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 왜 괴로움일까?
그는 한숨만 푹푹 쉬고 있었다. 행군중에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기 때문이다. 신입사원 연수 받았을 때의 일이다.
유일하게 장가 간 사람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서 왜 한숨만 푹푹 쉬고 있었을까?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도 짜증날 때가 있다. 광고음악이다. 매번 똑같은 소리를 반복하는 것이 특징이다.
처음에는 호기심에 한두번 귀 기울여 보지만 자주 들으면 어서 지나 가기만을 기다린다.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서 한숨을 푹푹 쉬는 것도 괴로움이다.
고성제에서 말하는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괴로움(求不得苦)’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욕망에 대한 괴로움이다. 욕망이 괴로움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될 것이다.
요즘 유튜브 시대이다. 무얼 하나 보려 해도 광고를 보아야 한다. 불과 5초 밖에 되지 않는 광고시간에 귀가 거슬린다.
과장된 몸짓과 함께 자극적인 소리가 특징이다. 내버려 두면 귀가 괴롭다.
광고 그만보기 버튼을 눌러서 중단시켜야 한다. 귀를 자극하여 짜증을 유발하는 광고 소리는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고성제에서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怨憎會苦)’도 이에 해당 될 것이다.
구부득고와 원증회고, 이 두 가지 괴로움은 탐욕과 성냄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탐욕도 괴로움이고 성냄도 괴로움이 된다.
특히 욕심 부리는 것, 욕망하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사실이다.
매혹적인 대상을 보았을 때 시무룩해진다거나 한숨만 푹푹 쉬었을 때,
이는 갖지 못해서 그리고 얻지 못해서 괴로운 것이다.
대상이 즐거운 것이라면 즐거운 마음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시무룩 해졌을 때 이는 욕망이 개입한 것이다.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을 때 결코 즐거운 것이 아니다.
눈으로는 대상을 즐기지만 마음은 편치 않은 것이다.
욕망은 사람을 시무룩 하게 만들고 한숨만 푹푹 쉬게 만든다.
Rūpaṃ disvā sati muṭṭhā
piyanimittaṃ manasi karoto
Sārattacitto vedeti
tañca ajjhesāya tiṭṭhati.
“혼란된 새김으로 형상을 보면
매혹적인 인상에 마음이 쏠려
오염된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마침내 그것에 탐착하고 마네.” (S35.95)
매혹적 인상(piyanimitta)은 매혹적 대상을 말한다. 사랑스러운 것이다. 소유하고 싶은 것이다.
내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가능하지 않다. 마음만 있을 뿐 엄두가 나지 않는다.
생물이 아닌 것도 있다. 화상도 있고 동화상도 있고 사물도 있다.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다. 그럼에도 갖고자 한다.
동영상에서 본 아름다운 여인, 그림같은 집, 고급 승용차는 갖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갖고자 하는 마음뿐이다.
시무룩해지지 않을 수 없고 한숨만 푹푹 쉬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욕망도 괴로운 것이다.
매혹적 인상에 왜 마음이 쏠리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게송에서는 두 가지를 들고 있다.
하나는 사띠를 놓친 것이고, 또 하나는 오염된 마음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사띠는 수행에 대한 것이다. 명상주제를 놓쳤을 때 번뇌가 치고 들어올 것이다.
마음을 명상주제에 꽁꽁 묶어 놓는다면 탐욕이라는 번뇌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상이 강렬할 때 사띠의 밧줄이 끊어지기 쉽다.
자신도 모르게 대상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빠져나오지 못한다.
집착하면 할수록 괴로울 뿐임에도 인상(nimitta)에 마음이 가 있는 것이다.
마음이 탐착의 대상에 가 있는 한 괴롭다. 이는 마음이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탐욕으로 오염된 마음이 대상을 보았을 때 역시 오염된 마음이 일어난다. 그래서 탐욕이 탐욕을 부른다.
그런데 이런 탐착은 과거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과거에 경험한 것이다.
대상을 보았을 때 과거 경험한 것이 떠올라 결합된 것이다.
만일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다면 탐착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탐착은 다름아닌 망상(papañca)이다. 망상이 일어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벗들이여,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나고, 그 세 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 시각에 의해서 인식되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납니다.”(M16)
모든 것은 조건 발생이다. 망상(戱論)도 조건발생이다. 그것은 접촉으로부터 시작된다.
눈이 있어서 대상을 보았을 때 시각의식이 발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때 시각의식은 맨느낌이다.
아직 오염되지 않은 것이다. 이 느낌이 과거 경험했던 것과 결합했을 때 망상이 일어난다.
망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마음 속에만 있는 것이다.
대상과 접촉해서 과거 경험한 것이 떠 올랐다면 망상이 일어난다. 망상은 망상을 부른다.
허공에 망상의 집을 짓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다. 대상을 보자마자 알아차려야 한다.
욕망은 괴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욕망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쉽지 않다.
부처님 가르침에 답이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한다.
“시각으로 형상을 보더라도 그 인상에 집착하지 않고 그 연상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가 시각능력을 이렇게 제어하지 않으면, 그것을 원인으로 탐욕과 불만의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이 그를 공격할 것이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제어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시각능력을 보호하고 시각능력을 수호한다.”(S35.239)
직접경험한 것을 인상(nimitta)이라고 한다. 먼저 인상이 있고 그 다음에 연상(anubyañjana)이 있다.
예를 들어 먼저 여자가 보이고 나중에 눈이나 코가 보이는 식이다. 인상과 연상으로 인하여 망상이 생겨난다.
그런데 망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갖고자 한다. 직접 경험한 것은 이미 지나가 버렸음에도 망상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시무룩해지고 한숨만 푹푹 쉬지 않을 수 없다. 욕망도 괴로운 것이다.
여기 사과가 있다. 사과는 이전에 맛을 본 것이다. 사과를 보면 시큼한 맛의 경험이 있다.
그런데 사과 그림만 보아도 사과의 시큼한 맛이 떠 올려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지만 있을 뿐 실재하지 않는다. 있다면 시큼한 사과 맛에 대한 경험만 있을 뿐이다.
이때 알아차림이 없으면 망상이 된다.
미니멀라이프(minimal life)라는 말이 유행이다. 간소한 삶을 말한다. 이는 버리는 것부터 시작된다.
버려야 할 것이 반드시 물건만 해당되는 것일까? 망상도 버려야 할 것이다.
망상을 일으키게 하는 직접경험된 것도 버려야 한다. 버려야겠다는 마음도 버려야 한다.
궁극적으로 자기자신도 버려야 한다. 자기자신도 버렸는데 괴로움이 일어날 수 있을까?
버리고 또 버렸을 때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그것은 다름아닌 욕망으로부터 해방이다.
구할 수 없는 것을 갖고자 할 때 괴롭다. 이는 탐욕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각능력을 이렇게 제어하지 않으면, 그것을 원인으로
탐욕과 불만의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이 그를 공격할 것”(S35.239)이라고 했다.
매혹적인 대상은 즐거운 느낌을 준다. 요즘은 간접적으로 즐거움을 추구한다.
유튜브를 보면 온갖 눈요기할 수 있는 것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는다. 늘 새로운 것을 찾는다.
만족하지 않는 것이다. 만족하지 않아서 불만이다. 불만족은 괴로운 것이다.
유튜브를 보며 시간 보내지만 즐겁지 않다. 그러나 무엇보다 대상에 대한 집착이다.
매혹적 대상을 접하면 시무룩해지고 한숨이 나오고 긴장되는 것은 결코 즐거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눈으로 즐기지만 갖지 못해서 불만인 것이다. 불만족은 괴로운 것이다.
이는 탐착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욕망은 괴로운 것이 된다.
욕망을 내는 순간 괴로움이 뒤따른다. 구부득고이다.
고성제 팔고 중에서 아마도 구부득고가 가장 괴로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싫어 하는 것과 만남에 따른 괴로움과 비할 바가 아니다.
성냄도 괴로움이지만 더 큰 괴로움은 욕망에 따른 괴로움이다.
그래서 염오(nibbidā), 이욕(virāgā), 해탈(vimutti)이라 했을 것이다.
이욕해야 욕망의 세계(欲界)에서 탈출할 수 있다.
먼저 싫어 하는 마음을 내야 한다. 대상과 접했을 때 욕망이 일어났다면 괴로운 것 인줄 아는 것이다.
Yo sukhaṃ dukkhato adda,
dukkhamaddakkhi sallato;
Adukkhamasukhaṃ santaṃ,
addakkhi naṃ aniccato
Sa ve sammaddaso bhikkhu,
parijānāti vedanā;
So vedanā pariññāya,
diṭṭhe dhamme anāsavo;
Kāyassa bhedā dhammaṭṭho,
saṅkhyaṃ nopeti vedagū
“즐거움을 괴롭다고 보고
괴로움을 화살이라고 보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으면
그것을 무상하다고 보는 자.
그 수행승은 바른 관찰자로서
느낌을 완전히 이해한다.
가르침에 기초하여
모든 느낌을 완전히 알아
현세에 번뇌를 여의고 지혜에 정통한 자는
몸이 파괴된 후에 헤아려질 수 없네.”(S36.5)
202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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