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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바로크 거장 안 부럽다…조선 승려가 새긴 황금빛 극락의 황홀경

황령산산지기 2022. 2. 27. 17:26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의 승려 장인’전

경북 예천군 용문사 대장전에 전해지는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국가지정보물).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초까지 활동한 거장 단응을 비롯한

조각승 9명이 일일이 나무판을 깎고 다듬어

불화 같은 도상을 구현한 목각탱 작품이다.

 

17세기 유럽 로마에 조각 거장 베르니니가 있었다면

당대 조선에는 단응이 있었다.

그 시대 로마의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과

경상도 예천의 고찰 용문사는

세계 조각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걸작들이 등장한 무대가 됐다.

 

당대 최고의 바로크 거장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1598~1680)는 대리석을 떡 주무르듯 했다.

천사의 화살을 맞고 종교적 황홀경에 빠진 성녀의 자태를 빚어낸 <성 테레사의 환희>는

1652년 완성된 뒤 유럽 왕공귀족의 눈길을 사로잡는 절대 명작에 등극한다.

 

32년이 지난 1684년 지구 반대편 조선의 산골 예천 용문사에서

단응을 비롯한 조각승 9명은 심혈을 기울여 일일이 나무판을 깎고 다듬어

불화 속 이상향의 세계를 입체적인 부조로 구현한

이른바 목각탱 장르의 걸작을 완성한다.

한가운데 아미타여래좌상을 팔대보살입상과 양대 불제자상,

사천왕상이 사방에서 둘러싼 서방극락정토의 정경을 입체그림처럼 빚어낸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국가지정보물)이다.

1622년 현진, 응원 등 조각승 13명이 만든 불상인 목조 비로자나여래 좌상(국가보물).

광해군의 비인 장렬(章烈)왕비가 발원해

자수사와 인수사에 모시기 위해 만든 불상 11구 가운데 하나다.

 

이런 비교가 낯설다고?

그렇지 않다. 단언할 수 있다.

불상과 불화를 결합시켜 만든 한국 조각사 최고의 명작이

337년 만에 처음 절 산문 밖으로 나와 관객의 눈길을 압도한다.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한구석에서 펼쳐지는 풍경이다.

미술사의 소외지대였던 조선 후기 불교미술의 대가인 승려 화가·조각가들과

그들이 수행과 작업을 일치시키며 공동체 정신으로 창작한 명작들을 재조명해 복권시킨

특별전 ‘조선의 승려 장인’(다음달 6일까지)은

경이적인 작품들의 성찬에 다름 아니다.

 

국내외 27개 기관의 협조를 받아 국보 2건, 보물 13건, 시도유형문화재 5건 등

총 145건을 출품한 역대 최대 규모의 조선시대 불교미술전은 시종 감동과 전율을 일으킨다.

1부 ‘승려 장인은 누구인가’의 첫 부분부터 예사롭지 않다.

1679년 울산의 승려 연희가 <금강경> 내용을 풀어서 그린 변상도와

1768년 화승 화련이 그린 쌍봉사 고승 33명의 백묘 화본은 국보도 보물도 아니다.

지방문화재를 발굴해 부각시키니 새로운 감각과 느낌이 배어나고

숨은 명장들의 화력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이어 나타나는 1부 전시장의 불상들 행렬이 놀라움을 안겨준다.

광해군의 비인 장렬(章烈)왕비가 발원해 자수사와 인수사에 모시기 위해 만든 불상 11구 가운데 하나인

목조 비로자나여래 좌상이 우뚝하다.

1622년 현진, 응원 등 조각승 13명이 만들었다.

근엄하면서도 깊은 고뇌가 응축된 상의 표정은 매혹적이다.

조선 후기 불상은 찐빵이나 떡 덩어리 같고 표정이 조잡하다는 식의 선입관이

비뚤어진 인식이었음을 웅변한다.

전시장 2부 ‘불상과 불화를 만든 공간’의 들머리에 펼쳐진

‘어느 조각승의 스튜디오’ 재현 공간.

대패, 자귀, 도끼, 망치 등 작업도구와 제작 중인 불상 등을 볼 수 있다.

 

2부 ‘불상과 불화를 만든 공간’은 창의적 기획력이 빛나는 공간이다.

‘화승의 스튜디오’ ‘조각승의 스튜디오’와 ‘불석’ ‘불복장’ 등

당시 불화·불교조각 제작 때 장인들이 누비고 활약했던 공간과 성상을 낳는 과정에서 필요한

각종 장엄 요소들을 재현하거나 실물로 재구성했다.

이런 장인의 공간을 보여주는 시도는 이전에 찾아볼 수 없었던 것으로,

기획진의 고심 어린 아이디어가 실현된 공간이다.

 

전시의 클라이맥스이자 고갱이인 3부 공간에서

드디어 마곡사 불상과 가장 아름답고 뜻깊은 이번 전시의 대표작인 예천 용문사 목각탱을 만나게 된다.

이 황금빛 목각탱의 존재감은 참으로 대단하다.

아미타여래불이 주재하는 서방 극락정토의 금빛 찬란한 세계는,

천사의 창에 가슴을 찔려 정신적 법열을 누리는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가 보았던

황홀경의 세계를 재현한 베르니니의 작품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사실성과 추상성이 결합된 목각탱은

중국과 일본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조선 불교예술의 위대한 정화다.

부조는 입체적인 환조보다 얼핏 쉬워 보이지만,

입체적 그림을 구현하는 것은 전면적 입체상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난도가 높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조선의 승려 장인’전 말미에는 전통 불교미술과 현대미술이 어울린 설치작업이 기다린다.

이름을 모르는 장인들이 만든 조선시대 불상들과 젊은 현대 미술작가 빠키가 꾸린

오방색조의 설치조형물 공간 속에 배치돼 독특한 감흥을 안겨준다.

 

의겸·신겸·철유 등 18~20세기 화승의 불화 명작들에 이어

무명 승려 장인의 불상들과 어울린 현대작가 빠키의 설치작품,

노승의 원숙한 뒷모습을 담은 거장 김홍도의 <염불서승도>로 마무리되는 후반부까지,

전시는 치밀한 틀거지를 유지하면서 미감과 이야깃거리를 놓치지 않는다.

전시장 마지막을 수놓은 18세기 그림 거장 단원 김홍도의 말년기 걸작인 <염불서승도>.

주름이 자글거리는 구름에 휩싸여 연꽃대좌 위에 앉은 채 돌아앉은 노승의 뒷모습이다.

 

조선의 승려 장인전은 한국 미술사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17~19세기 조선 중후기 시기가 숭유억불 정책으로

조잡한 떡 덩어리 모양의 불상만 찍어낸 퇴행기였다는 오랜 편견을 깨뜨렸다.

조형적으로 특출할 뿐 아니라

다채로운 서사와 역사적 맥락을 품은 불상과 불화들이 적절하게 재구성되면서

이 시기가 전란 이후 사찰 재건 바람 속에 작품 제작이 전례 없이 활기를 띠었고

피폐해진 대중을 위로하고 교화하기 위해

승려 장인의 공공적 미술 작업이 다채롭게 감행된 르네상스기였음을 일러준다.

 

장벽 같던 ‘숭유억불’의 프레임을 깨뜨린 건

국립박물관 전시 사상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성과다.

정명희, 권강미, 허형욱, 강삼혜, 유수란 학예사로 이뤄진 티에프(TF)팀은

전시 준비부터 출판 기획까지 합심하며 한국 미술사에 새 이정표를 세웠다.

팬데믹으로 고립감 깊어진 관객들에겐

승려 장인들이 배려의 마음으로 협업해 일군 옛

공동체 미술의 면면들이 따듯한 위안으로 다가갈 법하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