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우주가 무너지고 있다고 명상하면

황령산산지기 2020. 8. 1. 15:26

우주가 무너지고 있다고 명상하면

 

 

여기 깨달은 자가 있다. 깨달은 자에게도 번뇌가 일어날 수 있을까? 만일 그가 화를 낸다면 그는 깨달은 자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질투한다면, 그가 시기한다면 그는 깨달은 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깨달은 자라면 번뇌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금요니까야 강독모임이 724일 금요일 저녁에 열렸다. 7월 들어 두번째 모임에서 강독한 경은 무명이 사라져 명지가 일어난 뒤에도 번뇌가 들이닥칠 가능성이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자이나교의 숙명론

 

앙굿따라니까야 밥빠의 경’(A4.195)이 있다. 목갈라나존자는 니간타 교도 밥빠에게 무명이 사라지고 명지가 일어난 뒤에 미래에 괴로운 느낌을 초래할 번뇌가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신구의 삼업이 청정한 자에게도 번뇌가 일어날 수 있는지 물은 것이다. 이에 밥빠는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밥빠는 왜 이렇게 대답했을까? 그것은 자이나교의 숙명론과 관련이 있다. 과거에 지은 업이 남아 있는 한 반드시 과보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설령 깨달은 자라도 번뇌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이교도의 경에 따르면 숙명론에 대한 설명이 있다. 이는어떤 사람이 어떠한 느낌이라도,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체험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전생이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A3.61)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모든 것을 전생탓으로 돌린다면 어떻게 될까? 모든 것이 전생의 업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라면 아무 것도 해야 할 것이 없다. 따라서 수행을 할 필요도 없다. 정진이 없기 때문에 청정한 삶을 살 수 없다. 이는 다름 아닌 무작설(akiriya)이다.

 

무작설은 도덕적인 삶을 부정하는 강한 결정론이나 강한 비결정론을 말한다.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의 견해가 그랬다. 이에 반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작론이라고 한다. 이는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따른 연기법적 가르침을 말한다.

 

신구의 삼업을 청정하게 했을 때

 

부처님은 밥빠와 대화 했다. 니까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답식이다. 부처님은 문답식으로 밥빠의 잘못된 견해를 바로 잡아 주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밥빠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신체적 폭력을 조건으로 곤혹과 고뇌를 초래하는 번뇌가 생겨납니다. 그러나 신체적 폭력을 삼가면, 곤혹과 번뇌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는 새로운 업을 짓지 않고, 오래된 업은 겪을 때마다 끝냅니다.”(A4.195)

 

 

부처님은 신, , 의 삼업으로 번뇌에 대하여 설명했다. 삼업을 청정하게 했을 때 번뇌가 일어나지 않음을 말한다. 번뇌가 일어나지 않으면 새로운 업을 짓지 않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오래된 업에 대한 것이다.

 

오래된 업을 겪을 때

 

자이나교도들은 오래된 업, 즉 알 수 없는 전생에 지은 업은 반드시 과보로 나타나기 때문에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아무리 현세에서 삼업을 청정하게 해도 번뇌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깨달은 자라도 번뇌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과거에 지은 업에 대하여 오래된 업은 겪을 때마다 끝냅니다.”라고 했다.

 

과거 전생에 무수한 업을 지었을 것이다. 지금 여기에 이렇게 존재하는 것은 과거 지은 업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과거에 지은 업이 모두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업이 익어야 과보로 나타난다. 조건이 맞아 떨어져야만 받는 것임을 말한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과보로서 나타난 업은 소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직 겪지 않은 업이 작용해서 미래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지금 괴로운 것은 과거에 지은 업의 과보로서 나타난 것이다. 앞으로가 중요하다. 미래 괴로운 과보를 겪지 않으려면 새로운 업을 짓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업을 짓지않고, 오래된 업은 겪을 때마다 끝냅니다. (So navañca kamma na karoti, purāañca kamma phussa phussa byantīkaroti)”라고 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그는 새로운 업을 짓지 않고 오래된 업은 그것을 겪는 족족 끝낸다.”라고 번역했다.

 

오래된 업을 겪을 때 어떻게 끝내야 할까? 이는 부숨으로 성취된다. 어떻게 부수는 것일까? 경에서는 이것은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것이고,..”라고 하여 법수념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부술 수 있음을 말한다. 오염원을 부수는 수행을 해야 함을 말한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설했다. 사성제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고성제이다. 이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괴로움에 대하여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지금 괴롭다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먼저 인정해야 한다. 괴로움은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결과로 나타난 것은 바꿀 수 없다.

 

지금 괴로움에도 나는 행복합니다.”라고 말한다고 하여 괴로움이 행복으로 바뀌지 않는다. 괴로움에 대하여 알고 나면 괴로움의 원인에 대하여 알 수 있다. 그래서 사성제에서 인과는 거꾸로 되어 있다. 먼저 과가 나오고 그 다음에 인이 뒤따른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새로운 업을 짓지 않겠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오래된 업은 겪을 때마다 끝낸다고 했다. 이는 수행의 힘으로 끝낼 수 있음을 말한다. 수행의 힘으로 번뇌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금요니까야강독모임에서는 종종 세상의 이슈에 대해서도 경전의 문구와 관련지어서도 이야기한다. 최근 박원순서울시장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이에 대하여 모두 대단히 안타깝게 생각했다. 2년전 노회찬의원의 투신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있었다. 공통적으로 그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았다면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을텐데.”라는 것이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면 극단적 선택을 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업과 업의 과보 작용인 것을 안다면 함부로 목숨을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자제하는 삶을 산 자에게 있어서 극단적 선택은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전재성회장에 따르면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행위는 폭력적 요소가 있다고 했다. 예를 들어 잘못 발을 딛어 넘어졌다면 크게 다칠 것이다. 노인이라면 골반을 다쳤을 때 그것으로 인하여 죽음에 이를 수 있다. 실제로 유명한 사람 중에 넘어져서 골반이 부서져서 죽음에 이른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넘어져서 골반이 부서졌을 때 이는 신체적 폭력에 해당된다. 주의기울임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몸에 폭력을 가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폭력에는 신체적 폭력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언어적 폭력도 있다.

 

이번 박원순시장의 극단적 선택도 언어에 따른 것이다. 말한마디로 인하여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언어도 폭력인 것을 알 수 있다.

 

언어는 폭력이라고 했다. 왜 그런가? 명칭을 부여 하여 말을 잘랐을 때 언어 폭력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모든 상황을 다 고려하지 않고 거두절미하여 말했을 때 폭력일 수 있다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그것이 악업을 짓는 행위에 대한 것이라면 말 해서는 안된다. 전재성회장은 율장에 실려 있는 가르침을 예로 들어서 사실을 이야기할지라도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얘기해서는 안됩니다.”라고 했다. 율장에 이런 계율이 있음을 말한다.

 

육근청정에 대한 법문

 

부처님은 외도 밥빠와 문답식으로 대화했다. 무명이 사라지고 명지가 일어나면 더 이상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번뇌가 일어나는 즉시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부처님은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씀했다.

 

 

밥빠여, 이와 같이 마음이 올바로 해탈된 수행승은 여섯 가지 일관 삶을 삽니다. 그는 시각으로 형상을 보아도 즐겁거나 괴롭지 않고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올바로 알아차리는 삶을 살고, 청각으로 소리를 들어도,.. 후각으로미각으로촉각으로정신으로올바로 알아차리는 삶을 삽니다.”(A4.195)

 

 

한마디로 육근청정에 대한 법문이다. 네 번째 선정에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청정해졌을 때 번뇌가 일어나지 않음을 말한다.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아마 집착에 있을 것이다. 깨달은 자는 오온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온의 존재이다. 그러나 일반 범부들은 오온에 집착하기 때문에 오취온의 존재이다. 육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흔히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욕자가 앞에 붙어야 한다. 욕계 중생들은 욕오온, 욕십이처, 욕십팔계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육근도 범부에게는 욕육근이 된다. 깨달은 자만이 육근이 된다. 이는 육근이 청정함을 말한다. 네 번째 선정에서와 같은 청정을 말한다.

 

네 번째 선정 정형구가 있다. 니까야 도처에서는 행복도 고통도 버려지고, 기쁨도 근심도 사라진 뒤,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청정한 네 번째 선정이라는 정형구로 표현된다. 여기서 키워드는 평정하고 새김이 있는 청정이다. 이를 우뻬카사띠빠리숫디(upekhāsatipārisuddhi)라고 한다. 한자어로는 사념청정(捨念淸淨)이다.

 

어떻게 해야 무명의 잠재성향을

 

사념청정상태에서는 육근이 청정하다고 했다. 어떤 괴로움이 있어도 미래의 과보를 초래하는 업을 짓지 않는다. 이는 무명이 타파됨과 동시에 명지를 얻었기 때문이다. 다시는 옛날로 돌아 가지 않음을 말한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맛지마니까야 교리문답의 작은 경’(M44)에서는 이렇게 표현해 놓았다.

 

 

벗이여, 비싸까여, 세상에서 수행승은 즐거움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이미 생겨난 만족과 불만이 사라지면 즐거움도 뛰어넘고 괴로움도 뛰어넘어 평정하고 새김있고 청정한 네 번째 선정을 성취합니다. 그렇게 해서 무명을 버리게 되고, 무명의 경향을 잠재시키지 않습니다.”(M44)

 

 

네 번째 선정에서 무명이 진압된다고 했다. 주석에 따르면, 무명이 진압되면 통찰(vipassana)을 닦아서 거룩한 길을 따라 무명을 제거한다고 했다. 그런데 거룩한 길에서 무명이 제거되더라도 네 번째 선정을 통해서 진압되기 때문에 무명의 경향마저 뿌리 뽑는 것이라고 했다.

 

종려나무의 비유를 들어

 

부처님은 밥빠와 문답식으로 깨달은 자에게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적절한 비유를 드는 것이다. 부처님은 무명의 잠재성향을 뿌리 뽑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종려나무의 비유를 들었다.

 

 

밥빠여, 예를 들어 나무몸통을 조건으로 생겨난 그림자가 있습니다. 일꾼이 삽과 바구니를 가지고 와서 그 나무몸통의 밑동을 자르고, 밑동을 자른 뒤에 파내고, 파낸 뒤에, 뿌리와 그 안의 잔뿌리마저 뽑아내 버리고, 그 나무몸통을 토막토막 자르고, 토막토막 자른 뒤에 부수고, 부순 뒤에 조각내고, 조각낸 뒤에 바람이나 햇빛에 말리고, 바람이나 햇빛에 말린 뒤에 불에 태우고, 불에 태운 뒤에 재로 만들고, 재로 만든 뒤에 강한 바람에 날려 보내거나 강물의 거센 흐름에 씻겨버린다면, 이와 같이 해서, 수행승들이여, 그 나무몸통을 조건으로해서 생겨난 그림자는 뿌리째 뽑히고, 종려나무 그루터기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다시 생겨나지 않게 됩니다.”(A4.195)

 

 

종려나무 비유를 보면 뿌리째 뽑아 버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 뿌리마저 없애 버리는데 가루를 만들어 버리고 심지에 불에 태워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다시는 뿌리내리지 못할 것이다. 잠재성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일곱 가지 잠재성향(anusaya)이 있다. 감각적 욕망의 잠재성향, 존재에 대한 잠재성향, 적의의 잠재성향, 자만의 잠재성향, 사견의 잠재성향, 의심의 잠재성향, 무명의 잠재성향, 이렇게 일곱 가지 잠재성향이 있다.

 

붓다아비담마에서는 잠재성향에 대하여 “7가지 잠재성향은 긴 윤회 동안 줄곧 삶을 거듭하면서 존재들의 무더기(khandha)의 흐름속에 잠재해 있는 오염원의 씨앗이나 잠재력이다.”(336)라고 했다.

 

잠재성향은 나무의 잠재력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그 잠재력은 나무의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지만 때가 되면 무르익어 과일이 열매를 맺는 것으로 보아 잠재성향이 나무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진불사상이 있다. 유년기 천진난만한 시절로 되돌아 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천진불사상은 외도사상이다. 이는 부처님이 외도사상이라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잠재성향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천진하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자아의식이 강화되면 잠재의식은 드러난다. 특히 청소년기가 되면 잠재성향은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런 잠재성향은 숨어 있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다. 그러나 드러날 때가 있다. 감각기관이 감각대상과 접촉할 때이다. 접촉하는 순간 오염원으로 나올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우주가 무너지고 있다고 명상하면

 

잠재성향은 뿌리뽑는 것이라기 보다는 뿌리를 뽑아 말려서 태워 버려야 한다. 잠재성향은 마치 그림자와 같아서 윤회하는 존재에게는 항상 따라다닌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잠재성향을 말려서 태워 버려야 할까? 이는 오염원을 부수는 도를 닦아야 한다. 수행의 힘으로 잠재성향을 부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회장은 항상 최악의 상황을 생각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다고 명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 최악의 상황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 존재의 죽음일 것이다. 한 존재가 눈을 감는 순간 우주가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극단적이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고서도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지금 이순간 우주가 무너지고 있다고 명상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주가 무너지고 있다고 명상하는 것은 행고성에 해당될 것이다. ‘형성된 모든 것은 소멸되기 마련이다라고 아는 것이다. 지금 이순간 찰나찰나 우주가 무너지고 있다고 명상하면 극단적 선택은 피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전재성회장은 최악을 견디어 내면 무엇을 견디어 내지 못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무상, , 무아를 통찰하면 위대한 힘이 나올 수 있음을 말한다.

 

우주에서 유일하게 죽은 사람은

 

부처님의 죽음을 큰 죽음이라고 한다. 부처님도 아라한이기 때문에 아라한의 죽음도 큰 죽음이 된다. 부처님의 죽음이 왜 큰 죽음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회장은 윤회전체의 죽음입니다.”라고 했다. 보통사람들은 죽음은 윤회속의 죽음이지만 부처님의 죽음은 윤회를 끊는 죽음이기 때문에 큰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두 가지 죽음이 있다. 하나는 범부의 죽음이고, 하나는 부처의 죽음이다. 범부는 오취온의 존재이기 때문에 죽어도 죽지 않는 것이 된다. 오온에 집착되어 있는 한 세세생생 윤회할 것이기 때문에 죽어도 죽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러나 무명과 갈애가 뿌리뽑혀져 완전히 버려진 부처의 죽음은 진짜 죽음이 된다. 그래서 범부의 죽음을 작은 죽음이라고 말하고, 부처의 죽음을 큰 죽음이라고 말한다.

 

석지명 스님이 지은 큰 죽음의 법신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 서문을 보면 큰 죽음에 대하여 보통사람들이 오랜 습관으로 이루어진 개인적인 나로 살다가 죽게 되는 것을 작은 죽음이라고 한다면 업으로 된 나를 과감하게 버리고 전 우주를 자기로 사는 것을 큰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7)라고 했다. 이는 대승적 관점에서 큰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법신상주 실유불성이라는 대승열반경에 근거한 것이다.

 

디가니까야에서 보는 부처님의 죽음은 큰 죽음이다. 이는 경의 제목을 마하빠리닙바나(mahāparinibbāna)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윤회의 고리를 끊어 버렸기 때문에 큰 죽음인 것이다. 그래서 우주에서 유일하게 죽은 사람은 부처밖에 없다.”라는 말이 있다.

 

 

네 가지 거룩한 진리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해

여기 저기 태어나

오랜 세월 윤회했네.

 

이들 진리를 보았으니

존재의 통로는 부수어졌고

괴로움의 뿌리는 끊어졌고

이제 재생은 없어졌네.”(D16.34)

 

 

2020-07-2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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