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천자(蚩尤天子)의
실존연구
치우천자의
실존연구
대륙의 역사상 최초의 전쟁을 통해서 본
치우천자의 실존 증명
一. 序 言 중국의 正史인 『25史』의 첫머리에 해당되는 『史記』권1에서 중국의
시조인 황제(黃帝)와 치우(蚩尤)가 탁록의 들에서 치열한 싸움을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에 대하여 중국인 임혜상이 저술한 『중국민족사』에서 중국
역사상 최초의 전쟁은 바로 황제와 치우의 탁록戰이며 황제는 한족(漢族)의 영수(領袖)이고 치우(蚩尤)는 묘족(苗族)의 추장(酋長)이었다고
설명하였다.
한편 우리는 930여회의 외침(外侵)을 받았다고 배워왔고 역사상 최초의 전쟁은 『삼국유사』에서 연(燕)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하여 그 무리 천여명을 이끌고 들어와 처음에는 진번조선(眞番朝鮮: 箕準조선)의 변경에서 살도록 허락받았으나 그 세력이 커지자 번조선
수도인 왕검성에 쳐들어가 조선왕 준(準)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이것이 우리 史書에 기록된 우리민족의 최초의 전쟁이라
할수 있다.
오늘은 『25사』를 중심으로 우리조상들의 전쟁에 대한 생생한 기록을 더듬어 봄으로서 그 용맹성을 찬양하고 한편 역사의
맥을 간추려 보는 시간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二. 人 物 比 較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기록보다 2천여년전의 전쟁의 주역인 중국의 황제(黃帝)와 우리의 조상인 치우(蚩尤)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구 분 |
황제헌원(黃帝 軒轅) |
치우천자(慈烏支桓雄 蚩尤) |
직 위 |
중국의
시조(三皇中一人) |
桓雄시대
14대왕(三聖記) |
사서상 성분 |
少典(諸侯)의 아들, 漢族의 領袖(중국민족사) |
古天子(史記), 苗族의 酋長(중국민족사) |
출 생 |
壽丘(산동성) |
|
재 위 |
100년 |
109년(三聖紀) |
향 년 |
111세 |
151세(三聖紀) |
능 지 |
陝西省黃陵縣城北 (中國歷朝帝王槪覽 上郡橋山 (史記지리지) 寧州羅州縣 子午山
(史記괄지지) |
山東城
東平郡 壽張縣(史記) |
후 비 |
元妃: 祖
二妃:方雷 三妃: 魚 四妃: 毋 |
견비총:山陽郡鉅野縣(史記) |
三. 두 인물에 대한 史書의 기록
1.
蚩尤天子(慈烏支桓雄)
가. 치우천자에 관한
기록은 『桓檀古記』에 포함되어 있는『三聖記』 전하편 『太白逸史』 및 『揆園史話』 그리고 중국의 『25사』에 많은 면을 할애하여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여기에 기록된 내용을 중점적으로 설명 하도록 한다.
나. 『삼성기』上下편에 의하면 신시역대기에
치우천자는 14대 환웅으로 적혀
있다. < 신시역대도표 >
왕 대 |
재위년 |
한웅이름 |
서 력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
94 86 99 107 93 98 81 73 96 100 92 105 67 109 89 56 72 48 |
거발한 환웅 거불리 우야고 모사라 태우의 다의발 거
련 안부련 양
운 갈고(독로한) 거야발 주무신 사와라 자오지(치우) 치액특 축다리 혁다세 거불단 |
BC3898 3804 3718 3619 3512 3419 3321 3240 3167 3071 2971 2879 2774 2707 2598 2509 2453 2381 |
다. 『太白逸史』의 神市本紀에
의하면 晉나라의 『天文誌』를 인용하여 "蚩尤旗는 꼬리별혜성과 비슷하여 뒤가 꼬부라져서 깃발을 닮았다. 깃발이 보이는 곳 바로 밑에 兵亂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치우천왕이 승천하여 별이 되신 때문이다.
『通志』氏族略에는 "蚩尤氏는 蚩尤의 후예(後裔)이다."라고 했고
혹은 창서(蒼署)는 高辛과 더불어 역시 모두 치우씨의 後裔이다. 대극성(大棘城)에 태어나 이리저리 옮겨다니다가 山東의 회북(淮北)으로 옮겨
살았다."고 하였으니 ,대저 치우천왕의 英風偉烈함이 먼나라의 깊숙한 곳에 이르기까지 전파되었음을 이로써 미루어 알수
있다.
<晉天文志蚩尤旗수彗而後曲象旗所見之方下有兵云則乃蚩尤天王爲列宿也 通志氏族略蚩尤蚩尤之後或曰蒼署與高辛亦皆蚩尤氏之苗裔生大棘城而轉徒於山東淮北者也盖蚩尤天王之英風雄列播傳 遠域之深推此可知也>라.
『揆園史話』의
太始記에 의하면 神市氏는 蚩尤氏에게 다스리게 하였다. 치우씨는 참으로 뛰어나 만고에 강하고 용감한 사람의 조상이 되었다. 치우씨는
하늘을 빙빙돌게하는 힘과 바람과 번개, 구름과 안개를 능숙하게 부리고 칼 창 큰칼 큰도끼 긴창을 만들어 초목과 날짐승, 벌레, 고기따위를
다스리게 하였다. - 치우씨는 대대로 兵器 만드는 일을 맡게되고 늘 적을 쳐서 나라 지키기에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
치우씨는 백성을 거느리고 황하 이북에 자리잡고 안으로는 용감한 병사를 기르고 밖으로는 세상의 변화를 지켜보다가 유망이 쇠잔해 짐을 보고 군사를
일으켜 출정하였다. 이때 형제와 친척중에서 장수될 사람 81명을 뽑아서 군사를 거느리게하고 갈로산(葛盧山)의 금을 캐서 칼과 창과
화살촉을 벼르고 만들게하여 군사를 한데모아 정비한 후 탁鹿땅을 떠나 구혼(九渾)에 가서 연전연승하니 그 형세는 마치 비바람 같아서 세상 만물을
두려워 떨게하고 그 위력을 천하에 떨쳤다. 치우씨는 1년동안에 9諸侯의 땅을 빼앗고 다시 옹호산(雍狐山)에 나아가 수금(水金)에서
시작하여 예과(芮戈)땅에 나가서 다시 군사를 정비하고 洋水를 떠나 공상(空桑)을 쳤다. 1년동안에 다시 12諸侯國을 얻으니 시체가 들에
가득하고 중국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하여 도망가거나 숨어버리게 되었다.
마. 『중국25사』 『史記』-오제본기 제1-에
의하면
- 응(應)은 蚩尤는 古天子(應 曰蚩尤古天子)라고 하였고 반대로 안차기(安此紀)의
기록으로는 諸侯들이 서로 침공하는데 蚩尤가 가장 포악하니 蚩尤는 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安此紀云諸侯相侵伐蚩尤最爲暴則蚩尤非爲天子也)
- 또한 관자가 말하기를 蚩尤는 노산에서 금을 캐어 五兵을 만들었으니 분명히 庶人은
아니고 제후의 자리에 있었다. (管子曰蚩尤受盧 山之金而作五兵明非庶人蓋諸侯號也)
- 찬이란 사람은 공자의 三朝記를 인용하여 치우는 서인으로 탐욕이
있는자(瓚曰孔子三朝記曰蚩尤庶人之貪者)라고 하였다.
- 용어하도에서 황제가 섭정시 치우의 형제 81인이 있었는데 짐승의 몸으로 사람의 말을
썼으며 머리는 銅이고 이마는 쇠이며 모래를 먹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五兵을 양성하고 무기를 만들어 천하를 진동케하고 무도하게 萬民을
殺害하였다.(龍魚河圖云黃帝攝政有 蚩尤兄弟八十人 獸身人語銅頭鐵額食沙造五兵仗刀戟大弩威振天下誅殺無道萬民)
- 『산해경』에서는 황제(黃帝)가 명령하여 龍으로 하여금 蚩尤를 공격케하니 치우는 바람과
비를 불러일으켜 대풍우를 좇아 다루었다. (山海經云黃帝令應龍攻蚩尤蚩尤請伯雨師以從大風雨)
- 위의 내용들을 종합하여 『史記』본문에 제후들이 모두와서 복종하는데 蚩尤는 가장
포악하여 능히 벌할자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諸侯咸來賓從而蚩尤最爲暴莫能伐) 또한 蚩尤가 난을 일으켜 황제의 명령을 듣지 않으므로
탁鹿의 들에서 치우와 싸웠다.(蚩尤作亂不用帝命於是黃帝乃徵師諸侯與蚩尤戰於 탁록之野)
- 황람의 말을 인용하여 치우의 묘는 동평군수장현함향성안에 있으며 높이는 7길이고
10월에 백성들이 제사지내는데 붉은 기운이 비단 같이 솟아 올라사람들이 치우기라고 부른다.( 皇覽曰蚩尤
在東平郡壽張縣함향성高七丈民常十月祀之有赤旗出如匹縫帛民名爲蚩尤旗) 또한 그 부인의 묘가 산양군 거야현(견비 在山陽郡鉅野縣)에 있다고
기록하였다.
- 보는자의 시각과 목적에 따라 치우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기록한 것을 볼수 있다.
그러나 치우가 누구인가하는 것을 공안국이 명확히 밝히고 있다. 즉 九黎의 통치자(君號:직위)가 치우라는
것이다.(孔安國曰九黎君號蚩尤是也)
바. 치우천자에 대하여 우리의 사서는 환웅시대의 14대 통치자로서 중국의 시조인 황제를
물리친 용장임을 기록하였고 중국의 사서는 蚩尤天子를 諸侯, 포학자(暴虐者) 또는 탐자(貪者) 등의 여러 가지로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 대한
토의는 황제에 관한 기록을 검토한 다음 설명하기로 한다.
2. 黃帝(軒轅)
가 . 황제(헌원)에 관한 것은 『25사』의 맨 첫 번째 책인
『사기』권1에 아주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황제의 지위와 치우의 관계 및 전쟁을 중심으로 토의하도록 한다.
나. 『사기』의 오제본기에 황제는 少典의 아들이라고 적고
있다.(黃帝者少典之子) 또한 황제의 姓은 公孫이요 이름은 軒轅(헌원)이라고 하였다.(姓公孫名曰軒轅) 그런데 有熊國의 君이 少典의
아들이라고 적고 있다.( 周曰有熊國君少典之子也) 또한 少典은 諸侯國號이고 인명이 아니라는
것이다.(皇甫謐曰少典者諸侯國號非人名也) 헌원이라는 이름은 헌원이라는 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름으로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黃帝生於壽丘長於淮水因爲姓居軒轅之丘因以 爲名) - 孔安國은 黃帝는 복회 신농과 더불어 三皇중 하나라고 하였는데 太史公은 五帝중의
하나로 적고 있다. < - 太史公依世本大戴禮以黃帝,전頊,帝 ,唐堯,舜爲 五帝 - 孔安國尙書序-伏犧,神農,黃帝爲三皇
少昊,전頊,高辛,唐,虞爲五帝>
다. 『사기』에 기록된 黃帝의 世譜는 아래와 같다.(표
추후보완)
황제의 아들이 25인인데 그중 성을 받은자는 14인이라고 한다. 金氏의 조상이라고
하는 黃帝의 正妃(누조)로부터 난23자중 少昊金天氏인 玄 (현효)로부터 교극을 거쳐 고신(제곡)에 이르고 여기에서 지(摯)와 방훈을 포함한
4남에 이르고 있다. 또한 황제의 正妃에서 난 창의로부터 고양(전욱)을 거쳐 궁선,경강,구망,교우,고수,우순,우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황제로부터 순,우에 이르기까지 모두 성은 같고 국호만 다르다고 기록하고 있으며(自黃帝至舜禹皆同姓而異其國號) 舜이 東夷人 이라고 적고
있다.(風土記云 舜東夷之人生姚丘) 8대손이 東夷人이니 그 할아버지인 黃帝도 東夷人일수 밖에 없을 것이다.
라. 黃帝는 죽은 뒤 교산(섬서성)에 묻혔다고 되어 있는데 괄지지에는 寧州 羅州縣東八十里
子午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3. 蚩尤와 黃帝에 대한
평가
우리사서인 『삼성기』에서 蚩尤天王이 靑丘를 개척하여 땅을 넓혔다고 했는데 청구는 지금의
중국 산동반도에 해당한다고 말하고 있고 (桓檀古記譯者) 환웅시대의 14대 통치자라고 기록되었다. 한편 『규원사화』에서도 치우씨가 백성을 거느리고
황하 이북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1년동안에 9諸侯의 땅을 빼앗고 또 1년동안에 다시 12諸侯國을 얻었다고 하였다. 軒轅과의 싸움도
10년동안에 70여회나 되었다고 하니 相互犬猿之間의 戰爭勇士였던 것 같다. 그러나 『중국25사』의 기록은 다른점이 있다. 그것은 蚩尤는
天子였고 黃帝는 少典의 아들이라고 하는 단어이다. 이한마디로서 황제와 치우는 비교할 수 없는 직위임을 알수 있다. 다만 사가들이 황제를
높이기 위하여 少典之子를 有熊國의 君이라하여 少典을 人名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고 蚩尤를 貪者,暴者,또는 諸侯정도의 위치로 낮출려고 애쓴
흔적이 여러곳에서 발견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
三. 탁록의
전쟁
1. 사서내용의
비교
蚩尤와 黃帝의 탁록전에 대하여 『삼성기』와
『규원사화』,『중국25사』의 기록을 비교해보면 각각 차이가 있다. ① 『삼성기』에는 蚩尤天王이 神農(삼황중1인)의 나라가
쇠함을 보고 天兵을 서쪽으로 일으켜 索度(산동성)로부터 淮岱(淮水와 岱山 사이의 中國要地)사이에 웅거하였다가 헌원과 탁鹿의 들에서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다고 한다.
② 『태백일사』의 신시본기에서는 蚩尤天王이 탁鹿의
들에서 軒轅과 싸울 때 큰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치 못하게 하면서 싸움을 독려하니 적군이 마침내 마음에 두려움을 일으켜 크게 혼란하여
도망가고 숨으니 백리안에 병사와 말이 보이지 않았다. 이에 淮岱의 땅을 모조리 점령하고 탁鹿에 城을 쌓았다. 이에 헌원의 무리들은 모두
신하되기를 원하며 조공을 바쳤다. 또한 헌원은 항상 거쳐를 안정시키지 못하는 장수와 사병을 시켜 지키게하는 전장에서 살았다고 한 것을 보면
헌원이 전전긍긍(戰戰兢兢)하며 살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③ 『규원사화』의 太始紀에 의하면 軒轅이 蚩尤氏에게
도전하여 탁鹿의 벌에서 크게 싸우니 蚩尤氏는 큰안개를 일으킴으로 적군은 정신이 흐려지고 손이 떨려 급히 도망가서 겨우 목숨만 부지하였다.
이리하여 淮南,山東,北京,洛陽을 모두 차지하게 되고 탁록에 城을 쌓아 淮南,山東에 자리잡게 되었다. 雲 의 軒轅記에 치우씨가 비로소 투구와
갑옷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알지못하여 銅頭鐵額者라 하였으니 헌원이 심한 낭패를 본듯하다.
④ 『중국25사』『사기』권1에 의하면 치우가 황제의
명을 듣지않으므로 탁록의 들에서 싸워 드디어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고 간략하게 기록하고 치우의 墓가 東平郡壽張縣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탁록에서 黃帝가 蚩尤를 죽였다고 했는데 그 묘가 동평군에 있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즉 황제가 탁록에서 치우를 살해하여 시체를
다른곳에 옮겨 장사했다고 하고 혹은 黃帝가 龍을 시켜 치우를 中冀에서 참한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같은 『중국25사』의 내용에 대하여
『환단고기』와 『규원사화』에서는 치우천자의 兄弟 81人이 銅頭鐵額의 동일한 복식을 하였기 때문에 치우천자를 살해했다고 기록하였다는 것은 사실은
81인중의 한 장수가 죽은 것이 틀림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⑤ 최근에 발간된 『중국민족사』에서
중국사에 기록된바 漢民族과 異民族의 최초의 전쟁은 바로 黃帝와 蚩尤의 탁록戰이다. 황제는 漢族의 領袖이며 蚩尤는 구려(九黎) 즉
묘족(苗族)의 추장(酋長)이었다.
<中國史上所記漢族與異族第1次戰爭卽黃帝與蚩尤
鹿之戰黃帝爲漢族之領袖蚩尤爲九黎卽苗族之酋長>
라고 기록하였고 그 전쟁의 경과와 결과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다만 漢族과 異族의
최초의 전쟁이 중국의 탁鹿에서 이루어 졌으며 그 장수는 黃帝와 九黎의 통치자인 蚩尤였다는것만 적었다. 그러나 『산해경』에서 蚩尤가 兵을
동원하여 黃帝를 征伐했다고 기록하였다.(蚩尤作兵伐黃帝) 이는 같은 중국의 사서에서도 기록이 엇갈리는 것은 내용을 조작하고 있음을 쉽게 알수
있다. 이미 오랜 옛날의 전쟁에 대한 승패보다 기록되어 있지 않은 그 시대의 이면을 찾아보는 것이 더 의의가 있는 일이라고
본다.
⑥ 탁록전 관련 지역
四. 최초의 전쟁과 歷史의 脈
1. 蚩尤와 黃帝를 역사적인물로 인정해야
한다.
치우와 황제는 모두 東夷人이었다. 중국사서는 이들을 동이인이라고 기록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동이인이고 같은 시대의 사람들이었다. 중국은 황제를 漢族의 시조로 삼아 중국역사를 약5백년이전으로 더 연장시켜
단군조선보다 약 3백년 앞선 역사로 꾸며 놓았다. 그렇게하 기 위하여 중국의 역사는 부득이 蚩尤天子를 역사적인물로 인정하고 『25사』의 앞부분에
여러 가지 표현으로 기록하였다. 또한 탁록의 전쟁을 漢族최초의 민족간의 전쟁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우리동이민족의 후예들은 그것을 모른체하고
있다. 여기에 대하여 우리역사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① 치우는 한지방을 다스린 제후에 불과한 인물이다. 우리역사와는 무관한
사람이다.
② 치우는 苗族 또는 東夷人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조상만이 아니고 中國 蒙古,朝鮮등
중국대륙에서 살던 여러족속을 통칭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중국인들이 시도하고 있는 어리석은 이론에 불과하다. 『중국민족사』에서
漢族來源을 16개족속으로 구분하여 그중 東夷族에 대하여 "夷或曰東夷,以其居於華夏系之東也."'說文:夷東方之人也.從大從弓'東夷一名詞廣狹二義
狹義專指秦以前居山東,江蘇, 安徽等省自淮以北沿海一帶之異民族. 廣義則爲秦漢以後版圖擴張, 在境內之東夷己歸同化,因別指滿洲,朝鮮,日本,琉球
等族爲東夷"라고 기록하여 秦나라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狹廣의 두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중국이 東夷를 희석하기위하여
설명한 내용이지만 『양서』를 비롯한 여러사서에 "東夷國曰朝鮮"이라고하여 東夷는 바로 우리조상임을 분명히하고 있다.또한 치우는 환웅을 뜻하고
환웅시대는 모든 사서에서 단군조선 직전의 우리선조임을 기록하고 있다. 우선 역사사실로 인정해야 한다.
2. 蚩尤天子의 위치를 우리역사에
揷入해야 한다.
중국사서는 중국사로 시작하기 때문에 그들의 시조인 황제로부터 역사의 기원을 기록할 수
밖에 없으므로 황제와 동시대의 치우천자만을 중국역사에 부분적으로 설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는 중국(한족)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이어져
나왔음을 환웅시대의 역사기에서 밝히고 있고 여기에서 치우천자는 九黎의 14대 통치자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晩時之感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치우천자의 위치를 찾아 九黎의 왕세대를 바로세워 단군조선 이전의 약1600년의 우리역사의 脈을 연결해야 한다.
五. 結
言
家門의 족보를 찾고 조상의 묘역을 가꾸는 일은 그 후손들의 당연한 일이요 책무라고 할 수
있다. 씨족의 역사는 그 후예들이 찾아서 관리하는 것이 이치인데 우리역사를 찾는 일에는 是是非非 반대하는 자가 많다. 일본학자들의 논문이나
주장만을 앞세워야 우수한 학자인것처럼 우리역사를 남에게 맡기거나 의존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수 없는 조상 팔아먹는(?)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온 중국인이 두려워 떨던 치우천자를 우리조상으로 모시고 우리역사의 진면모를 찾는 일에 다함께 노력합시다.
출처:우리역사의 비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