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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하고 차분한 것의 귀함을 알아채는 이는 많지 않다

황령산산지기 2021. 9. 11. 11:30

가을과 국화


사군자 중 하나 국화 문인화의 소재
매·죽·난보다 상대적으로 덜 그려져
풍산 홍씨 4형제 국접도 눈길 끌어
발문·화제·그림 서로 힘 모아 완성
나비는 떠나지 못하고 여치는 감탄
열일곱 소년의 가을날 서정 보는듯
신명연의 화조화 감각적 채색 매료
세련된 느낌에 수첩 등 굿즈로 인기
사군자 그릴 땐 서예의 필묵미 추구

‘국접도’의 대칭적 구도는 당시 유행과는 다르다.

홍씨 형제들이 예스러운 구도를 택해 문인다움을 드러내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가을 냄새와 늦가을의 국화

 

정말 신기하게도 입추가 지나면 여름이 지고, 처서가 지나면 가을이 익는다. 한낮은 여전히 뜨겁지만, 아침과 저녁에는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중 가을 냄새를 싣고 오는 바람은 아침의 바람이다. 이른 시간에 나갈 채비를 하고 현관문을 열면 코끝에 차가운 향이 돈다. 계절이 또 바뀐다는 것을 실감하며 이맘때 분위기를 담은 노래를 듣는다.

 

그러다 보면 맘껏 즐기지 못한 여름을 보내는 아쉬움이 덜어진다. 가을 역시 좋은 계절이니 반가운 마음으로 맞아주자는 다짐을 하게 된다. 가을에만 경험할 수 있는 기쁨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구름 한 점 없는 높고 푸른 하늘, 사군자 중 하나인 국화 그림 감상 등이다.

 

국화는 사군자로 매화, 난초, 대나무와 함께 고결함을 상징하는 문인화의 소재다. 그것의 문학적 전통은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이자 시인이었던 굴원의 시에서부터 볼 수 있다. 조정에서 밀려난 그는 ‘저녁에는 가을 국화 떨어지는 꽃잎을 먹는다’는 표현을 썼다. 국화는 은거 생활하는 동안 그의 허기진 마음을 채워주는 꽃이었다.

도연명 역시 국화를 캐고 산을 바라보는 모습을 써 초야에 은거하는 삶을 보여줬다. 세상에 나아가지 못할지언정 국화를 볼 수 있음은 큰 위로가 된 듯하다. 국화는 가을이 모두 지날 무렵, 떨어진 낙엽 사이에서 혼자 피어난다. 이렇게 첫 추위를 견디고 굵은 줄기의 끝에 소담히 자리 잡는다.

필묵미를 느낄 수 있는 신명연의 ‘국죽도’. 능수능란한 먹과 붓의 사용을 통해 사군자를 그려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풍산홍씨 네 형제가 그린 ‘국화와 나비’

 

중국에서 시작한 사군자는 고려를 거쳐 조선에서도 그려졌다. 도화서는 물론이고 그 밖 문인들 사이에서도 지속해 다뤘다. 조선 중기에 들어서는 사군자를 그리는 조선의 독자적 양식적 전통이 세워지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는 서화 일치의 정신을 구현하는 사군자화가 자주 그려지는 모습이 보였다.

 

조선 시대 전반을 거쳐서 눈에 띄는 점은 국화가 매, 죽, 난보다 덜 그려졌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들여다볼 법한 국화가 등장하는 아름다운 우리의 서화가 있다. 풍산홍씨 네 형제가 조선 후기에 그린 ‘국접도(菊蝶圖)’(1751)도 그중 하나다.

 

풍산홍씨 네 형제는 홍상한의 아들 홍낙성(1718~1798), 홍낙명(1722~1784), 홍낙삼(1734~1753), 홍낙최(1735~1757)다. 홍상한은 대대로 높은 벼슬에 오른 가문 출신으로 예조판서와 판의금부사를 역임했다. 첫째 낙성과 둘째 낙명 역시 아버지를 이어 과거에 급제하였고 벼슬에 올라 나랏일을 하였다.

 

셋째 낙삼과 넷째 낙최는 모두 스무 살 무렵에 일찍 세상을 떠나 기록이 많지 않다. 네 형제는 우애가 각별했던 것으로 추측하는데 ‘국접도’가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제목 그대로 국화와 나비가 등장하는 이 서화를 형제들은 힘을 모아 함께 완성했다. 화면 상단 좌측의 발문은 낙성이 쓰고, 우측의 화제는 낙명이 짓고, 낙삼이 썼다. 전면에 모습을 보이는 그림은 낙최가 그렸다.

 

낙최가 그린 국화와 나비가 있는 장면은 화면 가운데 있다. 국화는 거기서도 중심에 뿌리를 내려 두 개의 줄기를 하늘 방향으로 키워낸다. 각각의 줄기에서 잎은 어긋나며 깃꼴로 갈라져 자라난다. 그 줄기의 끝에는 수십 장의 꽃잎이 겹친 꽃이 있는데 선과 색의 표현이 섬세하고 곱다.

 

나비는 국화의 왼쪽 하늘에서 내려보고 여치는 오른쪽 땅에서 올려본다. 국화의 아름다움에 나비는 떠나지 못하고 여치는 감탄한 것 같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낙최는 열일곱 살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소년이 느꼈을 가을날의 서정이 그림에서 보이는 듯하다.

 

낙삼이 해서로 써 내려간 화제는 앞서 언급한 국화의 문학적 전통을 보여준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해제에 의하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화를) 먹은 것은 굴원(屈原, 기원전 340?~278?)이 아니었던가.

(국화를) 캔 것은 도잠(陶潛, 365~427)이 아니었던가.

나는 이들이 국화와 만난 것을 기뻐하나, 또 이들이 때를 만나지 못했음을 슬퍼하노라.

그렇다 하더라도, 이들이 가령 때를 만났더라면 또 어찌 국화를 만날 수 있었겠는가.

그림을 그린 이는 어쩌면 국화를 캐고 맛보고 싶어 하는 것일까?

아니면 장차 때를 만나 국화를 만날 수 없게 될 것인가?”

 

화제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세속의 음악은 귀를 즐겁게 하나, 진정 큰 음악[大音]은 끊어지고 만다.

갖가지 고기는 입을 즐겁게 하나, 채소 뿌리 나물은 멀리하게 된다.

소리는 귀를 즐겁게 하고, 맛은 입을 즐겁게 하며, 그림은 눈을 즐겁게 한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오얏꽃과 복사꽃은 그릴 만하나, 국화는 그리기 어려우니, 안타깝구나!”

 

화려하고 소란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기는 쉽지만, 수수하고 차분한 것의 귀함을 알아채는 일은 오히려 어렵다는 의미다. 화사한 봄과 여름을 지나온 가을의 아름다움을 알아채는 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신명연은 사군자 중 매화를 즐겨 그리기도 했다. 구륵법과 몰골법을 함께 사용한 ‘홍백매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신명연의 깊이가 담긴 ‘국화와 대나무’

 

신명연(1808~1886)은 조선 후기에 태어나 말기에 주로 활동했다. 관직에 있었지만 그림도 꾸준히 평생을 그렸다. 그의 아버지는 문신이자 서화가로 이름을 날린 신위다. 시서화(詩書畵)의 삼절로 알려진 아버지로부터 그것들을 직접 전수받았다. 신위는 서장관으로 청에 다녀오며 옹방강 등 청의 학자, 문인 등과 시와 그림을 주고받으며 교류했다. 덕분에 집에는 중국 화가의 작품이 있었고 자연스럽게 청대 화풍을 수용했다.

 

신명연은 화훼화, 산수화, 사군자 등 다양한 주제의 그림을 그렸다. 그중에서도 화훼화를 많이 그린 작가로 장습업과 함께 손꼽힌다. 그는 화조화를 그릴 때 참신한 구도와 세밀한 묘사를 시도했다. 동시에 그사이를 채운 감각적인 채색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매료시켰다. 신명연의 채색은 대상의 촉감마저 느끼게 할 정도로 남다르다.

 

그가 그린 화조화의 아름다움은 현재에도 널리 알려졌다. 지금 보아도 그의 작품이 세련되었다는 느낌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굿즈로 인기 있는 국립박물관에서 그의 화조화로 수첩, 연필 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민화를 배울 때 가장 자주 모사의 대상으로 삼는 그림도 신명연의 것이다.

 

신명연은 반면 사군자를 그릴 때는 서예의 필묵미(筆墨美)를 추구하였다. 먹의 농담을 통해 형태와 기운의 변화를 담아냈다. 하나의 화면 안에서 구륵법(鉤勒法)과 몰골법(沒骨法)을 함께 활용하기도 했다. 구륵법은 윤곽을 먼저 긋고 그 안을 칠하고, 몰골법은 윤곽선 없이 수묵으로 형태를 그리는 방법이다.

 

‘국죽도(菊竹圖)’는 신명연이 수묵으로 국화가 있는 장면을 그린 서화다. 그의 화훼화에서 빛을 내는 색채감각이 보이지는 않는다. 대신 그가 사군자를 통해 추구한 단아한 문인의 취향이 전해진다. 질리지 않아 오래 볼 수 있어 긴 시간 지속하는 국화의 향과 닮았다.

 

 

김한들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