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송 달송

에고

황령산산지기 2022. 7. 3. 06:35
에고를 떨쳐버리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망각하고 잃어버릴 필요는 없다.
사실 그대는 그런 식으로 해서 에고를 갖게 되었다. 그대는 자기 자신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자기 자신을 망각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기억해야 한다.
그대는 주의를 더 기울이고 더 자각하고 깊은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야 한다.

그대는 사람들에게서 들은 바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를 스스로 알아내야 한다.
여자, 남자, 힌두교도, 기독교도, 백인, 흑인처럼 그대가 들은 바로부터 깨어나야 한다.

그대는 자신의 가장 깊은 중심으로 들어가서 자신이 누군지를 알아내야 한다.
바로 그런 앎, 그런 떠올림을 통해서 에고는 사라진다. 빛이 등장하면 어둠은 사라지는 법이다.

진짜 자아를 기억하면 가짜 자아는 더 이상 필요 없다.
그래서 그대가 가짜 자아를 떨쳐버려야 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에고 안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우리는 에고를 지탱할 새로운 버팀목들을 찾아낸다.

우리의 모든 행위가 에고를 계속 먹여 살린다.
심지어 모든 행위에서 그대가 진정한 행위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자신이 그것을 스스로 행하고 있다고 계속 주장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나는 호흡하고 있다.

그 말이 지닌 어리석음을 보라. 정말로 그대가 호흡을 하고 있다면, 그대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죽음이 와서 그대 앞에 선다면, 그대는 계속 호흡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죽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나는 호흡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호흡하고 있는 게 아니다.
호흡은 그대의 행위가 아니며 그대가 행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그저 저절로 일어난다. 
그대는 호흡을 할 수 없다.
호흡이 멈추면 그저 저절로 멈추는 것이다. 다음 호흡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호흡은 해프닝이지만, 인간은 적어도 그것을 하나의 행위라고 믿으며 살아간다.

그대는 나는 사랑한다.라고 말한다. 사랑을 나누다라는 표현 자체도 완전히 헛소리이다.
그대는 사랑할 수 없다. 그대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해프닝이다. 그대가 사랑에 대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랑은 그저 저절로 일어나거나 저절로 일어나지 않거나 둘 중에 하나이다.
그대가 노력을 기울인다면 오히려 그것은 가짜 사랑이 될 것이다.
오히려 사랑이 전혀 아닌 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그저 행위가 될 뿐이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는다면, 과연 무얼 하겠는가?
공허한 몸동작들만 하게 될 것이다.
껴안고 키스하는 것처럼 아무런 사랑 없이 그 모든 움직임을 행하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기계적이 될 것이다! 바로 그런 일이 온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다.
아내는 남편을,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완수해야 할 의무처럼 되어버렸다.
그것은 하나의 행위이자 일이 되었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그것은 아무런 만족이나 성취감을 주지 못한다.

에고는 그런 면에서 매우 교활하다. 그것은 자신에게 자양분을 줄 새로운 버팀목과 지원자들을 계속 찾아낸다.
그대가 실패를 하면 환경을 탓한다. 성공하면 그 덕은 자신에게 돌린다.

성공하면 그것은 자신의 운이고 실패하면 추악한 사회의 탓이다.
실패하면 교활한 사람들, 경쟁자들의 탓이지만, 성공하면 
그대가 성공한 게 된다.

 
- 오쇼의 <마음챙김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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