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라만상

배가 고플 때 먹고 졸릴 때 잠을 잔다. - 오쇼

황령산산지기 2022. 3. 6. 12:37

어떤 사람이 한 선사(禪師)에게 물었다. “당신의 길은 무엇입니까?

 

그가 말했다. “나는 배가 고플 때 먹고 졸릴 때 잠을 잔다. 이것이 나의 길이다. 나는 배가 고프지 않을 때는 결코 먹지 않으며 또 배고플 때 결코 굶지 않는다. 이것이 나의 길이다.

 

그 사람이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를 구하는 길 같지는 않은데요. 보통 사람들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선사는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한다면 나에게 올 필요가 없지.”

 

사람들은 너무 많이 먹거나 너무 조금 먹는다. 마음은 항상 불행해지는 원인을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마음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이다. 마음은 불행해지는 원인을 찾아내는 데 매우 능수능란하다. 마음은 모든 불행을 만들어 낸다. 환희에 찬 상태에서는 마음은 죽어 버리기 때문이다. 마음은 모든 환희에 반대하고 있다. 그대가 어떤 고통 속에 있으면 마음은 이것은 좋지 않으니 저것을 하라고 일러 준다. 정반대되는 것을 일러 준다. 경계하라. 마음이 정반대되는 것을 제안할 때 그에 따르지 말라. 항상 중용을 찾으라. 마음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멈출 곳을 알라.

 

노자는 말한다. “내가 그대들에게 세 가지 보물을 주겠다. 하나는 사랑이다. 다른 하나는 결코 극단으로 가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보물은 자연스러워지라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은 스스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따른다고 할 때 왜 모든 것이 그 스스로 이루어지는가? 마음은 불행을 만들어내는 데는 완벽한 숙련공이다.

 

어떤 청년이 나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단지 물 위에서만 살고 싶습니다.” 왜? 왜 그는 물 위에서만 살고 싶어 하는가? 그는 너무 많이 먹은 것이다. 이제 그것이 지옥으로 되고 말았다. 이제 그는 또 다른 지옥을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러나 어떻게 물 위에서 살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이 또 하나의 지옥을 만든다. 결국은 지옥에서 또 다른 지옥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지옥에서 지옥으로, 이것이 바로 마음의 길이다. 그리고 그 두 지옥 사이 어디엔가 천국이 있다. 그러나 마음은 항상 그 천국을 지나쳐 버린다.

 

두 지옥 사이에 천국이 있다. 그러므로 ‘어디에서’ 그칠 것인가 잘 알도록 하라. 바로 중간에서 멈추어라. 너무 많이 먹지 말라. 단식하지도 말라. 그러면 이기적이지 않게 된다. 너무 많이 먹으면 이기적으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라 나스루딘은 자신이 대식가임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 “나는 빵을 아흔 아홉 개나 먹을 수 있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말했다. “왜 백 개를 못 채우지?

 

그가 말했다. “자네는 나를 뭐로 생각하는가? 빵 한 개 차이로 나보고 거짓말쟁이가 되란 말인가? 내가 거짓말을 해야겠나?

 


사람들은 자기가 얼마나 먹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허풍을 떤다. 그리고 또 자기가 얼마나 오랫동안 단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허풍을 떤다. 그러나 허풍은 언제나 마찬가지이다. 죄인들도 그렇게 자랑하고 소위 성자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그렇게 자랑한다. 그 둘은 한 배에 탄 사람들이다. 허풍이 그 배이기 때문이다.


 

어떤 죄수가 감옥으로 들어왔다. 이미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가 물었다. “여기에 얼마 동안 있어야 하나?” 그는 고참이었다. 그 젊은 신참이 말했다. “15년밖에 안 됩니다.

 

고참이 말했다. “그러면 침대를 문 가까이 놓도록 하게. 곧 나가겠구먼. 나는 25년이나 더 있어야해.

 

25년을 선고받으면 위대한 죄수이지만 단지 15년밖에 안 된다면 …… 아직 애송이라는 말이다.


 

죄수들까지도 자기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에 대해서 떠벌인다. 살인을 한 번 했으면 일곱 번 했다고 과장한다. 성인들도 그와 똑같은 짓을 한다. 인도에서는 소위 성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자기가 금년에 얼마나 오랫동안 단식을 했는지를 공공연히 자랑한다.

 

나는 중용을 지키는 것보다 더 위대한 덕을 찾지 못했다. 그와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 그러한가? 왜 그것이 가장 위대한 덕인가? 중용은 에고를 완전히 파괴하기 때문이다. 에고만이 유일한 죄이다. 에고 때문에 사람들은 신성(神性)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평범하게 중간에 머물러 있다면 무엇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 가장 적당한 양의 음식물을 먹었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섹스를 가장 적당하게 했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중간에서부터 어떤 것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섹스에 탐닉하면서, 나이가 오십인데도 하루에 세 번이나 섹스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니면 독신이거나 처녀이므로 한 번도 누구와 섹스를 해 본 일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중간에 머물러 있다면 그렇게 주장할 수 있겠는가? 중간에는 주장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주장하고 단언할 것이 없으면 에고는 채워지지 않는다. 평범 하라. 중간에 머물라. 이것이 가장 위대한 덕이다.

 

실천하도록 노력하라.

진리를 아는 것은 기나긴 여행이다.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진리가 내려올 수 있기 전에 그대는 진리를 싣고 갈 수레가 되어야 하며,

찾아올 그 손님을 위해 완전히 빈 그릇이 되어야 한다.

매 순간 순간 비워야 한다.

그대가 먹으면 화장실서 비우듯이....

그대가 비어 있을 때만이 손님을 맞을 주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어떤 사람이 한 선사에게 물었다.

당신은 무엇을 합니까? 무엇이 당신의 종교적 수행입니까?

 

그가 대답했다.

나는 일상생활을 한다. 그것이 나의 수행이다. 배가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잠을 잔다.”

 

그렇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질문을 한 사람은 어리둥절해졌다. 그가 말했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아무것도 특별한 것이 없군요.

 

선사가 말했다.

그것이 중요한 점이다. 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특별한 것을 갈망하는 것은 전부 자아로 인한 것이다.

 

아직도 질문을 한 사람은 혼란스러웠다. 그가 말했다.

그러나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선사가 웃었다. 그가 말했다.

그렇지 않다.

네가 먹을 때 너는 다른 수많은 것들을 같이 하고 있다.

너는 생각하고 꿈꾸고 상상하고 기억하고 있다.

너는 단순히 먹기만 하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먹을 때 나는 단순히 먹기만 한다.

거기에는 먹는 것만이 존재할 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순수하다.

네가 잘 때 너는 수많은 일들을 하고 있다.

너는 꿈꾸고 싸우고 악몽에 시달린다.

내가 잘 때는 단순히 자기만 할 뿐,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잠이 존재할 때 오로지 잠만이 존재한다.

 

나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먹는 것이 존재할 때 오로지 먹는 것만이 존재한다.

나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걷는 것이 존재할 때 오로지 걷는 것만이 존재한다.

나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걷을 때는 그저 걷기만 한다.

 

 

나는 네가 이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

일상적이되, 일상생활 안에 깨달음을 끌어넣으라.

신을 일상생활 안으로 끌어넣으라.

자고 먹고 사랑하고 기도하고 명상하여라.

그러나 자신이 특별한 일을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때 너는 특별해질 것이다.

 

일상적인 삶을 살 차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초월적인 인간이다.

왜냐하면 초월하려고 원하는 것이 바로 일상적인 욕구이기 때문이다.

긴장을 풀고 평범하게 되는 것이 진정으로 초월적인 것이다.


 

그럼 밥 먹고 옷 입어야지.

그는 많은 것을 이야기 한다. 그는 거기에서 벗어 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한다. 만약 그와 같이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대가 지루해 할 수 있겠는가? 누가 지루해 할 것인가? 나 또한 매일 아침 일어나 목욕을 하고, 먹고, 입고, 그대가 하는 모든 행위를 한다. 그러나 나는 지루하지 않다. 나는 그것을 영원히 끝까지 계속할 수 있다. 왜 나는 지루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내가 거기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지루하게 느낄 것인가? 그리고 만약 그대가 거기에 없다면 누가 그것이 지루한 되풀이라고 말할 것인가? 매일 아침이 새롭다. 이는 과거의 되풀이가 아니다. 매일 아침 식사가 새롭다. 마치 아침 풀잎의 이슬방울같이 모든 순간이 새롭고 신선하다. 그것은 그대의 기억 때문이다. 과거로부터 수집하고, 과거를 지니고 와서는 항상 그 신선한 순간들을 먼지 쌓인 과거를 통하여 본다. 그래서 그대는 지루하게 느끼는 것이다.

선사는 순간 속에서 산다. 그리고 다른 순간들을 이 순간과 비교하기 위하여 가져오지 않는다. 과거를 지니고 있는 자가 없다. 그리고 또한 미래를 생각하는 자도 없다. 거기에는 오직 삶의 진행만이 있을 뿐이다. 순간에서 순간으로 흐르는 의식의 강물이 있을 뿐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도 항상 모르는 미지의 것이 된다. 익히 잘 알고 있는 것도 항상 낯선 것이 된다. 그렇다면 누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걱정하겠는가? 아무도 없다.

그대는 항상 그대의 과거를 가져 온다. 그대가 언제나 그것을 가져와 비교하고 비판하고 비난한다. 만약 내가 그대에게 꽃 한 송이를 보여 주면 그대는 그것을 직접 보지 않는다. 그대는 말한다. 그렇다 이것은 아름다운 장미이다. 그것을 장미라고 부를 필요가 무엇인가? 그대가 그것을 장미라고 부르는 순간, 그대가 과거에 알고 있던 모든 장미들이 그 안에 들어온다. 그대는 그것을 다른 꽃들과 비교한다. 그대는 그것을 동일시하고 분류한다. 그대가 그것을 장미라고 부르는 순간 그대가 그것을 아름답다고 하는 순간 모든 미(美)에 대한 그대의 모든 개념과, 장미들에 대한 모든 기억, 상상력 등이 그 안에 들어온다. 그 장미는 군중 속에서 잃어버렸다. 이 장미도 군중 속에서 잃어 버렸다. 그리하여 그대는 지루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장미와 같게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 차이점은 무엇인가? 만약 그대가 이 현상을 직접 볼 수 있다면, 이 장미를 직접 볼 수 있다면, 신선한 눈으로 텅 빈 과거 속에서, 깨끗한 의식 속에서 흐리지 않은 지각으로, 열린 문으로, 언어가 존재하지 않고 직접 볼 수 있다면, 만약 그대가 여기에 있을 수 있다면, 이 꽃과 잠시 동안 있을 수 있다면, 그렇다면 그대는 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오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