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하운 김남열
빛과 그리고 어두움 빛이 있으니 어두움이 있다. 어두움은 빛의 또 다른 한 면이다. 인생도 빛과 어두움의 면이 있다. 길다고 생각하면 길고, 짧다고 생각하면 짧은 인생의 얼굴을 하고 가는 것이 인간 의 삶이다. 이 인생의 길을 가면서 인간은 스스로 그 길을 밝히면서 가는 사람이 있고, 그래서 다음 세대에 오는 사람들이 전사前事의 일들을 보고 귀감이 되는 행적이다 생각하고 따르면, 그는 세상에 불빛이 되는 사람다운 사람의 삶을 산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 스스로의 길을 어두음으로 회칠하며 욕심과 아집과 집착으로 얼룩진 인생의 삶을 걷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전자의 인생길을 걷는 사람이나 후자의 인생의 삶을 걷는 사람 모두 동 시대에 살면서 그 시대의 긴박한 사회의 환경과 요구에 의하여 적응하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면서 빛과 그리고 어두움의 색깔이 되어서 사회를 밝히거나 암울하게 만들지만, 양자의 대립과 필요조건 속에서 서로의 만족을 채우고 비우면서 모두 그렇게 한 시대를 만들고, 영글게 하는 사람들이다.
삶의 길
인생을 길고 짧게 살던, 혹은 짧고 길게 살던, 그 인생의 여정에는 무수하게 열려있는 길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길이 아니요,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자연섭리의 조화로운 길이다, 그래서 하늘은 자전과 공전을 통하여 순조롭게 운행하게 만드는‘하늘의 길’이 있고, 사람은 사람답게 태어나서 사람답게 살다가라고 하는‘인간의 길’이 있고, 동물에게는 동물처럼 태어나서 동물처럼 살다가게 하는 우주만물의 이치인‘동물의 길’이 놓여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자연이 만들어낸 섭리의 길을 인지하고 살아가는 현자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하고 우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삼라만상의 이치가 자연의 섭리임을 깨달고 그렇게 사는 것이 현명하고 지혜롭게 사는 것임을 느끼면서 세상에 놓인 달콤한 것들에 미혹됨이 없이 자유의지로 선의지의 마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정도를 벗어나지 않고 바르게 가도록 참된 진리의 길을 가게 등불을 밝히는 사람을‘현자’라고 부르며, 그렇지 못한 온갖 현혹적인 도구로 사람을 사망의 길로 유혹하는 사람들을‘악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차안과 피안의 길을 말하든, 자유인과 범부의 길을 논하든, 사람됨의 길이나 동물과 같은 삶의 길을 논하든, 역사적 정의는 강자이든 약자이든 우주의 한 티끌 같은 인간 존재라는 사람에 의하여 규정되어 만들어진다. 단지, 우리가 현자라고 불렀던 예수, 석가, 공자, 노자, 맹자...,등의 존재는 너무나 인간적이며 인간적인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왔다가 사람들에게 인간 스스로가 어떠한 존재인가를 진정으로 알며, 사람으로 사는‘삶 의 길’이 무엇인가를 느끼며 참 의미를 깨닫게 하고는 불꽃처럼 사라진 존재이었다는 위대함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이제. ‘삶의 길’을 가르쳐준 그들만이 예수요, 부처요, 공자가 아니요. 우리가 현대를 살아가면서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부처와 예수와 공자가 우리 곁에 지금도 있으며,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예수는‘의인 하나도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했고, 부처는‘스스로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된다’고 설파했으며, 인자는 자기억제, 겸허, 너그러움을 지닌 사람이 진정한 인간다운 인간임을 공자는 말하지 않았던가.
닫힌 마음 그리고 열린 마음
열린사회는 배려하는 사회이며, 닫힌 사회는 배려를 나약함으로 매도하는 사회이다. 그래서 이기주의가 난무하고 자기중심적 사회이며, 타자에 대한 배려는 약자의 논리며, 약자의 모습이라고 어리석게 단언하는 사회이다. 그래서 닫힌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남의 말을 쉽게 수용하며, 거르지 않는 마음으로 맹목적인 복종으로 또한 많은 사람들을 판단의 논리로 정죄하며, 심판하며 집행자가 되려고 몸부림친다. 반면, 열린사회는 서로가 소통하는 가운데 사람의 인격과 인연을 중시하며, 인간의 도리와 살아있는 생명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며, 내가 가는 길만큼 타인의 길도 존중하며, 스스로의 길을 밝히듯이 타인의 길도 인도하며, 공동으로 평안과 안락한 삶을 도모하며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이다. 그 사회는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사회이기에 사람은 다 똑같은 존재라는 중요성을 모든 사람들이 인지하며, 차별의 가치보다 차이의 가치를 존중하며, 항상 만물을 평온하게 하고자 하는 마음, 많은 생명의 아픔과 고통을 나의 고통과 아픔으로 여기며 건져주고자 하는 마음이 팽배한 사회이다. 그러기에 이 사회는 서로가 어울리며, 춤추며 사로와 서로가 서로의 소망과 꿈을 소원하고 기도하며 사는 사회이다. 극락이 필요 없는 사회이며,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도시, 이곳에서는‘천국의 자유’를 최대한 만끽하는 사회이다. 곧, “하늘나라는 네 마음에 있다”는 가치가 실현되고 있는 사회이기에 예수요, 부처요, 공맹의 진리가 시끄럽게 대두되지 않고 조용히 인간 삶의 지혜로움으로 스며든다.
깨침의 시각으로
해달의 자유는 절대 채움으로써 얻을 수 없는 행복이다. 하심의 마음가짐으로써, 내리고 비움으로써 얻을 수 있는 대 자유의 기쁨이요, 희열이다. 살면서 사회와 문화의 여건에 변동 사항에 의해서 바르고 참된 길을 동요함이 없이 걸어간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지만, 나와 남이 어우러져 어깨동무하며 같이 평화와 안락을 누리고자 하는 것은 더욱 쉬운 행동이 아니다. 그러나 내려놓고 비움으로서 삶을 참되고 살찌우는 영통의 눈眼은 열린다. 모두가 깨침을 주는 시각視覺을 가지는 순간이다. 그 깨침의 시각을 주는 영통의 눈이란? 첫째, 정도正道의 직관이다 대상의 만물을 항상 바르고 참되게 보며 가려는 생각이다. 자기중심적인 에고에 찬 생각에 의하여 선악의 가치를 주관과 객관으로만 구분하지 않고, 냉철한 판단과 이성적이며 신앙적인 사유로 모든 존재의 참모습을 주관과 객관의 어우러짐의 조화로운 측면에서 살펴나가는 눈이다.
둘째, 공덕의 직관이다. 우리가 행하고 베풀 수 있는 공덕은 헤아릴 수 없음을 안다. 꽃을 보니 꽃의 아름다움을 알기에 꺾는 것보다 키우고 가꾸는 것을 좋아하고, 여인의 고결한 모습이 아름다우니 내 누이같이 여기고, 손잡고 길가는 노부의 모습이 행복해 보이니 나의 행복처럼 여기며, 그들의 건강을 소원하는 모습 등 내 마음이 평온하니 보는 것이 다 아름다워 보이면서, 만물이 태어나고 소멸하는 것이 그 공덕의 행함에 있음을 인지하며, 자신이 태어남도 전생에 조상님과 부모님과 자손들의 대대손손代代孫孫 이어져 온 수많은 공덕으로 인한 것으로 생각하고, 살면서 자신의 생명과 타인의 생명을 존중하며, 가치 있게 살아야 함이 무엇인가를 알고 덕을 쌓아가는 눈眼이다.
셋째, 본질의 직관이다. 인생을 살면서 사람들이 자유롭지 못함은 물질적이며, 정신적인 집착과 구속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오감에 의한 사물에 대한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다. 그러나 본질의 눈으로 생각하면, 있는 그대로 모습을 느끼고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산이 거기에 있으니 산을 보러간다”는 말처럼 인위적으로 조작하고, 만들려고 하는 것이 해로움을 부를 때가 있음을 안다. 그래서 놓여 있는 것을 그대로 관조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을 스스로에게 동화시켜 나간다. 또한, 부귀공명은 본질의 눈으로 볼 때에는 강에 흐르는 강물이요, 바다에 파도치는 바닷물이요, 하늘에서 내리는 물방울처럼 여기며 초월적 생각을 가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깨침의 시각! 이것은 곧 사회를 밝히는 눈이다. 또한 내가 참된 내가 되게 하는 삼매의 시각이며, 바라밀의 길이다. 그래서 비로소‘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도록 깨우침을 주는 것이다. |
출처: (사)행복저축은행 l 도서출판 여여심如如心 원문보기 글쓴이: 김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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