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론?

프리메이슨(Freemasonry)

황령산산지기 2006. 5. 18. 20:30
 

프리메이슨은 약 600만의 남성만으로 구성된 국제적 종교운동단체이다. 즉 그들은 '우주의 대건축자'인 지고자를 인정하는 종교단체이다. 비밀스런 의례를 행하며 자선사업과 사회활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프리메이슨의 일원인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사진출전:「중앙일보」 2001년 6월 27일 수요일 기사(이하 동일)
프리메이슨은 본래 18세기 초(1717) 영국에서 시작되었으며, 세계시민주의적(世界市民主義的) ·인도주의적 우애(友愛)를 중시한다.

일반적으로 프리메이슨은 중세 때 영국과 유럽에 퍼져있던 석공(stonemason)의 조직인 길드 : guild)에 기반해서 생겨난 것으로 알려져있다. 프리메이슨이라는 이름도 석공에 해당하는 영어명칭인 '메이슨(mason)'에서 유래한 것이다. 1717년 네 개의 길드가 합해져서, 런던에 지부가 생기면서, 프리메이슨 조직이 시작되었다.

당시 석공조합은 자유로운 집단으로 유럽 전역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석공조합은 그들의 조직을 기반으로, 18세기 당시 계몽주의와 인본주의의 영향으로 중시되던 인간의 자유와 평등의 정신을 반영한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이들이 모토로 한 것은 '우애(형제애)'운동으로 이 운동은 유럽전역과 미국에 까지 퍼졌다. 참여하는 사람들도 석공에 국한되지 않고, 지식인·중산층까지 퍼졌다. 프리메이슨운동을 통해 퍼진 인보주의와 자유의 정신은 프랑스와 북미혁명에 불을 붙였다고 한다.

미국의 초기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들이었던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철학자 레싱(Lessing), 문학가 쉴러(Schiller), 괴테(Goethe), 스위프트(Swift), 모차르트와 하이든 등도 프리메이슨운동에 참가했다.

 

 

 

 

 

 

프리메이슨은 자유주의 ·개인주의 ·합리주의의 의 입장을 취했고, 그리고 종교적 관용을 중시했다. 그 때문에, 가톨릭으로부터 탄압받았고, 이 후 비밀결사적인 단체가 되었다. 프랑스혁명이나 19세기 여러 정치적 사건과 연루되기도 했다.

이들은 일종의 비밀스런 결사라고 할 수는 있지만, 완전히 그들의 모습을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공공인 장소에 건물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들이 활동하는 랏지조직도 전화번호부에 기록되어 있고, 모임도 공표된다. 단, 그들의 독특한 인식의 방법와 모임의 내용은 공개하지 않으며, 비밀스런 의례를 행한다고 한다.

프리메이슨단체에서는 그들의 단체의 성격을 사적인 우애단체로 규정한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기여하며, 우애단체에서 찾을 수 있는 형제애를 즐기는 것을 기본적인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프리메이슨 조직은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공공교육, 의료 등 많은 자선활동에 지속적인 지원을 보이고 있다. 프리메이슨단체의 특징은 사회의 보다 나은 발전을 위해 자아개발과 자선(philanthropy)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프리메이슨에서는 조합원들을 훈련시키는 단계적 체계를 가지고 있다. 일종의 도제시스템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프리메이슨단체는 지고의 존재를 신앙을 인정한다. 프리메이슨에서 지고의 존재는 건축가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즉 그들은 '우주의 대건축자'인 지고자를 인정하는 종교단체이다. 그 이유는 본래 프리메이슨이‘로지(작은 집)’라는 집회를 단위로 형성되어있던 중세의 석공들의 단체인 길드를 모체로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랏지(Lodge)방에서 분파적인 토의를 금지한다. 그들은 삶의 지침이자 규율로서, "Volume of the Sacred Law"을 가진다. 프리메이슨의 구성원들은 그 단체의 원칙을 따르고, 인식에 이르는 그 단체만의 고유한 방법을 수호하고 비밀로 하겠다는 서약을 한다고 한다.


제 3의 눈-프리메이슨의 상징
 
 
 
프리메이슨의 대표적 상징에는 삼각형 속의 '제 3의 눈', 'G', 혹은 G가 새겨진 불타는 별, 콤파스, 목수의 직각자 등이 있다.

먼저 제 3의 눈은 신을 상징하는 프리메이슨의 대표적 상징으로서, 호루스의 눈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것은 신과 같이 모든 것을 통찰하는 눈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프리메이슨의 대표적 상징인 콤파스와 직각자
눈을 둘러싼 빛나는 삼각형은 신성의 상징임과 동시에 연금술(Alchemy: 중세의 신비주의 전통으로 비금속을 금으로 변하게 하는 것, 나아가 금과 같이 영혼의 불멸성을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의 3대 원소인 유황, 수은, 소금을 나타내기도 한다.

'G'가 새겨진 불타는 별은 황금분할에 의해 그려진 별로서, 행운을 부르는 작용을 한다. '불타는 별'은 신령의 빛(The Light of Spirit)을 상징한다. 보통 다섯개의 꼭지점을 가지고 있으며, 빛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G'는 기하학(geometry), 하느님(God), 영지주의(gnosis)를 의미한다고 한다.

콤파스와 직각자는 석공, 혹은 목수의 필수적인 도구이다. 프리메이슨에서 이런 건축과 기하학의 전통적 도구들의 상징은 도덕적인 의미를 가질 뿐 아니라, 종교적 힘까지 가지고 있다. 덧붙여 이들 형상이 담고 있는 상징적 의미와 힘이 보다 나은 시민을 창조하도록 돕는다고 보고 있다.









장미십자회 - 신비주의 단체의 뿌리
 
 
 

장미십자회 Rosicrucians

장미십자회(薔薇十字會:Rosicrucians)는 중세유럽, 독일을 중심으로 활동한 비밀결사단체이다. 카발라(Cabbalah, 유대교신비주의)와 연금술 등 여러 종교의 신비적 요소를 수용, 발전시킨 기독교적 신비주의단체로서, 17~18세기를 지나 19, 20세기에 생긴 서양 신비주의단체의 뿌리가 되었다.

■ 장미십자의 비밀

Rosicrucian Fellowship의 상징, 장미십자
단체의 이름은 그들이 사용한 깃발에 그려졌던 '장미십자가'상징에서 유래한다. 십자가와 장미는 각각 예수그리스도의 부활과 구속을 의미한다. 이 둘이 결합된 장미십자상징은 진리를 꿰뚫는 명상의 상징이 되어, 후대 신비주의 단체의 중요한 상징으로 사용되게 된다. 장미십자회의 종교적 추구는 고대로부터 전승된 태초의 지혜, 혹은 비의(秘儀)에 기초한다. 이들은 장미십자가를 통한 명상으로 인간의 깊은 내면과 직관, 무의식과 만날 수 있고, 나아가 절대적 신성과 접하는 신비체험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장미는 장미십자는 진리의 신비체험을 위한 핵심상징이다.

■ 익명의 문서, 장미십자회의 정체를 밝히다.

이 단체의 존재는 1614년과 1616년 사이에 독일 카셀에서 익명으로 출판된 세 개의 소책자 'Fama Fraternitatis(1614)', 'Confessio Fraternitatis(1615)', 'The Third Chemical Wedding of Christian Rosencreutz(1616)'을 통해 알려졌다. 이 자료에서는 독실한 독일인 귀족으로 알려진 '크리스티안 로젠크로이츠(Christian Rosenkreutz)'를 장미십자회의 창설자로 언급하며 그를 소개한다. 자료에 따르면 그는 이집트, 모로코 등지와 다마스커스(Damascus)등의 근동지방을 다니며 비학의 지혜, 수학과 자연과학, 연금술 등에 통달했으며, 특히 고대 이집트의 영적이고 연금술적인 신비를 전수받았다. 독일로 돌아온 그는 1407년 수도원을 만들고 세 명의 수도사들과 함께 장미십자회 활동을 시작한다. 1409년 '성령의 집(House of the Holy Spirit, Spiritus Sanctum)을 건립했고, 마법과 연금술 등에 대한 비법을 가르쳤다. 그에게서 비의를 전수받은 후계자들은 비밀엄수를 서약하고 사명을 위해 떠났다고 한다. 1484년 106세에 사망한 크리스티안 로젠크로이츠의 시신은 성령의 집에 안치되었고, 한동안 잊혀졌다가 120년만인 1604년에 전혀 훼손되지 않은 채 재발견되었는데, 그의 무덤이 열린 이 사건이 교단의 새로운 전파를 촉발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미십자회의 역사를 증명하는 이 유일한 기록의 사실성 여부에 대해 상이한 견해가 존재해왔다. 현대 장미십자계열의 단체들도 조금씩 다른 시각에서 이 기록을 해석한다. 한편에서는 이런 초기 문헌에서 말한대로 로젠크로이츠가 실제인물이라고 믿지만, 또 다른 단체들은 한명 혹은 그 이상의 역사적 인물(프란시스 베이컨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의 필명이라고 본다. 나아가 그를 우화적인 인물로 보고, 그를 둘러싼 이야기를 보다 심오한 진리를 가리키는 오컬트 전설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들 자료와 교단의 아이디어가 독일의 루터파 목사인 요한 발렌틴 안드레(Johan Valentin Andreae, 1586-1654)에 의해 쓰여졌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장미십자회의 신비사상자체를 완전한 장난으로 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드레가 이들 자료에서 권장하고 있는 비의와 사회개혁에 대한 그의 관심을 결합한 하나의 교단을 만들었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이 장미십자회의 일을 시작하도록 독려하는 문서를 원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특히 이런 견해는 이들 자료가 로마 교황에 반대하고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장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고 있다. 실제 로젠크로이츠에게서 배웠던 사람들의 모임은 반가톨릭의 성향을 띄었던 기독교적 비밀단체의 성격을 띄었다. 당시 가톨릭교의 교리를 부정했던 이들은 가톨릭으로부터 경계대상이 되기도 했다. 장미십자회가 이후 오컬트세계에 끼친 지대한 영향에도 불구하고 이 교단의 회원, 체계와 사상에 관한 자료는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다.

■ 17~18C 장미십자열풍의 역사

장미십자단 공원 내부, '18세기 이집트왕조의 평화정원'

인간의 영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소책자의 메시지와 비밀조직의 정체는 17세기 유럽에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실제 장미십자단체들이 만들어졌고, 장미과 십자가의 상징이 유행했다. 이들 단체는 사회개혁, 연금술연구, 카발라, 신비주의와 정통 기독교신학을 결합시켰으며, 당시 독일 전역에 세워졌던 보다 큰 규모의 그리스도교 경건주의 커뮤니티와 혼합되었다. 이 엘리트 비밀조직의 일원이 되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이 실제 자취를 찾으려고 했지만, 끝내 베일은 벗겨지지 않았다. 유명한 철학자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 등도 장미십자회에 접촉하려 했지만 실패했다고 전해진다.

17세기 장미십자의 신비주의는 유럽전역에 퍼져나갔다. 영국의 경우 로버트 플러드(Robert Fludd, 1574-1637)와 마이클 마이어(Michael Maier, 1568-1622)라는 인물의 노력에 힘입어 이 단체의 비의가 전파된다. 마이어는 특히 연금술과 장미십자의 사상을 결합시키는데 공헌했던 인물이다. 미국에서도 1694년 첫번째 장미십자회가 창설되었다. 이 단체의 기틀을 잡은 사람은 과학이자 신학자였던 요한 야콥 짐머만(Johann Jacob Zimmerman)이었다. 그는 펜실베니아로 이주해서 다른 경건주의 집단에 동참했다. 이들 단체는 천년왕국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또 한번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희망으로 그 순간을 알아내기 위해 관측소를 세우기도했다. 이들의 활동은 짐머만의 죽음 후에도, 그의 계승자를 통해 이끌어졌는데, 3대 계승자인 콘라드 마타이(Conrad Matthai)는 공동체의 해체를 허락했고 이후 흩어져 나온 소그룹들이 신비주의 은둔자 커뮤니티가 되었다. 회원들은 오컬트 비술을 가지고 치료사로서 활동하기도 했으며 마법지식과 오컬티즘을 후대에 전수하기도 했다. 현재 미국에는 장미십자회에 기원을 둔 여러 오컬트교단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나아가 18세기 동안에도 장미십자형제단(Brothers of the Rosy Cross)의 존재를 주장하는 여러 책자들이 발간되었으며, 이 시기동안 러시아, 폴란드 등지에서도 장미십자회에 기원을 두었다고 주장하는 여러 신비주의 단체들이 활동했다.

■ 19C, 오컬트 커뮤니티의 확산을 위해

대체로 이러한 열풍은 18세기 말 잦아들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의 존재를 믿어왔고 이들의 종교적 이상에 공감하면서, 장미십자회는 근대 오컬트 커뮤니티의 확산에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하며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프리메이슨(Freemasonry, 18C 초 영국에서 시작된 국제적 종교운동단체로서, 세계시민주의적(世界市民主義)과 인도주의적 우애(友愛)를 중시한다.)'이라는 핵심 오컬트 단체가 장미십자회의 사상을 흡수하게 되는 것을 주요한 계기로 장미십자회는 19세기 서구 오컬트 부흥의 사상적 기반으로 자리잡게 된다.

1866년 Robert Wentworth Little (1840-1878)은 Anglia에 프리메이슨에게만 개방되는 Societas Rosicruciana를 만들었으며, 몇 년 후에는 스코틀랜드 지부가 만들어졌다.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였던 프랑스의 장미십자사상은 오컬티스트 레비(Eliphas Levi, 1810-1875)로부터 새로운 자극을 받게 된다. 그는 The Doctrine of Transcendental Magic (1855); The Ritual of Transcendental Magic (1856); and The History of Magic (1860) 등 마법에 관한 세권의 기념비적 작품을 저술했다. 미국의 장미십자회원이었던 란돌프는 프랑스에서 열린 장미십자회모임에 가는 중에 레비를 만났다고 진술한다. 레비에 의해 다시 시작된 관심은 1888년 '카발라 장미십자단(Qabalistic Order of the Rosy Cross)'의 형성을 이끌었다.

■ 무엇을 위한 의식인가 ?

World-Wide Rosicrucian Fraternity의 사원내부

장미십자회의 중심가르침은 회원들만이 접할 수 있는 것으로 거의 문서로 공개되지 않았다. 단지 초기의 소책자와 다른 신비주의자들의 진술을 통해 대략의 지향을 이해할 수 있다. 두번째 소책자 'Confessio Fraternitatis'에 언급된 바에 따르면 장미십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개개인의 영화(靈化, spiritualization)'이며, 이를 위해 의사기독교적(quasi-Christion)이고비의적인(esoteric) 원리에 따른다. 저명한 신지학자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는 신지학의 세계관과 수행론을 정립함에 있어 "장미십자"의 방법에 기초한다고 밝힌바 있다. 그는 여기서 장미십자를 특정교단 혹은 사상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13, 14세기 이후 유럽 오컬트학파에서 항상 이용되어 온 방법인 '장미십자의 수행'이라고 불리던" 하나의 방법으로서 사용한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슈타이너의 장미십자에 대한 이해는 장미십자회 가르침의 성격을 보여줌과 동시에, 서구에서 생겨난 오컬트 및 신비주의에 몰두하는 사람들에게 장미십자의 어떤 지향이 호소력을 지녔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우선 슈타이너가 간파한 장미십자의 사명은 '태초의 영적 지혜를 근대정신과 근대영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형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오래 전 지식의 수호자들이 인간성의 진보를 위해 그동안 비밀리에 전수된 오컬트지식을 공개할 필요성을 자각하고, 19, 20세기의 지배적인 인간성으로도 비밀이 이해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크리스티앙 로젠크로츠를 중심으로 모인 최초의 장미십자회 사람들을 이런 사명을 위한 준비가 시작되야 함을 깨달은 사람들로 해석한다. 슈타이너는 로젠크로이츠가 했다고 알려진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비밀의식으로부터 우리는 초감각세계에 대한 인식과 지혜의 보고(寶庫)를 가지게 되었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고수한다면, 과거에 행했던 일, 즉 우리 학파에서 훈련받은 영혼들이 태초의 지혜에 관한 비밀을 배우고 식별하게 되었을 때 다른 이들을 지도하기 위해 그들을 보내는 일이 미래에도 요구될 것이다……태초의 지혜를 동경하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현재 우리가 지니고 있는 형태로 그들에게 지혜를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그것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권위를 높이 신뢰하고 인지할 필요성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태도는 빠르게 인류로부터 사라지고 있다. 사람들의 판단력이 증가할수록 가르지는 자에 대한 신뢰도 얕아질 것이다. 믿음과 신뢰는 과거 전달수단의 전제조건인 것이다.」

루돌프 슈타이너, 장미십자의 비교 제 1강 중에서


■ 현대의 장미십자단 - 국제조직 AMORC와 그 밖의 단체들

AMORC의 로고
현재까지 활발하게 활동중인 가장 눈에 띄는 장미십자회 계열의 단체는 'AMORC(Ancient and Mystical Order Rosac Crucis)'이다. 이들은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의 산호세(San Jose)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조직으로, 비공산권 나라를 중심으로 세계 전역에 퍼져있다. 1909년 이 단체를 창설한 것은 하비 스펜서(Harvey Spencer, 1883-1939)로서, 프랑스의 조합(the Brotherhood)에 입문했었다고 전한다. AMORC는 인류가 가진 최상의 잠재력과 영적 능력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장미십자회의 철학을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회원들은 지부에 입문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완성을 위해, 그리고 진정한 지식 혹은 우주적 의식의 성취를 목표로" 연구와 수행을 병행한다.

AMORC가 발행하는 계간잡지 Rosicrucian Digest 표지
이 교단은 로지(lodge지부) 시스템으로 운영되며, 회원명단은 공개되지 않는다. 서신왕래를 통해 조직 구성원들 사이에서만 은밀한 방식으로 비의를 전파하고 있다고 한다. The Rosicrucian Digest(신비주의, 철학, 과학, 예술에 관한 기사)와 The Rosicrucian Forum 를 출판하는데, 하지만 일부는 정기구독자에 한해 일반인들에게도 공개된다. AMORC 회원들은 12개의 마스터단계를 거치게 된다. 특히 10계급에서 12계급은 동양에 위치한 사원에서 영적인 방식으로 주어진다고 알려져있다. "신지학에서 처럼 그러한 완성에 이르려면 여러차례의 환생을 거쳐야 한다. 환생의 각 단계는 "Supreme Being"(최고의 존재자)와 보다 완전한 합일에 이르는데 바쳐진다.

이외에도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Fraternitas Rosae Crucis, 신지학회와 긴밀하게 연관된 The Rosicrucian Fellowship을 비롯해 Societas Rosicruciana in America (S.R.I.A.), Societas Rosicruciana in Civitatibus Foederatis (S.R.I.C.F.), Ausar Auset Society, Lectorium Rosicrucianum, Rosicrucian Anthroposophic League 등의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다.

▶ 참고 웹사이트 자료

· http://www.occultopedia.com/index1.htm : 장미십자회의 역사와 기본사상, AMORC에 대한 자료 / 관련도서자료.
· http://zelator.hihome.com/lecture/lecture05.htm : 루돌프 슈타이너의 [장미십자의 비교(1909)]강의 번역소개.
· http://www.americanreligion.org/cultwtch/rosicruc.html: 장미십자회의 기원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여러 장미십자계열 단체들에 대한 정리 및 관련서적
· The Rosicrucians:Past and Present, at Home and Abroad : S.R.I.A의 회원이 쓴 장미십자회의 과거와 현재
· http://www.rosycross.org/Rosicrucian_history.htm:World Wide Rosicrucian Fraternity의 장미십자단 역사와 고대이집트와의 관계.
· The Rosicrucian Archive : The Confraternity of the Rose Cross (CR+C)라는 장미십자계열의 교단과 연결된 장미십자관련자료도서관으로, 장미십자단의 기원이 된 소책자자료를 비롯해서 역사적인 문서들을 볼 수 있고, 역사와 상징, 카발라와의 관련 등을 비롯한 다양한 자료를 찾을 수 있다.
· http://www.angelfire.com/ri/rosicrucian : 관련단체와 학술정보 링크
· The Rosicrucian Academy : 관련단체와 학술정보 링크
· Rosicrucian Fellowship, The.
· Rosicrucian Order, AMORC (English-The Americas).



프리메이슨 비밀회원 모차르트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서양 고전음악 작곡가 모차르트도 프리메이슨의 일원이었다. 그의 음악은 자유, 평등, 박애로 대표되는 프리메이슨의 정신에 큰 영향을 받았다.

1784년 프리메이슨에 가입한 그는 같은 단체사람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프리메이슨 장송 음악(K.V. 477)>을 작곡했으며, 오페라 <마술피리>는 프리메이슨의 의식에서 영감받은 것이다.

모짜르트 가족. 피아노 건반위에 앉아있는 남자가 모짜르트다.


프리메이슨운동은 모차르트외에도 고전시대음악전체의 정신적 배경이 되었다. 보통 클래식음악은 바로크, 고전주의, 낭만파 등으로 분류되는데, 바로크는 대개 바하로 대표되며, 바하가 죽은 1750년 이후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이 활동했던 시기를 고전주의라고 한다. 고전주의음악이 작곡되던 18세기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중요시했던 시기였다.

이른바 이런 정신을 '계몽주의'라고 하며, 신이 아니라 인간을 중시한다는 의미에서 인본주의시대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정신을 구체적으로 만든 것이 바로 프리메이슨운동이었다. 당시 프리메이슨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고전시대 음악가들도 이런 프리메이슨의 정신에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모차르트, 하이든, 리스트 등 많은 작곡가들이 프리메이슨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래서, 바로크시대의 음악이 지식이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나 이해할 수 있는 복잡한 것이었다면, 고전시대의 음악은 간결하고 솔직한 선율이 사용해서 누구나 쉽게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중고등학교 때 배운 음악책에서, 고전시대는 곧 소나타형식과 연결되는데, 이 소나타형식도 사실은 이렇게 간결하고 일정한 형식을 기본으로 해서 음악을 작곡해서, 듣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지금 들어도 바하나 헨델보다는 모차르트의 음악이 훨씬 편하게 들리는 것도 이런 이유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고전주의 시대에는 인쇄술의 발달로 악보를 누구나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또한 일반대중들도 음악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시기였다. 사실 그 이전에는 영화같은 데서도 많이 볼 수 있듯이, 주로 귀족계층같은 특권계층의 사람들만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1720년 이후 유럽에서는 대중음악회가 자주 열렸다.

그 전에 귀족들을 위해 지어진 음악회장에 이제 보통 사람들도 들어가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 클래식음악은 팝이나 가요같은 대중음악이었던 것이다. <아마데우스>라는 영화를 보면, 하녀에 장사꾼들까지도 왁자지껄하게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감상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대중들이 음악을 들어러 가는 콘서트(Concert)라는 말도 1750년대 후반에 영국에서 처음 생겼다고 한다.

영화 <아마데우스> 에서 비춰지는 모차르트의 모습은 좀 경박스러운 듯도 하고, 그냥 별 노력이나 생각없이 번뜩이는 영감으로 음악을 작곡하고 그리 신중하지 않게 살았던 사람같다. 하지만, 인간의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을 중시하는 프리메이슨에 매료되어 회원으로 가입해서 열렬하게 활동했다는 사실은 모차르트의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한다.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를 질투하는 궁중음악장으로 나오는 살리에르는 봉건주의를 대표하는 권위적인 사람이라면, 그는 사랑스럽게도 인간의 자유, 평등을 위해 음악을 작곡했던 진지하고 아름다운 사람인 것이다.

영화 <쇼생크탈출>에 보면,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간 주인공이 정부에서 보내 준 레코드를 정리하다가 음악을 틀어주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이 영화의 주제를 잘 보여주는 클라이막스라고도 할 수있다. 바로 이 음악이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중 '저녁바람이 부드럽게'라는 곡이다.

피가로의 결혼은 모차르트가 30살 때 작곡한 오페라로 타임지에서 지난 천년간 가장 훌륭한 음악으로 선정한 곡이다. 이 오페라는 봉건주의의 억압을 깨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새로운 사회상을 제시한 오페라로 평가되는 오페라이다. 이러한 모차르트의 정신이 바로 프리메이슨운동에 영향받았다는 것이다.

모차르트가 궁핍함속에서 외롭게 말년을 보낸 것도 그가 최초의 자유로운 음악가였기 때문이라고 짐작되고 있다. 당시 음악가들은 주로 귀족에게 복종하며 그들의 지원을 받아야 적절한 수입과 명예를 얻을 수 있었는데, 모차르트는 이런 복종과 복종해서 얻을 수 있는 세속적인 명예를 거부했다고 한다. 특히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 이루어질 새로운 사회를 반영하는 <피가로의 결혼>을 작곡한 것은 모차르트에게 파멸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칼리오스트로, 위대한 연금술사 ? 희대의 사기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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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법의 약을 파는 연금술사와 불사의 전설

2. 위대한 연금술사 칼리오스트로
■ 발사모는 칼리오스트로가 아니다.
■ 연금술연구소와 이집트프리메이슨의 부활
■ 스트라스부르크의 선행
■ 예언자 칼리오스트로, 그리고 ‘왕비의 목걸이 사건’
■ 로마 : 고대이집트 프리메이슨 전파와 이단으로서의 최후
■ 칼리오스트로 관련 페이지

역사상 수많은 연금술사들과 마법사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있어왔지만 그중에서도 칼리오스트로는 가장 신비에 가리워진 인물이다. 혹자는 가장 매력적인 신비가이자 마법사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역사장 가장 유명한 사기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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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쥬세페 발자모 - 희대의 사기꾼


현재 칼리오스트로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은 그를 희대의 사기꾼으로 보는 것이다. 19세기 영국의 유명한 역사가 카알라일도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기꾼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희대의 사기꾼으로서의 칼리오스트로의 진짜 이름은 '쥬세페 발사모'였으며, 1743년 6월 2일 시실리의 팔레르모 지역에서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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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아주 어렸을 적에 아버지가 사망하였고, 어머니는 생계를 유지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쥬세페 발사모(칼리오스트로)는 삼촌 댁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유년기의 칼리오스트로는 베네딕트파의 수도원에 들어갔으며, 이곳에서 의약과 화학에 대한 재능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훌륭한 학생이었지만, 타고난 방랑벽 때문에 이곳을 탈출하여 일단의 방랑자 무리에 들어가게 된다. 이들은 당시 살인 등의 범죄와 연관이 있던 집단이었기 때문에 칼리오스트로는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곤 했지만, 삼촌의 탄원 덕에 감옥에는 가지 않았다. 하지만 17세가 되었을 때 최초로 큰 사기극을 벌이게 된다. 전말은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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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리오스트로의 사기극행진 그리고 프리메이슨 입문

마라노(Marano)라는 대장장이가 팔레르모에 왔을 때 칼리오스트로는 자신이 오컬트와 연금술에 능한 척 연극을 한다. 마라노는 금속을 변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많은 연금술사를 만나보았지만, 칼리오스트로의 연기력이 워낙 뛰어나서 그만 완전히 속아넘어가게 된다. 마라노가 자신을 믿게 된 것을 알고 칼리오스트로는 마법을 시연해서 이 도시에 숨겨져 있는 보물을 갖게 해준다며 금 60온스를 요구한다. 당시 금 1 온스가 오늘날 300불임을 생각 하면 이는 상당한 금액이었다.

마라노는 약간 주저하기는 했지만 칼리오스트로에게 금을 주었고, 둘은 한밤중에 팔레르모로부터 멀리 떨어진 들판으로 나갔다. 칼리오스트로가 그곳에 보물이 있다고 마라노를 속였던 것이다. 하지만 마라노를 기다리는 것은 칼리오스트로가 고용해놓았던 괴한 뿐이었다. 이 일이 있은 뒤 칼리오스트로는 팔레르모를 떠나 여행을 시작했다.

1768년 칼리오스트로는 고향인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나폴리를 여행하던 중 예전에 마라노를 공격할 때 고용했던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함께 카지노를 개설하였으며, 다시 사기행각을 벌여 부유한 외국인들의 돈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나폴리 당국이 이를 곧 적발하고 이들을 추방하였다. 칼리오스트로는 다시 로마로 갔는데 여기서 그의 필생의 동반자인 로렌자 펠리치아니(세라피나라고도 불린다)를 만나 그녀와 결혼한다.

하지만 당시 교회의 이단조사단이 그를 이단 혐의로 의심하자 잠시 스페인으로 피신을 갔다가 결국은 팔레르모에 있는 칼리오스트로의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직까지 팔레르모에 남아있던 마라노가 칼리오스트로를 잡아 그를 경찰에 넘긴다. 결국 운좋게 한 귀족의 도움으로 풀려날 수 있었던 칼리오스트로는 다시 한 번 한 연금술사에게 사기를 쳐서 10만 크라운(오늘날 백만불)을 훔쳐낸 뒤 1760년대 영국으로 건너온다. 영국에서는 생 제르멩 백작(Comte de Saint-Germain)을 만났고, 생 제르멩은 그를 이집트 프리메이슨으로 입문시켜준다. 이후로 칼리오스트로는 고대 이집트 지식의 도움으로 연금술의 비밀을 발견했노라고 사기를 치고 다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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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왕실의 칼리오스트로 : ‘마리 앙뜨와네뜨 여왕의 목걸이 사건’

.1772년 파리로 건너간 칼리오스트로의 사기 행각은 큰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왕실에서도 그를 인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즉 루이 14세가 칼리오스트로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베르사이유 궁에도 초청하는 등 몇 년 되지 않아 칼리오스트로는 프랑스에서 꽤 유명인사가 되었고, 왕가와도 친분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785년에는 유명한 '여왕의 목걸이 사건'에 얽혀들게 되었다.

라모뜨(Countess de Lamotte) 백작부인이 마리 앙뜨와네뜨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위해 무려 1600만 프랑에 이르는 돈을 칼리오스트로에게서 사기를 쳐 빼았았던 것이다. 라모뜨는 이에 그치지 않고 칼리오스트로를 절도죄로 고소하였고 칼리오스트로는 바스티유(Bastille) 감옥에 투옥되었다. 6개월만에 출감한 칼리오스트로는 프랑스에서 추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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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법의 약을 파는 연금술사와 불사의 전설

1789년 칼리오스트로와 그의 아내는 로마로 갔다. 이 시기 로마에서는 다시 전통적인 사기 수법인 마법의 약을 파는 일을 시작했으며 몇 년간은 모든 것이 잘 풀려나갔다. 하지만 곧 다시 1791년 이단 혐의로 체포되었고, 세인트 안겔로 성(Castle of Saint Angelo: 원래는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무덤이었다)에 투옥되었다. 18개월 동안 구금한 뒤에 교회조사단은 칼리오스트로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으나 당시 교황인 피우스 6세가 종신형으로 감형해주었다.

칼리오스트로는 탈옥을 시도하였지만 다시 붙잡혔고, 이번에는 몬테펠트로(Montefeltro) 근교의 산 레오(San Leo) 성으로 이감된다. 이 성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탈출하기 어려운 감옥으로 쓰이고 있었다. 결국 칼리오스트로는 1795년 8월 26일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당시 유럽 사람들은 칼리오스트로가 죽었다는 것을 믿지 않았고, 그가 살아있다는 루머가 떠돌았다. 이 루머로 인해 칼리오스트로는 오늘날까지 불사의 몸으로 살아있다는 전설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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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위대한 연금술사 칼리오스트로



■ 발사모는 칼리오스트로가 아니다.

하지만 몇몇 오컬트주의자들은 이러한 칼리오스트로에 대한 이야기들이 전적으로 거짓이라고 말한다. 그들에 따르면 칼리오스트로와 쥬세페 발사모라는 악명높은 여행가는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것이다. 1890년 블라바츠키여사(신지학의 창시자)는 "칼리오스트로의 부모가 누구였든 간에 그들의 성은 발사모가 아니었다"라고 천명한다.

1910년에 트라우브리지(W. R. H. Trowbridge)는 칼리오스트로에 대한 책을 저술하면서 칼리오스트로와 발사모는 전혀 동일인물이 아니라는 역사적 사료를 들이댄다. 그 사료에 따르면 칼리오스트로의 부모들은 귀족이었지만 칼리오스트로가 태어난지 석달밖에 안되었을 때 그를 고아원에 버렸기 때문에 그는 부모의 성도 모를뿐더러 자신이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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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금술연구소와 이집트프리메이슨의 부활

그러한 주장에 따르면 칼리오스트로는 어려서 아랍의 성스러운 도시 메디나로 여행을 갔으며 여기서 알토라스(Altholas)라는 현인을 만나 그에게서 다양한 과학과 동방의 신비로운 지식을 배운다. 12살무렵부터 칼리오스트로와 알토라스는 진리를 찾아 유럽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여행한다. 여행 도중 알토라스는 몰타에서 사망하였으며 칼리오스트로는 22살에 로렌자 펠리치아니를 만나 결혼한다.

칼리오스트로와 그의 아내 세라피나
1776년 칼리오스트로 부부는 런던에 정착하여 연구소를 차려 연금술 연구를 시작한다. 하지만 너무 사람이 좋았던 칼리오스트로는 결국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에게 3000기니에 해당하는 거액을 사기 당하고 런던을 떠난다. 1777년 4월 12일 칼리오스트로는 연금술의 대가가 된 프리메이슨이 되어 당시 잊혀진 이집트 프리메이슨을 부활시키게 된다. 이후 칼리오스트로는 세인트 페테스부르크, 바르샤바 등 유럽 각지를 다니며 오컬트지식을 전파하고 아픈 사람들을 기적적인 능력으로 치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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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트라스부르크의 선행

1780년 칼리오스트로가 스트라스부르크를 여행했을 때, 그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많은 군중들이 그를 보기 위해 라인강변에 몰려들었다. 이에 칼리오스트로는 다른 일정을 포기하고 모인 사람들 중 아픈 사람들을 모두 치료해주었다. 스트라스부르크에서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매일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가난한 사람에게는 돈을, 아픈 사람에게는 의술을 베푸는 선행을 계속한다.

하지만 보상을 요구하는 법은 없었다. 혹 누군가 억지로 선물을 하면 반드시 그보다 두배쯤의 값어치가 되는 선물로 보답했다. 그 결과 몇 달간이나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던 칼리오스트로가 그 도시를 떠날 때, 그의 인품에 감격한 15,000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를 환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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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언자 칼리오스트로, 그리고 ‘왕비의 목걸이 사건’

스트라스부르그를 떠난 칼리오스트로는 프랑스의 보르도와 리옹으로 갔다. 이 도시에서 사람들은 그를 새로운 예언자로 환영하였으며, 많은 남녀들이 모여들어 그의 이집트 프리메이슨 의례를 받았다. 1785년에 칼리오스트로는 파리에 거주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같은해 8월 23일 불행하게도 왕비의 목걸이 사건에 연루되서 바스티유에 갇히게 되고, 9개월이나 투옥된 후 프랑스에서 추방된다.

칼리오스트로는 프랑스를 떠나 영국에 왔지만 프랑스의 첩자였던 모랑데(Morande)에 의해 악명높은 쥬세페 발사모로 착각되어 또 고소당한다. 칼리오스트로는 공개편지를 써서 무죄를 주장하였고, 결국 모랑데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공식적으로 사과하였다. 하지만 이 이후로 150년이 지나도록 역사가들은 계속 칼리오스트로와 쥬세페 발사모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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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 고대이집트 프리메이슨 전파와 이단으로서의 최후

자신의 명성에 오점이 간 칼리오스트로는 실망 끝에 영국을 떠났으며 1789년에는 로마에 도착하였다. 로마에서는 다시 필생의 과업이었던 고대 이집트 프리메이슨 의식을 전파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때 우연히 두 사람을 이집트 프리메이슨으로 입문시킨다. 그런데 이들이 사실은 이단을 조사하는 교회조사단의 첩자들이였고, 칼리오스트로는 그 일로 산 안젤로 성에 투옥된다. 이때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죄목은 오직 프리메이슨이였다는 것이었다. 당시 정권은 프리메이슨을 이단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칼리오스트로는 산 안젤로 성에서 다시 산 레오 성으로 이감되었다.

산 레오 성은 거대한 바위산 위에 서있었는데 칼리오스트로는 그 산에 있는 동굴에 갇혔고 동굴에서의 3년동안 그는 쇠약해져 갔다. 그는 매일매일 이 무덤 속에서 벽에다 글을 써서 남겼다. 그리고 이 기록중 마지막 것은 1795년 3월 6일자로 되어 있다. 7개월이 지난 뒤 10월 6일 칼리오스트로가 죽었다는 공식기록이 발표된다. 이 기록이 맞다면 칼리오스트로는 산 안젤로 성에서 죽은 것이 된다.

그의 실체가 무엇이었던 간에 칼리오스트로는 오컬트계에서 그는 가장 위대한 인물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연금술 연구와 고대 이집트 프리메이슨의 의례를 부활시키려는 그의 노력, 예언자적 신비가로서의 명성 등은 현대 오컬트학자들에 의해 재조명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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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페이지

http://www.occultopedia.com/c/cagliostro.html

http://www.themystica.com/mystica/articles/c/cagliostro.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