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감한 판사
천구백칠십오년 오월십삼일 대통령은 긴급조치 구호를 발령했다.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의견 자체가 범죄가 된다는 내용이었다. 영장 없이 체포해서 재판에 넘길 수 있었다.
세상이 꽁꽁 얼어붙고 사람들의 입에 자물쇠가 채워졌다. 저항이 일기 시작했다.
다음해 봄 어느 날 오후 서문여자고등학교 수업시간이었다. 선생님이 아이들 앞에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북한에는 우리보다 일년 먼저 지하철이 생겼다. 너희들 이런 말 처음 듣지?”
아이들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생님이 말을 계속했다.
“후진국일수록 일인정권이 오래간다.
그 사람이 아니면 나라를 이끌어갈 사람이 없다는 식으로 국민을 압박하는 거지.
우리나라 현 정권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해 먹을 거야.”
담당 교사는 그 발언으로 긴급조치위반죄의 피고인으로 법정에 섰다.
그 교사는 법정에서도 “알고 있는 사실대로 얘기했을 뿐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당시의 공포분위기는 국민뿐 아니라 판사사회도 마찬가지로 얼어붙게 했다.
그런 사건을 무죄라고 판결했을 경우 어떤 피해가 올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분위기였다.
그해 그런 내용의 발언으로 긴급조치 위반죄가 되어 재판에 회부 된 사람은 모두 이백이십일명이었다.
이백이십명이 유죄로 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중의 한 사건이었다. 담당재판장은 고민했다.
그런 사건에 관대한 판결을 하는 것은 판사로서는 자살행위로까지 인식하고 있는 때였다.
그는 어떤 두려움에 빠져있는 자신이 미워지기까지 했다.
그는 마침내 무죄를 선고하면서 이렇게 판결이유를 썼다.
‘군사혁명을 한 박정희는 대통령의 연임을 삼선까지 허용하는 무리한 개헌을 강행했고
이 정도로도 부족함을 느껴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유신헌법을 통과시켜 현재까지 집권해 오고 있다.
따라서 기소된 교사의 말들은 모두 사실과 어긋난 것이 아니므로 피고인은 무죄’
그 판결로 권력 내부가 발칵 뒤집혔다.
대통령의 긴급조치로 사람들을 죽일 수도 감옥에 넣을 수도 있었다.
모두들 겁을 먹고 입에 재갈을 물렸을 뿐이지 정상적인 법치국가가 더 이상 아닌 걸 알고들 있었다.
심지어 유신헌법을 강행한 박정희대통령도 측근인 남덕우 국무총리에게
“내가 봐도 유신헌법의 대통령 선출방법은 엉터리야.
그렇게 해 가지고서야 어떻게 국민의 지지를 얻을수 있겠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유신헌법으로 이미 국민들은 대통령을 뽑을 권한을 박탈당했다.
담당 재판장은 조용히 사표를 내고 법원을 떠났다.
당시 대통령의 측근으로 그 명령을 기계같이 뒤에서 수행하던 대법원장조차 혼자 이런 말을 했다.
“저런 판사가 사법부에 세 명만 있으면----”
그 후 그 판사는 조용히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이천십칠년 저세상으로 갔다고 한다.
당시의 법조 분위기상 그는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었다.
혼자만 튀는 미움받는 인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후 되돌아 보면 그 이상한 행동은 그의 일생을 규정짓는 ‘중요한 실마리’였음을 알게 된다.
소리없이 재야에 묻혀 살다 간 이영구 판사 그는 의인이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경전같이 가지고 다니며 읽던 문학도였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빠져 있었다. 괴테의 시와 사상에 심취했던 그는 그 사상을 판사의 자존심에 연결시켰다.
그는 판사생활을 하면서 수시로 자신의 비겁함 후회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동료 판사였던 분이 그에 대해 쓴 글의 초고를 내게 보내주어 알게 된 인물이었다.
우리 사법부의 기념비적인 판결들을 모아 만든 책 속에 그가 썼던 판결문이 수록되어 있다.
책에는 그 판결문에 대한 평석으로 “그는 해야 할 말을, 해야 할 때에 함으로써
진실을 말해야 할 판사의 책무를 다했다”라고 적혀 있다.
변호사로서 오랫동안 법정을 다녔다.
지금도 집권자의 입맛에 맞는 판결을 하는 출세욕이 가득찬 판사들이 있다.
판사는 무엇으로 살까. 이영구 판사같이 옳은 것을 옳다고 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상황에 따라서는 판사가 져야 할 사회의 십자가를 지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올곧은 판사들이 만들어 내는 하나하나의 판결이 모세의 율법보다 더 훌륭한 이 나라의 경전이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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