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통!!또 비통!!!

빈농의 아들… 인권변호사… 스타 정치인… 대통령…

황령산산지기 2009. 5. 26. 08:16


영정사진




탄핵사태… 검찰 조사… 파란만장했던 승부사의 삶

《“더 이상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 없습니다.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 지난달 자신의 홈페이지 폐쇄를 선언하면서 남긴 이 말은 그의 마지막을 예고하는 것이었을까. 23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삶은 드라마 그 자체였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독학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인권변호사를 거쳐 대통령에 올랐으나 권력의 정점에서 물러난 뒤 불과 1년 만에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출석하는 운명이 됐다. 그의 일생은 파란만장한 굴곡의 연속이었다.》



독학으로 사시 합격
노 전 대통령은 1946년 8월 6일(음력) ‘까마귀가 와도 먹을 것이 없어 울다 돌아간다’고 할 정도로 외지고 척박한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는 그런대로 마쳤지만 학비가 없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할 뻔했다. “책값만 먼저 내고 복숭아 농사를 지어 입학금을 나중에 내면 안 되겠느냐”고 통사정한 끝에 학교를 다녔지만 졸업하는 데 4년이 걸렸다. 의협심이 강해 3·15 부정선거 직전 중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우리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제목의 작문 과제를 내주자 백지 제출을 주도하기도 했다.

중학교 졸업 후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 3년 장학금 제안을 받고 부산상고에 진학했다. 고교 졸업 후엔 농협 시험에 응시했지만 떨어졌고 삼해공업이라는 작은 어망회사에 취직했다가 한 달 반 만에 그만뒀다. 고향에 내려가 마을 건너편 산자락에 흙집을 짓고 독학으로 사법시험 공부를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29세 때인 1975년 4월 사법시험(17회)에 합격할 수 있었다.

민주투사 변신
법관에 임용됐지만 그는 8개월 만에 그만두고 변호사 개업을 했다. 1981년 그의 인생을 또 한번 바꿔 놓는 부림사건을 맡기 전까지 그는 돈 잘 버는 변호사였다. 부산 향토기업들의 상속세 반환 소송 등을 도맡다시피 했고 100억 원 이상의 거액 소송을 맡기도 했다. 부산상고 동창회 회장을 지냈으며 요트 타기도 즐겼다.

하지만 부산지역 시국사건인 부림사건의 변호인이 된 그는 충격에 사로잡혔다. 57일간이나 불법 구금된 학생의 온몸에 난 고문 흔적과 공포에 질린 눈을 보고 사회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는 법정에서 고문과 조작을 폭로하며 검찰과 충돌했다. 이후 그는 민주투사로 변신했다.

19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하고 1987년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재야인사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87년 2월엔 물고문으로 숨진 서울대생 박종철 군의 추도집회를 주도하다 최루탄을 뒤집어쓰고 경찰서로 끌려갔다. 검찰은 그에 대해 이례적으로 하룻밤 사이에 4번이나 영장을 청구하기도 했다. 박종철 사건이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면서 노무현의 이름도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청문회 스타 부상
그의 활동을 눈여겨보던 당시 김영삼(YS) 통일민주당 총재의 발탁으로 1988년 그는 부산 동구에서 총선에 출마해 정권 실세였던 허삼수 씨를 꺾고 13대 국회에 진출했다. 1989년 12월 전두환 전 대통령의 5공 비리 및 광주항쟁 청문회 때 전 전 대통령을 향해 명패를 집어던진 것이 TV로 전국에 생중계되면서 ‘청문회 스타’가 됐다.

하지만 1990년 1월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YS, 김종필(JP) 총재가 3당 합당을 선언하자 야당 잔류를 선언하면서 정치적 시련을 겪게 됐다. YS와 결별하고 1년 뒤 김대중(DJ) 총재가 이끌던 신민당과의 야권통합에 합류했으나 1992년 YS의 ‘텃밭’인 부산에서 총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1995년에도 부산시장 선거에 나섰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1996년 총선 때는 지역구를 서울 종로로 옮겨 출마했지만 또다시 고배를 마셨다. 당시 당선자는 민주자유당 후보로 나섰던 이명박 대통령이었다. 1998년 선거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던 이 대통령이 의원직을 사퇴하자 노 전 대통령은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보궐선거에 출마해 간신히 배지를 달았다.

하지만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그는 다시 “지역주의 타파”를 외치며 한나라당의 아성인 부산으로 뛰어들었다. 결과는 낙선이었다. 하지만 그에겐 ‘바보이기를 자청한 용기’ ‘남들이 꺼리는 길을 고집스럽게 가는 바보’ 같은 찬사가 쏟아졌다. 팬클럽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이 결성된 것도 이때다.

과 대통령 후보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1년 해양수산부 장관을 그만두면서 본격적으로 대권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노 전 대통령은 당내에서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이인제 대세론’이 워낙 강했기 때문이다. 진보진영 내에서도 그를 리더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2002년 봄 그가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설 때 정치권은 ‘무모한 도전’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2002년 3월 국민경선제를 채택한 새천년민주당 대선 경선이 시작되자마자 ‘노무현 드라마’는 시작됐다. ‘반칙과 특권 없는 사회’란 구호와 노사모의 열광적인 지원, 정치개혁의 상징물처럼 간주됐던 ‘희망돼지 저금통’ 등은 거센 ‘노풍()’을 일으켰다. 경쟁 후보였던 이인제 의원이 장인의 6·25전쟁 당시 좌익 전력을 문제 삼자 그는 “대통령 되려고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라는 대응으로 상황을 역전시키고 후보직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YS의 상도동 사저 방문과 현직 대통령이던 DJ의 세 아들 비리 등으로 역풍을 만나면서 한때 60%까지 치솟던 지지율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민주당 내에선 경선 재실시 목소리가 높아졌고, 때마침 한일 월드컵 인기를 업고 부상한 국민통합21의 정몽준 의원과의 후보단일화 압력이 거셌다.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를 이룬 그의 지지율은 다시 급등했다. 대선 당일 새벽 정 의원이 후보 단일화를 철회했지만 그는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고 승리했다.

대통령 재임 시절
노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내내 각종 정치적 논란에 휘말렸고 이 중 상당수는 스스로 촉발한 것이었다. 17대 총선 직전인 2004년 3월 야권은 선거중립 의무 위반 등을 들어 헌정 사상 첫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시켰다. 이로 인해 63일 동안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으나 탄핵 사태는 메가톤급 역풍을 불러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의 압승을 낳았다.

하지만 퇴임 전까지 노 전 대통령은 정치, 경제, 대북관계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상대의 허()를 찌르는 승부수를 던지는 ‘정치 실험’을 그칠 줄 몰랐다. 2005년 8월 국가보안법 폐지 등이 난항을 겪을 땐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제안했고, 2007년 4월 임기 말 권력 누수에 부닥치자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을 제안했다. 이런 정치 스타일은 아파트 값 폭등, 열린우리당의 재·보궐선거 전패 등과 맞물리면서 조기 레임덕을 불렀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이룬 업적에 대해서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특히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선거자금을 둘러싼 정경유착의 고리를 없애려던 노력은 평가받을 만하다. 자신의 지지 세력이 극렬히 반대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이라크 파병 등을 밀어붙인 것도 국익을 생각해 내린 결단으로 볼 수 있다.

다만 노 전 대통령 스스로 “언어와 태도에서 품위를 어떻게 만들어 나가느냐는 준비가 부실했던 것 같다”고 토로했던 것처럼 그의 언행이 대통령답지 못해 ‘한 일’에 비해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분석도 있다.

봉하마을로 귀향
노 전 대통령은 2008년 2월 25일 퇴임과 동시에 고향인 봉하마을로 돌아갔다. 퇴임 직전까지도 “대통령을 그만두면 열린우리당 상임고문으로 남고 싶다”며 정치활동 재개를 꿈꿨지만, 열린우리당 붕괴와 정권교체로 그는 낙향할 수밖에 없었다.

퇴임 후 그는 평범한 농촌 사람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귀향 직후 마을 주변 환경정화 활동에 주력했고 전국을 돌아보며 지역발전을 위한 구상에 몰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귀향 4개월여 만인 지난해 7월 국가기록물 유출 논란에 휩싸였고 지난해 12월엔 형 노건평 씨가 세종증권 비리에 연루되면서 사실상 칩거에 들어갔다. 급기야 올해 4월 박연차 게이트 연루 혐의로 전 가족이 검찰 수사를 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는 기득권 세력에 맞서며 한국 사회의 틀을 바꿔 놓으려 도전했고 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을 꿈꿨다. 그러나 그는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서 뇌물을 받은 의혹에 대한 검찰의 수사로 그의 상징인 도덕성이 타격을 받게 되자 결국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비극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조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