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창의 생가 /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위 시는 그러니까 이 날 이건창의 생가인 明美堂에 들렀을 때 우리를 위해 선생께서 손수 컴퓨터로 쳐가지고 오신 이건창의 〈韓狗篇〉이란 작품이다. 우리는 한낮에 지키는 사람 하나 없는 명미당 마루에 올라, 앞뒤로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시원한 바람이 한 번씩 지나가고, 앞쪽에 보이는 논들은 온통 초록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해오라비가 한가롭게 날아가는 들녘을 자꾸 곁눈질 하며, 거기서 우리는 구한말의 슬픈 개 이야기를 들었다. 위의 번역은 외람되지만 선생의 뜻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필자가 새로 했다.
이 시는 읽는 것으로 그뿐 다른 긴 말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처음 글은 막내 아우 이건승이 평안도를 다녀와서 자신이 지은 〈韓狗文〉을 보여주는 데서 시작한다. 평안도 강서산의 한씨집 개 이야기를 듣고서 시인은 아우가 지은 문장 외에 자신은 다시 시를 지음으로써 史家의 紀述에 시인의 銘頌을 아우르고자 하는 뜻을 서두에서 밝혔다.
한씨 집에서 기르던 충직한 개, 가난한 주인을 만났어도 제 주인을 위해 충성을 다 했던 개, 못난 주인은 빚 대신에 그 개를 팔았다. 팔려간 뒤에도 개는 오로지 제 옛주인만 생각했다. 제 주인에게 해가 갈까 봐, 집을 지키면서도 한 밤중에만 와서, 그것도 주인 몰래 지켰다. 그러다가 지쳐서 죽고 말았다.
시인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주인이 힘이 없어 제 나라를 다 빼앗기고, 나라 잃은 백성들이 마치 주인 잃은 개처럼 남의 집에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는데, 지식인이란 것들은 오직 제 뱃속 채울 궁리만 바쁜 나라. 도무지 개만도 못한 지식인들이 그는 부끄럽고 부끄럽고 부끄러웠던 것이다. 보아라 먹물들아! 개는 제 주인이 걱정되어 시키지 않아도 하루 수십리 길을 오가며 도둑을 지켰다. 제 집을 지켰다.
그런 개야 실제 있었던 얘기였겠지만, 주인의 성씨는 꼭 韓氏가 아니었을 게다. 그러니까 그는 韓氏집 개 이야기를 하면서 사실은 망해가던 우리나라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였겠지. 정작 나라가 다 망해 가는데도, 제 주인을 능멸하는 읍내 부자를 물기는커녕, 오히려 그 밑에서 꼬리를 치며 뼈다귀 하나라도 더 받아 먹으려 들던, 높은 벼슬에다 부귀영화에 겹던 매국노들을 말하려 했던 걸게다. 약에다 쓰려고 찾아도 쓸데가 없던 쓰레기 같은 지식인들, 이 나라 조선이 지난 5백년간 선비를 기른 보람은 도대체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인가?
이건창, 15살에 과거에 급제했던 조선조 최연소 과거 합격자. 불의는 눈 뜨고 못보던 서슬이 시퍼렇던 암행어사였고, 당대 조선 최고의 문장가로 이름 높았던 그다. 이 시는 1886년, 그의 나이 35세 나던 해에 지은 작품이다. 열강들이 야금야금 조선을 잠식해 들어오던, 조국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 같던 때였다. 한씨 집 개와 같은 충직한 선비가 그토록 아쉽고 간절하던 때였다.
처음 이 개 이야기를 형님에게 전해주었던 동생 이건승은 뒷날 나라가 망하자 멀리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길에 올라 거기서 세상을 떴다. 정작 이건창은 1898년 나라가 문을 닫는 험한 꼴을 보기 전에 눈을 감았다. 마흔 일곱의 젊은 나이였다. 그가 죽고나서 한일합방이 되자 매천은 이 나라 조선이 5백년 동안 선비를 길러왔는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 따라 죽는 선비가 하나도 없다니 이 어이 슬픈 일이 아니냐며, 아편 덩이를 삼켜 죽음의 길을 택했다. 정작 옛 주인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자들은 모두 새 주인 밑에서 호의호식에 겨워 있을 때, 주인의 눈길 한 번 받아보지 못해, 말석의 벼슬 한자리 차지해 보지 못했던 시골 선비 매천이 오히려 옛 주인을 위해 죽었다. 참 세상은 불공평하다.
날 강화 여행은 철저히 한시 순례로 코스를 잡았다. 처음엔 강화 읍내를 지나서 약 10분 가량 더 달려 하도리의 고려산 기슭에 있는 석주 권필의 초당 터로 갔었다. 한 시대를 떠들썩 하게 했던 시인이 세상 꼴 보기 싫다며 들어 앉았던 곳이다. 덩그러니 서 있는 유허비는 이제 염소를 묶어 두는 말목이 되어 있다. 초당 터를 지나, 《석주집》의 기록을 따라
초당 주변의 풍광을 더듬어 보았다. 거기서 초당 시절에 그가 지은 한시를 읽었다. 문집에 석주가 팠다고 적혀 있는 해묵은 돌샘도 찾아 보았다. 기록이 참 무섭다. 서북쪽으로 백 걸음 쯤 된다고 적은 바로 그 언덕 아래 그때 그가 팠던 그 돌샘이 지금도 거짓말처럼 그대로 남아 있다. 현장에서 읽는 한시는 역시 느낌이 색다르다. 참 그러고 보니 석주 권필도 개를 소재로 쓴 시 한 수가 있다.
누가 개에게 뼈다귀 던져 誰投與狗骨
뭇개들 사납게 저리 다투나. 群狗鬪方狠
작은 놈 꼭 죽겠고 큰 놈도 다쳐 小者必死大者傷
도둑은 엿보아 그 틈을 타려 하네. 有盜窺窬欲乘釁
주인은 무릎 안고 한 밤에 우니 主人抱膝中夜泣
비맞아 담 무너져 온갖 근심 모여드네. 天雨墻壞百憂集
제목은 〈투구행鬪狗行〉이다. 난데 없는 개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의 원인은 뼈다귀이다. 당시 벼슬아치들이 대북이니 소북이니 나뉘어져 티격태격하며 당쟁을 일삼는 동안, 정작 왜적이 쳐들어와 종묘사직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게 되었음을 풍자한 시로 알려져 있다. 석주는 그 시절을 완전히 `개판`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두 번 다 왜놈들이 이 강산을 유린했다. 지식인이란 것들이 뼈다귀나 일신의 안위에만 눈이 팔려 있었던 것도 꼭 같다. 아! 한심하구나. 권필은 날뛰는 외척들의 전횡을 보다 못해 날을 세워 풍자한 시를 썼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서 그에게 맞아 죽었다. 시인이 바른 말 했다고 시 때문에 임금에게 곤장을 맞아 죽던 어지러운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다시 3백년이 지나 이건창은 아예 지식인의 값이 개값만도 못한 세상이 되었다고 통탄했다.
우리는 다시 차를 돌려 나와 백련사를 찾았다. 백련사는 역시 고려산 자락에 자리 잡은 절이다. 석주의 시 속에 자주 등장한다. 석주 뿐 아니라 당시 뛰어난 시인들이 백련사와 관련된 시를 많이 남겼다. 옛 가람터엔 중창의 역사가 한창이었다. 10년전 포장도 안된 길을 어렵사리 찾았던 내게 그 변한 모습은 남다른 감회를 안겨 주었다. 수백년 된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스님이 내다 준 수박을 먹으며 땀을 들였다. 돌려 나오는 오솔길에선 까투리가 제 새끼들을 한 줄로 세워 길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나는 저만치에서 잠시 차를 세우고 그들이 완전히 지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다시 먼 길을 달려 이건창의 생가, 명미당을 찾았고, 거기서 한씨집 개의 슬픈 이야기를 들었다. 오는 길엔 다시 이규보의 산소를 들렀다. 고려의 이규보와 조선 전기의 권필, 구한말의 이건창, 세 큰 시인의 자취는 오늘 우리에게 무슨 상징이 될 수 있을까? 그렇게 하루의 나들이를 끝내고 해 떨어지는 한강을 거슬러 돌아왔다.
글: 정민 교수
편집: 한국 네티즌본부
'TIP' 쌍육삼매(雙六三昧)-신윤복(申潤福)
• 작가 : 신윤복
• 제작연대 : 19세기
• 소장처 : 간송미술관
• 재 료·크 기 : 지본채색 28.2×35.6㎝
쌍륙은 서양장기같이 말을 옮겨 상대방의 궁에 먼저 들어가는 쪽이 이기는 놀이이다. 말은 보통 검은말 16개, 흰말 16개인데 나무로 만들거나 뼈로 만들어 썼다고 한다. 주사위 두개를 굴려서 나온 숫자대로 옮기는데, 말을 어떻게 잘 옮기느냐 하는 것이 중요했단다.
]이것은 서아시아 쪽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다시 우리나라로 전해졌다고 하며, 주로 부녀자들이 즐겼다고 한다.
왼쪽 남자는 갓 아래 검은 복건을 쓰고 있어 벼슬하지 않은 유생임을 말해준다. 오른쪽 남자는 탕건을 벗어 왼편에 놓아두고 배자만을 입은 것을 보니 놀이에 열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푸른색과 붉은 색의 말로 편을 갈랐다. 기생쪽에만 푸른 말 두개가 나와 있는데, 판 위의 말은 모두 각 14개씩이다. 아마 붉은 색 말 두개는 남자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나 보다. 내려온 말이 두 개씩 밖에 되지 않는 것을 보니 놀이는 이제 막 시작되었나보다. 그래도 초반의 기세가 어느 순간 승패를 가름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려는지 “기러기 비켜나는 울음소리 역력한데, 인적은 고요하고 물시계 소리만 아득하다.” 고 온 정신을 놀이에 쏟고 있는 모습을 오른쪽에 시로 써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