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임나(任那)가 한반도 남부 땅인 가야伽倻 지역에 있었으므로 당시에 한반도 남부 지역을 식민 통치를 한 것이라고 엉뚱한 주장을 한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폐기된 학설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들이 쓴 논문이나 서책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폐기되기는커녕 더욱 공고한 학설로 자리 잡고 있다.
일제 식민사학자 3인방 가운데 한 사람인 쓰다 쏘우키치(津田左右吉)가 조선총독부를 통한 조선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날조한 것인데 현 강단사학계의 스승이라고 하는 이병도李丙燾박사는 아무런 검토 없이 덥석 받아들이면서 정설로 둔갑하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도 국사 교과서를 보면 고구려는 6대 태조왕(재위 53~146)부터, 백제는 13대 근초고왕(재위 346~375)부터, 신라는 17대 내물왕(재위 356~402)부터 진정한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 이전 역사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정사(正史)에 기록된 우리의 소중한 역사를 일제를 추종하는 식민사학자들의 손으로 싹둑 잘라 버린 것이다. 그들은 북쪽은 중국의 식민지였고, 남쪽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는 5000년의 역사가 아니라 기껏해야 1600년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임나일본부설은 약 4세기경에 한강이남을 임나(그들은 가야를 임나로 봄)에서 통치했다고 주장한다.
한심한 것은 우리나라 주류사학자 대부분이 일본의 주장에 동조하여 임나를 가야 지역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위 주류사학자들이 그렇게 주장을 하고 있으니 많은 학자, 언론인들도 덩달아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일본을 추종하는 식민사학자들의 말처럼 임나(任那, 대마도)가 과연 가야 지역에 있었을까?
임나가 또 나뉘어 삼가라三加羅가 되었는데, 이른바 가라라는 것은 중심이 되는 읍을 부르는 이름이다. 이때부터 삼한이 서로 다투어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화해하지 못하였다. 좌호가라가 신라에 속하고, 인위가라가 고구려에 속하고, 계지가라가 백제에 속한 것은 이 때문이다.
영락 10년에 삼가라가 모두 고구려에게 귀속되었다. 이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를 모두 임나에서 통제하여 열 나라로 나누어 다스리면서 연정이라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서 직접 관할하였으므로 열제의 명령 없이 마음대로 하지는 못하였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고구려국본기> 기록에는 대마도를 고구려, 백제, 신라가 삼등분하여 통치하였고 각기 인위가라仁位加羅, 계지가라雞知加羅, 좌호가라佐護加羅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 기록대로 대마도에 좌호, 인위, 계지 같은 지명을 사용한 흔적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놀랍게도 계지雞知, 인위仁位, 좌호佐護라는 지명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학교와 우체국 이름, 지도, 버스 표지판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현지인에 의하면 이런 지명이 사용된 것은 천 년도 넘었다는 것이다. 대마도에 계지, 인위, 좌호라는 지명이 있다는 것은 오직 『태백일사』에만 나온다. 다른 어떤 역사 기록물에도 나오지 않는다.
任那者(임나자)는 本在對馬島西北界(본재대마도서북계)하니 北阻海(북조해)하고 有治曰國尾城(유치왈국미성)이오 東西(동서)에 各有墟落(각유허락)하야 或貢或叛(혹공혹반)이러니 後(후)에 對馬二島(대마이도)가 遂爲任那所制故(수위임나소제고)로 自是(자시)로 任那(임나)는 乃對馬全稱也(내대마전칭야)라
自古(자고)로 仇州對馬(구주대마)는 乃三韓分治之地也(내삼한분치지지야)오 本非倭人世居地(본비왜인세거지)라. 任那(임나)가 又分爲三加羅(우분위삼가라)하니 所謂加羅者(소위가라자)는 首邑之稱也(수읍지칭야)라. 自是(자시)로 三汗(삼한)이 相爭(상쟁)하야 歲久不解(세구불해)하니 佐護加羅(좌호가라)는 屬新羅(속신라)하고 仁位加羅(인위가라)는 屬高句麗(속고구려)하고 雞知加羅(계지가라)는 屬百濟(속백제)가 是也(시야)라.
永樂十年(영락십년)에 三加羅(삼가라)가 盡歸我(진귀아)하니 自是(자시)로 海陸諸倭(해륙제왜)가 悉統於任那(실통어임나)하야 分治十國(분치십국)하니 號爲聯政(호위연정)이라. 然(연)이나 直轄於高句麗(직할어고구려)하야 非烈帝所命(비열제소명)이면 不得自專也(부득자전야)니라.” (『태백일사(太白逸史)』 ‘고구려국본기’)
http://v.media.daum.net/v/20170214070348549
[그때 그 뉴스] "대마도는 한국땅" 日고지도 발견
현재 일본 나가사키 현에 소속된 대마도(일본명 쓰시마). 그런데 대마도가 우리나라의 땅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내용의, 일본인이 작성한 고지도가 21년 전인 1996년 발견됐습니다. 이 지도는 임
news.v.daum.net
대마도는 한국땅 日고지도 발견
“임나任那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에 위치하여 북쪽은 바다에 막혀 있다. 다스리는 곳을 국미성이라 했다. 뒤에 대마도 두 섬이 마침내 임나의 통제를 받게 되어 이때부터 임나는 대마도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옛날부터 규슈와 대마도는 삼한이 나누어 다스린 땅으로, 본래 왜인들이 대대로 살던 곳이 아니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은 고구려 제19대(374~412) 왕으로 재위기간 동안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을 크게 확장시켰고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써서 중국과 대등한 입장을 보였다. 본명은 담덕(談德).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고도 하며 제18대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아들이다.
386년(고국양왕 3)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391년 즉위했다. 396년에 광개토왕은 직접 수군(水軍)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해 백제의 아신왕(阿莘王)에게 항복을 받고 많은 전리품과 백제왕의 동생과 대신 10명을 인질로 잡아오는 큰 전과를 올렸다.
서쪽으로도 진출하여 랴오둥(遼東)지방을 놓고 후연과 싸웠다. 404년에도 후연을 공격하여 요동성을 비롯한 랴오허 동쪽지역을 차지했다. 이는 전국시대 연(燕)에게 잃었던 고조선의 땅이 700여 년 만에 고구려에 의해 회복된 것이었다. 이밖에도 392년에는 북으로 거란(契丹)을 정벌하여 남녀 500명을 사로잡고 거란에 잡혀있던 고구려인 1만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재위기간중에 64성과 1,400촌락을 정복했으며,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확장시켜 서로는 랴오허, 북으로는 개원(開原)~영안(寧安), 동으로는 훈춘(琿春), 남으로는 임진강 유역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중국과의 뼈저린 투쟁의 목표이던 랴오둥을 완전히 차지하고 또 동북의 숙신을 복속시켜 만주대륙의 주인공이 되었다.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중국과 일본 등지에는 호태왕(好太王)으로 알려져 있다.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비(碑)
414년 아들인 장수왕 2년에 아버지 광개토왕의 훈적(勳績)을 기리고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를 명기해두기 위해 세운 비이다.
414년에 지금의 중국 압록강 북안(北岸)인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광개토왕비를 건립하였다.
높이가 6.39m에 이르고 무게가 37톤으로 추정되며 비신에는 총 1,775자의 비문이 음각되어 있다. 고구려 패망 후 땅 속에 묻혀 있다가 1880년 압록강변의 한 농민에 의해 발견돼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임나일본부설의 근거 가운데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이다.
일본 서기 신공황후 49년조를 보면 신공 황후가 보낸 왜군이 한반도에 건너가 7국과 4읍을 점령하고 임나에 일본부(日本府)를 설치하였는데 562년에 임나는 신라에 의해 멸망되었다는 기사가 있다. 그런데 일본은 광개토 대왕릉비에 새겨진 비문의 내용을 토대로 '임나일본부'가 실제로 있었다고 억지 주장하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물이 된 비문의 내용은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 * * 羅以爲臣民"이다. 일본은 이구절을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백제)를 격파하고 신라,* *을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을 하는데 신묘년이면 391년으로 영락 6년에 해당한다. 일본이 해석한 내용은 일본이 임나일본부를 두고 가야와 신라, 백제를 다스렸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일본 역사에서 '일본'이라는 이름은 7세기후반에 들어서야 처음 나타나는데 비문은 391년에 새겨졌기 때문에 이때는 일본이라는 이름이 나타나기전이므로, <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일본부와는 시기적으로 전혀 상관이 없는것이다.
비를 세운 장수왕이 아버지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비에 광개토왕의 영토확장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뜬금없이 왜가 백제와 신라를 정복했다는 내용을 적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일본이 임나일본부를 지속하게 주장하는이유는 바로 '일본의 일제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함이고 한국은 과거 일본의 지배가 있었으니 식민지가 되는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하기 위함이다. 이는 1300년 전에 태어난 일본이라는 나라가 1600년 전의 기록을 왜곡한 것으로 겨우 해적처럼, 넘나들며 마을을 불태우고 부녀자들과 재물을 약탈했던 왜구가 신라와 백제를 격파하고 가락국에 임나일본부를 두어 통치했다는 억지를 쓴다.
일본참모본부에 의해 광개토태왕 비문의 주요 글자가 변조되었다고 드러났다.
즉 참모본부의 요원 사코가게노부(酒勾景信)가 1883년 일본의 대륙침략에 유리하도록 비문의 글자를 고쳐서 탁본을 만들었으며, 이어 1900년경에는 사카와의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참모본부가 석회를 발라 비자를 변조했고, 그 후 또다시 참모본부가 잘못 새긴 곳에 3차 가공을 했다는 것이다.
1884년 일본군 육군대위로 하여금 비문의 글자를 조작한 일명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라는 허위탁본을 떠가지고 귀국토록 한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일본육군 참모본부가 1889년 회여록(會餘綠) 제5집에 요코미다다나오(模井忠直)의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를 통해 발표함으로써 일본의 역사왜곡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육군대위 사코가게노부가 탁본하여 왔다는 내용을 해석하면 “왜가 신묘년(AD391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伽倻), 신라 등을 격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하여 당시 왜가 한반도 남부지역을 지배하였다는 결정적 증거가 광개토대왕비에 있다는 주장이다. 참으로 요절복통을 할일이 아닌가. 이것은 한마디로 일본의 조직적인 비문조작의 극치가 만들어낸 하나의 ‘쇼’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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