지나가다가도 스마트폰 메모에 기록해 둡니다. 나중에 글 쓸 때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터넷 검색하다가 좋은 문구가 발견되면 역시 컴퓨터 메모장에 기록해 둡니다. 쌓이고 쌓이다 보니 꽤 많습니다. 죽 열람해 보면 모두 글쓰기 소재가 될 것들 입니다. 법우님이 보내 주신 수행지침서 나는 아직도 명상이 어렵다에는 주옥 같은 글로 가득합니다. 반드시 수행에 관련된 것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말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 중에 성냄에 대한 것도 있습니다.

 

화가 났을 때 “90초만 참으면 된다라고 합니다. 만약 90초를 참지 못하고 폭발하면 자신만 손해일 것입니다. 성냄이라는 것이 파괴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한번 화를 내면 모두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도 소원해지고 친구와의 관계는 단절됩니다. 만약 고객과 싸운다면 다시는 오더 하지 않을 것입니다. 90초를 참지 못하여 다투고 싸움을 하고 더 나아가 전쟁을 하게 됩니다.

 

힌두교에 없는 것 하나

 

각운 법우님의 글에서는 명상수행에 대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잘못된 수행방법에 대한 지적의 글이 많이 있습니다. 정견을 갖지 않으면 삿된 길로 빠져서 고생하게 됨을 말합니다. 어디까지나 가르침에 근거하여 수행해야 함을 말합니다. 그런데 법우님의 글을 읽어 보면 힌두교 성자의 명구도 종종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유지 크리슈나무르티는 말합니다. 생의 고통은 죽음 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그래서 진정한 깨달음은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고.”라는 말입니다.

 

힌두교 성자들의 깨달음과 불교의 깨달음이 공통되는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습니다. 힌두교에서는 존재의 근원 또는 마음의 근원을 인정합니다. 이런 경향은 참나라 하여 선불교에서도 인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음의 근원이라 하여 아트만이나 진아를 인정하는 힌두교 구루의 가르침과 열반을 말하는 부처님 가르침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해탈하는 것 까지는 같을 수 있지만 힌두교에는 없고 오로지 불교에만 있는 것이 바로 열반이기 때문입니다.

 

각운님이 힌두교 성자의 명언을 언급하긴 하지만 이는 해탈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힌두교에서는 해탈을 말하지만 열반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부처님 가르침에서만 열반이 있습니다. 그런데 열반은 연기의 가르침으로 밖에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 어느 종교도, 이 세상 어느 구루도 열반에 열반에 대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이는 연기법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연기법이어야만 열반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건법 빠띳짜사뭅빠다(paiccasamuppāda)

 

연기법은 원인(hetu)과 조건(paccaya)과 결과(phala)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누구나 잘 아는 십이연기에서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avijjāpaccayā sakhārā)”를 례로 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연기법은 인연과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히 이 연기법에 대하여 조건법이라고 합니다. 연기에 대하여 빠띳짜사뭅빠다(paiccasamuppāda)라 하는 것도 연기법이 조건법임을 말합니다. 조건에 따라 발생하고 조건에 따라 소멸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변치 않는 영혼이 있어서 몸에서 몸으로 몸을 갈아 탄다면 열반은 있을 수 없습니다. 조건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힌두교 성자들이 마음의 근원을 이야기 하지만 조건법이 아니기 때문에 해탈은 가능할지언정 열반은 실현될 수 없습니다.

 

마음이 끊어져야 열반이 실현됩니다. 마음이 끊어지려면 마음이 조건발생하고 또한 마음이 조건소멸해야 가능합니다.조건발생의 예로서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고(sakhārapaccayā viññāa)”가 있습니다. 여기서 의식은 재생연결식을 말합니다. 물론 삼세양중인과로 설명했을 때 입니다.

 

십이연기에서 형성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재생연결식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연기의 환멸문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환멸문에서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고(sakhāranirodhā viññāanirodho)”라 했습니다. 더 이상 재생연결식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 명색도 일어나지 않게 되어 세상도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여기서 세상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을 말합니다.

 

영원주의가 왜 모순인가?

 

부처님 가르침에서만 열반이 있습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연기법으로만 열반을 설명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하지 않으면 열반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 변치 않는 영원한 것이라면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조건에 따라 생멸하기 때문에 마음이 끊어질 수 있어서 열반이 실현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각운님은 초불연 각묵스님의 각주를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생명과 몸은 다르다.’는 견해는 몸이 여기서 끝나더라도 생명은 그렇지 않다. 생명은 새장을 벗어난 새처럼 자유롭게 간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이 견해는 생명은 이 세상으로부터 저 세상으로 간다고 거머쥐기 때문에 상견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성스런 도는 삼계윤회를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하나의 형성된 것이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다고 한다면 이미 생겨난 윤회로부터 벗어남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도를 닦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모순에 빠진다. 그래서 이런 견해를 가진 자도청정범행을 닦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초불연 상윳따2 255번 각주)

 

 

이것은 영원주의에 대한 설명입니다.초불연에서는 영원주의에 대하여 생명과 몸은 다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전재성님은 영혼과 육체는 서로 다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빠알리 원문에는 “Añña jīva, añña sarīranti”라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지바(jīva)‘the life’의 뜻이긴 하지만 문맥상 영혼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어떤 변치 않는 영혼이 있어서 몸만 바꾼다는 것이 상견론자들의 주장입니다. 이런 상견론자들의 주장은 디가니까야 하느님의 그물의 경에서 수행승들이여,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들은 영원주의자들인데, 네 가지 근거로서 자아와 세계가 영원하다고 주장한다.”(D1)라고 부처님께서 말씀 하신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자아와 세계가 영원히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상주론입니다. 힌두교도 마찬가지 입니다. 힌두교에서 해탈을 말 할 수 있어도 열반을 말하지 못하는 것은 상주불멸하는 존재의 근원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어느 것도 항상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깟짜야나곳따의 경에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S12.15) 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형성되어진 존재은이 끊임 없이 무상하게 소멸해 갑니다. 이것을 관찰하면 모든 존재가 영원하다는 영원주의는 사라집니다. 이것이 다름 아닌 연기법입니다. 이는 십이연기에서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고(sakhāranirodhā viññāanirodho”에 해당될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영혼의 실체를 인정하는 영원주의는 연기법으로 논파됩니다.

 

양극단을 떠나 중도로

 

두 개의 극단적 견해가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입니다. 영원주의가 조건소멸하는 것을 관찰함으로써 논파되듯이, 허무주의 역시 조건발생하는 것을 관찰함으로써 논파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대부분 영혼이 윤회한다거나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단멸론적 견해에 지배 되어 살아 가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연기의 가르침에 따르면 모두 삿된 견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수행승이여, ‘영혼과 육체는 서로 같다.’라는 견해가 있다면 청정한 삶을 살지 못한다. 수행승이여, ‘영혼과 육체는 서로 다르다.’라는 견해가 있어도 청정한 삶을 살지 못한다. 여래는 이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생겨난다.”(S12.35)

 

 

부처님 가르침 핵심은 연기법입니다. 사성제도 연기법이고 십이연기법도 연기법입니다. 모두 조건발생과 조건소멸에 대한 것입니다. 연기법은 조건법입니다. 그럼에도 영혼과 육체는 서로 다르다.’하여 어떤 변치 않는 영혼이 영원이 몸만 갈아탄다고 한다거나, ‘영혼과 육체는 서로 같다.’라 하여 몸이 무너지면 정신도 무너져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견해를 가진다면 청정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 이교도의 경에서는 이것은 해야 하고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도나 정진이 없는 셈이다.”(A3.61)라 했습니다.

 

자아의 감옥에 갇혀

 

세상에 수 많은 견해가 있습니다. 설령 그것이 성현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의 개인적 견해에 불과합니다. 그런 견해의 특징은 자아를 기반으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영원주의적 견해를 갖는 것도 자아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고, 단멸론적 견해를 갖는 것도 자아를 기반으로 하는 것입니다. 어느 영원주의자가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라는 견해를 가졌을 때 자아의 감옥에서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또한 어느 단멸론자가 영혼과 육체는 서로 같다.”라는 생각을 가졌을 때 역시 자아의 감옥에 빠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온이 내 것이라고 집착했을 때 오온의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오온의 감옥은 다름 아닌 자아의 감옥입니다. 누군가 그는 물질을 자아로 여기고,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고,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깁니다.”(M44)라 여겼을 때 몸이라는 물질에 갇혀 버리고 맙니다. 이외 느낌, 지각, 형성, 의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은 자아의 감옥에서 빠져 나오는 법문을 펼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무아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은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M148) 라 했습니다.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닌 무아이어야만 열반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자아의 감옥에 갇혀 있다면 열반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연기법으로 이루어진 존재입니다. 연기법은 조건법이기 때문에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합니다. 우리 몸과 마음도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하기 때문에 무아입니다. 무아이기 때문에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조건만 소멸되면 오온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아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은 오로지 부처님 가르침 뿐입니다. 거의 대부분 사람들은 자아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2017-09-17

진흙속의연꽃


출처 : 진흙속의연꽃
글쓴이 : 진흙속의연꽃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