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그대가 기름을 조금이라도 흘리면

황령산산지기 2020. 11. 8. 07:29

그대가 기름을 조금이라도 흘리면

 

 

수행처에서는 늘 알아차리라고 말한다. 이때 알아차림은 사띠와 동의어이다.

미얀마 수행처에서는 사야도가 늘 사띠하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사띠를 우리말로 간단하게 알아차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요즘 마음챙김이라는 말을 많이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사띠의 뜻을 정확하게 담지 못해서 비판받고 있다.

그래서 일묵스님은 기억이라고 말한다. 체험한 것을 기억하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다.

사띠가 수행이 아닌 일상용어로 사용된다면 이는 가르침에 대한 기억이 될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늘 기억하고 있는 것 자체가 사띠하는 것이기 때문으로 본다.

 

수행을 오래 했다고 해도 사띠의 뜻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은 드문 것 같다.

이럴 때는 초기경전을 열어 보아야 한다.

마침 상윳따니까야 사띠빳타나상윳따(S47)에서 좋은 예를 발견했다.

나라의 경(janapadasutta)’(S47.20)에 다음과 같은 몸관찰(身念處)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이보게 그대는 이 기름으로 가득 채운 그릇을 가지고

대중들과 나라의 최고의 미인 사이를 돌아 다녀야 한다.

 

또한 칼을 뽑아 든 한 남자가 그대의 뒤를 따를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기름을 조금이라도 흘리면, 그는 즉시 그대의 목을 벨 것이다.”(S47.20)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한다. 나라를 망하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녀들이 있는 곳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이 사람에 대하여 경에서는 삶을 원하고 죽음을 원하지 않고,

즐거움을 원하고 괴로움을 원하지 않는 자”(S47.20)라고 했다. 일반 범부중생을 말한다.

 

이런 자에게 기름이 가득 든 그릇을 들고 미녀들 사이를 걸으라고 했을 때 한눈 팔면 어떻게 될까?

기름이 바닥에 떨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즉시 그 사람의 목은 베어지게 될 것이다.

 

기름단지의 비유는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가득 찬 기름은 이 몸에 대한 새김을 두고 하는 말이다.”(S47.20)라고 했다.

몸관찰, 즉 신념처에 대한 것이다.

 

몸관찰은 어떤 것일까?

몸관찰의 정형구가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한다.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D22.2)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몸관찰의 핵심은 노력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ātāpī sampajāno satimā)”하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는 것(ātāpī)과 올바로 알아차리는 것(sampajāna)이 사띠(sati)임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사띠는 노력과 올바른 알아차림이다.

이것을 삼마사띠(sammāsati)라고 한다. 팔정도에서 정념(正念)에 대한 것이다.

 

삼마사띠는 아따삐와 삼빠자나의 결합이다.

올바른 사띠가 되려면 노력(ātāpī)’을 필요로 하고 동시에 바른 알아차림(sampajāna)’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노력은 정진을 말한다. 그렇다면 바른 알아차림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행동의 목적에 대한 올바른 알아차림, 수단의 적합성에 대한 알아차림,

활동반경에 대한 올바른 알아차림, 실재에 대한 올바른 알아차림”(Pps.I.253)으로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삼빠자나는 앎의 영역 또는 지혜의 영역에 해당된다. 그래서 알아차림이라고 말한다.

 

사띠라는 말은 알아차림이라고는 말로 써도 무방하다.

이는 삼마사띠에 대한 정의가 사띠마와 삼빠자나가 결합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띠와 알아차림을 구분없이 사용해도 큰 무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띠는 몸관찰(kāyānupassī) 뿐만 아니라, 느낌관찰(vedanānupassī),

마음관찰(cittānupassī), 법관찰 (dhammānupassī)에도 모두 똑같이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네 가지 새김의 토대(cattāro Satipaṭṭhāna)’라고 한다. 한자어로 사념처(四念處)라고 한다.

 

경에서는 몸관찰에 대하여 기름이 가득 든 그릇을 든 범부가 걸어 가는 것으로 비유했다.

미인의 아름다움에 한눈 팔면 기름을 흘리게 될 것이다.

그럴 경우 뒤따르는 칼을 든 사람에게 목을 베이게 될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마음을 대상에 묶어 두라는 것이다.

가득 찬 기름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마음이 거기에 가 있는 것이다.

마치 시속 100키로 이상 운전할 때 전방을 주시하는 것과 같다.

 

운전 중에 라디오도 듣고 옆사람과 대화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속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전방을 주시하게 된다.

시속 60키로일 때 다르고, 시속 100키로일 때 다르다.

시속 150키로라면 어떨까? 라디오 소리도 옆사람의 대화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시속 200키로라면 온 마음을 운전에 집중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죽음이기 때문이다.

 

몸관찰은 대상에 대하여 집중하는 것이다. 관찰의 대상에 사띠의 끈을 묶어 놓는 것과 같다.

마음이 대상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당겨지게 될 것이다.

래서 마음이 외부대상으로 보호된다.

눈과 귀 등 여섯 가지 감각대상으로부터 보호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각과 청각 등에서 일어나는 오욕락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수행은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대충대충하는 것이 아니라 죽기를 각오하고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대가 기름을 조금이라도 흘리면이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2020

 

담마다사 이병욱

'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년에 털리지 않으려면  (0) 2020.11.08
인생이 힘들어질 때, 인생이 쉬워질 때  (0) 2020.11.08
명상에 이르는 길  (0) 2020.11.01
지금 집밖으로 나가면  (0) 2020.11.01
식물도 중생이다  (0) 2020.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