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거짓말에 흔들리는 대한민국

황령산산지기 2020. 10. 24. 07:21

blue gull

 

거짓말에 흔들리는 대한민국

최초의 근대형 국가는 근대가 태동하기 2000여 년이나 훨씬 전에 나타난 중국의 고대 진(秦)나라다.

근대국가에서는 이전에 왕들이 ‘주관적인 뜻’으로 하던 방식을 포기하고

관리가 ‘미리 다듬어 공개한 객관적인 말’로 통치한다. 귀족 통치가 행정가 통치로 교체된 것이다.

 

행정가들은 ‘미리 다듬어 공개한 객관적인 말’을 근거로 권한을 행사하는데, 그것이 바로 ‘법’이다.

‘법’은 ‘말’의 한 형태다. ‘법’을 지킨다는 것은 ‘말’을 믿고 지킨다는 의미다.

 

‘주관적인 뜻’을 강압적으로 행사해야 작동되던 나라가

이제는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자율적 신뢰를 바탕으로 작동되는 나라로 바뀌었다.

 

진나라는 이런 의미를 국가적으로 구현하려 했다.

정치의 출현은 사실 말의 출현이다.

기원전 6~7세기, 인간은 전혀 알 도리도 없고 무섭기만 한 신(神)으로부터 벗어나 독립한다.

 

맹목적인 믿음과 용맹스러움으로 신에 복종하던 인간이 스스로 역사의 책임자로 등장하면서

신을 빼고 인간들끼리 말로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했다. 대화의 출현이다.

 

신으로부터 독립한 인간이 자신을 완성해가는 핵심 장치가 바로 정치다.

정치를 통해서만 세속에서 투쟁하는 인간은 자기 삶의 높이를 꽃으로 피울 수 있다.

말이 엉켜 대화에 실패하면 정치라는 꽃은 피울 수 없다. 대화의 실패는 결국 신뢰의 실패다.

진나라는 과격한 혁명을 통해 최초의 근대형 국가를 개시한다.

다른 나라들도 시대에 맞는 혁신을 시도했으나 아쉽게도 상앙(商)이라는 통찰력 있는 재상이 없었다.

 

당시 중국 땅에는 시대에 맞추려는 혁신이 유행이었고, 그들은 그것을 변법(變法)이라고 했다.

상앙도 처음에 변법을 시행하였지만, 뜻대로 이루지 못했다.

 

혁신의 기운이 긍정적으로 확산되지 못하는 원인을 분석하다가 ‘신뢰’가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장기간의 실정으로 아무도 국가가 하는 ‘말’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날, 상앙은 도성의 남문에 10m 정도의 나무 기둥을 세웠다.

기둥에 ‘이 나무 기둥을 북문으로 옮기는 자에게 금 10냥을 하사한다’는 공고를 붙였다.

신뢰가 무너진 상황에서 나라의 공고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상금을 50냥까지 올렸지만, 지원하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며칠 후, 혹시나 하고 나무 기둥을 북문으로 옮기는 이가 있었다. 상금 50냥이 즉시 내려졌다.

백성들은 비로소 정부를 믿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변법이 효율적으로 실시되었고, 진나라는 부강한 나라로 변모하였다.

신뢰를 회복했기 때문이다. 신뢰가 무너지면 나라는 번영하지 못하고 추락한다.

인간사의 신뢰는 대부분 ‘말’에 대한 신뢰다.

제자 자로가 정치에 가장 중요한 것을 묻자 공자는 ‘말’을 바로 세우는 것이라고 한다.

소위 ‘정명론(正名論)’이다. 정치가 잘되려면 ‘말’이 사실에 맞아야지 어긋나면 안 된다는 뜻이다.

 

말과 사실이 어긋나는 것을 거짓이라고 한다. 제자 자공이 또 통치의 요체를 물었다.

공자는 경제와 군대와 신뢰라고 말한다.

제자가 셋 가운데 하나만 남기게 질문을 하자 공자는 최종적으로 신뢰를 남긴다.

거짓은 나라를 망친다. 화폐도 사실은 신뢰 장치다.

신뢰가 없으면 화폐가 제대로 유통되지 않아 경제가 죽는다.

신뢰가 없으면 교육이나 행정도 있을 수 없다.

 

말의 신뢰가 정치의 핵심적인 토대라는 사실은 상앙이나 공자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현대를 사는 바로 지금의 우리에게도 변함없는 핵심이다.

 

신뢰의 ‘신(信)’ 자가 사람(人)과 말(言)의 일치로 되어 있는 것에 깊은 함축이 있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믿을 수 없고, 믿음을 상실한 통치자가 펴는 정책은 효과를 내기 어렵다.

정치는 말로 피우는 꽃이다. 말이 곧 정치다.

좋은 정치에서는 말이 빛나고, 나쁜 정치에서는 말이 천하다.

나라를 발전시키는 정치에는 우선 미더운 말들이 있다.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는 데서는 거짓말이 난무한다.

정치가 잘되는 나라에서는 정치인들의 말이 교과서에 실리지만,

정치가 길을 잃으면 학생들에게는 정치인들의 말을 되도록 듣지 못하게 하고 싶어진다.

 

혁명은 정치가 파괴되어 야만으로 돌아간 다음에 새 문법과 새 말을 세워 새로워지는 일이다.

새 말과 새 문법은 신뢰 없이는 서지 못한다.

혁명은 신뢰를 잃은 말을 신뢰 있는 말로 바꾸는 과격한 사건이다.

종내에는 문법의 혁신이고 말의 교체다.

촛불혁명은 실패했다. 혁명의 실패는 말의 실패이자 거짓말의 득세다.

나는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섰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문재인 대통령의 통치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알게 해주는 조짐을 읽고 절망했다.

 

대통령 취임 3개월도 채 안 되었을 2017년 8월 1일 나는 ‘문재인 대통령, 고유함이 사라진다’는 글을 발표했다.

거짓말은 다른 위선이나 실수들과는 차원이 다르게 깊은 것이다.

‘말의 신뢰’는 인간의 근본과 관련되기 때문에 다른 것보다 훨씬 더 본질적이다.

글의 요지는 대통령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었다.

문 대통령은 스스로 5대 인사 원칙을 지키겠다고 말해놓고, 처음 인사부터 지키지 않았다.

 

말은 신뢰이며 근본이기 때문에 거짓말 자체로 끝나지 않고 다른 모든 통치 행위에 끝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취임사는 국민을 향해서 하는 엄숙한 약속이지만, 다 거짓말이 되었다.

당대표 시절 만든 혁신안도 결국은 거짓말이 되려 한다.

 

성범죄로 직을 잃어 보궐선거가 실시되면

그 지역에 후보를 내지 않는다는 말은 당시 눈가림을 위한 임시변통이었을 뿐이다.

 

김정은이 가장 두려워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한 말은 김정은이 가장 깔보는 대통령이 되면서 거짓이 되었다.

거짓말하는 인격은 항상 현상 유지만 하면 된다는 유혹에 빠져 있기 때문에

미래를 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미래를 여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다.

 

거짓은 그 사람을 그 자리에 머물게 하면서 그가 뒤집으려 했던 과거를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닮게 만든다.

 

문 대통령은 ‘근혜 산성’과 ‘명박 산성’을 보며 “대한민국 민주주의, 정부의 반헌법적 경찰 차벽에 가로막혔다”

질타했지만, 자신의 실력도 ‘재인 산성’ 이상이 못 된다는 것을 자인할 수밖에 없다.

 

거짓으로는 자신이 부정했던 과거 이상의 실력을 낼 수가 없다.

과거와 닮아가면서 혁명은 실패하고, 거짓을 강변하는 억지만 남는다.

인간을 인간으로 지탱해주는 가장 원초적인 힘 가운데 하나가 무엇일까?

염치를 아는 것이다.

 

거짓말을 하고도 염치가 살아 있으면, 즉시 수정하고 다음에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지만

염치가 살아있지 않으면, 거짓말을 하고도 상황을 들어 어쩔 수 없었다고 강변하거나

상대방에게 뒤집어씌우고 감추려 한다.

 

염치가 있다면, 최소한 과거에 상대방을 비난하느라 했던 말이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

사람들은 당장의 기능적인 작은 이익 때문에 본질을 포기하고 거짓을 범한다.

자기가 한 말은 지키겠다는 최소한의 염치만 있어도 본질을 포기하고 기능을 취하려는 유혹을 이길 수 있다.

지금 정부에서는 ‘조스트라다무스’니 ‘추스트라다무스’니 하는 인격들이 생산되고,

오히려 보호받고 있다. ‘내로남불’도 모두 염치를 상실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가장 큰 문제는 거짓말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닌 것이 되어 버렸거나 염치없는 행위들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고 허용되면서 인간 사회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기풍이 무너진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집권세력이 앞장서서 무너뜨리고, 사회적으로 확산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이것은 가장 근본 소질이기 때문에 한 번 무너지면 다시 세우기 쉽지 않다.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고 기본 기풍을 무너뜨리면, 정치 자체가 파괴되어 국가적으로 더 큰 손실을 입는다.

정치를 자기 뜻대로 하려고 기본 기풍을 포기하면, ‘말’의 질서가 파괴되고 신뢰가 무너져서 국가는 서 있기 어렵다.

 

과학도 정직한 기풍이 있어야만 발전한다.

거짓과 몰염치와 ‘내로남불’로는 국가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혁명이고, 개혁이고, 통일이고 간에 거짓말만 줄여도 문제의 반은 해결된다.

글 / 한국경제 칼럼 /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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