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앞날 되시기를][꿈은 이루어진다][꿈은 미래의 현실이다]
백두산 천지 [영원히 살 것처럼 계획하고, 하루 살다 죽을 것처럼 실천하라.]
[ 이상 없는 현실은 무의미하고 현실 없는 이상은 존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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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지방을 중심으로 한 소호(少昊)족의 문명이 동이(東夷) 즉 고대한국과 유사하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 하겠고
사마천의 사기에도 [황제헌원씨]가 소전(少典)의 자손이라 했는데
지금 중국 꽁정파도 [황제헌원씨] 부족이 만주에서 온 사람들이라 주장하고 있으니
소전(少典)이란 압록강 유역에서 홍산지역을 거쳐서 중국 서안, 함양 지역으로 이동한
고대한국인의 통칭인 것이 더욱 더 드러났다 하겠다.
압록강 -> 홍산 -> 서안, 함양
꽁정파가 요하 유역 홍산문화를 중국고대문화라고 우기더니
이제 탐원꽁정 백두산꽁정 어쩌고 하면서 이제 압록강 유역도 중국고대문명이라 우기는 것 같은데
어쨌던 그들도 중국의 시조라 일컬어지는 [황제헌원씨] 부족이 만주에서 온 사람들이라 '실토'한 것은
잘된 일로 본다.
그들에 의해서도 이제 소호(少昊)는 물론 소전(少典)도 고대한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이라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하겠다.
저번 글에도 밝혔듯이 요임금은 소전(少典)의 후예이고 순임금은 소호(少昊)의 후예인데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은 친자식이 아닌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준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대한국에서 중국으로 문명이 전파된 2갈래 즉 소호(少昊)와 소전(少典)의 통합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중국고대사의 큰 분수령을 이룬다 하겠다.
물론 소호(少昊)와 소전(少典)의 본격적인 통합은 그보다 훨씬 뒤의 일이지만
소호(少昊)족인 순임금이 소전(少典)으로 가서 임금이 되었다는 것은 소호(少昊)와 소전(少典)의 통합을 시작한다는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본다.
요순임금의 왕위계승은 후대에 중국이라는 개념의 하나의 나라가 탄생할 수 있게 한 초석이 되었다 하겠다.
소전(少典)은 이미 [황제헌원씨] 때 고대한국에서 독립하여 하나의 나라 즉 독립국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 하겠는데
그 과정에서 [황제헌원씨]와 [치우씨]의 대결이 있었다 하겠다.
[황제헌원씨]는 독립에 성공했다고 보는데 그래서 중국인들이 [황제헌원씨]를 그들의 시조라 칭해오고 있다고 본다.
사마천 사기의 주석에 보면 소전(少典)은 사람 이름이 아니라
제후국(諸侯國)의 이름이라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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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전(少典)은 제후국 이름이고 사람이름이 아니다.
( 少典者 諸侯國號 非人名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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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4천7백년전 인물인 [황제헌원씨]가 제후국(諸侯國)인 소전(少典)의 자손이라는 얘긴데
그럼 당시 본국(本國) 은 어디인가.
중국에서는 [황제헌원씨]를 중국의 시조라 칭해오고 있고
그 이전에는 세상(동북아)에 나라가 없었다는 듯이 '이미지 메이킹'을 해오고 있지만
사마천 사기만 봐도 [황제헌원씨] 이전에도 '나라'가 있었다.
제후국(諸侯國)인 소전국(少典國)이 있었고 ( 또한 소호국(少昊國)도 있었고)
그리고
본국(本國) 이 있었다.
꽁정파도 스스로 밝혔듯이 [황제헌원씨] 부족 즉 소전국(少典國)은 만주에서 온 사람들이고
그럼 본국(本國)도 만주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하겠다.
필자는 고대한국 제3차 중심지를 압록강 유역( 특히 집안, 환인 지역)으로 비정해 왔는데
위 사실과 일치한다 하겠다.
당시 천제의 나라 즉 본국 즉 고대한국의 임금으로 [치우씨]가 거론되는데 필자는 아직 단정하진 못한다.
[치우씨]는 당시 고대한국의 임금이었거나 아니면 군 총사령관
또는 당시 고대한국의 [서방군 총사령관] 또는 [서부지역을 관할하는 제후국의 왕] 이었던 것으로 본다.
[황제헌원씨]는 독립하려했고 그 독립을 막으려했던 [치우씨]
사기의 주석을 봐도 [치우씨]를 중국인들은
1. 치우는 제후국 임금이었다. (諸侯號)
2. 치우는 옛 천자다. (蚩尤 古天子)
3. 치우는 구리(九黎)의 임금이었다. (九黎君號蚩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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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으로 설명하고 있고
제후였다는 주장과 천자였다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구리(九黎)는 구이(九夷) 즉 동이(東夷) 즉 고대한국의 통칭.
어찌됐던 제후국 소전의 자손인 [황제헌원씨] 시대에 이미 [원조 황제의 나라]인 본국(本國)이 있었고
그 본국(本國)은 [황제헌원씨] 부족의 고향인 만주에 있었으며
꽁정파의 백두산꽁정, 탐원꽁정 등을 보아도 그 본국(本國)은 압록강 유역에 있었다 하겠다.
( 탐원꽁정 : 문명의 근원을 탐구한다는 것으로 압록강 유역을 문명의 발상지로 보는 것.
지금까지는 집안 위 통화 지역을 여명문화(시작하는 문화)라 이름 붙이며 발굴하고 있고
결국 고대한국 피라미드들이 몰려 있는 [집안]을 노리고 있는 듯.
[집안]은 장군총 등 수많은 피라미드가 있는 곳. - 1만기가 넘는다.)
[치우씨]가 당시 고대한국의 최고임금이었던 아니던 간에
분명한 것은 제후국 자손인 [황제헌원씨]가 독립할 때 만주에 본국(本國)이 이미 있었고
그 나라는 구리(九黎) 즉 구이(九夷) 즉 동이(東夷)였다는 것.
즉 중국에 '나라'가 생기기 이전에 이미 고대한국은 존재하고 있었고
중국의 시조라 칭해져 온 [황제헌원씨]가 그 본국(本國)의 제후국의 자손이었다는 얘기가 되니
지난 약 2~3천년간 '천하의 중심'이라 스스로 자부해오던 중국인들의 자존심이 얼마나 상했겠는가.
필자는 고대한국인의 후손인 [황제헌원씨]가 대단히 훌륭한 인물이라 보는데
중국인들 입장에서는 그 [황제헌원씨]가 본국(本國)인 고대한국에서 온 인물이라는 것이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중국문명의 시조가 만주에서 왔다.
사실 이 사실은 예전에도 중국 지식인들이 상당히 많이들 알고 있었던 사실이라 하겠는데
그래서 사실 동북꽁정은 현대에 들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최소한 2천년 이상 계속되어 온 것.
중국 사서의 고대한국 관련 기록들이 삭제 축소 은폐된 것 많고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중국의 압력에 의하여 조선 조정이 전국에 영을 내려서
《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등 한국고대사서들을 모두 거두어 들인다.
( 소각 또는 창고에 쌓아두고 국민들이 못보게 한 것.)
한국고대사서는 한국과 일본에 아직도 많다?! <- 관련글
이러하듯이 동북꽁정이 시작된 것은 2천년이 넘었다 하겠는데
지금의 한국고대사 밝히기가 이리도 험난한 것은 그 영향 크다 하겠다.
수천년 쌓인 장벽을 뚫고 나아가야 하니.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한국인들 자신이 한국의 태고(상고)역사의 영광을
잘 믿지를 못한다는 것.
오랜 세월 중국의 압박을 받고 사대주의 시대도 오래였다 보니
정신적으로 '한국은 원래 중국의 아래였다'는 듯이 '세뇌' 된 것.
수십년 일제치하의 찌꺼기 '친일파 문제'도 문제지만
수천년 중국의 동북꽁정에 의한 '세뇌'도 참 문제라 하겠다.
그러나 원래 역사적 진실은 영원히 조금도 변하지 않는 것이고
현대의 동북꽁정은 우리에게 많은 도움도 준다 하겠다.
이제 세상이 점점 더 개명되다 보니 수천년 이어온 꽁정파는 예전 방식으로는 꽁정이 어렵다 판단하고
아예 만주고대사를 중국고대사에 편입시키는 길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보고
무리한 저기를 하는 것 같은 데
어쨌던 꽁정파의 주장들 즉
[황제헌원씨] 부족이 만주에서 왔다, 여명문화(시초 문화)는 압록강 유역이다, 백두산이 중국민족의 영산이다 는 등의 주장들은
어쨌던 중국문명의 뿌리는 고대한국에 있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실토'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쨌던 고마운 일이라고도 볼 수 있고
때가 되니 당연히 벌어지는 일들이라 하겠다.
6~5천년전은 최근 10만년 동안 지구기온이 가장 높았던 시기라 압록강 유역이 고대한국의 중심지였던 것이고
예를 들어 8~6천년에는 6~5천년전보다 지구기온이 추웠기 때문에
( 1만2천년 전부터 6~5천년전까지 지구기온이 크게 보면 계속 올라갑니다.)
기온상으로도 문명은 [남도 -> 한강 ->대동강 -> 압록강]으로 전파되었다 볼 수 있고
실제로 1만5천년전 쌀, 2만년전 신석기 등 최고대 유물은 모두 남한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원조 고대한국문명 ] 즉 [마 문명] <- 관련글
즉 꽁정파가 만주꽁정(백두산 꽁정)을 아무리 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
그들은 말하자면 '남한꽁정'은 할 수가 없다고 본다.
동북꽁정만 해도 당황해하는 중국인들도 많은데
'북한꽁정'도 아니고 '남한 꽁정'이라...
사실 제발 '남한 꽁정'도 좀 하라고 얘기하고 싶기도 하다.
이는 중국고대문명이 남한에서 전파된 것이라는
즉 남한 지역이 문명의 시초라는 것을 그들 스스로 밝히는 것이므로.
이리보면 동북꽁정 만으로도 꽁정파에게 감사해야 할 것 같다.
만주고대문명이 전파된 것이 중국고대문명이라고 그들 스스로 밝히고 있으므로.
( 5~6천년 전 문명인 요하 유역 홍산문화가 한민족 근원문화인 것처럼 설명하시는 한국 학자분도 계신데
이는 꽁정에 이용당할 우려도 있다는 의견을 드립니다.
홍산문화는 압록강 유역 고대한국문화의 지류에 불과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소전(少典)의 자손이라 전해오는 [황제헌원씨]는 고대한국인의 후손이라 볼 수 있고
따라서 민족적으로도 [황제헌원씨] 역시 우리 한민족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치우씨]는 우리편이고 [황제헌원씨]는 남의 편이다' 하는 식의 구분은 무의미하다고 본다.
그런데 당시 본국인 고대한국 문명의 혜택을 더 많이 받았다 할 [치우천자]의 군대는
당시 중국인들 눈에는 경이적으로 보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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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우는 노산의 쇠(철)로 병사들을 만들었다." ( 蚩尤受盧山之金而作五兵)
" 치우는 형제가 81인 이었는데 짐승의 몸에 사람 말을 하고
머리는 구리로 되어 있고 이마는 철로 되어있고 돌가루를 먹었고 병장기를 만들었다."
(蚩尤兄弟八十一人 並獸身人語 銅頭鐵額 食沙石子 造立兵仗刀戟大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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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귀절들은 사기 주석에 나오는 글들인데
" 쇠로 병사들을 만들었다.", " 짐승의 몸" 얘기는 [철갑옷]을 말하는 것으로 보고
" 머리는 구리로 되어 있고 , 이마는 철로 되어있다"는 얘기는 발달된 [금속 투구]
" 돌가루를 먹었고 병장기를 만들었다."는 얘기는 철광석을 퍼다가 병장기를 만들었다는 얘기로 본다.
이는 당시 중국땅보다 훨씬 더 발달된 구리(九黎) 즉 구이(九夷) 즉 동이(東夷)
즉 고대한국의 금속문명에 대한 당시 중국 땅에 살던 사람들의 놀라움으로 본다.
4천6백여년 전에 고대한국에서는 이미 철과 구리로 갑옷과 병장기를 만들었다는
증거 중 하나가 되는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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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이 소전(少典)족은 이미 약 4천6백여년전에 고대한국에서 독립했다 하겠고
소호(少昊)는 그 후로도 오랬동안 고대한국( 후에는 고조선)의 영역으로 남아있었는데
이는 소호(少昊)족이 지리적으로 소전보다 한국땅에서 더 가까이 있어서인지 본국인 고대한국에 대한 애착이 강했기 때문으로 본다.
순임금의 부친은 본국인 고대한국에 대한 애정 때문에
아들 순임금이 고대한국에서 이미 독립해 나간 소전(少典)의 임금이 되는 것이 탐탁치 않아 반대한 것으로 보는데
그리하여 후대에 중국인들의 미움을 사서 '아버지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식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지 않나 싶다.
하지만 순임금은 그 부친과 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전(少典)의 임금이 되었고
이는 후대에 중국이 통일 될 수 있는 시금석이 되었다 하겠다.
후대에 거대 중국의 압박으로 우리 한국이 많은 고난도 겪었지만
본시 명검을 만드려면 수도 없이 두드려야 하듯이
많이 두드릴수록 명검이 나오듯이
더욱 훌륭한 한민족을 만드려는 하늘의 뜻으로 볼 수 밖에 없지 않나 싶다.
지난 세월 한민족이 받은 고통은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것 같다.
현재 한민족은 세계최고의 지능지수를 가지고 있고 (언론 기사)
세계제일의 순발력 적응력 인내심 등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데
즉 대체적으로 그 자질이 세계제일이라 보는데
이는 숱한 고난을 이겨낸 산물이 아닌가 싶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한국민 평균 지능지수(IQ) 세계 1위 <- 관련글
우리가 수십년간 일제치하라는 수치스런 고난을 겪었지만
그 덕분에 결과적으로 독립정신을 더욱 새롭게 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아직도 친일파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점도 많다 하겠는데
이것도 단지 시간문제로 본다.
외세를 등에 업고 동족인 한국인 위에 군림하는 자들은 결국 그 댓가를 받을 것으로 본다.
그들에게 빨리 뉘우치라 권하고 싶다.
모든 것이 인과응보 사필귀정이므로.
세상에 비밀은 없다.
( 필자는 공산독재도 싫어하지만
외세를 등에 업고 한민족 위에 군림하는 자들도 싫어합니다.
이는 정치적 발언은 아니고 원론적인 발언이라 하겠습니다.)
소호(少昊)와 소전(少典)이 모두 소(少)인데
자신들 부족(또는 국가)의 이름을 함부로 정하는 것이 아니니
이들에게 소(少)자는 아주 큰 의미가 있을 수 밖에 없다 하겠다.
소(少)는 무엇인가.
소(少) 는 드물다, 귀하다는 뜻.
즉 아무데나 있는 것이 아니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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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少) - 금문]
[출처 - http://www.internationalscientific.org/Character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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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少) 의 고대한자는 이처럼 [물가(강가)의 소(小)]라 하겠는데
그럼 소(小)는 무엇인가.
1,2,3차 삼위태백 (버전3) <- 관련글
[소(小) - 갑골문]
위에서처럼 은 갑골문은 점 3개 찍어놓고 [소(小)]라 한다.
점 3개와 작다는게 무슨 관계인가.
[소(小)]는 원래는 작다는 뜻의 글자가 아니다.
[소(小)]는 원래는 [고대한국 중심 3연성 피라미드]를 뜻하는 글자.
피라미드는 이집트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고대한국의 피라미드가 이집트로도 전파된 것은
이미 많이 드러난 사실이라 하겠다.
고대한국계 추정 이집트 왕족들 2 <- 관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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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小)] - 금문
위에서처럼 [소(小)]는 뭔가 3개가 서있고
그 앞에서 [자(子)] 즉 젊은 지도자가 하늘의 은혜에 찬양하는 또한 춤추는 모습.
여기서 [춤]이란 하늘의 은혜에 감사하는 춤.
한민족 전통의 [어깨 춤]은 [고대한국 중심 3연성 피라미드] 앞에서 (아래에서)
젊은 지도자 (하급지도자 : 당하관)들이 하늘에 찬양하고 춤추는 모습에서 유래됐다고 본다.
피라미드 위에는 최고지도자들(상급지도자들 : 당상관)이 있었고
피라미드 아래에는 젊은 지도자들이 있었다고 본다.
좌우당간(左右堂間)과 서자(庶子)와 산신(山神) <- 관련글
[자(子)]란 원래는 아들이란 뜻이 아니고
촉망받는 젊은 지도자를 뜻한다.
이러한 뜻이 나중에는 [훌륭한 사람]이라는 뜻이 되어
[공자] [노자] 등의 존칭에도 쓰이게 된 것으로 본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서자(庶子) 환웅(桓雄)]의 표현도 그러한 뜻으로 본다.
[서(庶)]라는 말은 지금은 서민 즉 일반사람, 가난한 사람을 뜻하는 말로 격하됐지만
원래는 피라미드 아래의 젊은 지도자(당하관)를 뜻한다.
[서(庶) - 금문]
위에서 직각돌 모양은 피라미드 아래부분을 뜻하고
ㅂ 자 형은 머리에 2개 깃 또는 꽃가지 등을 꽂은 젊은 지도자를 뜻하는데
지도자의 몸을 그리면서 또한 역시
[소(小)] 즉 [고대한국 중심 3연성 피라미드]를 형상화 하고 있다 하겠다.
( 이는 [서자(庶子)]가 아무 피라미드 앞에나 있었던 인물이 아니라
당시 세상의 중심이었던 [고대한국 중심 3연성 피라미드] 앞에 (아래에) 있던 인물이라는 표현으로 봅니다.)
[설문해자]도 이와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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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庶)]는 마룻대(屋) 아래 무리(眾)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