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송 달송

[스크랩] 고대의 다양한 하루의 계산 달력

황령산산지기 2010. 9. 11. 10:54

time, space, interface

시간, 공간, 인터페이스

 

 

 

달력의 최소단위는 ‘하루’이다. 이 하루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지구에 생명체가 생겨난 이후 지금까지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해가 뜨고 지는 것을 경험해왔기 때문이다.
자연 속에서 인간의 존재를 확인시켜 준 최초의 존재는 바로 ‘해’이다.

이어서 한 달과 일주일이 생겨났으며 이를 위해 ‘달’이 새로운 기재로 작용하였다.

 

 

아스텍의 역석(曆石), 무게 약 25t, 지름 약 3.7m, 1790년에 발견된 이 달력은 현무암에 조각한 것이다

 

 

역법의 기초

  
역법의 기본계산단위는 일(日)이다. 일은 오늘날 관례적으로 자정에서 자정까지의 시간으로 측정되지만, 항상 그렇게 결정되어온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원시 부족들은 여명부터 여명까지로 계산한 반면, 어떤 부족들은 일몰부터 일몰까지를 하루로 계산했다. 2세기경부터 1925년까지 천문학자들은 정오부터 정오까지를 하루로 계산했다. 일은 다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세분되었는데, 그 세분된 길이는 계절에 따라 자주 변하므로 여름철의 낮을 세분한 것은 겨울철의 그것보다 더 길었다. 유럽에서는 13세기말에 기계식 시계가 사용되면서부터 변동시간제(seasonal or variational hour) 대신 고정시간제(fixed hour)로 바뀌었다.

 

일을 세분한 다음 단계는 일을 더 큰 단위로 묶는 것이다. 원시부족들은 종종 일을 월로 묶었지만, 그뒤에는 월보다 좀더 짧은 주기가 유용하다는 것을 알았다. 서(西)아프리카 부족들은 4일, 중앙아시아와 아시리아에서는 5일, 이집트에서는 10일을 1주기로 사용했다. 현재 사용중인 7일 체계는 바빌로니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7일의 주기를 선택한 것은 7을 신성시한 데서 유래한 것인데, 우주에는 7개의 행성이 있다는 그들의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BC 1세기에 이르러 로마인들은 유대력처럼 7일을 1주로 채택했다. 일을 월로 묶는 것은 약 29.5일인 달의 위상주기를 바탕으로 한다. 월을 사용하면 일수를 계산할 때 큰 수를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1개월은 여성의 생리주기나 몇몇 해양생물의 주기적인 활동과도 비슷하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매우 중요시되었고 종종 제례의식과 종교의식의 기준으로도 사용되었다.

 

월을 년으로 묶는 것은 달력을 제작하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직면했던 문제이다. 그 이유는 달의 위상주기인 29.5일이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의 공전주기인 365.25일과 조화를 이루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양년의 중요성은 명백한데, 그 이유는 계절의 변화가 태양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태양관측을 통해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이 오래 전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태음 주기와 태양년을 조화시키기 위해 건설한 가장 유명한 구조물은 아마 잉글랜드 윌트셔에 있는 스톤헨지일 것이다. 스톤헨지의 원형(原形)은 BC 2000년경에 만들어진 것 같고, 그뒤 수세기 뒤에 개량되었다. 이 구조물은 거의 원에 가깝게 배열된 구멍·돌·아치들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바깥쪽 원은 위치를 표시한 56개의 구멍이 있는 고리이고, 안쪽 2개의 원에는 각각 29개와 30개의 구멍이 있다. 이 푯돌들(가장 잘 알려진 것이 커다란 '힐 스톤'[heel stone]임)이 구조물을 이룬다. 구멍이나 돌을 힐 스톤 또는 다른 푯돌 중의 하나와 일치시킨 뒤, 동일 직선상에 있는 지평선 위의 한 지점에서 출현하는 태양이나 달을 보아 관측했다. 태양이 지평선의 최북단과 최남단에 위치할 때 각각 하지와 동지가 되며, 안쪽 두 원에 표시된 29개와 30개의 위치로 29일과 30일로 된 태음월을 계산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태양력과 계절을 맞추기 위해 일정한 치윤법이 사용되고 있다. 매우 흥미롭게도 이집트인들은 1회귀년(태양년)이 약 365.25일인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365일을 1년으로 사용했다. 그결과 달력은 점점 계절과 맞지 않게 되어서 일상생활용과 농업용으로 나누어졌다. 로마인들은 이것을 일치시키기 위해 처음으로 4년에 하루씩 윤일(閏日)을 삽입했다. 월은 태음월이지만 년은 태양년(태양의 경로로 측정함)인 태음태양력(太陰太陽曆)의 역사는 이집트와 그리스를 제외하면 중동의 초기 문명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계산법은 BC 3세기에 메소포타미아에서 개발된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달력제작자들의 욕구, 즉 달의 위상변화 주기와 같이 자연적으로 주어진 시간의 표시를 재배치하여 사회적 요구에 쉽게 적용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려는 열망에서 비롯되었다. 예를 들면 메소포타미아력에서는 1태양년이 여름과 겨울의 두 계절로 나누어져 있다. 초승달이 처음으로 뜨는 날을 각 월의 시작일로 했다. 월의 이름은 도시마다 달랐으며, 한 도시에서조차 여러 가지로 불렸다. 이무렵에 왕년(royal year)이라는 개념이 도입되어, 왕의 재임기간에 행해진 치적을 기려 왕의 이름을 년의 이름으로 명명했다.

 

A page from the Hindu calendar 1871?1872.

힌두의 달력

 


서양의 역법

 

고대중동의 역법

바빌로니아력의 영향은 바빌로니아 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되었지만, 고대 중동의 타민족들이 사용하던 역법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몇몇 또는 모든 월의 이름이 알려지고 있지만, 그 순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시리아인의 1주는 5일인 듯하며, 히타이트력의 첫번째 달은 바빌로니아력에서처럼 과일을 처음 수확할 때인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월초(月初)에 신이 운명을 정한다고 믿었다. 이집트력은 원래 달을 바탕으로 했다. 이 달력은 시리우스 별이 떠오를 때 계절과 맞추어졌는데, 그 주기는 실제 태양년보다 단 12분이 짧았다. 고대 그리스력도 태음월의 사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듯하다. 도시의 축제 이름을 따서 붙여진 월은 초승달로 시작했다. 12개월(약 354일)로 이루어진 태음년(太陰年)은 격년에 1번씩 윤달을 삽입하여 태양년과 일치시켰다. 바빌로니아에서의 관행과 비슷하게, 낮과 밤은 각각 4개의 시간대로 세분되었고, 각각의 시간대는 또다시 불균등한 12개의 시간으로 나뉘었다. 1시간의 길이는 계절에 따라 약 45~75분 사이로 변동되었다. 처음에는 바빌로니아에서처럼 계절을 여름과 겨울로 나누었으나, BC 650년경에는 이미 4계절로 나눈 증거가 있다.

 

 

로마력

초기 로마력은 로물루스가 제정하고 로마의 한 도시에서 사용된 지역 달력에 그 기원을 둔다. 한 해는 마르크(March:오늘날의 3월)로 시작되며, 10개월(6개월은 30일, 4개월은 31일로 구성됨)로 이루어져 있고 총 304일이다. 1년은 데켐베르(December:오늘날의 12월)로 끝나는데, 그뒤는 계산되지 않은 겨울 공백기간에 해당하는 어떤 것이 이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BC 7세기 로마의 제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는 야누아리(January:오늘날의 1월)와 페브루아리(February:오늘날의 2월)를 추가하여 1년은 50일 늘어난 354일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새로 추가된 월에 충분한 일 수를 채우기 위해, 그는 30일로 된 월에서 하루씩 빼서 1월과 2월에 배정하기 위해 56일을 남겨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로마인들에게는 짝수를 두려워하는 미신이 있었기 때문에 폼필리우스는 야누아리에 하루를 더 추가했다. 페브루아리는 지옥의 신에게 맡겨진 달이었고, 그결과 일수가 짝수로 남게 되었다. 이 체계는 12개월을 한 주기로 하는 1년이 355일(짝수가 아니므로 수용할 만 했음)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했다. BC 7세기 후반에 이르러 로마 공화력이 도입되었는데, 이것도 355일을 1년으로 했다. 즉 3, 5, 7, 10월은 각각 31일, 1, 4, 6, 8, 9, 11, 12월은 각각 29일, 그리고 2월은 28일로 이루어졌다. 이 역법은 사실상 태음년이어서 365.25일의 태양년보다 10.25일이 짧았다. 달력을 계절과 맞추기 위해 2년마다 1번씩 27일 또는 28일의 윤달을 2월 23일 뒤(2월의 나머지 5일은 생략됨)에 삽입했다. 그러나 부주의와 무지 및 부정행위로 인해 치윤은 불규칙해졌고, 그결과 계절의 혼돈을 초래했지만,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로마 공화력의 많은 부분이 현재 널리 사용되는 그레고리력으로 이어졌다.

 

 

유대력

초기 유대력도 12태음월을 바탕으로 했다. 이 역법은 태양의 경로와 관련이 있지만, 354일의 태음년이 365일의 태양년과 어떻게 조정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오늘날 사용중인 유대력에서, 년은 태양력이고 월은 태음월인 태음태양력이다. 태양년이 12태음월보다 11일 정도 길기 때문에 30일로 된 13번째 달이 19년 주기 중에 3, 6, 8, 11, 14, 17, 19번째 년에 삽입된다. 1주는 7일로 되어 있다. 이슬람력의 년은 태음년이며, 30일과 29일이 번갈아 있는 12태음월로 이루어졌고, 월은 대략 초승달로 시작된다. 1년은 윤일의 삽입 여부에 따라 총 354일 또는 355일이며, 그결과 32.5년마다 각 달은 조금씩 늦어져서 계절을 거꾸로 한 바퀴 돈다. 힌두력도 달의 공전을 바탕으로 하지만, 태양력 계산법과 일치될 수 있다. 이것은 태양년에 근사한 360일을 27일 또는 28일로 된 12태음월로 나누고, 60개월마다 윤달을 삽입했다.

 

 

고대 아메리카의 역법

 

마야력

마야력의 기본 구조는 고대 중앙 아메리카의 문명사회에서 사용된 모든 역법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것은 365일의 1년과 260일의 제사주기(祭祀週期)로 되어 있다. 이와 동시에 그 주기는 ' 역주기'(曆週期)라고 하는 1만 8,980일, 즉 365일씩 52년이라는 더 큰 주기를 만든다. 마야인들이 260일 주기를 원래 무엇이라 불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은 그 주기를 날짜를 셈한다는 뜻의 촐킨(Tzolkin), 점술력(占術曆) 또는 제사력(祭祀曆) 등 여러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그 역법은 1~13의 숫자가 조합되어 이루어졌고, 날마다 20개의 이름이 순차적으로 붙여졌다. 이러한 날들은 운명적인 특징을 지니는 것으로 여겨졌다. 365일인 마야력은 각각 20일씩 18개월과 우아예브(Uayeb)라고 하는 악의 징후를 뜻하는 기간인 나머지 5일로 나누어져 있다. 고대 마야인들이 역사적인 날들을 기록했던 방법은 독특했다. 그들은 년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날을 지정하여 52년 주기의 역주기에 1번씩 나타나도록 했다. 날짜를 서로 연결시키기 위해 마야인들은 날짜 사이의 시간을 며칠 또는 며칠의 묶음으로 표현했으며, 모든 역사 기록들을 서로 관련짓고 날짜를 정확히 맞추기 위해 특정한 날을 기점으로 삼아 연속하여 시간을 계산했다.

 

아스텍력

아스테카력은 '멕시코 계곡'에서 사용된 초기 달력에서 유래했으며, 기본적으로 마야력과 비슷했다. 1년은 월말마다 행해진 축제기간에 맞도록 고안되었다. 새로 불을 지펴서 한 해를 시작했고 4년마다 거창한 의식을 거행했다. 아스텍력은 마야력에 비해 수체계가 좀더 원시적이고 날짜기록 방식이 부정확하다는 점이 크게 달랐다. 다른 모든 중앙 아메리카인들뿐 아니라 멕시코인들은 세계가 주기적으로 파괴된 뒤 재창조된다고 믿었다. 멕시코 시의 국립인류학박물관에 소장된 ' 역석'(曆石)에는 멕시코인들이 지진으로 세계가 파괴될 때라고 믿었던 날짜가 묘사되어 있다.

 

북아메리카 인디언력

북아메리카의 인디언 부족들에게는 진정한 의미의 역법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대신 그들은 독자적인 방식으로 시간간격을 계산했지만 일은 모든 부족들에게 시간의 기본적 단위로서 인식되었다. 일반적으로 하루가 지날 때마다 모두 몇 개인지 그 수를 알고 있는 막대기 묶음에서 막대기를 하나씩 빼내어 날을 확인했다. 이보다 더 긴 시간 간격은 달을 이용하여 계산했으며, 계절의 순환주기도 매우 중요했다. 대부분의 부족들은 12개월을 1년으로 계산했지만, 몇몇 부족들은 13개월을 1년으로 계산하기도 했다. 중요한 사건이 있는 해는 종종 V자가 표기된 막대기로 표시했다. 북부지방의 몇몇 부족들은 일련의 사건들을 상형문자로 기록했다. 이러한 기록 중 하나는 '외로운 개의 겨울 횟수'(Lone-dog Winter Count)로 알려져 있다. 전해지는 것은 들소 가죽으로 만든 옷에 그린 것인데 이것은 1800년부터 시작해 71년을 1 주기로 기록한 것이다. 단지 몇몇 부족만이 달의 경과를 년과 관련지어 계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유럽인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많은 것들이 변화했다. 그결과 그들의 달력에 관한 현재의 지식은 원래의 체계들이 지녔던 복잡성을 완전히 보여주지는 못할 것이다.

 

잉카력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잉카에 태양과 달의 관측을 바탕으로 한 역법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 역법의 자세한 계산법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12태음월의 이름은 기록으로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농경생활기의 축제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지만, 시간 계산법이 널리 사용된 증거는 없다. 불확실하지만, 이후의 연구를 통해 잉카의 수도 쿠스코에서는 27⅓일을 1개월로 하는 태음태양력이 공식적으로 사용되었음이 밝혀졌는데, 이것은 328일(27⅓×12)로 이루어져 있다.

 

 

동양의 역법

 

동양의 역법은 태음태양력인 중국의 역법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중국의 역법은 해와 달의 운행에 의한 단순한 음양력으로부터 시작되지만 한대(漢代) 이후로는 음양력의 추산뿐만 아니라 일식(日食)과 월식(月食), 그리고 오행성(五行星)의 운행을 계산하는 방법이 포함된 광범위한 내용의 천체력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후 보다 정확한 역을 만들기 위한 수십 회의 개력(改曆) 과정을 거치면서 중국의 역법은 더욱 발전하게 되며 역법의 연구에만 전념했던 중국 천문학의 역사는 곧 역법의 역사와 상통하게 된다. 한국과 일본 등 주변 여러 국가들은 예로부터 중국의 역을 도입하여 사용했으며 도입된 역은 각각 자기나라의 실정에 맞는 역으로 개정되거나 새로운 역으로 제작·소화하는 과정에서 발전되었다.

 

중국의 역법

초기의 중국력은 연중 계절과 달 위상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BC 14세기경 은(殷)왕조시대에는 365.25일의 태양년과 29.5일의 삭망주기를 확립했다는 증거가 있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역법을 음양력, 즉 '태음태양력'으로 생각했다. 중국에서는 음양력이 계속 사용되었지만, 여러 시기에 걸쳐 힌두력이나 이슬람력과 같은 외국의 역법들이 도입되어 한때는 음양력과 동시에 사용되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달이 차고 기우는 삭망주기의 길이와 함께 BC 2000년 전부터는 규표를 사용하여 태양 때문에 생기는 막대의 그림자 길이를 측정함으로써 동지와 1태양년의 길이를 알게 되었다. 이로부터 달의 삭망주기인 1삭망월(태음월)과 지구의 공전주기인 1태양년을 역법의 기본단위로 하는 태음태양력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1삭망월의 평균치는 약 29.53058일이고 1태양년의 평균치는 365.2422일이다. 그러나 1태양년의 길이는 12.36827삭망월로 정확히 1삭망월의 정수배가 되지 않고 12삭망월보다는 10.8751일이 길기 때문에 이 나머지 일수가 3태양년간 쌓이게 되면 1개의 윤달을, 그리고 8태양년간 쌓이게 되면 3개의 윤달을 더해주어야만 달의 삭망과 계절이 일치하게 된다. 이와 같이 달의 삭망이 계절에 대하여 복귀되는 주기를 찾아서 그 안에 윤달을 배치하는 방법을 치윤법이라 한다. 즉 태음태양력에서는 치윤법을 써서 일정한 주기 안에서 1년의 평균 일수가 1태양년의 일수와 같게 되도록 했다. 치윤법에는 8태양년에 3개의 윤달을 두거나 19태양년에 7개의 윤달을 두는 8년 3윤법과 19년 7윤법 등이 쓰였다. 중국에서는 19년의 4배인 76년을 주기로 하는 치윤법이 쓰이기도 했는데 이는 19년 7윤법이 이미 포함된 법이다. 19년 7윤법은 치윤법으로서는 상당히 완전한 것으로 19태양년에 7개의 윤월을 넣어서 235삭망월이 되게 하면 19년간에 걸쳐서 평균한 해의 일수가 1태양년의 일수와 같게 된다.

 

19태양년〓365.242196일×19년〓6,939.6017일235삭망월〓29.530588일×235월〓6,939.6882일〓(12월×19년)+7삭망월

이 6,940일은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인 BC 6세기에 발견되어 장주기(章週期)라고 불렸으며 서양에서는 BC 4세기에 그리스의 메톤에 의하여 발견되어 메톤 주기라고 알려졌다.

 

중국에서는 치윤법으로 장법(章法)과 파장법(破章法)이 주로 사.용되었다. 장법은 19년 7윤법으로 태초력(太初曆) 이후 초기의 중국 역법에서 주로 쓰였다. 그러나 장법의 235삭망월이 정확히는 19태양년보다 0.0865일이 길기 때문에 윤달을 더 두어야 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600년에 221개의 윤달을 두는 새로운 윤법이 창시되었다. 이는 장법을 파기했다는 뜻으로 파장법이라 일컬었으며 그후에는 이 파장법이 계속 사용되었다. 중국의 역법은 삭망월을 어떻게 태양년과 결합시키느냐가 역법의 근본으로 치윤법과 더불어 연대배치법(連大配置法)이 쓰였다. 연대배치법은 작은 달 29일과 큰 달 30일을 교대로 놓아 만든 1태음년의 한 달 평균일이 29.5일로 평균 삭망월보다 0.03058일이 짧게 되므로 때로는 큰 달을 연속해서 놓아 그 평균일이 삭망월에 접근된 값이 되도록 연대월(연속되는 2개의 큰 달)을 배치하는 방법이다.

 

중국에서 치윤법과 연대배치법의 규칙이 바르게 된 것은 사분력(四分曆)이 만들어진 춘추전국시대 중엽이며 이것이 확립되어 역법시대로 들어간 것은 BC 104년 한나라의 태초력 이후이다. 태초력 이후 중국의 역법은 단순한 음양력이 아닌 광범위한 내용을 포함하는 천체력으로 발전한다. 천문지식이 발달하고 우수한 관측 기계의 사용으로 관측값이 정밀해짐에 따라 역법 계산에 새로운 방법이 도입되었으며 이에 따라 중국에서는 한나라의 태초력 이후 청나라말 시헌력에 이르기까지 수십 회의 개력을 하게 된다. 개력을 하게 되는 주요한 동기는 정확한 역을 제작하기 위한 것으로, 1태양년의 길이가 정확하지 않으며 세차운동 때문에 춘분점이 황도상을 매년 50°03˝씩 동에서 서로 이동하고, 황도와 백도가 교차할 때 일어나는 일월식의 예보가 적중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개력은 음양력의 추산에 필요한 천문상수의 변개(變改)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태양과 달의 위치계산, 그리고 일월식과 오행성의 행도(行度)에 대한 계산법 등 천체의 운행과 관련된 여러 문제를 망라하는 것으로 중국의 천문학은 주로 역법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한국의 역법

 

한국에서 역법의 발달은 삼국시대에 중국의 역법을 도입하는 것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중국역법의 영향을 받아왔다. 고려시대까지는 중국의 역을 받아 그대로 사용했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중국의 역법에 손질을 가해 한반도의 실정에 맞는 역으로 제작하게 되었다. 조선 말기인 1896년 태양력이 채택되기 이전까지 한반도에서는 실로 오랜 기간 동안 태음태양력인 중국의 역법을 사용했으며 현재에도 민간력으로 남아 태양력과 함께 계속 사용되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중국과 한국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에서는 송(宋)나라의 원가력(元嘉曆)을 사용했고, 고구려에서는 당(唐)나라의 무인력(戊寅曆)을, 그리고 신라에서는 당나라의 인덕력과 대연력을 사용하다가 신라 말기에는 당나라의 선명력을 사용했다. 선명력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초기에도 쓰였던 역법으로, 일월식 계산에서는 중국류의 역법 중 가장 좋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당나라 말기에 가장 오래 쓰였다. 또한 일본 서기(書紀)에 기록된 역일(曆日)과 간지(干支)를 역산(曆算)하여 본 결과, 일본이 백제로부터 얻어가서 배우고 사용한 역은 송나라의 원가력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일본의 역사시대는 그 이후로부터 시작된다.

 

고려시대에는 건국 후 별도로 역서를 만들지 않았으며, 당나라의 선명력을 계속 사용해오다가 충선왕(忠宣王) 때에 이르러 비로소 원(元)나라의 수시력(授時曆)을 사용했다. 중국에서는 당나라의 선명력 이후 고려의 건국 때까지 무려 22회의 개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에서는 1309년 수시력이 채용되기까지 약 400년간 선명력을 계속 사용했다. 이는 빈번한 개력으로 인한 혼란과 그에 따른 새로운 역의 추산 방법 등이 문제가 되어 선명력의 오차를 인정하면서도 그대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려에서는 선명력의 오차를 극복해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052년(문종 6)에 왕은 명을 내려 태사(太史) 김성택이 십정력(十精曆)을, 이인현은 칠요력(七曜曆)을, 한위행은 견행력(見行曆)을, 양원호는 둔갑력(遁甲曆)을, 김정은 태일력(太一曆)을 편찬하게 했으며, 1218년(고종 5)에 김덕명은 신찬력(新撰曆)·고려사성요력(高麗師星曜曆)·고려일력(高麗日曆) 등을 편찬했으나 독자적인 역법을 만들지는 못했다. 1370년(공민왕 7) 고려의 사신 성회득이 명나라 황제로부터 받아온 대통력(大統曆)을 반포했다. 명(明)의 대통력은 세실소장(歲實消長)을 삭제하고 역원(曆元)을 고친 것 외에는 원의 수시력을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고려말에 이어 조선에서도 사용했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에 이어 명나라의 대통력을 사용했다. 그러나 일월식(日月食)과 오행성(五行星)의 행도(行度)에 대한 계산방법은 수시력 시행 이후 그 이치를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이 부분은 계속 당의 선명력을 사용했다. 그리하여 세종은 정흠지(鄭欽之)·정초(鄭招)·정인지(鄭麟趾) 등에게 명하여 이를 추산하고 연구하여 그 묘리를 터득하게 했으며, 명나라의 태음통궤(太陰通軌)와 태양통궤(太陽通軌)를 얻어 그 오류를 바로잡아서 칠정산 내편(七政算內篇)을 만들게 했다. 또한 이순지(李純之), 김담(金淡)에게 명하여 명의 회회력법(回回曆法)을 연구하고 정돈하여 칠정산 외편(七政算外篇)을 편찬하도록 했으니, 칠정산 내·외편은 시작된 지 10년 만에 모두 완성되었다.(1442)

 

칠정산 내편은 원의 수시력을 바탕으로 대통력의 장점을 더해 한반도의 실정에 맞도록 엮은 역법이다. 칠정(七政)이란 일월과 오행성을 합쳐서 말하는 것으로 칠정산 내편의 역원·역법·계산법 및 천문상수는 모두 수시력과 같다. 내편에서는 북경을 기준으로 하여 만든 수시력과는 달리 한양을 기준으로 한 동지와 하지 후의 일출입(日出入) 및 주야시각(晝夜時刻)에 대한 수표가 실려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한양을 표준으로 실측 추산한 내편은 이후 한반도에서 역편찬의 기반이 되었다. 칠정산 외편은 순태음력법인 회회력법의 해설서이다. 회회력은 고대 그리스의 〈알마게스트 Almagest〉를 기본으로 한 역법으로서 중국 재래의 역법과는 계통이 전혀 다른 것이다. 원나라에서는 수시력과 병용하여 사용했다. 외편의 내용은 태양·태음·교식(交食)·오성(五星)·태음오성능범(太陰五星凌犯)의 5장(章)으로 되어 있다. 내편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각도 표시법으로 내편에서는 중국 고대의 전통에 따라 원주를 365.25°, 1°를 100′, 1′을 100″로 정한 데 반해 외편에서는 그리이스의 전통에 따라 원주를 360°, 1°를 60′, 1′을 60″로 하고 있다. 칠정산 외편은 수시력보다 수학적으로 앞섰고 세밀한 관측에 의한 방대한 수표가 수록되어 있다. 칠정산 내·외편의 완성으로 조선 역법은 완전히 정비되었으며 이는 후세 역산가들에게 훌륭한 교본이 되었다.

 

조선에서는 명의 대통력 이후, 1653년(효종 4)에는 서양의 역법에 영향을 받은 시헌력법(時憲曆法)이 시행되어 조선시대말까지 사용되었다. 1772년(영조 48)에는 칠정백중력(七政百中曆)을 시헌력법으로 편성한 시헌칠정백중력(時憲七政百中曆)을 사용했으며, 1780년(정조 4)에는 백중력(百中曆)을 만들어 대통력법과 시헌력법을 함께 실어 간행했다. 이를 바탕으로 1782년에는 천세력(千歲曆)을 간행하여 사용하다가 1904년(광무 8)에는 천세력을 만세력(萬歲曆)이라 고쳐 반포했다. 조선에서 태양력은 1896년에 이르러 비로소 쓰였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태양력을 쓰되 시헌력을 병용하기로 하여, 절후(節候)와 행사 등은 음력인 시헌력을 따랐다.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친 1897년에는 시헌력의 역명을 명시력(明時曆)으로 고쳤고 이 역서는 1908년까지 출간되었다.

 

 

오늘날의 역법

 

현재 전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역법은 태양력에 기원을 두고 있다. 태양력이 계절의 변화와 일치하고 종교적인 축일을 계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때때로 이러한 축일이 태음력의 계산법에 근거하므로 태음력의 계산법과 태양력의 계산법이 일치되어야 했다. 이를 위해 로마 공화력과 이집트력의 특징이 결합되었다. BC 1세기 중엽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 소시게네스에게 역법 개혁에 대한 조언을 구하자, 소시게네스는 개혁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적인 방법은 태음력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월은 365.25일의 태양년을 따르는 계절을 기준으로 하여 배열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카이사르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1년을 365일로 하고 4년마다 2월 23일과 24일 사이에 하루를 윤일(閏日)로 삽입함으로써 365.25일의 형태를 완성했다. 이 율리우스력에서 월은 로마 공화력을 이어받았지만, 그 수 체계는 오늘날 역법과 비슷한 형식을 가졌다. 그러나 원래의 율리우스력에는 주가 없었다.

 

365.25일인 율리우스력의 1년은 해마다 11분 14초가 길어지는 것으로 판명되어, 1,000년이 지나면 7일의 차이가 났다. 이 문제는 카이사르 이후 수세기 동안 교회심의회에 계속 제기되었으나, 이것을 고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시기는 부활절을 결정할 때 사용되던 춘분점이 원래의 날짜와 10일 차이가 생긴 1545년이었다. 16세기 이후 세기년의 4번 중 3번은 평년(윤년이 아닌 해)으로 하고 율리우스력의 형태를 유지한다는 것이 공포되었다. 이로써 세기년 중 정확히 400으로 나누어지는 해만 윤년으로 한다는 규칙이 정해졌다. 따라서 1700, 1800, 1900년은 율리우스력에서 그랬던 것처럼 윤년이 아니지만, 2000년은 윤년이 된다. 이러한 역법, 즉 그레고리력이 공포된 시기에 부활절의 날짜를 결정하는 규칙들도 제정되었다. 그레고리력에서는 율리우스력에서와는 달리 부활절이 바로 결정되지 않는다. 오늘날 그레고리력에 대한 논란이 없지는 않다. 1700년대 후반 프랑스 혁명에 즈음하여 교회와 관련된 모든 것이 완전히 제거된 상용력을 만들려는 요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년의 총 일수가 365일로 고정되었고 각각 30일씩 12개월로 나뉘며 나머지 5일은 축일과 휴가에 할당되었다. 7일 1주제는 폐지되고 30일인 1달은 10일씩 3등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프랑스 공화력은 오래가지 못했는데, 12년 정도 사용되다가 1805년에 폐지되었다. 널리 사용된 그레고리력과 관련된 월의 계속된 변동은 외국과의 통신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레고리력에 대한 개혁이 여전히 제기되고 있는데, 7일 1주제와 달의 길이가 서로 다른 것에 불만을 느끼기 때문이다. 원래의 율리우스력에서처럼 축일과 안식일을 해마다 같은 날로 고정시키면 더욱 편리할 것이다. 오늘날에는 2가지의 일반적인 방법이 제시되고 있다. 첫째는 국제고정력(國際固定曆 International Fixed Calendar)으로서, 1년을 28일씩의 13달로 나누고 마지막에 하루를 추가하는 것이다. '솔'(Sol)이라는 새로운 달은 6월과 7월의 사이에 놓이며, 모든 월은 모두 일요일로 시작해서 토요일로 끝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의 결점은 한 회계 연도를 4등분하기 불편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요인을 해결할 수 있도록 개선된 것으로 세계력(World Calendar)이 있다. 이것의 1년은 91일씩 4등분되며, 그 끝에 하루가 추가된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각 달이 5주 이상으로 늘어나며, 이렇게 4등분된 월은 다른 요 일에 시작된다고 비평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안된 두 개선책은 모두 많은 변수들을 담고 있는 현재의 체계보다 개선된 것으로 보인다.

 


문명이 분화되면서 바로 이 ‘해’와 ‘달’은 시간측정을 위한 중심 역할을 놓고 서로 맞붙게 된다.

 

하지만 꼭 자연현상만이 달력의 지배권을 놓고 투쟁을 벌인 것은 아니다. 앞면만 놓고 볼 때, 달력은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천문학과 물리학 그리고 수학 등 인간의 지혜가 스며들어 있는 문명의 산물일 뿐이다.


하지만 그 뒷면에는 끊임없는 권력의 간섭에 의해 변천해온 달력의 어두운 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시간을 지배하는 자가 권력을 잡기 때문이다. 반대로 권력은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공간에 대한 지배만큼이나 시간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
현대 달력은 과학과 권력의 치열한 싸움이라는 이중주의 산물이며 이 이중주의 한복판에는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 즉 시간을 측정하는 인터페이스를 둘러싼 암투가 놓여있는 것이다.

 

출처 : ─┼★불가사의에 답이있다★┼─
글쓴이 : 칠성여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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