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라만상

호접몽(胡蝶夢)

황령산산지기 2020. 4. 18.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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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접몽(胡蝶夢)  

        

 

 

낮은 다탁을 사이에 두고 툇마루에 앉아있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평화롭습니다. 고즈넉한 산사에 한동안 침묵이 흐릅니다. 뻔뻔하게 너만 생각하고 제발 너부터 행복하라고 스님이 다독입니다.

행복하자 친구야,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무슨 사연인지 모르지만, 딸아이가 보고 있는 드라마의 한 장면입니다. 아마도 힘든 시간을 겪고 있는 주인공이 출가한 친구 스님을 찾아가 위로받는 이야기 같습니다.

 

절집의 기와지붕에 어리는 빛과 그림자, 앞산의 부드러운 능선은 빗자루로 마당을 쓸어 놓은 듯 한동안 산란했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습니다. 마침 안부를 묻는 워싱턴에 사시는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여기도 깊은 산중이니 놀러 오라십니다.


너도밤나무와 떡갈나무 사이로 나들이 나온 사슴 가족의 사진이나 소소한 일상을 전해 주시며 늘 한 번 다녀가라 하십니다. 언제든지 와서 쉬었다 가라는 그 한 마디는 비록 일부러 길 떠나지 않아도 이미 영혼의 휴식처입니다.


배닝시 샌하신토(San Jacinto) 산 중턱에 자리한 미주 금강선원은 청화 대종사께서 창건하신 수행도량입니다. 야청빛 하늘이 신비롭던 산사의 하룻밤은 오래도록 고요한 잠심의 세계를 선사할 것입니다.


불자가 아니어도 반기시며 맑은 차를 손수 대접해 주시는 주지 스님의 편히 쉬었다 가시라.”는 한 말씀에 그믐밤의 무수한 별들이 가까이 내려옵니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 자연의 품에 안기어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잠시 머물다 가는 것, 바람도 자고 풍경도 한가롭습니다.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는 새로 돋아나는 꽃과 잎들이 전하는 거룩한 침묵을 통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남겨주신 법정 스님의 말씀이 범종 소리와 더불어 마음에 공명이 되어 울립니다. 텅 빈 마음에 괴로움을 여의고 행복을 얻으라 하십니다. 문득 산 이와 죽은 이 모두 생명이 살아서 움직이는 자연의 품에 안기는 순간이 평안임을 깨닫습니다. 돌아가신 영혼을 위해 영가등을 올려드리고,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나 온누리에 평화를 주시길 합장합니다.


다람쥐와 생쥐가 공존하고 매실과 앵두가 익어가는 도량의 후원을 지나 종각의 처마 끝에는 풍경이 그네를 타고 있었지요. 멀리 퍼져 가던 범종 소리 그치고 하얀 나비 한 마리 앉아있습니다.

 

나비 한 마리

절의 종에 내려앉아

졸고 있네

- 부손

 

시절 인연이 닿은 봄날, 여여스님의 다연(茶宴)<꽃차 여행>에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고향 땅의 청정한 산야에 핀 백화,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꽃차를 음미하며 고향의 봄노래를 불렀습니다. 선물로 주고 가신 꽃차 몇 송이 유리다관에 띄웁니다. 잔 꽃송이들이 피어오르고 은은한 다향이 그리움을 불러옵니다.


아카시아 한 그루도 보이지 않는 아카시아 골목에 사는 나는 봄 편지를 부치러 집을 나섭니다. 팔랑이며 작은 단풍잎이 자꾸만 떨어졌습니다.

 

꽃잎 하나가 떨어지네

, 다시 올라가네

나비였네!

-모리다케(守武)*

 

지난겨울 풍족하게 내린 비로 야생화가 만발한 슈퍼 블룸(Super Bloom)’ 꽃 잔치가 한창이더니 단풍잎이 날아다니듯 모나크나비가 쉴 새 없이 날아옵니다. 막 부화한 아기 나비들이 끝없이 동에서 서편으로 날아갑니다. 어디에 이 많은 나비가 숨어 있었는지 온 골목에 나비 떼가 춤을 춥니다. 영상으로 담아보려던 헛수고를 그만두고 길섶에 앉은 나비 한 마리 들여다봅니다.

 

나비 한 마리 돌 위에 앉아 졸고 있다

어쩌면 나의 슬픈 인생을

꿈꾸고 있는 건지도 몰라

-시키*

 

가던 길을 멈추고 나비 떼에 갇혔습니다. 이보다 더 어여쁜 감옥이 있을까요 절로 행복한 수인이 된 봄날입니다. 내가 나비이고 나비가 나인지 호접몽(胡蝶夢)을 꾸는 나의 넋도 자유롭게 창공을 날아다닙니다첨부이미지



* 부손(蕪村) · 모리다케(守武) · 시키(子規)

   일본의 유명한 하이쿠 시인.

 

<에세이21> 2020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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