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앞날 되시기를][꿈은 이루어진다][꿈은 미래의 현실이다]
[영원히 살 것처럼 계획하고, 하루 살다 죽을 것처럼 실천하라.]
[ 이상 없는 현실은 무의미하고 현실 없는 이상은 존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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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큰 나라 관음상, 1400년 변치 않는 미소
[중앙일보 2010.03.26]
일본 나라 호류지 안 대보장원에 전시돼 있는 ‘백제관음상’.
세월을 견뎌온 미소는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일본인들이 나라에 오는 이유가 오직 ‘이 불상을 보기 위해서’라고 할 정도로 사랑받는다.
“일본이 침몰해도 이것만은 남기고 싶다.”
프랑스의 대문호인 앙드레 말로가 극찬했던 ‘이것’은 바로 ‘백제관음상’이다.
이 불상은 일본 나라(奈良)에 있다. 나라는 간사이(關西) 지방 남쪽에 있는 고대 일본의 도읍지다.
오사카(大阪)·교토(京都)·고베(神戶)와 같은 일본의 유명 도시들과 가까이 있다 보니 이 지역에 여행 가는 사람들도 건너뛰기 일쑤인, 약간은 소외된 도시다.
한데 이 도시가 올해는 조금 남다른 관심을 모은다.
올해가 고대 일본이 나라에 도읍을 정한 지 1300주년 되는 때다.
우리야 무슨 상관이냐 싶겠지만 알고 보면 고대 일본의 도읍엔 백제의 숨결이 그대로 살아 있다.
백제의 숨결을 좇아 ‘호류지(法隆寺)’로 갔다. 백제관음상이 모셔진 절이다.
이 절은 고구려·백제에서 불교를 배운 쇼토쿠(聖德) 태자가 607년에 세운 절이다. 천황의 명으로 세웠다고 한다.
국보·중요문화재로 지정된 것만 190종류, 2300여 점으로 1993년 일본에서 처음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이 절은 나라시내에선 전철로 세 정거장밖에 안 된다.
한데 전철에서 내려 버스를 갈아타고 또 버스에서 내려 걸어야 하는 수고로운 여정을 감수해야 한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애써 찾아가면 1400년을 견뎌온 목재 건물의 도도함과 그 안에 숨어 있는 ‘백제관음상’의 아름다움이 그 모든 수고를 보상한다.
1000엔짜리 표를 끊고 들어선 절에선 어깨를 나란히 한 금당과 오층탑이 먼저 나타났다.
기와지붕이 가파르게 아래로 뻗쳤다 새침하게 들어올린 것이 우리의 것을 연상케 했다.
대부분의 일본식 사찰은 지붕이 느슨한 각도를 이룬다.
금당 안 고구려 승려 담징이 그렸다는 벽화는 1949년 전기누전으로 난 화재로 소실됐다.
천장에 ‘비천도(飛天圖)’ 등 벽화 일부가 남아 있지만 실내가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절 안내원은 “호류지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맛보려면 손전등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호류지 중문. 왼쪽 뒷편에 고개를 내민 오층탑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탑으로 유명하다.
보수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회랑을 돌아 대보장원(大寶藏院)으로 향했다.
‘백제관음상’을 비롯한 일본 국보급 문화재들이 보관돼 있다.
표지판에는 ‘대보장원’이라는 글씨 아래 ‘백제관음당’이라고 써 있었다.
‘구다라칸논도(百濟觀音堂)’라고 읽는다.
일본에서는 백제(百濟)의 음독 ‘구다라(くだら)’는 ‘큰 나라’라는 말이 변형된 것이라고 한다.
일본인들은 “대보장원을 보려면 마음을 차분히 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시간에 좇기면 섬세한 아름다움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실내는 창마다 가림막이 쳐져 있어 어두웠다. 오직 문화재만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다.
대보장원의 가운데 백제관음상을 위한 방이 따로 마련돼 있었다.
어두운 실내에 밝은 조명이 오직 관음상을 향했다. 사진 촬영은 금지됐다.
녹나무로 만든 관음상은 키가 2m를 훌쩍 넘었다.
오른손을 가볍게 펼쳐 앞으로 내밀고 왼손에는 호리병을 살짝 쥐고 있었다.
얼굴은 검게 변색됐지만 미소가 비쳤다.
8등신에 호리호리한 몸매, 부드러운 어깨와 허리의 곡선이 세월을 견뎌왔다.
뒤편 둥근 광배(光背)는 변색돼 오히려 신비로움을 자아냈다.
일본인들은 이곳에서 나지막이 탄성을 뱉고 두 손을 모았다.
일본에는 ‘구다라나이(くだらない)’란 형용사가 있다. ‘시시하다’는 뜻이다.
‘구다라’는 백제(百濟), ‘나이’는 없다(無い)를 의미한다.
즉 ‘백제에 없는 것’은 시시하다는 말이다.
7세기 왜(倭)의 하시히토(間人) 공주가 “좋은 것은 다 백제에서 왔구나”라고 한 말이 형용사로 뜻이 굳었다.
이정봉 기자
출처 - http://news.joins.com/article/aid/2010/03/26/3665538.html?cloc=olink|article|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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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글에서도 보이듯이
'시시하다, 수준이 낮다, 별 볼일 없다'를 뜻하는 일본어 ‘구다라나이(くだらない)’
이는 백제(百濟) 즉 '구다라'가 ‘나이’ 즉 없다(無)
즉
'백제가 없다'
'백제적인 요소가 없다'
'백제것이 아니다'
라는 정도의 뜻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구다라나이'라는 말은 '백제것이 아니다'라는 뜻을 넘어서
사실은 '한국 것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봐야 할 것이라 봅니다.
일본의 고대문명이라는 것이 고조선, 가야,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계속해서 문명이 전해져서 생긴 것인데
2천 수백년전 고조선(특히 마한)에서 처음 일본으로 벼농사, 금속문화 등이 전해지고
그후 가야,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건너가서 작은 나라들을 세우고 일본 고대문명이 시작되는데
가야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일본의 가장 큰 세력인 기간도 있었고
고구려, 신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라 하겠는데
한국의 3국시대 말기에는 백제의 영향이 가장 컸다고 봅니다.
그래서 '구다라(큰 나라)'가 '백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지금 전해지지만
나라(국가)를 뜻하는 '다라'란 '달아'
즉 '달의 땅'이란 얘긴데
'달'이란 '아사달'이란 말에서도 보이듯이 고조선을 뜻하는 말이고
한국 전체를 뜻하는 말이라 하겠습니다.
[다라]는 일본어에서 [큰 그릇]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죠.
예전 그릇들은 고무나 프라스틱 그릇이 아니라 토기, 도자기 였죠.
일본인들이 한국의 도자기에 너무나 감탄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조선 도자기공들이 일본 도자기 산업을 일으켜서
그 이후 일본 도자기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죠.
한국을 뜻하는 [달아(다라)]라는 말이 [큰 그릇]을 뜻하는 말로도 쓰이는 것은
한국의 그릇이 그만큼 높이 평가받았다는 것이 되겠죠.
예로부터 한국어가 건너가서 일본어의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일본어에는 고대 한국사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가 많이 남아있다 하겠습니다.
위 백제관음상의 어깨로 흘러내리는 모습은
태극을 닮았다 하겠습니다.
호류지(법륭사) 금당(왼쪽 건물)과 5층목탑
위 두 건물은 백제인들에 의해서 백제식으로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고
처마 선 등이 일본식이 아니라 한국식.
위 금당은 고구려 승려 담징의 그림이 그려진 것으로 유명하죠.
아미타정토도(阿彌陀淨土圖) - 고구려 담징 그림
담징의 원 그림은 화재로 불타고, 위 그림은 일본의 화가가 복원한 것인데
담징의 원 그림은 위의 복원도보다 더 뛰어난 것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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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글은 홍윤기박사의 저서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의 발췌문입니다.)
고대 백제의 열풍, 한류(韓流)의 원조
‘구다라나이(無い)’라는 말이 일본 땅에서 오랜 역사 속에 이어져 왔다.
백제, 구다라 열풍은 이미 고대 일본땅에서 왕성하게 일었고 그것이 한류의 원조(元祖)였다.
옛날 일인들은 백제에서 건너온 물건이나 백제 문화를 접하면 입버릇처럼 “구다라나이” 소리를 했다.
‘구다라나이’는 일인들의 ‘백제 칭송’이다.
본래 일인들이 백제 문화를 찬양하던 이 말의 어원은 “이것은 백제 물건이 아니다(これはの物では無い)”였다.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뛰어난 생산품이 아니면 가치가 없다는 말이었다. 요즘 흔히들 우리가 외제 명품을 따지는 것과 같은 찬사였다. 이렇듯 고대 백제 문화는 왜(倭)나라에 영향이 컸다.
그 사실을 입증하는 역사 내용이 일본 역사책 [일본서기]에도 나온다.
그것을 읽어 보면 일본 고대의 왕궁 지역은 땅의 이름 그 자체가 ‘구다라’(백제)였다.
그곳에는 ‘구다라강’(백제강)이라는 이름의 강물이 흐르고 있고,
그 강변에 사는 백성들은 그들의 왕인 일본 제34대 조메이천황(敍明天皇, 629∼641 재위)을 위해서 ‘구다라궁’(宮)을 짓고,
‘구다라대사’(大寺, 백제 큰절)도 건축했다.
물론 조메이천황은 그 구다라궁(宮)에서 살았다.
일본의 세이조대학 사학과 사에키 아리키요(佐伯有淸) 교수는 이 당시
“백성들은 조메이천황을 ‘구다라대왕’(大王, 백제대왕)이라고 불렀을 것 같다”([新撰姓氏錄硏究の硏究篇], 1970)라고 지적한 저명한 역사학자이다.
어째서 백성들은 조메이천황을 ‘구다라대왕’(大王, 백제대왕)이라고 불렀던 것인가.
두 말할 나위 없이 조메이천황은 백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1천2백년 전인 서기 815년에 일본 왕실에서 펴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이라는 왕실 족보를 읽어보면 그 사실이 밝혀져 있다.
상세한 내용은 [신찬성씨록]에 관해 필자가 자세하게 쓴 본문의 글을 읽어주시기 바란다.
[신찬성씨록]에는 조메이천황의 친할아버지였던 “일본 제30대 비타쓰천황(敏達天皇, 572∼585 재위)은 백제인 왕족이다”라는 역사 기사도 밝혀져 있다.
또한 일본 고대사 연구가 우다 노부오(宇田伸夫) 씨가 지금부터 6년 전인 2002년에 쓴 역사 저술
[구다라가엔](花苑, 백제화원)이라는 책을 읽어 보면 다음처럼 썼다.
나라(奈良)땅의 구다라궁(宮, 백제궁)에 살던 남편 제34대 조메이천황이 서거한 뒤에 왕위를 계승한 것은
왕비였던 일본 제35대 고교쿠(皇極, 642∼645 재위) 여왕이었다.
고교쿠여왕도 남편처럼 계속해서 구다라궁에서 살았다.
고교쿠여왕 당시의 인자하고 슬기롭다는 공주는 이름이 하시히토(間人) 공주였다.
하시히토 공주와 히이라기 궁녀와의 대화에 보면 다음 같은 대목이 나온다.
하시히토 공주는 백제궁 정원에 피어 있던 붉고 아름다운 ‘잇꽃’을 가리키며,
“이 꽃은 어디서 이곳 아스카(飛鳥, 나라땅의 백제인 왕실 터전, 필자 주)에 온 것이지? ”하고 물었다. 그러자 궁녀는 하시히토 공주에게 서슴없이 대답한다.
“물론 구다라(, 백제)에서 전해 온 것이지요.”
그 말을 들은 공주는, “좋은 것은 모두 구다라(백제)에서 온 것이네”하는 감탄이 나온다.
즉 ‘백제 것만이 최고’라는 비유로 일본의 옛날 명언이 된 이른바 ‘구다라나이’(無い)라는 찬사가 이미
지금부터 1360년 전부터 일본땅에 퍼져 있었다.
그런데 일본의 군국주의 일제 치하가 되면서부터 일본에서는 ‘구다라나이’라는 백제 찬사를 ‘쓸모 없는 것’이라고 나쁘게 해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본 역사학의 태두(泰斗)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박사는
“구다라(백제)라는 말은 고대부터 일본에서 백제를 ‘큰나라’라고 부른 데서 생긴 말이다”(KBS-TV [역사스페셜] 2002. 7 방송)라고 했다.
우에다 마사아키 박사의 주장은 수긍이 간다.
고대 백제로부터 일본으로는 불교를 비롯하여 벼농사며 베틀과 대장간 철기 문화, 글을 쓰는 문자며 좋은 말(馬)과 소 등 가축과 그 밖의 모든 선진 문화가 건너갔기 때문이다.
누구나 사람은 온 몸속을 뜨겁게 맴도는 제 조상의 핏줄기는 속이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기에 지금의 일본 아키히토(明仁, 1989년 즉위) 일왕도 지난 2001년 12월 23일, 도쿄의 왕궁(황거)에서
“내 몸에도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고 공언했나 보다.
그 날 아키히토 일왕은 도쿄의 일본 왕실에서 68번째의 생일을 맞으면서 기자회견을 갖고 다음처럼 말했다.
“나 자신으로 말하면, 간무(桓武, 781∼806 재위)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武寧王, 501∼523 재위)의 자손이라고 역사책 [속일본기]에 쓰여 있기 때문에
한국과의 혈연을 느끼고 있습니다”(「朝日新聞」 2001년 12월 23일자 보도).
일왕이 한국인의 후손이라는 것을 더욱 구체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입증할 만한 매우 중요한 행사가
2004년 8월 3일, 충청남도 공주의 무령왕릉에서 거행되었다.
이 날 일본 왕실의 아사카노미야(朝香宮, 이하 조향궁)라는 이름(왕실 호칭)의 아사카노 마사히코(朝香誠彦) 왕자가
백제 제25대 무령왕 왕릉(공주 송산리 제7호 고분)에 찾아와 제사를 지냈다.
조향궁 왕자는 한국에 건너오기 직전에 도쿄의 황거에서 지금의 아키히토(明仁) 일왕의 윤허를 받고 공주에 왔다.
조향궁 왕자는 일본 왕실에서 직접 가지고 온 고대 일본 왕실의 향(香)을 향로에다 피우며
제삿술과 제사용 음식물 등 제물을 진설하고 무령왕의 영전에 깊이 머리 숙여 절을 올렸다.
지금의 아키히토 일왕의 당숙인 조향궁 왕자는 제사를 모시고 나자 공주 시내의 공주시청으로 오영희 공주시장을 시장실로 찾아 예방했다.
이 자리에서 조향궁 왕자는 일본 왕실에서 가지고 온 향로와 향을 무령왕릉 제사 기념으로 오영희 공주시장에게 직접 기증했다.
그가 오영희 공주시장에게 기증한 향은 1300년 전에 일본 왕실에서 침향목(沈香木)으로 만든 일본 왕실 제사용의 향이다.
고대 백제인들은 4세기 경부터 본격적으로 일본 내해의 ‘난바’(難波) 나루터(難波津, 난파진,
지금의 오사카 난바)로 건너갔다.
그 무렵부터 난바(難波)는 백제인들의 새로운 개척지가 되기 시작했다.
영국인들이 영국의 ‘요크’(York) 지방으로부터 대서양의 험한 파도를 넘어 신대륙 아메리카로 건너가서
새로운 항구를 개척하고 ‘뉴욕’(New York)이라는 새 이름을 붙였듯이,
백제인들은 영국인들보다 이미 1400년 전에 현해탄의 험한 파도를 건너가 고대 일본 내해의 새로운 나루터를 글자 그대로 ‘난바’(難波, 난파)로 부르기 시작했다.
현재의 오사카 중심지 ‘난바’는 이미 고대 백제인들의 터전 바로 그 자리다.
오늘의 오사카 중심 번화가다.
오사카는 구다라스(백제주)라는 백제국가였다
백제에서 일본 왕실로 천자문 책을 써가지고 건너간 백제인 학자박사 왕인(王仁, 5C)이 지은 일본 최초의 고대시(古代詩)인 ‘와카(和歌)’가
바로 그 [난바 나루터 노래](難波津歌, 난파진가, 나니와쓰노우다)였다.
그 무렵 ‘난바’의 백제인 왕족 오진왕(應神王, 4∼5C)의 왕실은 현재의 오사카부인 구다라스(百濟洲, 백제주) 땅에 있었다.
고대 한국인들이 일본 열도로 건너가 일본에 먼저 와서 살고 있었던 일본 선주민들을 거느리면서
서로 혼혈하게 된 과정을 설득력 있게 지적한 저명한 학자가 있다.
일본의 동물자원 육종학자인 아자후대학 수의학과 다나베 유이치(田名部雄一) 교수가 필자에게 보내준 논문
[개로부터 찾아내는 일본인의 수수께끼]([犬から探る日本人の謎], 1985)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눈길을 끈다.
“한반도로부터 고대 일본으로 개가 건너왔다. 개는 사람이 데리고 왔다”고 했다.
개는 저 혼자 한반도로부터 호기심을 갖고 앞도 보이지 않는 막막한 먼 바다로 일부러 건너갈 수 없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왜섬 땅으로 건너갈 때 개도 함께 데리고 갔다는 것.
다나베 유이치 교수는 잇대어 다음처럼 쓰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무렵, 한반도에서 ‘야요이인’(彌生人, BC. 3∼AD. 3C 시대 한국인)이며 ‘고분인’(古墳人, AD. 4∼6C 시대 한국인) 등
도래인들이 일본열도로 건너오면서 새로운 개를 데리고 왔다.
그 이후로 인간은 혼혈하여 현재의 일본인들이 성립되었고, 그와 마찬가지로 개도 혼혈하여
대다수의 일본 견종(犬種)도 성립되었다.”
오사카 시내에서 [백제] 즉 [구다라](한자어의 百濟, 또는 久太郞) 지명들이 여기 저기 수없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금부터 1천 5백년 전인 서기 4세기 경부터의 일이다.
왜냐하면 4세기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수많은 백제인들이 백제로부터 일본 규슈며 오사카 땅으로 건너가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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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민족에게 고구려, 백제, 신라는 똑같이 중요합니다.
지역감정 조장하면 매국노 입니다.]
[밝은 앞날 되시기를][꿈은 이루어진다][꿈은 미래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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