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스크랩] 이종보통영화 4:『엣지 오브 투모로우』 - 아직 컵에 설탕을 넣을 때가 아니다 (영화 보신 분들만 클릭)

황령산산지기 2016. 2. 13. 09:26

 

   

 

 

 

 

0.

   이것은 미래시제의 자전영화다. 누구의 삶과 죽음에 관한 영화인가. 당연히 인류일 것이다.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걷거나 헤엄치지 못하는 거의 유일한 동물이다. 걷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어미의 젖을 찾아 머리를 들이

지도 못하며, 최초의 걸음을 걷기까지 인간에게는 터무니없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야생이었다면 절대로 살아남지 못했을 시

, 탄생과 함께 반드시 누군가의 보호를 받아야만 하는 인류는 오늘도 취약하다.

 

 

 

        그녀의 성분에는 얼마간의 모성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만일 본능을 관장하는 신이 있다면, 아마도 그는 일찌감치 인류를 저버리지 않았던가 싶다. 그러나 죽음의 여신은 다르다. 인간

에게 전승이라는 편법을 허용해주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은 1회성으로는 끝나지 않는 독한 생명력을 가지는데, 그 힘은 숱한 시행착오와 실패의 경험을 통해 형성된 지

식이 다음 삶, 즉 후대에게 전승되는 것으로 구현된다. 후대에까지 지적인 유산을 남길 수 있다는 것, 즉 삶이 가르쳐준 진실을 본

체의 죽음 이후에도 생존시켜 다음 삶으로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인류에게만 허용된 특혜다.

 

   본능에 누적시켜 상속할 수 있는 경험적 지식의 총량은 극히 미미하다. 때문에 그것은 지식이라는 말이 아닌 진화라는 말로 설

명되곤 한다. 선대의 은혜를 입고 일어서는 인간과는 달리, 매번 0에서 새로 시작해야 하는 동물들은 터무니없이 불공평한 게임을

해야 하는 것이다. 본능이란 뿌리 없는 줄기와 마찬가지여서 결코 죽음 이후를 도모하지 못한다.

 

   영화의 전반부는, 죽음을 통해 신생을 번영해온 인류의 사업수완을 보여준다. 셀 수 없는 죽음을 반복해가며 외계인을 패퇴시키

기 위한 지식을 형성시켜나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인류가 가진 지독한 생명력의 은유다.

 

 

   죽음은 우리의 가장 주요한 성장수단이나, 일상으로 무시되고 간과된다. 이미 무수한 죽음을 거쳐 전장의 승리자가 된 인류에게

있어 개개인의 삶과 죽음이란 너무나도 흔해빠진 자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은, 인류가 무수히 거쳐 온 고통이기에 그저

지나가면 그뿐인, 흘러간 옛일로 치부된다. 일이 글러먹을 때마다 아무렇지도 않게 주인공을 죽이고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은 언뜻

리셋 가능한 게임을 떠올리게 하지만, 학습을 위해 자행되는 그 수많은 죽음들이 인류(주인공)를 진보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상기

할 때는 아무래도 조금 다른 생각을 갖게 된다.

 

   어찌 됐든 죽음이라는 불공평한(?) 특권을 통해 무수한 승리를 챙겨가며 자연의 지배자로 올라선 인류의 적수는 이제 없다.

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출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류의 적은 현재에는 없으나 미래에 반드시 마주치게 되는 것, 시간

이다.

 

 

1.

   오직 시간만이 인류의 적수가 될 수 있다. 이 영화의 안타고니스트는 겉으로는 외계인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그 본질에는 시간

이 자리하고 있다. 왜소한 개별자에 불과한 인간의 삶과 죽음과는 달리, 시간이라는 적의 몸집은 측정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다.

끝없이 다시 살아날 권능을 가지고도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끝없이 좌절하는 주인공의 권능이 고작 하루치에 불과했음을 상

기하자.

 

 

   우리의 삶과 이야기들은 시간이 형성시켜 온 너무나 방대한 원형(Archetype)의 바다에 간편히 수장되어버린다. 이것은 우리가

거쳐 온 모든 삶의 굴곡들이 기실은 지겨운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슬프지 않다, 우리의 삶과 죽음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어서

 

   감독은 이 지루한 반복에 여러 가지 유머를 덧입히는데, 이 시도는 아주 적절했다고 본다참으로 인간적이다. 유머야말로 인간

만이 향유할 수 있는 유희가 아니었는가.

 

   시간을 주재하는 것은 신의 영역이니, 초월적인 지식을 지니고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자들을 편의상 선지자라고 칭하겠다. 선지

자는 죽고 부서진다. 물론 그것으로 끝은 아니다. 시간은 선지자를 쉽게 한 줌 소금으로 만들어 버리지만, 그는 이내 다른 이름의

선지자로 부활하는 인류의 끈질긴 메카니즘 때문이다. 끝없는 반복 속에 매몰된 채로 과거의 인류는 그 자신의 목적을 삶과 죽음

으로 이어나가는 것이다.

 

   수혈은, 인류가 과거의 형식에서 신생인류로 진화하는 반환점을 보여주는 표지이다. 반인반신이던 주인공이 비천한 인간이 되

는 지점이기도 하나, 이 시점부터의 인간은 비로소 모든 실패를 딛고 한번뿐인 생을 일으켜 역시 한번뿐인 시간에 온몸으로 충돌

해가게 된다. 이 충돌 이후는, 기존의 인류가 쌓아놓은 지식체계의 피라미드로도 알아낼 수 없는 신성한 미지이며, 또한 그래서 신

선해진 새로운 생명이다.

 

 

   마지막 장면, 또다시 되살아난 주인공이 인류의 승리를 선고받고 실소하는 장면은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게 연출된다. 과장을 절

제해낸 실소, 아름다우나 거창하지 않은 이 승리는 그 소박함으로 인해 설득력을 갖추게 된다. 아마도 우리가 늘 겪어왔던 순간이

기 때문일 것이다. 이 승리의 순간은 실소를 통해 사소하게 처리되지만, 어떤 승리이든 간에 피를 흘린 사람들은 있게 마련 아니던

. 모든 승리는 얼마간씩은 처절한 것이다.

 

 

 

 

   감독은 이 처절한 승리와 신생의 희망을, 유도 식 팔굽혀펴기를 하며 위로 솟구쳐 오르는 그녀의 움직임에 묶어둔다. 그녀의 움

직임과 그의 웃음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미완의 시제에 안착하는 것이다.

 


 

2.

   세월은 돌고 도는 것이라는 옛말을 원망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이것은 우리의 생처럼 지루하고 기진하다기보다는,

끄럽고 처참하다고 해야 마땅할 이전투구이며, 부당한 되감기이다.

 

   더러운 술자리에서 몸에 박힌 총탄의 시간을 넘어, 이제는 반신반인으로 추앙받는 자의 시간이 돌아왔다. 이것은 아무래도 싸움

의 전조로 보인다. 헌데 누가 이 기진맥진한 싸움을 기꺼이 감당할 수 있겠는가? 또는 그것을 후세에게 물려줄 수 있겠는가? 어느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감독은 이와 동일한 성분의 질문을, 사랑할 것인가 아니면 보낼 것인가의 문제로 훌륭히 치환해 낸다. 모태솔로인 나는 다른 정

회원들처럼 모든 종류의 로맨스를 혐오하는 편이지만, 커피에 설탕 셋을 넣어주는 이기적인 순간의 행복에 입각한 그 낭만적인 질

문만은 다크나이트의 조커가 만들어내던 딜레마만큼이나 마음에 든다.

 

 

   세계의 사랑보다 제 한 몸의 안녕을 선택하는 영악한 시도는, 그것이 집단화될 때 한없이 위험해진다.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한 설문을 받을 때, 우리는 너무 쉬운 답을 고르지는 않았는지 되물어볼 필요가 있겠다.

 

 

 

   분명한 것은, 누군가 커피에 설탕을 넣으며 일신의 안주를 모색할 때 다른 누군가는 죽음 이후의 삶까지를 걸고 결연히 전장으

로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들의 편이다. 앞으로도 영원히.

 

 

   오늘날에도 세계의 곳곳은 독재자들과 부당한 침략, 자원을 둘러싼 내전 등으로 오염되어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도 곧 오늘과

미래를 걸고 싸움터에 나서야 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니 오늘의 인류에게, 나는 아직 잔에 설탕을 넣지 말 것을 권하고 싶다.

 

 

 

 

   주인공의 마지막 웃음으로 숱한 과거사들은 모두 반쪽이 되어 썰물처럼 밀려나간다. 영화의 제목(내일과 오늘의 경계)처럼 경

계에 서 있는 웃음이다. 비로소 과거를 잘라내고 미래로 접목된 시간의 실황이 중계되는 것이다. 그것은 수혈 없이도 다시 태어나

는 우리 생명이며, 인류의 진면목이기도 하다. 애석하게도, 어쩌면 운 좋게도 우리는 이것 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니 우리, 걸어 나가라 이 신생의 내부로. 이번에는 "신보다 더 먼저"*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대사

 

   + 시골에 살고 있다 보니 내 리뷰는 터무니없이 늦다. 시골에는 극장이 없고 차가 없으면 영화를 보러 갈 수가 없는, 누락을 견뎌

야하기 때문이다. 파일이 뜨고 난 뒤에야 영화를 보고 리뷰를 작성하지만, 이미 리뷰를 써놓은 사람들의 글에서 내 것과 겹치는 부

분이 발견되면 세상에 그것만큼 맥이 빠지는 일이 또 없다. 그 부분을 빼고 나머지를 다시 추슬러야 하는 수고를 버거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글과 겹친다는 그 사실 자체가 몹시 기분 나쁘다. 지난 번 애써 적어놓은 그래비티의 리뷰를 올리지 않기

로 마음먹었던 것은 몇 줄 안 되는 부분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것만큼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리뷰를 올릴 수 있을 것 같다. 영화관에 나를 데려가 대신 표 값을 치러준 동생에게

감사한다.

 

 

   ++에밀리 블런트는 정말, 정말 섹시했다. 처음 화면에 나왔을 때는 예쁘다는 생각 안 했었는데

출처 : 이종보통영화
글쓴이 : 윤나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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