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스크랩] 업(業)이란 --나에게 있었던 일로 인하여 내 속에 있게 된것. 내 운명의 근원

황령산산지기 2017. 4. 1. 06:12

 

 

편 집 부

 

예로부터 업(業)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무엇을 두고 업이라고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업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어떤 것인가?

업이란 자신을 움직이는 근원 속에 있는 일을 말한다.

따라서 이 근원 속에 있는 업은 어떻게 해서 생기게 되는지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보자.

 

업이란 자신 속에 있던 일이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속에 있던 일이 어떻게 이런 일을 만들어내는가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자기가 한 일이 자신의 의식 속에 입력이 되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자연을 보다 세밀히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자연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모든 현상은 자신 속에 있던 일을 자신의 열매 속에 전부 입력시키고 있다.

인간은 의식을 가진 하나의 주체이다. 인간은 자기가 한 일을 의식 속에 전부 입력시키게 된다.

그리고 이 의식은 영체 구실을 하고 이 영체가 죽음에 임하게 되면 인체와 분리됨으로써 독자적인 자기를 존재하게 하고 있다.

이 영체 속에 있던 의식이 사라지면 영체는 곧 새 생명으로 태어나게 된다.

그러나 의식이 사라졌다고 해서 과거에 자기에게 있었던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의식은 사라졌지만 그 속에는 자기 속에 있었던 것이 그대로 잠재해 있다.

그래서 자기 속에 잠재해 있는 이 복합된 일들이 계속해서 하나의 반응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하여 영원히 자신 속에 있었던 일을 반복해서 지키려 하는 것이 업이며 업의 습성이다.

 

세상의 모든 일을 존재하게 하는 뜻은 단 두 가지가 있다.

세상은 이 두 가지의 뜻에 의하여 존재하게 된다.

하나는 인과의 법이다. 좋아지고 나빠지는 현상은 이 인과의 법에 의해서 나타나게 되어 있다.

하나는 윤회이다.

윤회라는 것은 모든 것이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있는 것은 계속적인 반복현상을 일으키므로 해서 이런 현상이 있게 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끝없이 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도 이 법칙에 의해서 존재하고, 모든 만물이 인과의 법에 의해서 나고 죽기를 계속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번 세상에 난 것은 스스로 소멸되지 않고 계속 자신을 존재시키려고 노력한다.

우리 속에 있는 일도 그런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 번 입력이 되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계속 그 영향을 받아 활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떠한 일을 자기 속에 존재하게 했는가에 따라서 현세가 다르고 내세가 다르다.

그래서 영원히 있게 될 자신 속의 일들이 다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가장 조심해야 할 일은 바로 인연을 짓는 일이다.

사람이 나쁜 것과 인연을 지으면 거기에서 나쁜 것이 생기게 되고,

좋은 것과 인연을 지으면 좋은 것이 생기게 된다. 이것 또한 인과의 법이다.

'업'은 바로 인과에 의해서 자기에게 존재하게 되어 있다.

이 업이 존재하는 한, 사람은 업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자신이 아무리 잘 살고, 아무리 좋은 일을 하려고 해도 업이 큰 사람이 하는 일은

자신이 좋아지기는커녕 남까지 망치게 되고, 자신이 좋아지려고 하는 일이 항상 자기 자신을 괴롭히게 된다.

그것은 자기 속에 좋은 근원이 있어야 하는데 자기 속에 그런 좋은 근원이 없으니,

자기에게 좋은 일이 나타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이럴 때에는 깨달음만이 자기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깨달음이 없이는 어떤 경우에도 자기 속에 있는 업의 지시를 거역할 수 없다.

 

이런 현상은 우리주위에서 얼마든지 볼 수가 있으며, 이것은 인간의 삶에 매우 중요하다.

그러니까 깨달음이 없이는 누구도 이런 일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자연의 법은 엄격하다.

수학에서 2+2가 1이나 5가 될 수 없듯이 진리에서도 있는 일은 불변한다.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한 평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깨달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좋은 일을 해서 좋은 결과를 사람들에게 있도록 한 일이 60%이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무지해서 실수한 일이 40%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스스로 자기의 감정과 잘못된 성질을 억제할 수가 있다.

그리고 잘못된 일을 노력하면 고쳐 나갈 수도 있다.

그러나 실수를 해서 자기가 자신 속에 지어 놓은 무지의 결과인 업이 60%이고 선업이 40%이면

이 때에는 좋은 일을 하기가 매우 힘이 든다. 왜냐하면 좋은 자기보다도 더 큰 업의 힘이 방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많은 문제가 어디에서 생기고 있는가 하면,

바로 이러한 업이 과거 자기 속에 있는 일로 인하여 생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업은 어떻게 해서 생기게 되는가?

그것은 자기 속에 있는 일에 의해서 생기게 된다.

그러면 업은 어떻게 해서 지어지는가? 그것은 말과 행동으로 짓게 된다. 행동으로 업을 지을 수 있고 말로서도 지을 수 있다.

 

말로서 어떤 업을 짓게 되는가?

자기가 모르는 말을 함부로 하면 그것은 업이 된다.

거짓말은 자기를 망치고 남도 망치는 일이 된다. 이것이 바로 말로 짓는 업이다.

그래서 과거 석가모니 부처에게서 제대로 배웠던 제자들은 경전의 맨 앞에 이렇게 써놓았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하고.

부처는 깨달은 분이었기 때문에 업의 세계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설명을 했다.

그의 제자들은 자신이 들은 말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면서 혹시 부처의 말을 그릇되게 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으로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서 '나는 이렇게 들었다.' 하고 쓴 것이다.

제자들은 깨달은 사람도 아니어서 세상을 확실히 본 것도 아니니까 부처에게서 배운 것을 '나는 이렇게 들었다.' 하고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자기가 확실히 모르는 것도 잘 아는 것처럼 말한다.

실제로 현실 문제를 통해 세상의 일을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농사일을 잘해서 좋은 열매를 수확하여 많은 이익을 얻는 사람이 농사일을 잘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농대의 교수는 이러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일을 잘하는 학생들을 만들어 낸다. 왜냐? 일을 잘하는 사람은 제대로 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사람에게서 배워야 제대로 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일을 잘하는 사람에게서 배워야 거기서 배운 사람도 일을 잘할 수 있는 것이다.

공대의 교수가 미국의 유명한 공과대학을 나왔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나의 기계를 항상 다루는 곳에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 대학에 와서 교수 생활을 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다른 사람에게 전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에게서 배우는 사람들이 기계를 잘 다룰 수 있고 유능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렇지 못하다. 경제를 가르치려면 다른 것은 볼 필요가 없다.

어떤 사람이 힘든 환경과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생활에 성공하여 별 문제가 없는 사람이 되었는가를 확인하여 그 사람을 대학의 경제학 교수로 세워 놓으면 그 교수는 학생들에게 어떻게 하면 돈을 벌고 잘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가르쳐줄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각 학교에서 수만 명의 선생이 남을 가르치고 있지만 선생이라는 사람들 중에 과연 몇 사람이나 자기 전공분야에서 제대로 일을 해보고 강단에 선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이 잘못된 교육이 사람의 의식을 버려놓았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은 것이다.

결국 학교에서 업을 얻어오는 셈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 업이 많고 많은 문제가 생겼다고 하겠다.

실수를 해서 자신이나 남에게 잘못된 일을 하게 된다면 그러한 실수를 우리는 악업(惡業) 이라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모르고 한 일, 무의식 중에 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면 이 또한 악업이라고 말한다.

이런 일을 많이 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오게 되는가 하면, 현재와 미래에 걸쳐 끝없는 불행이 이어진다.

우리는 왜 이런 일이 미래에 끝없이 영향을 미치게 되는가에 대해서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의식을 정밀하게 분석하면, 하나의 기체에 의식이 입력되어 있다.

의식이 이 기체를 움직일 때에는 이 기체 자체는 살아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모든 사물을 보고, 느끼고, 행동할 수 있는 자기 의사를 표출하게 되지만, 이 기체가 일정기간이 지나 노화되어 버리면 이 의식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 왜 이 의식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같이 나타나느냐 하면, 의식에 애착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의식자체가 죽지 않으려고 계속 움직이며 활동을 하니까 살아있는 것과 꼭 같다고 하겠다.

이 기체가 이런 상태에 있을 때에는 업으로 인해서 엄청나게 혼탁해지는 것이다. 기체의 질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의식 자체가 없어지면 이 기체 자체는 자기가 입력한 의식을 발생하는 자기 속에 있던 것을 가지고 태어나 새로운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그 생명이 부활되었을 때 그 생명력을 움직이는 힘은 바로 그 없어진 줄 알았던 그 의식에 의해서 나타난다.

과거의 기억을 상실했다는 것뿐이지 그 활동을 일으키는 그 근원은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의 일에 의해서 현재가 영향을 받고, 현재의 일에 의해서 미래에도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한 번 지어진 것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활동이 존재하는 한 없어지지 않는다.

아무 활동도 하지 않으면 그 의식자체는 죽게 된다.

그런데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현실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살아가는 물질은 있을 수 없다. 영체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영체가 곡식의 열매와 다른 것은, 몇 가지의 다른 세계와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세계라는 것은 천국과 지옥, 극락 같은 것이다.

생명의 세계는 현재의 세계를 말하고, 사후의 세계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말하며, 그리고 아무 것도 없는 근원의 세계가 있다.

생명체는 이런 세계를 계속 반복하게 되는데, 이 근원의 세계에 가면 아무 것도 없다. 이 세계에는 신(神)도 들어갈 수가 없는 세계이다. 산 자가 해탈을 했을 때만 들어갈 수 있는 세계다.

의식이 갈 수 있는 세계라 하면 그 곳은 살아있는 세계다. 그러나 근원의 세계는 살아있는 세계도 아니고 죽어있는 세계도 아니다. 이 의식이 없는 세계를 근원의 세계라 하고 태어남의 세계라고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새로 태어나게 하는 세계, 그 세계에서 보면 세상에 있는 모든 일을 볼 수가 있다. 그러니까 사람은 현세에 있었던 일로 인하여 끝없는 내세에서도 영향을 받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인연이 업을 만들고 업이 새로운 인연을 만든다. 업이 큰 사람은 진리를 들으면 화를 낸다. 성질에 맞지 않으니까 거부감이 생기는 것이다. 업이 중간정도인 사람은 진리를 들으면 반신반의한다. 업이 없는 사람이 진리를 들어야 기뻐한다.

"바로 그것이다. 맞다! 저 가르침은 대단하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업이 많은 사람을 가르치고, 깨우치려 하면 받아들이지도 않으니까 의심과 시비만 생긴다.

 이것은 업의 활동이 커서 옳은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가 중요시해야 할 것은 있는 일을 제대로 아는 사람에게서 배우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있는 일을 배울 수가 있는 것이다. 학벌이 높은 사람에게 배우기 보다 의식이 좋은 사람에게서 배워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5백년이상 유교라는 것이 존재했다.

유교는 이상적인 학문이다. 암기만 하면 된다. 또 신학문이 들어오면서도 사람들은 암기만 잘하면 판사가 되고, 검사가 되고, 행정 간부가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대학교수가 되고, 사회의 지도층 인사가 되었다.

하지만 이 암기 잘하는 사람들은 의식이 좋아서 암기를 잘하는 것이 아니다.

뇌의 활동이 좋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얼마든지 하루저녁에 몇 권의 책을 읽고, 의식 속에 집어 넣을 수도 있다.

그리고 시험문제를 보면 의식 속에 있는 것을 내어놓으면 된다.

그런 사람이 사법고시에 일등을 하고 행정고시에 일등을 하게 된다.

그리고 학과성적에 일등을 해서 대학의 교수가 되고 사회의 지도층 인사가 된다.

유감스럽게도 이 사람들은 사회의 현실을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엄청난 시행 착오가 존재하게 되고, 그들은 자기들의 시행착오를 숨기기 위해 말을 또 만들어내게 된다. 말을 만들어 내는 것 자체가 업을 짓는 일이다.

자기가 모르는 말이나, 자기가 실수를 해서 거짓 말을 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말로 업을 짓는 일이다.

 이 업은 항상 자기에게 대물림을 한다. 그래서 자기 속에서는 그 업의 작용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된다.

만약에 사람들이 이런 불행에서 벗어나는 길을 원한다면, 스스로 배워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길을 전하는 일을 함으로서 선업을 지어야 한다.

축복이 되는 일은 선업이고, 남에게 피해가 되는 일은 악업이다.

악업을 짓지 말고 사랑을 배워서 행해야 옳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구하는 길이다.

우리는 이 업이라는 세계에 대해서 현실에 있는 일들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견딜 수 없는 일을 당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항상 자기가 하는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하는 것을 머리에서 떨쳐버려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아무리 많이 가르쳐도 근본이 나쁜 사람들은 잘못 살게 되어있다.

반면에 근본이 좋으면 가르쳐주지 않아도 뛰어나게 되어있다.

우리는 이런 일을 항상 역사를 통해서 확인해야 한다. 역사 속에는 우리가 모르는 모든 일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일들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

인간의 의식 속에 있는 일들이 반복되듯이 역사 속에 있는 일들이 계속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에서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은 역사 속에서 보면 된다.

잘 살려고 하는데도 잘 안 되는 것은 의지가 약하기 때문이다. 왜 의지가 약한가? 업이 크니까 의지가 약한 것이다. 세상에 있는 일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인연에 의해서 존재해오고 있다.

자신 속에 있는 일이나 세상 속에 있는 모든 일이 인연에 의해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지 인연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돌감을 만들어 냈으면 그 돌감은 계속 돌감을 만들어 낸다. 그

래서 돌감을 세상에 있게 하는 것이고,

단감이 만들어 졌을 때는 단감이 계속 단감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계속 단감이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일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업이란 무엇인가?

업은 업이라고 대답을 해서는 안 된다.

나에게 있었던 일로 인하여 내 속에 있게 된 것으로, 내 생명의 근원에 있게 된 일들을 업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내 생명 속에 있는 이 업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그것은 과거로부터 나에게 있었던 일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 것이다.

한번 존재한 것은 쉽게 없어지지 아니하니, 한 번의 실수로 인하여 지은 업은 수백 번을 되풀이하면서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업도 애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전생에 기생집이나 출입하고 술을 잘 먹던 사람은 현세에 태어나도 착실하게 살지 못한다.

여전히 기생집이나 출입하고 술만 먹고 다니게 된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많은 재물을 물려받는다 해도 곧 재산을 탕진해 버리고, 곧 어려운 입장에 처하게 된다.

결국 어려운 입장에 처하게 되어야만 그 짓을 그만 두게 된다. 그런데 그것도 이번 생에서 고생을 좀 한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다시 태어나도 다른 환경 속에서 같은 일을 하게 된다. 이렇게 끝없이 되풀이된다. 그래서 나중에는 망해 버린다.

과거의 노름꾼은 현세에 와서도 도박판에서 세월을 보내게 된다. 자기가 한 일 속에 그런 일이 있기 때문에 항상 그 일만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전생에 그림을 잘 그리던 사람은 현세에 태어나서도 화가가 된다. 그 사람은 그림을 배우지 않아도 그림을 잘 그린다.

그런 일이 자기 속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제부터라도 과연 내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확실하게 생각해야 한다.

사람들이 업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업을 짓지 않는 일이고,

사람들에게 선행을 함으로써 자신 속에 좋은 일을 있게 하는 것이다.

내가 좋은 일을 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선업을 오랫동안 행했기 때문에 악업을 억누를 수 있었던 것이다. 악업이 적고 선업이 커가자 그는 깨달음을 위해서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다.

선업이 큰 사람은 아무리 힘든 상황에 처해 있어도 그것을 극복 해 나간다. 태어날 때부터 근본이 좋으면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거기에서 스스로를 윤택하게 하는 지혜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있는 일을 바로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이 크면 클수록 선업을 자기 속에 쌓을 수가 있다. 깨달음 없이 선업을 자기 속에 쌓는다는 것은 매우 힘든다.

 

세상의 일을 설명하려면 인과와 윤회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있는 일이 모든 것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생명의 근원도 있는 일에서 생긴 것이고, 업의 근원도 있는 일에서 생긴 것이고, 윤회의 근원도 있는 일에서 생긴 것이며, 인과의 근원도 있는 일에서 생긴 것이다. 모든 일이 있는 일로부터 생기게 된다.

 

출처 : 어두운세상에길은있는가..책을 사랑하는 모임
글쓴이 : 진리의 빛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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