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송 달송

우주의식으로 향하는 세가지 길

황령산산지기 2022. 3. 13. 06:50

- 파라마한사 요가난다

 

극히 미소한 정도의 두려운 생각이나 정신적인 불안함이 생기는한 우주적 의식세계에 도달할 수 없다. 자아실현 동지회의 집중에 관한 기법은 인간의 집중하는 힘과 질(質)을 향상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러한 수련은 잠재의식 수준에 수년동안 결실없이 방황하는 열성적인 구도자를 도울 것이다. 여러분이 벗어나려고 하는 그 세계는 환각적이거나 상상으로의 영적 경험으로 가득차 있다. 인간은 실제적인 영적 경험과 진리의 실현을 위해 초의식에 도달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많은 것들을 가르치면서 적게 실천하는 버릇이 있다. 여러분이 설탕에 관한 강의를 백번 들을 수 있어도 그 맛을 볼 때까지는 참맛을 알 수 없다. 실천에 옮기지 않고는 진실한 어떠한 가르침도 역시 알 수 없는 것이다. 여러분은 예언자나 위대한 사람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그때 그들의 진리가 여러분 자신의 것이 되어 진리는 증명될 수 있으며 보편적인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여러분이 진리를 실천할 때 자신이 기독교인이거나 힌두교인, 불교인, 그밖의 다른 종교인이든지 그때마다 그리스도가 여러분을 부를 것이며 크리슈나, 붓다, 그밖의 진리의 신성한 화신들이 마찬가지로 여러분을 부를 것이다.

 

< 확고하게 진리의 길을 따르라.>

수천의 사람들 중에 단지 몇 명만이 신을 찾고 있으며 그들 구도자들 중에 아마 단 한 명 정도가 그분을 알고 있다. 부단히 추구하는 사람만이 신을 깨달을 것이다. 따라서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 명상을 규칙적인 생활화로 실천하는 데 최선을 다 해보라. 결코 신을 망각하지 마라. 여러분이 그분을 발견할 때까지는 결코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유한적인 형체 뒤에 있는 무한성을 나는 느끼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하라.

나는 그분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결코 이곳에 오지 않았다. 나는 내가 완전한 영적 교섭을 할 수 없다면 결코 이런 강의를 맡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 수준을 넘어서 이야기 할 때 학생들은 자신들이 배운 것을 잊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집중은 神을 발견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집중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영적인 발전단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다. 집중하지 않고서는 결코 신을 발견할 수 없다. 여러분의 의식으로부터 모든 소리와 산만한 주의를 차단시킬 수 있는 방법을 배우라. 여러분의 의식이 바르게 되는 순간 신은 그곳에 있다. 그분은 여러분으로부터 숨지 않는다. 그러나 여러분이 신으로부터 숨고 있다. 명상중의 여러분이 내부의 빛
을 볼 수 있을 때 그것을 간직하려고 하라.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가 된 자신이 있음을 느끼려고 해보라. 그곳이 신이 있는 곳이다. 여러분이 신의 빛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라.

집중하고 있는 동안 더 많은 평화를 느끼게 되거나 더욱 오랫동안 집중할 수 있도록 여러분은 더욱 깊이 신의 세계로 들어갈 것이다. 영적 진리에 관한 책을 읽는 데 걸리는 시간을 명상하는데 이용하게 되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훨씬 커다란 발전을 시킬 수 있다. 잠을 좀 덜자고 더 많은 시간을 명상하는데 할애하도록 하라. 여러분이 즐길 수 있는 그 휴식상태는 수면보다 백 배나 더 신선감을 준다.

여러분은 자신의 의식으로부터 소음을 차단시킬 수 없다면 신의 세계에 도달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현인들이 동굴이나 숲의 외딴 곳을 찾는 이유이다. 내가 가르친 집중과 명상의 방법을 실천하여 반복해서 내부의 침묵으로 뛰어 들어라. 그리하면 커다란 평화와 행복을 발견할 것이다. 기타는 말했다.

“조용한 장소에 홀로 머물러 (요가의 집중으로) 다듬어진 마음과 정신으로서 항상 바라고 있는 욕망과 소유하고 싶은 열망으로부터 해방되라. 요기는 끓임 없이 영혼과 일치되려고 해야 한다”

깊은 명상의 침묵은 모든 교회나 사원에서 더욱 열심히 실천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은 말수를 좀 줄여야 한다. 인도에서 내가 사원에 머물러 수련하고 있는 동안 나의 구루 스와미 스리 유크테스와는 우리에게 단지 경우에 따라서만 강의를 해주었다. 대부분 시간을 우리는 그의 주위에 둘러앉아 아무런 말없이 내부로 정신을 집중시켰다. 우리가 만일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게 되면 그는 우리를 꾸짖으셨다.

그리고 영적 생활에 있어서 그러한 스승으로부터 지혜를 배우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스승은 단순히 진리에 관한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그가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는 사람이며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사람이다.

<가시적(可視的) 세계의 불가시적(不可視的) 원천>

우주는 두 개의 부분 혹은 두 개의 양상으로 분리되어진다. 한쪽 면은 삼라만상이다. 다른 한쪽 면은 오직 신만이 존재하며 단 하나의 창조물도 없다. 그것은 “빛의 어둠”과 “빛없는 광명”의 세계이다. 기타에서 신은 말한다. “해도 별도 그리고 불빛 하나 없는 그곳이 내가 사는 최상의 처소이며…”

그와 같은 이중성은 인간의식으로 판명된다. 여러분의 존재는 보이는 하나와 보이지 않는 다른 하나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여러분은 눈을 뜨고 물리적인 창조물을 보고 그 속에 자신이 있음을 본다. 눈을 감고는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캄캄한 공간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형체로부터 여러분의 의식이 격리되어 질 때도 여전히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으며 작용한다. 만일 깊은 명상 중에 여러분이 눈을 감고 그 어둠을 꿰뚫어 본다면 모든 생성물이 나타내는 빛을 바라볼 수 있다.

보다 깊은 사마디로서 여러분은 나타난 광명을 앞서 체험하고 완전한 축복의식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그 세계는 모든 형체 너머에 있는 곳이며 어떠한 감각 또는 초감각의 감지보다 훨씬 더 무한한 실제성, 촉감, 기쁨이 있는 것이다.

신은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의식속에서 우주를 다스리는 것과 똑같은 작용법칙을 준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눈을 감고 체험한 형체가 없는 의식상태는 “빛의 어둠”과 “빛없는 광명”의 무한한 신앙에 비유될 수 있다. 신은 그분의 물질적인 삼라만상의 세계를 특정짓는 이중성과 어떤 형태나 특질없이 그곳에서 존재한다. 삼라만상의 뒤편에 존재하는 이러한 광대무변한 영원성의 영역안에 신은 홀로 영원한 존재, 영원한 의식, 항구적인 새로운 축복의 절대적 의식속에 살고 있다.

신이 절대자로서 무한성의 영역을 통치하는 의식세계에는 세상이나 혹은 어떤 다른 창조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은 우주의 다른 쪽에 있는 모든 삼라만상을 자신속에서 알고 있다.

이 우주의 공간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아이쉬타인은 “공간이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그곳으로부터 와서 그곳으로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전자들과 온 세상은 어디로 사라지는가?

여러분이 언제라도 어떤 물질적인 창조물에 의해 매혹되어 질 때는 눈을 감고 내부를 응시하면서 그 원칙을 숙고해보라. 여러분은 아무 것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또한 모든 가시적 사물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빛이 어둠을 비추다”
만일 여러분이 어두움을 응시해보면 그 커다란 빛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둠 뒤에 그리스도 의식이 있다. 어둠 뒤에는 다른 세계의 풍부한 생명이 있다.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우주 바로 뒤에는 지능이 있다. 그리고 여러분의 바로 뒤에는 신이 있다. 여러분이 그분을 발견할 때까지 멈추지 마라. 알아야 될 많은 것들이 있다. 내부로 깨달아야 할 많은 것들이 있다.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무한자로부터 여러분에게 똑바로 올 것이다. 명상에 의해 내부로 감지한 진리는 과학이 다른 방법으로 발견하고 있는 생리학적 법칙의 근거를 나타내 준다. 나는 눈을 감고 있으면 내 몸속에 흐르는 신비한 생명류를 알고 있다.

정적속에서 여러분이 눈을 감고 있을 때 홀로 있다고 느끼지 마라. 신은 여러분과 함께 있다. 왜 그분이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가? 에테르는 라디오에 의해 잡힌 음악 또는 반대로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음악으로 가득차 있다. 따라서 그것은 신과 함께 있다. 신은 여러분이 존재하고 있는 이 순간마다 함께하며 이를 깨달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명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명상하는 여러분들은 더욱 깊이 들어가야 한다! 여러분이 실제로 자신의 내부에 신의 존재에 대한 어떤 표시를 느낄 수 있을 때까지 잠에 떨어지지 마라. 그의 경이적인 비밀을 발견할 수 있을 때까지 어둠속을 응시하라.

여러분에게 격려가 되도록 오늘 나는 초의식 상태에 있었던 경험을 말해 주겠다. 언제인가 나는 워싱턴산에 있는 도서관에 가서 앉아 있었다. 4시 경이었다. 갑자기 내 호흡이 멈추었다. 사지(四肢)도 굳어졌다. 나는 죽음의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호흡과 움직임은 내 육체를 떠났다. 하지만 나는 의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죽음의 경험은 놀라운 것이었다. 나는 내 육체를 보았고 신의 빛으로 만들어진 우주적 활동사진으로 모든 자연을 보았다. 나는 기쁜 나머지 소리쳤다. “죽음은 없습니다. 주여! 이 모든 세상은 단지 하나의 영화입니다”

자신의 왕좌에 있는 통치자는 “아, 나는 왕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이 인간에게 오도록 허락한다면 그는 떠난다. 그는 삼라만상에 있는 모든 형제들속에 내재한 신을 느끼는 진정한 왕이다. 죽음은 그를 두렵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죽음을 신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보기 때문이다.

<우주의식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길 >

인간의식을 우주의식으로 확장시키는 3가지 길 가운데 첫 번째는 사회적인 길이다. 여러분은 그속에서 “자아”를 차단시키고 모든 것을 위해 살아라. 여러분의 친구들에게 관대하라.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라. 신은 여러분이 자신이 아닌 사람을 돌보아가면서 생활함으로써 자신의 의식을 확장시킬 수 있도록 가족을 주었다. 가족생활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자기의 희생을 배우며 반면에 어느 정도 의식의 확장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개인적으로 되는 사랑은 배타적이며 한계성이 있다. 즉 사랑이 비개성적일 때 의식이 확장된다. 비개성적인 사랑을 발전시켜라. 즉 여러분이 자신의 가족에게 주는 것과 똑같은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줄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을 아끼는 것만큼 남을 아껴주며 생활해야 한다. 우주의식으로 가는 사회적인 방법은 이런 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신은 모든 그분의 자녀들을 똑같이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가 그분의 성스러운 가족이며 그분의 사랑은 비개성적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자녀들은 그와 똑같은 사랑을 또다른 사람에게 주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신의 계적이다. 그것을 망각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온 세상 사람들의 자세가 바뀌어져야 한다. 여러분 각자는 모든 사람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진정한 본질은 편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남에게 주기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뻐하는 것을 볼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것을 느끼고 사랑할 때 모든 삼라만상은 우리에게 그 반응을 나타내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서”
포기한 예수는 우주의식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회적인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 준 것이다. 그리스도와 같이 여러분도 자기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봉사해야 한다.

우주의식을 가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 사람은 자신의 사랑을 그밖의 모든 사람을 배제시키는 몇몇 사람에게 제한시키지 않는다. 따라서 여러분은 전세계인이 여러분의 가족이 되어야 한다. 명심할 수 있겠는가? 나에게는 항상 이러한 의식이 있다. 나는 신분도 국가도 없다. 나는 모든 것을 나의 것으로 생각한다. 모든 남자들을 형제와 같이 사랑하고 모든 여자들은 자매와 같이 사랑하고 윗사람을 부모와 같이 사랑하라. 모든 인간들을 여러분의 친구로서 사랑하라.

<두 번째 길>

우주의식으로 들어가는 두 번째 길은 자아훈련 방법이다. 무절제로 인한 희생자가 되지 마라. 일하는 것을 즐기라. 하지만 그들에 대해 집착하지 마라. 자유로워지라. 유쾌하라. 그리고 자제하라. 그릇된 습관의 노예가 되는 것을 피하며 여러분의 오직 올바른 확실성에 따라 행동하라. 우주의식에 달하기 위해 자제력을 갖는 것과 뜨거움과 차가운, 유쾌함과 슬픔, 건강과 질병의 이원성을 넘어서야 할 필요가 있다.

어떠한 흥분 또는 정신적 교란 없이 모든 것을 견디는 방법을 배우라. “좋은 일로 기뻐서 흥분하지 않고 나쁜 일로 괴로워하지 않는 즉 모든 곳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확립된 지혜를 갖고 있다”

<가장 높은 길>

마지막으로 명상의 방법이 있다. 이는 형이상학적인 길이다. 만일 명상하는 동안에 여러분이 호흡하는 것을 여전히 의식하고 있다면 육체감각에 매여 있는 것이다. 우주의식에 들어가기 위해 사람은 구루가 준 명상방법을 통해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밀폐시킨 물항아리를 물탱크속에 넣는다면 항아리속에 있는 물과 항아리를 둘러싸고 있는 물과는 분리된다. 그러나 여러분이 뚜껑을 들어내면 항아리에 있는 물과 탱크속에 있는 물은 섞여지게 된다. 이와 같이 보통 사람들의 의식이 무지의 뚜껑으로 봉해져 있다면 신을 차단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뚜껑이 명상의 바른 방법으로 제거된다면 인간은 내적인 신의 평화와 외적인 육체의 평화를 느낄 것이다.

여러분이 명상의 지속성과 깊이를 발전시킬수록 더욱더 많은 평화와 항상 새로운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 그밖의 어떠한 것을 여러분이 시도하더라도 명상으로부터 얻게 된 신성한 의식을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하느님은 어느 곳에나 계시지만 여러분은 그분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여러분은 자신속에 있는 그분을 발견하기 위해 여러분의 의식을 그분의 것과 결합시키거나 무지의 뚜껑을 벗겨낼 때까지는 안팎으로 그분을 느낄 수 없다. 여러분이 만일 물질적 욕망에 침잠하게 되면 질식해버리고 만다. 여러분이 신의 대양에 침잠하게 되면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신을 한번 발견한다면 여러분은 진정한 영속적인 만족을 경험하게 된다. 인간의 우정은 매정해질 수 있지만 신을 결코 여러분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 밖의 모든 사람이 여러분을 저버릴지라도 여러분이 신을 택한다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