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죽음의 시간이 나를 지나치지 않도록

황령산산지기 2021. 6. 27. 04:29

나는 언제 최후를 맞이하게 될까? 지금 이대로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을 것이다. 언젠가 죽음의 침상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니 죽는 줄도 모르고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하여 말하기 꺼려 한다. 애써 피하는 경향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감에도 남의 일인 것처럼 여긴다. 죽음이 은폐된 영향도 있을 것이다.

 

장례식장에 가도 죽음을 볼 수 없다. 직계 가족이 아닌 한 죽은 자의 모습을 볼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죽음은 저 건너 저 멀리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지금 이 모습 이대로 천년만년 갈 것처럼 보인다.

 

무병장수를 꿈꾸어 보지만

 

유튜브에서 죽음에 대한 프로를 보았다. 불교TV(BTN)에서 지혜의 다락방을 본 것이다. 한림대 김현아 선생이 강연한 평균수념 100세 시대, 죽음을 어떻게 바라볼 곳인가?’에 대한 것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내용이 있다. 무병장수에 대한 꿈을 말한다. 흔히 구구팔팔이삼사라고 말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긴 병치레를 하다가 서서히 죽어간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하나의 그래프를 보여주었다.

 

 

그래프를 보면 늙어서 병들어 죽는 것은 숙명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생활가능에서 독립생활불가로 진행되고, 이어서 준와상, 완전와상을 거쳐 사망단계에 이른다. 문제는 커다란 사고가 있는 경우 더 빨리 진행된다는 것이다.

 

삶의 과정은 평탄하지 않다. 언제 어떻게 사고가 날지 모른다. 가장 두려운 것은 중풍이나 자동차 사고 같은 것이다. 사고가 나면 거의 죽음 직전까지 이른다. 회복되더라도 옛날로 돌아가기 힘들다.

 

나이 들어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낙상을 들고 있다. 넘어져서 골반이 깨지는 것을 말한다. 골반에 금이 가면 독립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다. 완전와상 상태가 되어서 평생 누워 지내야 한다. 대소변도 볼 수 없어서 누군가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런 상태로 얼마나 갈 수 있을까?

 

무병장수의 꿈은 요원한 일이다. 지금은 자신의 힘으로 생활가능한 신체일지 모르지만 삶의 과정에서 낙상, 독감, 사별 등으로 인하여 파란이 일어날 때 골이 깊게 패이는 것과 같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서서히 사그라져 간다. 독립생활불가단계를 거쳐서 준와상으로, 준와상에서 와상으로 진행되었을 때 요양원에 가지 않을 수 없다.

 

독립 생활이 불가할 때 남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준와상이 되었을 때 요양원에 가야 할 것이다. 완전와상이 되었을 때는 요양원에 있게 된다. 밥도 떠 먹을 힘도 없게 되었을 때 죽음은 얼마남지 않는다. 지금 팔팔한 사람도 최후에는 요양원에 있게 된다.

 

사람의 일생은 요양원에서 마무리된다. 이런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먼 훗날 일처럼 여긴다. 오늘 사고가 나서 완전와상이 된다면 죽음은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이다. 이런 때 어떤 마음 가짐을 가져야 할까? 초기경전에서 지혜를 찾을 수 있다.

 

죽음의 시간이 나를 지나치지 않도록

 

존자 싸밋디는 어두운 새벽에 일어나 온천으로 갔다. 하늘사람(天神)이 나타나 공중에서 시로서 수행승이여, 그대는 향락없이 걸식하네, 향락을 누리고 나서 걸식하지 않네. 수행승이여, 시절이 그대를 지나치지 않도록 향락을 누리고 걸식하십시오.”(S1.20)라고 말했다.

 

천신은 수행승을 유혹하기 위해 온 것이다. 숲속 지상의 요정이 수행승에 반해서 천신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잘생기고 젊은 수행승이 열심히 수행하는 모습을 보고서 마음을 흔들어 놓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시절이 그대를 지나치지 않도록 향락을 누리고 걸식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천신은 시절이 지나치지 않도록 하라고 말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젊었을 때는 즐기는 삶을 살아야 함을 말한다. 욕망대로 살다가 수행은 나이 들어 수행을 해도 늦지 않음을 말한다. 그러나 현명한 부처님 제자는 천신의 의도를 눈치 챘다. 이렇게 게송으로 말했다.

 

 

그대가 말하는 시절을 나는 모르네.

그 시간은 감춰져 있고 볼 수도 없으니,

시절이 나를 지나치지 않도록

나는 향락없이 걸식하며 사네.”(S1.20)

 

 

게송에는 두 개의 시절이 있다. 하나는 천신이 말하는 시절이고, 또 하나는 싸밋디존자가 말하는 시절이다. 여기서 시절은 빠알리어 깔라(kalā)를 번역한 말이다. 전자는 청춘의 시절(yobbanakalā)’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고, 후자는 죽음의 시간(maraakalā)’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이다.

 

천신과 수행자는 깔라에 대하여 서로 다른 이야기를 했다. 천신은 젊은 시절 감각적 쾌락을 마음껏 즐길 것을 말했다. 수행승은 죽음의 시간이 지나치지 않도록 수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시라도 젊었을 때 출가하는 이유는

 

최근 유튜브에서 담마끼띠 스님의 강의를 들었다. 한국명상원 채널에서 강의한 싸밋디의 경을 잠결에 비몽사몽간에 들은 것이다. 분명히 죽음이 시절이 나를 지나치지 않도록이라는 구절에 대하여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싸밋디의 경에 대한 글을 여러 차례 썼다. 그때 마다 죽음과 관련하여 해석했다. 젊은 나이에 출가한 것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출가하는 것이라고 쓴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수명이 보장되어 있지 않음을 말한다.

 

천신은 젊었을 때는 즐기며 살라고 했다. 이는 악마의 달콤한 속삭임과도 같다. 유사한 내용이 많은 수행승들의 경’(S4.21)에도 있다. 악마가 나이 든 브라만 사제로 변신하여 젊은 수행승을 유혹하는 장면이다.

 

악마의 유혹에 젊은 수행승은 넘어가지 않았다. 수행승은 성직자여, 우리들은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S4.21)라고 말했다. 여기서도 시간이 나온다. 어떤 시간을 말하는 것일까?

 

젊었을 때는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삶을 살기 쉽다. 젊은 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최대한 즐기는 삶을 살고자 할 것이다. 그래서 악마는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S4.21)라고 말한다. 이 말은 요정이 천신으로 변신하여 시절이 그대를 지나치지 않도록 향락을 누리고 걸식하십시오.”(S1.20)라고 말한 것과 같다.

 

청춘의 시절은 한번 지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세상사람들은 청춘의 시절을 즐기고자 한다. 그러나 수행승들은 정반대로 청춘시절에 출가하여 걸식하며 살아간다. 이처럼 정반대로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반사람과 수행승은 시간관 또는 시절관이 다르다. 일반사람들은 시간이라는 것이 초년부터 시작하여 중년, 노년에 이르기까지 일직선선상으로 펼쳐져 있는 것으로 본다. 기대수명이 백세라면 나도 백세까지 사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승 또는 수행자의 시간관은 다르다.

 

수행자는 시간 또는 시절이라는 것이 우리의 삶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죽음이 언제 닥칠지 알 수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S4.21)라고 말하거나, “시절이 나를 지나치지 않도록 나는 향락없이 걸식하며 사네.”(S1.20)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시간 은 죽음의 시간(maraakalā)’이 된다. 한시라도 젊었을 때 출가하는 이유가 된다.

 

한호흡기에도 죽음의 명상을

 

사무실 창밖에 요양원이 하나 보인다. 언제 부터인가 생긴 것이다. 거리에 요양원이 하나 둘 생겨나고 있다. 이제 어디를 보아도 요양원 하나 정도는 쉽게 볼 수 있다. 부자가 아닌 한 요양원에서 최후를 보내게 될 것이다. 나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요양원에 들어가는 날은 먼 훗날이 아니다. 언제 들어갈지 알 수 없다. 사고가 나서 독립생활이 불가할 때 남의 도움을 받게 된다. 죽음이 머지 않은 것이다. 준와상이 되면 죽음은 더욱 더 가까이 있게 된다. 완전와상이 되면 요양원에서 최후를 맞아야 할 것이다.

 

독립적 생활이 가능할 때 무엇을 해야 할까? 수행을 해야 한다. 좀 더 힘 있을 때 도와 과를 이루어야 한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삶이라면 한가롭게 있을 수 없다.

 

하루를 일생처럼 살아야 한다. 그래서 내가 하루 밤낮 동안만을 살더라도 세존의 가르침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A6.19)라며 죽음에 대한 새김(maraasati)’을 닦아야 한다고 했다. 아니 내가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동안만 살더라도 세존의 가르침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A6.19)라고 하여 한호흡기에도 죽음의 명상을 하라고 했다.

 

이런 날이 올 줄 왜 몰랐을까?

 

지금 건강하다고 하여 지금 젊다고 하여 즐기기만 하는 삶을 살면 어떻게 될까? 반와상 또는 완전와상이 되어 요양원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후회가 될 것이다.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젊어서 청정한 삶을 살지 않고

재산도 모으지 못했으니,

고기 없는 연못에 사는

백로처럼, 죽어간다.”(Dhp.155)

 

젊어서 청정한 삶을 살지 않고

재산도 모으지 못했으니,

쏘아져 버려진 화살처럼,

누워서 옛날을 애도한다.”(Dhp.156)

 

 

젊어서 청정한 삶을 살지 않은 것은 젊어서 즐기기만 하며 산 사람을 말한다. 마치 고기 없는 연못에 날개 부러진 왜가리와 같은 신세가 되는 것이다. 또한 쏘아져 버려진 화살과 같은 신세가 된다. 이런 날이 올 줄 왜 몰랐을까?

 

머리에 불이 붙은 듯 살아야 하리

 

젊은 시절 수행의 길을 간 사람들은 최후의 시간을 충분히 예견했을 것이다. 그날이 먼 훗날이 아니라 오늘이 그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가만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죽음의 시간이 나를 지나치지 않도록 하루를 일생처럼 살아야 한다. 아니 하루가 아니라 한호홉기를 일생처럼 살아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옷이 불붙고, 머리가 불붙었는데, 그 옷이나 머리에 불을 끄기 위해 극도로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고 정진하고 정근하고 불퇴전하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려야 하듯,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그 수행승은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를 버리기 위하여 극도로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고 정진하고 정근하고 불퇴전하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려야 한다.”(A6.20)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의 목숨은 짧다.

훌륭한 사람이라면 그 목숨을 경시하라.

머리에 불이 붙은 듯 살아야 하리.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피할 수 없다.(S4.9)

 

 

2021-0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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