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지금 집밖으로 나가면

황령산산지기 2020. 11. 1. 10:54

오늘 하루는 어떻게 전개될까? 지나고 나면 흔적이 남는다. 삶의 족적을 남기며 앞으로 나아 간다.

가기 싫어도 등 떠밀리듯이 가는 것이다. 목적지는 있는 것일까?

 

여행에는 목적지가 있다. 여행을 하면 돌아갈 집도 있다.

목적지도 없고 돌아갈 집도 없다면 이런 여행을 무어라 해야 할까? 아마 걸인이나 노숙자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걸인이라 해도 같은 걸인이 아닌 사람도 있다.

목적지가 있고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이라면 수행자라 해야 할 것이다.

 

삶의 목적이 없다면, 삶의 방향이 없다면 하루하루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사는데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허무주의자가 될 것이다.

뒤돌아보면 꿈과 같고 허망하게 느껴진다면 삶의 목적도 의미도 이유도 발견하지 못하는 삶이 된다.

더구나 삶의 재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될지 모른다.

 

삶의 의미를 즐기는 데서 발견한다면 극단주의자가 될 수 있다.

더 이상 즐기는 삶을 살 수 없을 때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즐기는 삶, 오욕락의 행복을 추구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허무주의자가 되기 쉽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병이 깊으면 깊어질수록 극단적 생각이 지배하게 된다.

 

오늘 하루가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다.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이 될 수 있다.

사람의 수명은 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오늘 최후의 날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욕된 삶은 아닌지 돌아보는 것이다.

설령 영광된 삶을 살았을지라도 오욕락을 즐기는 삶을 살았다면 허무한 것이다.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온다는 보장이 있을까? 어느 누구도 나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지나가다 낡은 간판이 떨어진다면 즉사할 수 있다.

차를 몰고 가다가 갑자기 나타난 차에 부딪쳐 죽을 수 있다. 안타까운 죽음이다.

하필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죽음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씨바까여, 이 세상에서 어떠한 느낌들은 우연한 피습에서 생겨납니다.

씨바까여, 이 세상에서 어떠한 느낌들은 우연한 피습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체험해야 합니다.

 

씨바까여, 세상에 어떠한 느낌들은 우연한 피습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세상의 진실로서 인정해야 합니다.

 

씨바까여,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들은

개인이 느끼는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모든 것은

과거의 원인에서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여깁니다.

 

그러나 스스로 체험적으로 알았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고

세상의 진실로서 인정되었다는 것도 너무 지나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 수행자나 성직자들은 잘못된 것이라고 나는 말합니다.”(S36.21)

 

 

상윳따니까야 몰리야 씨바까의 경에 나오는 부처님 가르침이다. 부처님도 우연을 인정했다.

반드시 원인과 결과에 따른 선형적 인과론만 적용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모든 것이 업보의 성숙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우연의 피습(Opakkamikāni)’으로 설명했다.

 

우연의 피습은 우연히 발생하는 사건을 말한다. 주석에 따르면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직접적인 원인에 따른 우연의 피습이 있다.

주석에서는 부처님이 돌조각에 우연이 발을 다친 것을 예로 들고 있다.

데바닷따가 부처님을 살해할 목적으로 바위를 굴렸는데 그 때 돌조각 하나가 부처님에게 상처를 입힌 것이다.

 

또 하나는 간접적 원인에 따른 우연의 피습이 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굶주림이나 목마름, 중독, 물림, 불타고, 익사하고, 살해되는 것은

제때에 업보에 따라 죽지 못한 것으로 본다. (Milp.302)”라고 설명되어 있다.

 

살면서 예기치 못한 일을 종종 겪는다. 이를 모두 전생의 업보 탓으로 돌리면 숙명론자가 될 것이다.

자동차사고가 나도 전생 탓으로 돌린다면 사람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부처님은 숙명론을 부정했다.

업과 업의 과보에 따른 업의 법칙을 인정하지만 그 밖에도 수많은 요인이 얼키고 설켜서

나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말한다. 우연의 피습을 말한다.

 

우연의 피습 역시 인과에 따른 것이다. 하필이면 그때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사고가 난 것이다.

우연의 피습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 인과가 작동된 것이다. 우연적 사건도 인과의 야기에 따른 것이다.

원인과 조건이 맞아 떨어졌을 때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우연히 일어난 사건에 말려든다는 것은 억울한 일이다. 이를 네 탓이라고 볼 수 있을까?

아니면 내 탓으로 보아야 하나? 누구를 원망해야 할까? 신을 믿는 사람이라면 신의 탓이라고 말할 것이다.

명론자라면 액땜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연의 피습은 네 탓도 아니고 내 탓도 아니다.

신의 탓도 운명론적인 것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접촉에 따른 것이다.

접촉이 없었다면 괴로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다.

 

아난다여, 업보를 믿는 자로서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에게도 괴로움은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난다.”(S12.34)

 

 

부처님은 이교도들에게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고 했다. 괴로움이 내 탓이 아님을 말한다.

그렇다고 남 탓으로 돌려서는 안될 것이다. 신의 탓으로 돌려서도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업보를 믿는 자로서 괴로움은 남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해서는 안된다’(S21.34)고 했다.

 

부처님은 괴로움의 발생이 내 탓도 아니고 남 탓도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이교도들에게 벗들이여, 괴로움은 연유가 있어 생겨나는 것이다. 무엇을 연유로 해서 생겨나는가?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난다.”(S21.34)라고 말씀했다.

 

접촉을 하면 느낌이 발생한다.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말한다.

사고에 따른 괴로움이 발생했다면 이는 접촉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접촉이 없이 괴로움을 경험할 수 있는 그러한 여지는 없다.”(S21.34)라고 말씀했다.

 

우연한 피습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다. 네 탓도 아니고, 내 탓도 아니고, 누구의 탓도 아니고, 그 무엇의 탓도 아니다. 오로지 접촉에 따라 일어난 것이다. 일어날 만한 조건을 갖추어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우연한 피습에 대하여 괴로워하거나 슬퍼해서는 안된다.

 

불운에 괴로워하거나 슬퍼해서는 안된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에 대하여 괴로워 하지도 말고 슬퍼하지도 말아야 한다.

다만 사띠 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돌조각을 맞았을 때 사띠(正念)하고 삼빠자나(正知)하며 고통을 견디어 냈듯이.

 

지금 집 밖으로 나가면 죽을 수 있는 요인은 너무나 많다.

당장 차를 몰고 나가면 누가 들이 받을지 알 수 없다.

최대한 주의 기울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방어운전 하는 수밖에 없다.

 

사고는 순간에 일어난다. 순간적 사고는 속수무책이다. “어어하면서 당하는 것이다.

최대한 주의 기울어야 한다. 일종의 사띠라고 볼 수 있다.

늘 깨어 있으면 피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일어난다면 이를 우연의 피습 또는 우연한 피습이라고 보아야 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알면 삶의 목적이 확실하다. 돌아 갈 집도 있다.

해탈과 열반이라는 목적지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동안 수행공덕으로 인하여 선처에 태어날 수 있다.

살다가 우연한 피습을 당해도 안심인 것이다.

 

 

202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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