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죽어도 좋아!”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무욕의 성자
우유에 도취한 듯
백세를 바라보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주변에도 아흔을 넘겨서 사는 어르신이 있습니다. 옛날 같았으면 환갑 전에 목숨을 다 했는데 갈수록 수명이 늘어 나서 이제 백세를 바라 보게 되었습니다.
오래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의 꿈일 것입니다. 그러나 젊음의 교만, 건강의 교만으로 육체를 험하게 사용한 자들은 늙어서 그 대가를 톡톡히 받습니다. 젊음과 건강은 즐기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상윳따니까야에서 악마 빠삐만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목숨은 길다.
훌륭한 사람이라면 그 목숨을 경시하지 말라.
우유에 도취한 듯 살아야 하리.
죽음이 다가오는 일은 결코 없다네.”(S4.9, 전재성님역)
악마는 사람의 목숨은 길다고 하며 우유에 도취한 듯 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린 아기가 누워서 우유를 마시고 포근한 요람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잠을 자듯이, 훌륭한 사람은 목숨이 길고 짧은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지금 젊은 자, 지금 건강한 자는 지금 이순간을 즐기기에 바쁩니다. 지금 이순간 만큼은 영원히 이 행복이 계속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그래서 한살이라도 젊어서 놀고자 하며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라 한다거나. “이 밤이 새도록 춤을 춥시다.”라 합니다.
머리에 불이 붙은 듯
어떤 이는 인생을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 합니다. 늘 하는 말이 “행복하세요”라며 ‘행복론’을 이야기합니다. 늙음과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아무 생각 없이 즐기자고 말하면 악마의 속삭임입니다. 부처님은 악마의 게송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의 목숨은 짧다.
훌륭한 사람이라면 그 목숨을 경시하라.
머리에 불이 붙은 듯 살아야 하리.
죽음이 다가 오는 것은 피할 수 없네.” (S4.9, 전재성님역)
부처님의 현실직시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은 목숨이 짧으니 머리에 불이 붙은 듯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 목숨을 경시하라고 했을까?
부처님은 목숨을 ‘경시하라(hīḷeyya)’ 고 했습니다. ‘목숨을 하찮게 여겨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목숨을 하찮게 여기라 했을까요?
사람들은 지금 젊다고 하여, 지금 건강하다고 하여 천년만년 살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신의 목숨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이는 “나의 삶은 확실하지 않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하다.”는 말로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사람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건강하다고 하여, 지금 젊다고 하여 죽음이 저 멀리 100세 까지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이 순간에도 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유에 도취되듯 세상 모르고 요람에서 잠을 자는 아기처럼 사는 자에게 지금 이 순간에 죽음이 닥친다면 어떻게 될까요? 해야 할 일이 많음에도 지금 이순간 최후를 맞는 다면 한(恨)이 많을 것입니다.
통일은 도둑처럼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운명은 도둑처럼 온다.’라는 말을 바꾼 것입니다. 도둑은 예고하지 않고 옵니다. 언제 어떻게 들이닥칠지 모릅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멀쩡하더라도 내일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 도 있습니다. 뉴스에 따르면 길거리를 걷다가 간판이 떨어져 죽고, 공연장에서 바닥이 무너져 죽고, 신입생환영회장에서 천정이 무너져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취한듯 살아 가는 자에게도 죽음은 도둑처럼 다가 올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사람의 목숨이 짧다.( Appamāyu manussānaṃ). “라 했습니다. 반면에 악마는 “사람의 목숨은 길다. (Dīghamāyu manussānaṃ)”라 했습니다. 사람의 목숨은 짧습니다. 길게 살아 보아야 백년입니다. 사람의 목숨이 짧은 것은 사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십년 후가 될지, 이십년 후가 될지, 백세를 채우고 죽을지, 아니면 오늘밤 최후를 맞이 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머리에 불이 붙은 듯 살아야 하리.(Careyyādittasīsova)”라 했습니다.
오늘 밤 최후가 될지 모르니
부처님 제자들은 젊은 날에 출가했습니다. 경전에서는 칠흑 같은 머리를 가졌을 때 출가했다고 표현 했습니다. 한참 혈기가 왕성할 때 출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를 이해 하지 못하는 자들은 젊을 때 즐길 만큼 즐기다가 나이 들어 출가해도 늦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악마의 속삭임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십년후, 이십년후 내가 살아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물론 기대수명이 있어서 팔십세, 구십세를 말하지만 기대수명일 뿐입니다.
부처님은 항상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하라고 했습니다. 늘 오늘밤이 최후의 밤이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는 예경지송에서 ‘죽음에 대한 새김의 이치’게송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의 삶은 견고하지 않지만
나의 죽음은 견고하고
나의 죽음은 피할 수 없으니
나의 삶은 죽음을 끝으로 하고
나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하느니라.
뭇삶은 행위의 소유자이고
행위의 상속자이고
행위를 모태로 삼는 자이고
행위를 친지로 하는 자이고
행위를 의지처로 하는 자로서
그가 지은 선하거나 악한 행위의 상속자이니라.
선행을 하면, 두 곳에서 즐거워하니
이 세상에서도 즐거워하고
저 세상에서도 즐거워하나니
‘내가 선을 지었다’라고 환호하고
좋은 곳으로 가서 한층 더 환희하느니라.
아! 머지않아 이 몸은
아! 쓸모없는 나무조각처럼
의식 없이 버려진 채
실로 땅 위에 눕혀질 것이니라.
형성된 것들은 실로 무상하여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이니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의
지멸이야말로 참으로 지복이니라.
(죽음에 대한 새김의 이치, 예경지송, 전재성님역)
예경지송에 실려 있는 이 게송은 후대사람들이 만든 것입니다. 경전 이곳 저곳에서 죽음에 대한 명상과 관련된 게송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요지는 항상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밤이 최후가 될지 모르니 머리에 불이 붙은 듯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죽음의 침상에 누웠을 때
부처님은 우유에 도취되듯 즐기며 살라 한적이 없습니다. 늘 죽음을 직시하며 살라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게송으로 말씀 했습니다.
“밤과 낮은 지나가고
목숨은 다함이 있네.
작은 시내에 물이 마르듯
사람의 목숨은 다해 버리네.” (S4.9, 전재성님역)
사람들은 매우 바쁘게 살아 갑니다. 월요일인가 싶으면 금요일입니다. 밤과 낮이 빠른 속도로 바뀌는 것 같습니다. 늘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언젠가는 최후의 밤을 맞이하여 죽음의 침상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왜 젊었을 때 출가하는가?
목숨이 다하는 그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 날이 백세가 될지 오늘밤이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우유에 도취되듯 아무 생각없이 사는 자에게도 최후의 밤은 오고야 말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사람의 목숨은 짧다.
저 피안은 도달되어야 하고
착함은 행해져야 하며
깨끗한 삶은 닦여져야 한다.
태어나서 죽지 않는 것은 없다.
수행승들이여, 오래 산다고 해도
백년이나 그 남짓일 것이다.” (S4.9, 전재성님역)
‘사람의 목숨은 짧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면 다급한 것입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목숨이 붙어 있을 때 ‘피안’에 도달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처님 제자들이 한살이라도 젊었을 때 출가하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부처님 제자들의 오도송
부처님 제자들의 오도송이 있습니다. 테라가타와 테리가타라 부릅니다. 최근 전재성박사는 주석을 포함한 테라가타와 테리가타를 완역했습니다. 이제까지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게송만 접했으나 제자들의 깨달음에 대한 게송도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제자들의 깨달음에 대한 오도송은 부처님의 오도송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을 제자들도 똑같이 깨달은 것입니다. 모두 깨달은 자들입니다. 깨달은 자들은 ‘아라한’입니다. 부처님도 아라한이고 깨달은 제자들도 아라한입니다. 어떤 이는 부처님에게만큼은 ‘대아라한’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기도 합니다.
연료가 떨어진 불처럼
아라한은 저 언덕으로 건너간 자들입니다. 다시는 이 언덕으로 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저 언덕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무아의 성자들에게 자아는 시설되지 않기 때문에 죽음도 태어남도 없습니다. 부처님은 완전한 열반에 든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씀 했습니다.
“몸은 부서지고
지각은 소멸하였고
일체의 느낌은 식었고
형성들은 그치고
의식은 사라졌다.”(Ud.92, 전재성님역)
우다나에서 부처님이 제자 딥바존자의 완전한 열반에 대하여 설명한 게송입니다. 게송을 보면 오온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육체가 부서짐과 함께 마음과 마음부수가 모두 소멸하고, 식고, 그치고, 사라진 것입니다. 특히 의식이 사라졌다고 했는데 이는 집착의 대상인 오온을 남김 없이 소멸 시켰기 때문에, 연료가 떨어진 불처럼 ‘결생(paṭisandhi)’되지 않는 지멸을 말합니다.
망치 불꽃처럼
완전한 열반은 저 언덕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언어적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재생의 업을 짓지 않아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 완전한 열반에 든 것으로 봅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망치불꽃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쇠망치로 쳐서
튕겨나와 반짝이는 불꽃이
차츰 사라져가니,
행방을 알 수 없는 것과 같이,
이처럼 올바로 해탈한 님
감각적 쾌락의 속박의 거센 흐름을 건넌 님,
동요를 여의고 지복에 도달한 님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는다.” (Ud.92, 전재성님역)
열반을 불꽃의 사라짐으로 비유합니다. 불꽃은 연료로 인하여 타오릅니다. 그러나 연료가 다하면 불꽃은 마침내 꺼지고 맙니다.
사람들은 삶의 과정에서 무수하게 연료를 만들어냅니다. 탐욕이라는 연료, 성냄이라는 연료, 어리석음이라는 연료입니다. 탐진치는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연료입니다. 다음생까지 이어지게 하는 연료가 탐진치라는 오염원입니다.
청정한 삶을 살아 가는 자들에게는 오염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연료가 바닥 났을 때 더 이상 불은 타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어디 다른 세계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쇠망치를 모루에 쳤을 때 불꽃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무아의 성자에게 오온의 죽음은 시설되지 않습니다. 오온의 죽음과 함께 불사가 됩니다.
아라한의 인생관
무아의 성자는 아라한입니다. 아라한은 살아도 그만 죽어도 그만이라 볼 수 있습니다. 자아관념이 없는 성자에게 있어서 애초부터 죽음과 태어남은 시설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삶에 대한 애착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하시사야도는 ‘아라한의 인생관’에 대하여 이렇게 법문했습니다.
“그러면 아라한이 이러한 괴로움을 끝내기 위해 빨리 죽기를 바라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하지만 때 이른 죽음이나 육신의 해체를 바라는 마음은 파괴적 욕망으로 아라한은 거기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래서「장로게」(Thag.654; 606; 1003)에는 ‘죽음을 바라지도 않고 삶을 바라지도 않는다’고 하는 어떤 아라한의 게송이 있는 것입니다.”(마하시사야도, 12연기 법문집 patticca-samuppada)
아라한의 인생관에서 ‘죽음을 바라지도 않고 삶을 바라지도 않는다’라는 말에 주목합니다. 아라한은 불가피하게 식사를 하고 잠을 자는 등 생리적 욕구를 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먹고 마시고 자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지 않습니다. 아라한에게는 그 무엇에 대한 갈애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삶에 대한 애착도
아라한은 살아 있어도 살아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죽는다고 해도 죽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관념이 있는 자에게는 이 세상이 있으면 저 세상이 있지만, 무아의 아라한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아라한의 인생관에 대하여 테라가타에서는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Maraṇe me bhayaṃ natthi
nikanti natthi jīvite
Sandehaṃ nikkhipissāmi
sampajāno patissato'ti.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고
삶에 대한 애착도 나에게 없다.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이 집적의 몸을 버려 버리리라.”(Thag.20, 전재성님역)
아라한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생존의 뿌리가 끊어 졌기 때문에’ ‘태어남이 부수어졌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남이 없는 아라한에게 있어서 생존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을 바라지도 않고 삶을 바라지도 않는 삶입니다. 오래 살고 싶은 욕망도 없고 빨리 죽어서 완전한 열반에 들고 싶은 욕망도 없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게송에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고 삶에 대한 애착도 나에게 없다. (Maraṇe me bhayaṃ natthi nikanti natthi jīvite)”라 했습니다.
“세상에 미련이 없어야 되요”
범부들은 즐기며 살기에 바쁩니다. 천상에서 반나절에 불과한 일생을 살다 가지만 마치 천년만년 살 것처럼 우유에 도취되어 살아 갑니다. 그러나 부처님 제자들은 젊은 나이 임에도 출가하여 청정한 삶을 살아 가고 있습니다. 오늘 밤 최후로를 맞이 했을 때 해야 할 일이 많다면 억울해 할 것입니다. 최근 김성철 교수는 중관학 강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어도 좋아가 될려면요 머리도 시원해지지만 감성도 한이 다 풀려야 되요. 세상에 미련이 없어야 되요. 그게 번뇌를 제거하는 겁니다. 탐욕, 분노, 교만 이거 다 쓸어 버리죠 그럼 ‘죽어도 좋아’입니다.” (김성철 교수, STB콜로키움 29회 중관학 3강)
수 년 전 노인의 성문제를 다른 영화 ‘죽어도 좋아’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영화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밤 최후를 맞는 다면 “죽어도 좋아!”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한 맺힌 자가 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한이 많다는 것은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많다는 것을 말합니다. 더구나 한으로 인하여 ‘홧병’으로 죽었다면 결코 선처에 태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한을 안고 갈 필요가 없습니다. 한이 있다면 이 생에서 풀어 버려야 합니다. 깨끗이 털어 버려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김성철 교수는 “세상에 미련이 없어야 되요”라 했습니다. 세상에 미련이 없는 자가 한이 없는 자입니다. 그리고 번뇌가 없는 자입니다. 가르침을 실천한 무욕의 성자라 볼 수 있습니다.
“일꾼이 급여를 기다리듯”
무욕의 성자에게 더 이상 죽음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오래토록 살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갈애가 소멸된 자에게 있어서 삶에 대한 애착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다만 조용히 때를 기다릴 뿐입니다. 이에 대하여 테라가타에서는 이렇게 표현 했습니다.
Nābhinandāmi maraṇaṃ
nābhinandāmi jīvitaṃ,
Kālaṃ ca paṭikaṅkhāmi
nibbisaṃ bhatako yathā.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삶을 환희하지도 않는다.
일꾼이 급여를 기다리듯,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Thag.606, 전재성님역)
죽음과 삶이 같은 마음을 말합니다. 아라한에게 있어서 “어찌 내가 오래 살아야 한단말인가 나는 삶을 원하지도 않는다.”(ThagA.II.257) 라는 생사일여의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에 대한 비유로 급여를 기다리는 일꾼으로 비유했습니다.
월급생활자들은 때 되면 월급이 나옵니다. 당연히 노동에 대한 대가입니다. 열심히 일하면 보상이 따릅니다. 마찬가지로 해야 할 일을 다 해 마친 아라한에게 있어서 죽음은 일꾼이 급여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아라한은 삶에 대한 애착도 없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지 없지만 조용히 때, 완전한 열반을 기다릴 뿐입니다.
지금 죽어도 좋아!
아라한에에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삶에 대한 애착도 없습니다. 해야 할 일을 다 해 마친 자에게는 오온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불사입니다. 때가 되면 불꽃이 꺼지듯이 사라집니다. 그때까지 어떻게 지낼까요? 범부들처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우유에 도취된 아기처럼 요람에서 잠만 자는 것이 아니라 ‘늘 깨어 있는(sampajāno patissato)’ 삶을 살아 갑니다. 무아의 아라한, 무욕의 아라한에게 있어서는 ‘지금 죽어도 좋은’ 것입니다.
Nābhinandāmi maraṇaṃ
nābhinandāmi jīnitaṃ,
Kālaṃ ca paṭikaṅkhāmi
sampajāno patissato'ti.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삶을 환희하지도 않는다.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Thag.607, 전재성님역)
2017-04-0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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