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면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장소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직접 느낄 수 있다. 극장 안에서 1시간 반 정도 보고 나온 것 같은데 밖에 나오니 3시간이 흘렀다! 이 영화 때문에 요즘 난리다. 특히 블랙홀(black hole)이란 단어는 이제 너무 많이 나와 식상할 정도다.
“할머니, 블랙홀은요 무엇이든 무섭게 빨아들이는 거래요. 빛도 빨아들인대요.” “그래? 절대로 가까이 가지 마라, 큰일 나!”
이런 대화가 할머니와 손자 사이에서 있음직한 현실이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상대성이론과 블랙홀에 대해 이번 기회에 확실히 알아보자.
상대적으로 쉬운 상대성이론
아인슈타인(Einstein)의 상대성이론에는 특수상대성이론(special relativity)과 일반상대성이론(general relativity) 두 가지가 있다. 이름으로 봐서는 특수상대성이론이 일반상대성이론보다 더 어려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반대다. 특수상대성이론은 ‘특수한(쉬운)’ 경우에만, 일반상대성이론은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이론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니 일반상대성이론이 훨씬 어렵다.
실제로 특수상대성이론은 1905년에 발표됐고 일반상대성이론은 그보다 10년 뒤인 1915년에 발표됐다. 특수상대성이론은 ‘시간+공간’의 이론이고 일반상대성이론은 ‘시간+공간+중력’의 이론이라고 생각해도 틀리지 않는다.
중력은 시공간을 휘게 한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뉴턴(Newton)의 중력 이론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질량이 시공간을 휘게 만들어 중력장이 형성된다고 보는 관점이다. 뉴턴의 중력 이론에서는 물체가 중력에 이끌려서 천체를 향해 떨어진다고 해석했다.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물체가 천체의 중력이 휘어 놓은 시공간 안에서 운동한 결과로 떨어진다고 풀이한다.
예를 들어 얇은 고무막에다가 무거운 구슬(천체)을 올려놓으면 고무막은 휘게 될 것이다. 무거운 구슬에 의해 휘어 있는 고무막에다가 작고 가벼운 구슬(물체)을 또 굴리면 구슬은 큰 구슬 쪽으로 돌면서 굴러 떨어질 것이다. 중력장 주변에서 빛이 휘는 현상도 이와 같이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한 1915년의 바로 다음해인 1916년, 독일 과학자 슈바르츠실트(Schwarzschild)는 회전하지 않는 천체에 적용할 수 있는 일반상대성이론 방정식의 풀이(solution)를 찾아냈다. 슈바르츠실트의 풀이에 따르면 태양 주위를 지나가는 빛은 중력 때문에 마치 볼록렌즈를 통과한 빛처럼 휘며, 그 정도는 2’’(1°의 1800분의 1) 정도가 된다.
뉴턴 이론에서 빛(광자)은 질량이 없으므로 중력에 의해 영향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 하지만 상대성이론에서는 빛이 휜 시공간을 진행하면 저절로 궤적이 휘게 된다. 빛은 두 점 사이의 최단거리를 여행하지만 휜 시공간에서 그 궤적은 직선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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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을 푼 슈바르츠실트. 그는 제1차세계대전 중 독일군으로 근무하던 1916년 이 방정식을 풀었다. 그의 풀이는 블랙홀의 존재를 보이는 엄청난 성과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불과 6개월 후에 질병으로 사망한다. 2 에딩턴이 관측한 개기일식 사진. 에딩턴은 개기일식 때 별의 위치를 측정, 빛이 휜다는 것을 입증했다. |
당시 빛이 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일반상대성이론의 결과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자 이를 증명하기 위해 1919년 에딩턴(Eddington)이라는 영국의 천문학자가 일식을 관측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떠났다. 그리고 아인슈타인과 슈바르츠실트가 옳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에딩턴은 어떻게 일식을 이용해 증명했을까? 그 해답의 열쇠는 개기일식 때 별들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개기일식이 일어나면 보름달이 떠 있는 밤처럼 어두컴컴해지고 밝은 별들이 보인다. 아인슈타인과 슈바르츠실트가 옳다면 그러니까 빛이 휜다면, 이 때 별들의 겉보기 위치는 실제 위치보다 해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에딩턴을 이를 관측한 것이다. 1919년은 일제강점기 아래 3·1운동이 일어났던 해다. 우리 민족은 생존을 위해 처절하게 투쟁하고 있을 때 지구 다른 쪽에서는 우주의 대비밀이 밝혀졌던 것이다.
빛도 빨려 들어가는 블랙홀이 존재한다
슈바르츠실트의 풀이에 따르면, 해가 작아질 수만 있다면 표면중력이 강해져서 빛이 더 많이 휘어야 하고, 마침내 반지름 3km 크기로 줄어들면 빛도 빨려 들어가는 블랙홀이 된다! 에딩턴이 슈바르츠실트가 옳다는 것을 보였으니, 블랙홀의 존재 가능성도 증명한 셈이 된 것이다.
그런데, 슈바르트츠실트의 풀이는 회전하지 않고 가만이 있는 블랙홀에만 맞는 것이었다. 슈바르츠실트가 아인슈타인 방정식을 푼 지 거의 50년이 지난 1963년, 뉴질랜드의 로이 커(Roy Kerr)는 회전하는 블랙홀에 관한 풀이를 구해냈다.
1 로이 커(Roy Kerr). 회전하는 블랙홀에 대한 아인슈타인 방정식의 풀이를 발견한 과학자 2 동반성으로부터 블랙홀이 물질을 빨아들이는 장면(상상도) <출처: (cc) ESO/L. Calçada> |
천문학자들은 1960년대 말부터 우주에 있는 블랙홀을 실제로 찾는 일에 착수했다. 캄캄한 우주에 혼자 있는 블랙홀을 찾기란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 해답의 열쇠는 쌍성이 쥐고 있다. 두 별 사이의 거리가 충분히 가깝다면 강한 중력을 가진 블랙홀은 상대적으로 구조가 허술한 동반성으로부터 물질을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두 별은 서로 공전하고 있으므로 끌려오는 물질은 곧 바로 블랙홀로 떨어지지 못하고 그 주위에 원반을 형성하게 된다. 이 원반을 우리는 유입원반(accretion disk)이라고 한다.
유입원반 안에서 나중에 유입된 물질은 먼저 유입된 물질이 블랙홀로 떨어지고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원반 속에서 회전하게 된다. 그런데 먼저 유입된 물질은 나중에 유입된 것보다 더 빨리 회전하므로 속도가 다른 안쪽과 바깥쪽 물질의 마찰은 온도를 수백만 도 이상 상승시킨다. 이 과정에서 에너지가 높은 X-선이 방출된다. X-선을 방출하는 천체들을 많이 발견되자 블랙홀의 존재를 의심하는 천문학자들은 사라지게 됐다.
블랙홀 주위에서는 시간이 늦게 간다
블랙홀이 시공간을 어떠한 모양으로 휘게 하길래 빛도 빨려들어갈까? 그 답은 직관적으로 간단하다. 앞에서와 같이 얇은 고무막을 생각하고 이번에는 그 위에다 크기는 작지만 매우 무거운 구슬을 올려놓았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이번에는 밑으로 축 처지게 될 것이다. 아주 무거운 구슬이 고무막을 찢어버리 듯이 블랙홀은 시공간을 파괴해버린다.
블랙홀 주변에서는 빛만 휘는 것이 아니고 시간적으로도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블랙홀을 향해 자유낙하를 시도한다고 하자. 떨어지는 사람은 아무런 시간 간격의 변화를 느끼지 않은 채 일정한 시간이 경과하면 블랙홀 표면에 도달하게 된다(실제로는 생존은 불가능하겠으나). 그러나 밖에서 바라보는 관찰자 입장에서는 떨어지는 사람이 블랙홀에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점점 낙하속도가 늦어지는 것처럼 보이게 되고, 마침내 블랙홀 표면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멈춘 듯이 보인다.
관찰자는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떨어지는 사람이 블랙홀 표면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없다. 관찰자 입장에서 보면 블랙홀 표면에서 떨어지는 사람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느껴진다. 따라서 블랙홀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우리가 볼 수 없게 된다. 이는 마치 우리가 지평선 너머에 있는 물체를 볼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이러한 뜻에서 블랙홀의 표면을 사건의 지평선(事件의地平線, event horizon)이라 혹은 사상(事象, 관찰할 수 있는 사물과 현상)의 지평선이라고 부른다.
블랙홀로 ‘에스컬레이터’가 계속 들어간다고 상상해보자. 그 위에서 어떤 사람이 2초마다 사과를 하나씩 밖으로 던진다고 하자. 밖에서 사과를 받는 사람은 예를 들어 5초마다 사과를 하나씩 받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영화 ‘인터스텔라’에서처럼 안쪽에서 1시간이 바깥쪽에서는 7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사건의 지평선에서 왜 빛조차 탈출하지 못할까? 사건의 지평선에서는 ‘에스컬레이터’가 광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바깥쪽을 향해 광속으로 걷는 사람이 그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제자리걸음을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블랙홀 가까이에서 광속보다 작은 속도로 운동하는 물체는 블랙홀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웜홀은 다른 우주로 가는 통로?
만일 한 블랙홀이 다른 우주에 있는 블랙홀과 이어질 수만 있다면 우주여행을 하는데 지름길 노릇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사과 속의 벌레구멍과 같아서 사과의 한 쪽 표면에서 다른 쪽 표면으로 벌레가 가는데 시간을 절약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것으로부터 학술용어 웜홀(worm hole)이 탄생하게 됐다. 뉴턴 때문에 중력을 설명할 때 늘 사과가 인용되는데 이제 사과 속 벌레구멍까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상대성이론에서 웜홀은 원래 블랙홀과 블랙홀을 연결하는 통로였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한쪽에서 블랙홀 속으로 들어가 살아남아서 다른 쪽 블랙홀에 도달한다고 하더라도 빠져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에는 무엇이든지 내놓기만 하는 화이트홀(white hole)이 출구에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과학소설 작가들은 화이트홀을 ‘발명’했다. 즉 블랙홀과 웜홀은 과학적 근거가 있지만 화이트홀은 없는 것이다. 웜홀은 학술용어로 아인슈타인-로젠 다리(Einstein-Rosen bridge)라고도 한다.
1 웜홀의 개념도, 웜홀은 원래 블랙홀과 블랙홀을 연결하는 통로였다. 2 웜홀이 지상에 존재한다면 그 모습을 상상한 그림. <출처: (cc) CorvinZahn - Gallery of Space Time Travel> |
상대적으로 어려운 상대성이론
상대성이론을 다 다룰 수는 없는 만큼 여기서는 웜홀의 입구는 왜 회전하는 블랙홀 즉, 커(Kerr) 블랙홀이라야 하는가, 커 블랙홀의 에너지는 꺼내 쓸 수 있는가, 확장된 사건의 지평선(stretched event horizon)이란 무엇인가 등에 대해 집중적으로 알아보기로 한다.
영화 [인터스텔라]에는 이런 어려운 상대성이론 지식들이 모두 담겨있다. 그 이유는 세계적인 물리학자 킵 쏜(Kip Thorne)의 철저한 자문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훌륭한 상대성 이론 교재다.
물리학자 킵 쏜(Kip Thorne)이 영화 [인터스텔라]의 과학적 자문을 하는 모습. <출처: PARAMOUNT>
커 블랙홀을 통한 여행
풀이를 찾아낸 사람의 이름을 붙여, 회전하지 않는 블랙홀을 슈바르츠실트 블랙홀이라고, 회전하는 블랙홀을 커 블랙홀이라고 한다. 슈바르츠실트 블랙홀과 커 블랙홀은 다른 점이 여럿 있다. 슈바르츠실트 블랙홀의 경우는 사건의 지평선이 하나밖에 없지만, 커 블랙홀의 경우는 안쪽에 하나, 바깥쪽에 하나, 두 개가 있다. 또한 슈바르츠실트 블랙홀의 특이점(singularity, 부피가 0이고 밀도가 무한대인 점)은 말 그대로 점이지만, 커 블랙홀의 특이점은 고리(loop) 모양이다. 그 고리를 통과해야 기적이 가능하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연구소 칠판에는 분필로 그린 마름모 꼴 그림이 나온다. 이 그림은 펜로즈 다이어그램이라고 한다. 쏜이 직접 그린 그림이다. 블랙홀을 통과하는 여행을 하면 어떨 일이 벌어지는지 알려면 이 그림을 좀 이해해야 한다.
1 영국의 수학자, 이론물리학자 로저 펜로즈(Sir Roger Penrose) <출처: (cc) Festival della Scienza from Genova> 2 영화 [인터스텔라] 중에 등장하는 펜로즈 다이어그램. <출처 영화 [인터스텔라] 웹사이트> |
펜로즈(Penrose)는 유명한 수학자다. 영국에서 ‘케임브리지(Cambridge)에 호킹(Hawking)이 있다면 옥스퍼드(Oxford)에는 펜로즈가 있다’ 같은 말이 나올 정도였다. 펜로즈 다이어그램은 펜로즈가 그린 그림인데, 시공간을 나타낸 그림이다. 평이한 시공간을 펜로즈 다이어그램으로 그리면 아래와 같다.
펜로즈 다이어그램 상에서 슈바르츠실트 블랙홀은 아래 그림처럼 나타내진다. 그림에서 왼편은 우리 우주이고 오른편은 다른 우주가 된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블랙홀이 시공간을 뒤틀어 버리기 때문’이라고만 알아두자.
펜로즈 다이어그램에서 빛의 궤적은 45°의 각도를 갖는다. 그리고 수직선을 기준으로 45° 이내 각도의 영역은 이동 가능한 영역이다. 빛의 속도 이내로 이동하는 물체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측자가 일단 블랙홀로 뛰어들게 되면, 즉 사건의 지평선을 넘으면, 그림 위쪽의 ‘미래’ 특이점으로 떨어지게 된다. ‘미래‘ 특이점이라고 한 이유는 블랙홀의 시간 지연 때문이다(우리 우주의 관찰자 입장에서는 블랙홀의 특이점 생성 자체가 영원한 미래의 일이다).
그림 상에서 A나 B 같은 여행은 광속보다 느린 경로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A는 블랙홀 바깥에서의 여행이고 B는 블랙홀로 뛰어드는 여행을 의미한다. 하지만 C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C는 광속보다 빠른 여행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웜홀 여행을 하려면 슈바르츠실트 블랙홀로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커 블랙홀 경우는 다르다. 커 블랙홀은 특이점이 고리 모양이고 사건의 지평선이 두 개가 있다고 했다. 커 블랙홀에 대한 펜로즈 다이어그램을 그리면 아래와 같다. 고리모양의 특이점은 펜로즈 다이어그램 상에서 세로로 나타나며, 바깥쪽 사건의 지평선은 우리 우주와 접하지만, 안쪽 사건의 지평선은 우리 우주의 영역 바깥에 나타난다.
커 블랙홀을 통하는 여행을 생각해보자. 그림에서 A, B, C는 가능한 여행이고 D는 불가능한 여행이다. A는 고리 모양 특이점을 통과하는 것으로 반중력 우주로 가게 된다. B와 C는 블랙홀에 들어는 가나, 고리 모양 특이점을 피해 다른 우주로 가는 경우다. D는 광속보다 빠른 불가능한 여행을 보여준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는 입구와 출구에 블랙홀이 아예 없는, 새로운 모습의 웜홀이 등장했다. 이는 쏜의 주장에 근거를 둔 것이다. 또한 주인공 쿠퍼(Cooper)는 회전하는 블랙홀로 들어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회전하는 블랙홀에서는 에너지를 뽑아 낼 수 있다.
커 블랙홀은 슈바르츠실트 블랙홀에는 없는 회전 질량(rotational mass)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회전 질량은 블랙홀이 가장 빨리 회전하는 경우 총질량의 29%에 이르는데, 이 회전 질량은 추출될 수 있다. 추출된 질량은 유명한 특수상대성이론의 공식에 의해서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다. 이 특성이야말로 슈바르츠실트 블랙홀에서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커 블랙홀은 주위에 에르고스피어(ergosphere)라는 영역이 있다. 에르고스피어는 아래 그림과 같이 커 블랙홀을 둘러싸고 있는데, 어떠한 물체도 이 안에서는 운동, 즉 회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커 블랙홀은 이 영역의 시공간 자체를 회전시키기 때문이다. 커 블랙홀의 회전 질량이 밖으로 나가면, 커 블랙홀의 회전이 점점 느려진다. 에르고스피어는 점점 작아지고 마침내 회전이 멈추면, 즉 슈바르츠실트 블랙홀이 되면 완전히 사라진다.
커 블랙홀의 에너지를 꺼낼 수 있다 했는데, 한 방법은 펜로즈 과정(Penrose process)을 통해서다. 펜로즈는 에르고스피어에 E1의 초기 에너지를 가지고 들어 온 물체가 둘로 갈라져 한 조각이 블랙홀로 떨어져 버리고 다른 한 조각이 E2의 에너지를 가지고 블랙홀로부터 탈출하는 경우, 회전 질량의 추출에 의해 E2가 E1보다 클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이것이 펜로즈 과정이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주인공 쿠퍼는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고 블랙홀로 뛰어 든다. 여주인공 브랜드(Brand)가 타고 있는 부분은 분리됐기 때문에 펜로즈 과정에 의해 에너지를 얻어 블랙홀을 탈출할 수 있다. 영화에서는 ‘slingshot(스윙바이와 같은 개념)’으로 표현됐지만 쏜은 펜로즈 과정을 염두에 뒀을 것으로 믿는다.
회전하는 블랙홀에서 에너지를 추출하는 다른 과정도 있다. 블랜포드(Blandford)와 즈나이엑(Znajek)이 발견한, 블랜포드-즈나이엑 과정(Blandford-Znajek process)과정이다. 이 과정은 전자기적 과정으로 블랙홀과 유입원반이 자기장을 띠고 있을 때에만 성립된다. 그런데, 블랙홀이 자기장을 띨 수 있는가? 약간 이상하게 느낄 지도 모른다. 그간의 상식으로는 블랙홀은 ‘질량 M, 각운동량 J, 전하 Q외의 물리량을 가지지 않는다’라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간 블랙홀의 물리량은 3가지뿐이라는 것을 가리켜 ‘블랙홀에는 머리털이 없다(Black holes have no hair)’라고 표현했다. 즉 대머리가 돼 머리털이 세 가닥 M, J, Q만 남았다는 뜻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은 휠러(Wheeler)다. 그러나 쏜은 호킹의 이론을 바탕으로 확장된 사건의 지평선, 즉 블랙홀 멤브레인(membrane) 이론을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확장된 사건의 지평선은 M, J, Q 이외에도 온도 TH, 엔트로피 sH 같은 물리량을, 블랙홀 전기역학 덕분에 전하 σH, 전류 jH, 저항 RH, 전기장 EH, 자기장 BH 같은 물리량을 가질 수 있게 됐다. 머리카락이 세 가닥밖에 안 남았던 대머리 블랙홀이 마침내 ‘가발’을 쓰게 된 것이다!
따라서, 블랜포드-즈나이엑 과정(Blandford-Znajek process)은 쏜이 주장한 ‘가발’을 쓴 블랙홀 이론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블랜포드-즈나이엑 과정(Blandford-Znajek process)은 태양계만한 작은 영역에서 한 은하계만큼(!)의 에너지를 방출하는 ‘퀘이사(quasar)’라는 수수께끼 천체의 정체를 시원하게 풀어줬다. 연구 성과로 보면 이른바 대박을 친 것이다.
그런데, 블랜포드-즈나이엑 과정을 담은 논문은 너무 어려웠다. 이 과정을 쉽게 설명하는데에도 쏜은 천재적 기지를 발휘한다. 블랜포드-즈나이엑 과정을 성립하는 과정을 그린 후, 그 과정이 간단한 전자회로와 다름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고.
쏜은 쉽고 정확하게 설명하는데 천재적인 물리학자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도 쏜 박사의 완벽한 자문이 처음부터 끝까지 돋보였다.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동영상들을 검색해보자. 단언컨대 이 영화에 '과학적' 오류는 없다. 과학적 오류처럼 보이는 것은 영화 속 ‘어떤 존재’가 만들어낸 ‘기적’이다.
영화 ‘인터스텔라’는 ‘우리가 이해한 과학의 관점’,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 과학의 관점’, ‘인류의 정서적 관점’이 삼위일체가 돼 빚어낸 걸작이다. 나중에 두 개를 가지고 태클을 걸면 곤란하다. 그것은 판타지에 가까운 부분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옥의 티’를 찾을 것이 아니라 영화가 말하는 과학을 좀 더 이해하려고 노력해보자.
블랙홀을 통과한 로봇 타스(Tars)가 전해준 정보를 쿠퍼 딸이 금방 풀어서 ‘플랜 A’대로 우주 스테이션을 공중으로 띄워 올린 부분이 좀 어색하긴 했다. 하지만 이 부분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 과학’ 영역이므로 토를 달기 어렵다. 아마 그 내용은 반중력(antigravity)에 관한 것이 아니었을까. 커 블랙홀의 고리모양 특이점을 지나면 반중력 우주가 있으니까 말이다.
혁혁한 공을 세운 타스는 까맣게 타버렸다. 타스를 수리해달라고 부탁하는 쿠퍼의 모습은 영화 ‘스타워즈(Star Wars)’에서 깡통 로봇 ‘알투디투(R2D2)’의 수리를 부탁하던 루크(Luke)의 모습과 빼닮았다. 영화 ‘인터스텔라’와 드라마 ‘빅뱅 이론(Big Bang Theory)’의 주인공이 모두 쿠퍼인 것은 우연인가? 어쨌든 두 쿠퍼 때문에 요즘 생활이 즐겁다.
사족 하나, 내년은 일반상대성이론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영화 ‘인터스텔라’는 그 기념작이 될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이 영화를 봤더라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 글
- 박석재 전 천문연구원장
- 서울대 천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텍사스대에서 블랙홀 천체 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연구원으로 재직했다. 한국천문연구원의 원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도 한국천문연구원에 재직 중이다. 한국아마추어천문학회를 창립하고, 현대 과학의 어려운 이론을 여러 가지 재미있는 형식을 빌려 알기 쉽게 설명하는 등 과학 대중화에 노력해왔다. 저서로는 <하늘에 길을 묻다>, <개천기>, <블랙홀이 불쑥 불쑥>, <해와 달과 별이 뜨고 지는 원리> 등이 있다. 블로그: http://blog.naver.com/dr_blackh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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