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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

황령산산지기 2015. 3. 12. 16:39

타자의 얼굴 앞에 선 주체 에마뉘엘 레비나스

“진정한 삶은 여기에 부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 안에 있다. 이런 알리바이 속에서 형이상학은 생겨나고 유지된다.”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대표작 [전체성과 무한](1961) 1장은 ‘형이상학’의 탄생에 대한 이 문장과 더불어 시작한다. 진정한 삶은 부재한다. 이것은 랭보의 시구이기도하다. 진정한 삶은 없지만, 속절없이 우리는 세계 안에, 진정한 삶이 없는 곳에서 살아간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이 사실 때문에 형이상학이 탄생한다! 진정한 삶이 세계 안에 없으니 우리는 마치 목마른 자처럼 세계 저 너머를, 이 세계와는 다른 곳을 바라본다. 그래서 레비나스의 문장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형이상학은 ‘다른 곳’을, 그리고 ‘다르게’를, 또 ‘타자’를 향하고 있다.” 형이상학(Meta-physics)은 문자 그대로의 뜻대로 가시적이며 손에 쥘 수 있는 사물들의 세계, 즉 물리(physics)의 배후(meta)를 넘겨다보는 학문이지 않은가? 이 세계 저편에 대한 인간의 그리움의 표현이 바로 형이상학이 아닌가? 형이상학이 건너다보는 저편의 세계, 나의 것과 다른 타자의 세계에서 우리는 진정한 삶을 만날 수 있을까? 혹시 그것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지 않을지? 레비나스 철학은 바로 이러한 물음에 몰두하고 있다.


레비나스의 방랑 유대주의, 러시아문학, 프랑스 문화, 독일 현상학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출처: Bracha L. Ettinger at en.wikipedia.org>

레비나스가 현대철학에 불어넣은 활력은 매우 인상적이다. 현상학적 전통의 관점에서 후설과 사르트르가 ‘의식’에, 하이데거가 ‘존재’에 몰두하며 현상학을 발전시켰다면, 레비나스는 ‘타자’라는 개념을 현상학의 중심에 끌어들였다. 이 타자 개념에 대한 사유로부터 서구 문화 전반의 전체주의적 성격에 대한 반성에 가속도가 붙었다. 또한 ‘타자에 대한 환대’라는 그의 화두는 최근 데리다의 ‘환대의 정치학’이란 형태로 현대 철학에서 결실을 낳기도 했다. 이 외에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레비나스의 저작들을 권장한 데서도 시사되듯이 레비나스의 사상은 현대 종교 철학에도 영감을 불어넣었다. 레비나스는 성서가 말하는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의 모습을 한 고통 받는 타자와의 마주침이란 어떤 것인가를 진지한 철학적 사유 속에서 살펴본 사상가인 것이다.

레비나스는 어떤 사람인가? 그의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유대인의 방랑을 따라가 보아야 한다. 1906년 리투아니아의 유대인 사회에서 태어난 이 철학자의 지적 배경을 최초로 결정한 것은 유대주의와 러시아 문화였다. 그는 먼저 성서에 익숙해졌고 다음으로 톨스토이 등의 러시아문학에 익숙해졌다. “철학의 문제는 ‘삶의 의미’에 관한 연구로서 이해되었다. 그런데 러시아 소설가들이 만들어낸 주인공들은 이 ‘삶의 의미’에 관해 끊임없이 숙고하고 있었다.” 이후 그는 17세의 나이에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는 모험을 감행한다. 프랑스 철학과 문학을 통해 그는 프랑스 문화에 동화되었고 마침내 귀화하기에 이른다.

또한 그는 독일 프라이부르 대학에 머물며 당시 최첨단의 현상학의 대표자인 후설과 하이데거에게 지도를 받는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이후 그는 프랑스에 독일 현상학을 소개하고 프랑스에서 현상학적 철학을 꽃피운 최초의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된다. 프랑스 현상학을 대표하는 사르트르 역시 후설에 관한 레비나스의 박사학위 논문을 읽고 처음 현상학에 입문했다. 이렇게 동유럽에서 서유럽에 이르는, 그리고 유대공동체에서 기독교 국가에 이르는, 성서로 대표되는 예루살렘에서 철학으로 대표되는 아테네에 이르는 지적 여정을 통해 유대주의, 러시아문학, 프랑스 문화, 독일 현상학이라는 네 개의 사상이 그의 철학의 배경에 자리 잡게 된다.


아우슈비츠에서 가족을 잃다 서구 존재론의 폭력성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집단학살수용소였던 아우슈비츠 수용소, 여기서 가족을 모두 잃은 레비나스는 2차 대전 이후 평생 독일 땅을 밟지 않았다. <출처: angelo celedon AKA lito Sheppard at en.wikipedia.org>

무엇보다 레비나스 사상의 성립에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그의 개인적 불행이자 전 세계의 불행이기도 했던 제2차 세계대전의 체험이다. 아우슈비츠에서 가족들을 모두 잃은 그는 2차대전 이후 평생 독일 땅을 밟지 않았다. 레비나스가 보기에 서양 존재론은 타자를 동일자로 환원하는 전체성의 철학이다. 고유성을 무시하고 타자를 전체성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서양 철학의 지배적인 사유 방식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통찰은 저 아우슈비츠의 체험에 힘입은 바 크다. 레비나스는 인간이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상실하고, 타자를 나의 영향권 아래 종속시키기 위해 국가 사회주의 같은 전체주의의 이념을 강요하는 일이 어떻게 생길 수 있는지 묻는다. 전체주의의 한 형태인 나치즘파시즘이 일으킨 전쟁은 단순히 정치적, 경제적인 관점에서 해명되지 않으며, 또 여러 형태의 휴머니즘을 통해서 방지되거나 치유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타자를 동일자(나)로 환원하는 서구 존재론의 구조에서 필연적으로 유래할 수밖에 없는 전쟁이었다. 그래서 레비나스의 첫째가는 관심은, 나라는 동일자로 흡수되지 않는 절대적인 타자가 있음을 드러내고, 그 타자에 대해 가지는 윤리적인 책임성이 나의 나됨, 즉 나의 주체성을 구성하는 근본임을 보이는 것이 된다.


자기 자신에게 전념하는 이기적인 삶, 그것은 슬픔을 달래고 죽음을 극복하기엔 충분치 않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진정한 삶’이 부재하는 세계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사는가? 우리는 우리와 다른 대상을 먹거나, 우리에게 필요한 물건으로 바꾸거나, 또는 우리의 인식의 대상으로서 소유한다. 욕구(besoin)하는 대상을 흡수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나에게 종속된 것으로 만든다. 한 마디로 나는 미다스왕처럼 온갖 타자를 자기 소유의 황금으로 바꾸면서 내가 주인인 세계를 구성한다. 자기보존욕을 타고난 존재자 일반은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게끔 되어있다. 요컨대 “존재자가 자기 자신에게 전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레비나스는 내가 세계의 주인으로써, 나의 욕구에 따라 세계를 즐기고 관리하는 이러한 존재 양식, 혹은 나 자신에게 몰두하여 끊임없이 나의 세계로 귀환하는 사유를 일컬어 ‘존재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의 존재에 전념하는 “이 시간은 슬픔을 달래고 죽음을 극복하기엔 충분치 않다.” 그것은 노동을 하고 먹거리를 벌어 나를 먹이는 일이 반복될 뿐 아무런 질적 도약이 없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노동과 향유를 통해 세계 안의 모든 것을 자기의 소유물로 만든 이 고독한 부자에게 찾아올 새로운 손님이란 죽음 밖에 없는 것이다. 죽음이 도착할 때까지 노동과 향유라는 천편일률적인 순간들이 반복되리라.

이와 반대로, 나의 존재 유지를 위해 먹고 마시고 도구를 만드는 나의 세계로부터 떠나, 나의 바깥 혹은 나와 절대적으로 다른 자에게로 가고자 하는 사유를 일컬어 ‘형이상학’이라고 부른다. 우리에겐, 나의 존재 유지를 위해 대상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와는 다른 ‘욕망(désir)’이 있다. 이 욕망은, 플라톤이 ‘욕망할 수 있는 최고의 것으로서 존재들 너머에 있는 최고선의 이데아’를 이야기했을 때의 욕망, 곧 ‘초월’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레비나스 철학은 나의 세계를 떠나 낯선 자에게로 가는 이 ‘초월’의 가능성, 바로 세계 저편으로 가는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숙고한다.


출산도 형이상학인가? 아이를 통해 도래하는 무한한 시간

자기 존재의 세계를 넘어서는 일, 즉 형이상학과 초월은 어떻게 가능한가?다양한 답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출산’이다. 나의 아이는 나이며 동시에 타인이다. 나와 내 아이의 관계는 ‘동일성 안에서의 구별’이다. 나로부터 나온 아이는, ‘나의 자식은 나의 분신’이라는 일상어의 표현이 잘 나타내 주듯 나 죽은 후 세상을 살아갈 또 다른 나이다. 이런 뜻에서 아이와 나 사이엔 모종의 동일성이 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만든 예술품이나 책상 같은 나의 작품이 아니며, 나의 소유물도 아니다. 그러므로 출산이란 ‘지배’가 될 수 없다. 출산을 통해 도래하는 미래는 어떤 의미에서도 주체의 힘이 거머쥐고 지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레비나스에게서 미래란 절대적으로 나의 영향권 바깥에 있는 시간이다. 미래 앞에서 나는 철저히 수동적이다. 왜냐하면 미래의 시간이란 나의 시간이 아닌 남의 시간, 즉 출산을 통해 생겨난 내 ‘아이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미래는 나의 가능성에서 전적으로 빠져 달아나는 아이의 시간이되, 그 아이는 여전히 나의 아이이므로 해서 나는 나의 가능성과 나의 지배 바깥에 있는 시간, 내 아이가 앞으로 살아나갈 시간을 걱정하고 그 시간을 위해 무엇인가 해 주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나로부터 나온 아이는, ‘나의 자식은 나의 분신’이라는 일상어의 표현이 잘 나타내 주듯내가 죽은 후 세상을 살아갈 또 다른 나이다. <출처: NGD>

다시 말해 주체는 자기를 위해 노동하고 향유하는 자기 존재의 세계에서 벗어나 아이를 통해 비로소 미래 시간에 몰두할 수 있게 된다. “출산은 내가 거머쥘 수 있는 모든 것, 나의 가능성을 지시하지 않는다. 출산은 나의 미래를 지시한다. 나의 이 미래는 동일자의 미래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나의 모험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것은 매우 새로운 의미에서의 나의 미래이다.” 오로지 나의 세계에 속한 것만이 한정가능하며, 그렇기에 나의 세계 저편에 있는 타인, 곧 아이와 그의 시간인 미래는 내가 한정할 수 없는 것, 즉 ‘무한’이다. 그런데 이 나의 아이는 타인이면서, 이미 말했듯 여전히 모종의 방식으로 나이다. 아이는 나이며 타인이기에, 나는 미래로 초월할 수 있는 것이며, 미래는 나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타인의 시간이면서도 여전히 나의 모험일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나의 세계 저편의 낯선 곳을 건너다보는 일, 진정한 삶을 건너다보는 일이 가능해진다.


신은 타자의 얼굴을 통해 말을 건넨다 타자에게 자기를 내어주는 주체

출산을 통해서만 나의 세계 밖으로 초월이 가능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존재함을 위한 세계에 속하지 않는, 나와 다른 자와 맞닥뜨리는 상황은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일어나는가? 타자는 모든 것이 박탈된 궁핍한 얼굴의 모습으로 나에게 현현(l'épiphanie)한다. 나는 다른 사물을 인식하듯 타자를 인식할 수 있다. 또 타자를 수단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 나의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 여러 방식으로 타자를 소유할 수 있다. 그러나 고통 받는 얼굴은 내가 어떤 식으로도 소유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나와 다른 자이다. 그 얼굴은 나의 모든 능력에 반대하여 나에게 ‘저항’한다. 얼굴의 저항이란, 대상 세계를 소유하고 지배하려고 하는 나의 힘을 무력화시키고 나의 윤리적 행동을 촉구하는 ‘윤리적 저항’이다. 고통 받는 타자의 얼굴은, 가령 ‘살인하지 말라’고 나에게 명령한다. 타자는 나 보다 높은 곳에 있는 나의 주인처럼 내가 윤리적으로 행동하기를 명령하고 나는 그 명령을 회피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떤 식으로도 나에게 규정되지 않고, 오히려 나의 힘을 무력화시키고 나에게 명령하는 타자의 얼굴이란, 형이상학의 대상, 규정 불능의 무한자, 곧 신의 흔적과도 같다. 신은 바로 타자의 얼굴을 통해서 내게 말을 건넨다. 레비나스는 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 어떤 것도 신을 통해서 정의하고자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들 간의 관계를 통해서 내가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신이지, 그 역은 아니다. 내가 신에 대해서 무엇인가 말하고자 할 때, 그것은 언제나 인간들 간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나는 위대하고 전능한 존재의 현존(existence)으로부터 출발하지는 않는다. 신의 추상적인 관념은 인간적 상황을 명백하게 해줄 수 없는 관념이다. 반대로 인간적 상황이 신의 관념을 명백하게 해 준다.”

이렇게 신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라는 맥락 속에서만 의미 있는 것이 된다. 그러니 교회가 아니라, 이기적인 바람을 담은 기도 속에서가 아니라, 먼저 고통 받는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신은 도래한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타자와의 관계가 ‘신’이라는 말이 비로소 의미를 지니게 되는 맥락이라면, ‘존재자’로서의 신을 믿지 않고도 우리는 신이란 말을 유의미하게 사용할 수 있지 않은가? 레비나스의 초월 또는 형이상학이란 바로,타자의 얼굴을자신의 흔적 삼아 나타나는 무한자와 관계함을 말한다. 이 관계란, 내가 나에게 전념하는 세계를 떠나, 나와 전혀 다른 자에게로 가서 그를 위해 나를 종처럼 건네주는 일이다. 이렇게 레비나스는 형이상학, 초월, 무한자 등의 고전적인 개념의 의미를 윤리학적 맥락 안에서 새롭게 이해한다.

서동욱 이미지
서동욱 | 서강대 철학과 교수
벨기에 루뱅대학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있으며 [익명의 밤], [일상의 모험―태어나 먹고 자고 말하고 연애하며, 죽는 것들의 구원], [들뢰즈의 철학―사상과 그 원천], [차이와 타자―현대 철학과 비표상적 사유의 모험] 등의 저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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