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스크랩] 라즈니쉬의 죽음의 예술을 읽고

황령산산지기 2016. 2. 6. 12:19

 

 

 

 

라즈니쉬가 쓴 죽음의 예술이라는 책이 있다.

하시디즘을 소개하며 얘길를 풀어 간다.

하시디즘이란 형식을 강조하는 전통적 유대교에 대한 반동으로 출현한 유태교의 신비주의 분파의 하나이다.

십팔세기 폴란드에서 경건주의 운동으로 나타나 오늘날

미국이나 이스라엘에서 소규모 집단으로 지속되고 있다.

하시디즘의 창시자 발셈은 우크라이나에서 천칠백년에

태어나 폴란드로 이주했다.

그는 경전을 신비적으로 해석하여 설교하고 병든 자를

낫게 하여 군중을 사로 잡았고 성자란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유태의 신앙이나 관습을 거부하지는 않았으나

진정한 종교는 신이 만물에 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가르침은 엄격한 규율이 없으며 삶과 기쁨, 그리고

은총을 강조한다.

지식보다는 믿음이 중요하고 가난하거나 무식할지라도

믿음과 정열과 따뜻한 맘을 갖고 있다면 신과 합일을

이룰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책의 한 부분에서 어떻게 신을 섬겨야 하는지

제자가 물었을 때 모른다고 대답을 먼저 하고 긴장을

푼 뒤에 비유 비슷한 얘기를 한다.

왕에게 두 친구가 있었는 데 둘다 유죄 판결을 받아 살려

주고 싶어도 법을 어길수가 없어 절벽 양쪽에 줄을 걷게

하고 건너게 해서 맞은편에 도착되는 자는 살려주게 했다.

왕의 명령대로 해서 먼저 건넌 친구는 무사히 건넜다.

남겨진 친구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외쳤다.

" 말해 주게나, 친구여 자네는 어떻게 건넜는가?"

먼저 건넌 친구는 뒤돌아 보고

"나도 모르겠네. 그러나 단 한가지 한 쪽으로 기울때마다

반대쪽으로 몸을 기울였다네."

여러가지 암시하는 바가 크지만

여기서 건너편이란 피안이나 해탈을 뜻하는 것같다.

그리고 살아가는 동안 지나치게 향락하지도,

지나치게 포기도 말고 중용의 도를 깨치라는 것이 아닌지.

세상안에 빠져있지만도 말며, 세상에 도피하지도 말라.

계속 균형을 유지하고 지나치게 향락에 빠졌다 싶으면

포기쪽으로 기울이라.

그리고 너무 포기자, 즉 금욕주의자가 되어간다고 느끼거든 다시 향락쪽으로 기울이라.

하나의 극단에 있지않고 정중앙에 있을 때 포인트가 있다.

그것이 신을 섬기는 길이다.

균형속에 머물러 있으면 신이 너에게 와닿고 네가 신에

가 닿은 것이다.

네가 정확히 중간에 있을 때 기적이 일어나고 너는 아무것도 아니며 너는 무라고 얘기하며

이것으로 너 자신으로 이르는 신비와 존재의 자물쇠를

풀 수있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하시디즘은 기도의 종교이다.

고행보다 자연스럽게 살고 삶의 작은 기쁨을 즐긴다.

모든 작은 기쁨들의 총합이 커다란 축복이 되고

커다란 축복이란 작은 기쁨들이 내면에 축적된 것에

지나지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은 의식의 미세한 입자에 불과하지만 거대한

것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인간의 내면에 하늘이 들어 있음을 강조한다.

의식에는 두가지 차원이 있는 데 소유의 차원 그리고 존재의 차원이고 인간에게도 두 종류가 있다한다.

하나는 더 많이 소유하고자 열심히 투쟁하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소유의 무용함을 깨닫고 존재의 방향으로,

자신이 누군이지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종교적인 인간은 모든것의 무용함을 깨달고 자신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할 수없음을 아는 사람이다.

소유자는 즉 부자는부를 소유하고 있다지만 사실은 소유물이 그들이 소유하고 있고 소유물에 괴롭힘을 당한다.

소유의 세계에서 자신을 분리시키고 순수한 공간만 존재할 때 그 것이 너의 존재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마음이란 지금까지 모아온 것의 총합에 지나지 않고 마음이란 존재 내부에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서

마음의 너머에 진정한 존재가 있고 소유의 너머에

진정한 존재가 있다.

외부에서 물건을 모으듯 내부에서 관념을 모아와서

물건애 애착을 갖지않고 관념에 애착을 가지지않을 때 돌연 존재의 하늘이 열린다고 한다.

하시디즘에서 말하는 죽음은 자아의 죽음을 얘기하고

무아의 탄생을 예고한다.

부분의 죽음이 전체의 탄생이고 인간의 죽음은 신의 탄생으로 다가는 서는 첫걸음이라 표현한다.

죽음을 두려워 하면 삶도 두려워하고 잘 산다는 것은 종국에

죽음조차 신에게 맡긴다는 뜻같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감각은 바같으로 향해 있는데

내면을 들여다 보는 것을 명상이라 얘기하고 제삼의 눈이라고 말한다.

그 내면을 들여다 보면 밝은 빛에 익숙한 눈이 어둔 곳을

보는 것처럼 적응의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점차로

내면의 빛을 느낄수있다 한다.

그 내면에서의 빛은 태양처럼 공격적인 빛이 아니고 달빛에 가깝고 매우 자비롭고 부드럽게

향유된다고 한다.

그 빛의 근원이 어느 순간 자신이라는 것이 깨달는 것을 명상이라

설명되는 것같다.

사실 명상이란 현재를 느끼는 훈련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의 세 시제로 나누는데 라즈니쉬는

시제는 과거와 미래로만 나눠진다고 얘기한다.

현재는 시간의 일부가 아니라 영원의 것이라 말한다.

신은 항상 존재하는 현재만이 있기때문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과거로부터 기인해서 미래로 흘러간다.

과거와 미래는 비존재적이다.

존재하는 것은 현재이다.

우리가 비참했던 것 은 조금 전이고 아니면 조금후가

될 수있다.

이 현재의 순간이 축복이며 즐거움이고 신의 순간이라

얘기하며 현재를 느끼는 것이 바로 명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존재는 배울수있는 것이 아니라 깨우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삶을 이해하려 하지말고 삶을 살아라고 사랑속에

들어가고, 깨달음은 체험에서 나온다고.

삶은 살며 사랑하며 체험해야할 신비라고 말한다.

삶에는 세가지가 있다.

하나는 객관적인 세계 즉 사물의 세계이며 모든 사람이

볼 수있는 과학자가 함께 하는 세계이다.

두번째가 주관적인 세계인데 개발되어야 하는

시와 음악과 예술의 세계, 즉 창조의 세계가 내면으로 향하는 사람이 느끼는 세계이다.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하다.

신이 존재하냐고?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증거란 오직 물건을 위해서 필요하다.

신에게는 증거가 필요치않다.

내가 너를 사랑할 때 그 증거가 무엇일까?

시에는 증거가 없어도 화학에는 있다.

시는 삶에 의미를 준다.

증명되진않지만 삶에 의미를 준다.

증명된 것은 기껏해야 우릴 편안하게 해 줄 뿐이다.

신은 대상이 아니라 증명할 수없다.

신은 음악에 가깝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붙잡을 길이 없고 금고에 넣어 둘수도 없다.

사랑은 존재하지만 소유할 수는 없다.

사랑을 소유 하려하면 객관적으로 되고 사랑을 죽이게 된다.

그녀를 물건으로 제한시키면 그 녀도 용서하지않을 것이다.

정치가의 삶은 공적인 삶이고 시인과 화가는 개인적인

삶이다.

개인적인 것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하느님에게

이르는 문이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세번째의, 진정으로 종교적인세계는 초월적이다.

첫째는 객관이고 과학이며

둘째는 주관이며 예술이다.

셋째는 초월이다. 양자를 초월한 종교는 예술이상이며

음악이상이다.

이 새번째는 우선 생각을 주시해야한다.

생각들을 주시함으로서 주시자, 생각하는 자를 주시하게

시작하기작된다.

사물로부터 시작해서 생각으로 전환하고, 다음에는

생각으로부터 생각하는 사람으로 전환하라.

사물이란 과학의 세계이며 관념들은 예술의 세계이며

생각하는 자는 종교의 세계이다.

처음에는 우리 주위에 있는 환경은 사물이고,

두번째는 관념이며, 세번째는 중심, 바로 우리의 존재이며

의식이고 깨달음이다.

사물을 버리고 관념속에 뛰어들고 그 어느날 관념도

떨어져 나가고 순수함 속이 홀로, 절대적으로 홀로 된

외로움 속에 열반이 존재한다.

그러한 외로움속에 우리는 실재 속에 존재하게 된다.

객관적인 방식은 과학적인 방식이며 서구적인 방식이다.

주관적인 방식은 동양적인 방식이다.

종교적인 방식은 초월적이다.

거기서 동양과 서양이 만나서 용해된다.

종교적인 방식은 동양적이지도 서양적이지도 않다.

서양은 과학적이고 동양은 시적이다.

서양은 역사적으로 사고하며 동양은 신화적으로 사고한다.

서양은 진실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갖고 동양은 진실에

대한 환상과 꿈에 더욱 관심을 갖는다.

서양은 의식적인 맘에 동양은 무의식적인 맘에.

서양은 남성적이며 동양운 여성적이고

서양은 보다 의지적이고 동양은 복종적이다.

그러나 종교는 양자를 초월한다고 말한다.

보는자를 본다면 깨달을 수있다.

그런 상태를 열망하라.

서양에서 왔다면 그것을 얻기위해 투쟁하고 동양에서

왔다면 그것에 복종하라.

서양인이라면 원하고 동양인이라면 기다리라고 한다.

라즈니쉬의 얘기는 듣다보면 재미있는 데 나중에는

또 뭔 소리인지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우리도 진리를 찾지만 진리도 우리를

기다리고 손을 뻗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라즈니쉬는 우리 영혼의 상처를 외과의사처럼 사정없이 열어둔다.

하지만 자비한 신은 영혼을 더 큰 모습으로 아물게 하는 것

같다.

출처 : 캐나다 그리고 만남
글쓴이 : 박진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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