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을 호구신(戶口神)이라 했다. 집집마다 돌면서 일으키는 역병이라는 뜻이다. ‘호구거리’는 천연두를 몰고 오는 ‘호구’가 탈 부리지 못하게 하는 굿이다. 천연두가 순하게 지나가길 기원하는 축원한다.|한국민족대백과사전에서 |
1432년(세종 14년) 4월 21~22일 세종대왕이 화들짝 놀라는 일이 일어났다. 마침 극심한 전염병으로 백성들이 신음하자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는 토목·건설공사를 중단하라”는 명을 내린 터였다. 그것이 그치지 않았다.
세종은 관리들이 제대로 환자들을 구호하는지 혹 생명이 위태로운 자가 있는지 사람을 시켜 알아보았다. 한마디로 감찰단을 파견하여 관리들의 전염병 대책에 잘못이 있는지 낱낱이 파악했던 것이다. 그런데 소격전(도교 주관의 제사 관장 부서)을 살피던 감찰단원의 보고가 세종의 억장을 무너뜨렸다.
“소격전 소속 여종 복덕은 시각장애인인데, 굶어죽게 생겼습니다. 복덕은 아이까지 안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란 세종은 소격전과 한성부 북부지역(북부령) 책임자 등 관리 2명을 문책하여 형조에서 심문하도록 하고 복덕에게는 쌀과 콩 각 1석(石)을 하사했다. 세종의 지시는 일회성에서 끝나지 않았다. 세종은 “복덕이 내가 내린 쌀을 다 먹은 뒤에는 또 굶을 것 아니냐”면서 “앞으로 복덕과 같은 백성은 그의 족친에게 맡기거나, 족친마저 없다면 해당 관청(소격전)이 끝까지 책임지고 구호해야 한다”는 명을 내렸다.
‘디테일’ 세종의 전염병 대책
이처럼 전염병과 같은 재난에 맞선 세종은 시쳇말로 ‘디테일 세종’ 소리를 들을만 했다. 건국초여서 제도가 확립되기 전인데다 워낙 명철한 성군이었기에 만기친람, 그 자체였다. 예컨대 1434년(세종 16년) 전국에 전염병이 돌자 세종은 처방문까지 일일이 써서 전국에 내려주었다.
“내가 의서에 써있는 처방과 약방을 뽑아 적어 내린다. 수령들이 집마다 찾아다니며 알려주고 정성껏 치료해주라.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과인의 뜻을 저버리지 마라.”(<세종실록>)
세종이 내린 처방문 중에는 별의별 요법이 다 등장한다. 그 중에는 발효시킨 콩씨와 불기운 받은 아궁이 흙, 그리고 어린아이 소변을 섞어 마시는 처방이 있다. 세종은 또 “복숭아나무 가지 잎사귀와 백지(구릿대 뿌리 말린 약재), 백엽(측백나무 잎)을 찧어 가루를 내고 탕을 끓여 목욕을 하면 좋다”고도 했다. 이밖에 ‘복숭아 나무 속 벌레똥’을 가루로 곱게 갈아 물에 타먹는 것도 세종의 처방문에 포함되어 있다. 이 뿐인가. 세종은 요즘의 코로나 19와 같은 급성전염성 질환이 번질 때의 대비책도 빼놓지 않았다.
“급성전염병이가 도질 때 한 자리에 거처하는 경우에도 감염되지 않는 처방이 있다. 매일 아침 세수할 때와 밤에 자리에 누울 때 참기름을 코 안에 바른다. 전염병 확산이 너무 빨라 약을 구할 수 없으면 급한대로 종이 심지를 말아서 콧구멍에 넣어 재채기 하는 것이 좋다.”
<영조실록> 1750년에 기록된 ‘월별 사망자수’. 매달 28~29일 월별 사망자를 집계했다. 10월 이후의 통계는 보이지 않지만 9월까지의 그해 누적 사망자는 22만3000여명에 달한다. |
죽을 각오로 백성들을 관리하라
세종은 전염병으로 죽을 처지에 빠진 백성들을 직접 구휼했다. 1434~35년 사이 전염병으로 죽은 함경도 백성이 3262명에 이른다는 보고를 받고는 면포 5000필을 급히 나눠주었다. 1437년(세종 19년)에는 굶주린 백성들이 한성부 내 두 곳에 마련된 진제장(굶주린 자들의 무료급식소)마다 1000여명씩 몰려들었다.
그러나 이들을 배불리 먹이려고 한 두 곳에 집단수용 했던 것이 화를 불렀다. 해가 바뀌어 봄이 되면서 전염병이 이 급식소에 모인 백성들을 휩쓸었고, 이곳에서 사망자가 속출했다. 세종은 가슴을 치면서 “대체 지금 이곳에서 사망자가 왜 속출했는지 그 사유를 낱낱이 기록하라”는 명을 내렸다.
7년 후인 1444년(세종 26년)에도 전염병이 휩쓸자 굶주린 백성들을 한 두 곳에 집단 수용하는 문제를 심사숙고했다. 세종은 “7년 전의 전철을 밟으면 안된다”고 신신당부하면서 “백성들을 분산 수용하고 질병을 얻은 자는 다른 사람과 섞여 살게 하지 마라”는 지시를 내렸다.
세종은 분산 수용소의 관리를 중앙 및 서울의 5개 관청 공무원들에게 맡겼다.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면서 세종은 “백성들을 나눠 관리하도록 하는데, 만약 백성 한사람이라도 죽게되면 관리책임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죽을 각오로 백성들을 관리하라는 뜻이었다.
허준이 편찬한 <신찬벽온방>. 광해군때 전염병이 돌자 왕명을 받들어 두달 여 만에 편찬해서 전국에 배포했다. 전국 각 수령과 백성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게 만든 일종의 ‘전염병 매뉴얼’이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
소빙하기, 조선은 전염병의 시대
그러나 세종(재위 1418~1450)은 운이 억세게 좋은 임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임금들에 비해 전염병 창궐 횟수(5회)가 적었기 때문이다. 전염병 발생횟수를 임금별로 보면 숙종 연간(재위 1674~1720)에 25회로 가장 많았고, 영조(1724~1776·19회)와 현종(1659~1674·13회) 때가 뒤를 이었다.
전염병은 성종(재위 1469~1494·2회)까지 드문드문 했다가 연산군(재위 1494~1506·9회)부터 증가한다. 폭군의 시대에 하늘도 노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이 무렵부터 전 세계적으로 소빙하기에 접어든다.
소빙하기는 16세기부터 시작되어 18세기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의 기온저하는 조선 뿐 아니라 전세계적인 추세였다. 중국의 경우 소빙하기가 절정을 이룬 17세기(명나라 말기) 기온이 지금보다 최하 1.5~2도도 떨어졌다는 연구도 있다. 이에따라 가뭄·홍수 등 기상이변이 빈발했다.
겨울에도 천둥 번개가 치고, 5~6월까지 서리와 눈이 내리기도 했다. 겨울추위가 혹독해졌지만, 한편으로는 겨울철인데도 갑자기 봄날처럼 따뜻해져 꽃이 피기도 했다. 기상이변은 굶주림과 위생불량을 낳았고, 이것은 곧 면역력의 저하를 부추겨 전염병 창궐로 이어졌다.
1392년부터 1917년까지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전염병 발병을 햇수로 따지면 320년에 달하고 연평균 2.73회 발생했다는 연구가 있다. 전염병 기사는 1455건이나 된다. 가히 ‘전염병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염병 유행 빈도는 3월(12.3%), 2월(12%), 4월(10.4%) 등 봄철(34.7%)이 가장 많았다. 코로나19 사태가 겨울에 시작해서 봄철에 확산되는 추세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보 제28호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모든 중생의 질병을 고쳐준다는 약사불을 형상화했다. 약사불상은 서기 800년 무렵부터 집중적으로 조성되는데 <삼국사기> 등을 보면 이때부터 질병기사가 많이 나타난다.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
인구가 142만명이나 준 대기근, 전염병의 여파
특히 현종(13회)-숙종(25회)-영조(19회) 등이 전염병의 절정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구자들은 현종-숙종 시대가 소빙하기가 극에 달한 17세기라는 점에 주목한다.
특히 1670년(경술년·현종 11년)과 1671년(신해년·현종 12년)에 걸쳐 조선을 덮친 이른바 ‘경신대기근’과, 1695년(을해년·숙종 21년)과 1696년(병자년·숙종 22년) 시작된 ‘을병대기근’은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전세계를 강타한 이상저온이 조선에도 닥쳐 냉해와 가뭄, 홍수가 이어졌다.
현종은 “가엾은 우리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아, 허물은 나에게 있는데 어째서 재앙은 백성들에게 내린단 말이냐”(<현종실록> 1670년 5월)고 하늘을 원망할 뿐이었다. <숙종실록>은 1678년(숙종 4년) 9월 “경술년(1670년)과 신해년(1671년) 기근과 전염병으로 10만명의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고 기록했다.
25년 뒤인 1695(을해년)~96년(병자년)부터 시작된 이른바 ‘을병대기근’은 가뜩이나 도탄에 빠져있던 백성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을병대기근’으로만 140만명이 넘는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
“서울과 지방을 통틀어 호수는 129만 3083호이고 인구는 577만 2300명으로 집계됐다. 계유년(1693년)과 비교하면 호수로는 25만 3391호가, 인구로는 141만 6274명이 각각 줄었다. 을해년(1695년) 이후 기근과 전염병이 참혹했기에 이 지경이 된 것이다.”(<숙종실록> 1699년 11월16일)
1695년부터 99년까지 4년간 조선 인구의 20% 정도가 기근과 전염병으로 떼죽음을 당했다는 얘기다.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의사 처방전 목간. 열을 제거하고 장내 불순물을 신속하게 제거하는 약재가 포함되어 있다.|이용현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제공 |
영조 치세의 어두운 얼굴
흔히들 52년간이나 재위한 영조를 두고 조선 중흥의 기틀을 다진 임금으로 치켜세운다. 하지만 <영조실록>을 찬찬히 뜯어보면 영조 시대의 어두운 얼굴을 볼 수 있다. 이 무렵 역시 전세계에 불어닥친 소빙하기의 끝자락이었다. 1731년(703명), 1733년(2081명), 1741년(3700명)의 전염병 희생자수는 약과였다. 1749년(영조 25년) 12월4일 <영조실록>은 심상치않은 내용을 전하고 있다. “여역(전염병)으로 인한 민간의 사망자가 거의 50만~60만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해가 바뀌었는데도 마찬가지였다.
1750년(영조 26년) 1월5일 <영조실록>은 전국 8도에 전연병 때문에 사망한 백성이 즐비하자 그저 “시신을 묻어주는 것이 왕정(王政)의 큰 일”이라고 했다. 전염병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진다. 두 달 뒤인 3월23일 “전염병 사망자가 전국적으로 10만명이 넘었다”(3월23일)고 했다.
영조는 안간힘을 다하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5월10일 영조는 “지금 전염병은 전쟁보다 심하다”면서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백성들이 다 죽게 생겼다”고 발을 동동 굴렀다. 영조는 “아! 저 백성의 죽음이 줄을 이어도 그 임금 된 자가 부덕해서 구해내지 못한다”면서 “이는 하늘의 저버림”이라고 한탄한다.
왕조시대엔 이와같은 국가적인 재난이 일어나면 신하들이 벌떼처럼 나서 “임금이 모자란 탓이니 마땅히 몸과 마음을 삼가고 반성하여 하늘의 징계를 두려워 해야 한다”고 다그치기 일쑤였다. 이를 ‘공구구성(恐懼修省)’이라 했다. 그러나 영조는 이것이 못마땅했다. 아무리 ‘임금이 곧 하늘’인 왕조시대지만 모든 잘못을 군주에게만 돌리는 신하들의 버릇도 역시 문제라고 본 것이다.
“일을 맡은 신하들은 임금의 부덕이라고만 말하지 말라. 백성들을 진휼하는데 심혈을 기울여라. 백성들에게 빌려준 곡식은 가을 추수 때까지 미뤄라. 이 모두가 백성의 고혈(膏血)이다.”
‘호구별성’. 호구와 별성이 서로 결합된 신명(神名)이다. 호구는 마마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주로 천연두를 앓고 죽은 신격을 말한다. 별성은 ‘객성(客星)’을 의미한다. ‘호구별성’은 집집마다 방문하며 천연두를 옮기는 신을 뜻한다. |한국민족대백과사전 |
월별로 기록한 전염병 사망자수
상황은 점점 악화됐다. 5일 후인 5월15일 <영조실록>은 “각도의 장계를 미뤄보면 역질로 사망한 이가 12만4000명에 이르고 원적지 밖에서 떠돌다 죽은 이들까지 합하면 적어도 30만명은 될 것”이라고 했다. 이 해 <영조실록>은 1월부터 월별로 전염병으로 사망한 백성들의 수를 집계해놓았다.
그에 따르면 1월 전국적으로 1만1692명의 사망자를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2월 6233명, 3월 3만7581명, 4월 2만5547명, 5월 1만9849명, 6월 3만300명, 7월 2만2261명, 8월 2246명씩 사망했다. 월별 사망자수 집계는 9월 6만7869명이라는 숫자가 마지막으로 등장한다. 10월 이후의 사망자 수는 기록되지 않았다. 9월 한달간 7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했는데, 그 다음달인 10월부터 사망자가 없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영조실록>에 등장하는 9월까지의 월별 사망자수가 맞다는 것을 가정한다면 1750년 한 해 전염병으로 사망한 백성수는 22만3578명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렇다면 영조에 이어 조선의 중흥군주라는 칭송을 받는 정조의 시대는 어땠을까. 예외가 없었다. 12만8000명에 이르는 전염병 사망자가 나온 해(1799년·정조 23년)가 있었다. 정조는 “굶주린 자와 죽어서도 장사조차 치를 수 없는 자들을 돕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고, “각 지방에서 전염병이 가장 번성한 곳을 골라 여제(려祭·전염병 돌 때 올리는 제사)를 드리라”고 지시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전염병 매뉴얼까지 전국에 배포했지만…
전염병이 창궐하면 세종처럼 군주가 직접 나서 처방문을 뽑아 각 지방에 내려보낸 경우도 있지만 지방 수령이나 백성들이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일종의 ‘전염병 매뉴얼’을 편찬해서 배포한 케이스도 있었다. 중종(재위 1506~1544) 연간에 나온 <간이벽온방>과 광해군 연간(재위 1608~1623)에 편찬된 <신찬벽온방>이 그것이다.
특히 1612년(광해군 4년) 12월 함경도에서 시작된 전염병이 강원도를 거쳐 전국으로 급속히 퍼지자 광해군(1608~1623)은 “전염병 재앙은 과언의 허물 탓”이라고 자인하면서 “그러니 과인이 책임지고 퇴치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광해군은 어의인 허준(1539~1615)에게 명해 ‘전염병 매뉴얼’ 격인 <신찬벽온방>을 편찬토록 했다.(1613년 2월) 전염병 발생 두어달 안에 편찬과 배포까지 마무리했으니 그 시대 기준으로는 참으로 발빠른 대처라 할 수 있다. 한문 4대가 중 한 사람인 이정구(1564~1635)은 “<신찬벽온방> 편찬으로 누추한 시골의 후미진 골목이라도 다 처방문을 의지하여 구해 살게 되었다”고 했다.
기상이변 같은 자연의 질서가 무너지면…
하지만 18세기 들어서야 영국 의사 에드워드 제너(1749~1823년)가 천연두의 근대적인 예방법인 종두법을 최초로 개발하지 않았던가. 또 ‘전염병의 원인=병원성 미생물’이라는 학설은 19세기가 되서야 ‘미생물학의 아버지’라는 루이 파스퇴르(1822~1895)가 완성했다지 않은가. 그랬으니 그 이전에는 원인불명의 돌림병이 돌면 곧 역귀의 조화로 여기기 일쑤였다. 또 세종의 처방에도 들어있듯 참기름을 코에 바르거나 종이 심지를 말아서 콧구멍에 넣어 재채기 하는 방법 같은 민간요법도 ‘전염병 매뉴얼’에 들어있었다.
“뭐 이런 터무니없는 미신이 어디있냐”는 실소가 나올 수도 있겠다. 하지만 미생물에 의한 전염 원리를 몰랐던 그 조선시대에도 병의 전염 원인을 나름대로 이해한 대목을 읽을 수 있다.
예컨대 허준의 <신찬벽온방>은 ‘운기(運氣)의 부조화’를 전염병 창궐의 원인으로 꼽기도 했다. 인간의 신체도 기의 균형이 깨지면 병이 나듯 자연의 기운도 조화를 잃으면 전염병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허준은 ‘운기의 부조화’를 두고 ‘따뜻해야 할 봄이 춥거나 더워야 하는 여름이 서늘하거나 서늘해야 하는 가을이 덥거나 추워야 하는 겨울이 따뜻하거나 하는 경우’라 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16~18세기 전세계를 강타했던 소빙하기의 기상이변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기상이변으로 멸망을 재촉한 명나라
그러나 그 어떤 대책도 전염병을 옮기는 미생물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한 시대였던만큼 전염병을 잡는데는 역부족이었다. 그것은 어떤 나라 어떤 왕조도 마찬가지였다. 단적인 예로 지금보다 기온이 1.5~2도나 낮았다는 중국 명나라 말기(1600~1640년) 중국 경제의 중심지였던 양쯔강(揚子江) 이남 지역을 강타한 자연재해와 뒤이은 전염병은 ‘사람 고기를 먹을 만큼’ 심각해졌다. 1641년 이자성(1606~1645)의 반란군이 인구의 70%의 이상이 기근과 전염병으로 소멸된 황허(黃河) 이남을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는 연구가 있다.
20세기 이후 항생제가 개발되면서 세균성 전염병은 상당부분 정복된다. 하지만 또하나 변수가 생겼으니 바로 바이러스였다. 바이러스는 항생제로 치료되는 세균과 달리 변이가 쉬워 생길 때마다 백신을 개발해야 하고, 2차 감염까지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인류가 대처하기 어렵다.
지금까지도 RNA를 기반으로 하는 바이러스는 그 유전적 전달구조가 완벽하지 않기에 돌연변이가 많이 발생하는 문제가 있다. 2000년대 이후 코로나 바이러스(사람과 동물에서 나타나는 호흡기 바이러스 중 하나)는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이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와 코로나19의 형태로 쉽게 돌연변이를 일으키며 잇달아 등장하고 있다.
김준근의 <기산풍속화첩>에 실린 마마배송굿. 천형으로 일컬어지던 천연두는 18세기 영국 의사 제너가 종두법을 개발하고 나서야 퇴치의 길로 접어들었다. |
코로나19가 마지막인가
그런데 ‘코로나19’가 마지막이 아닐 것이라는 걱정이 든다. 이준호의 논문(‘조선시대 기후변동과 전염병 발생이 미친 영향’)은 “1511~1560년과 1641~1740년, 1781~1890년 사이의 전염병 창궐은 소빙하기 징후로 인한 이상기후가 주된 원인”이라고 보았다.
논문은 “한반도의 경우 2100년 쯤 기온이 평균 1.4도 이상 상승한다”고 예측한 IPCC(유엔 산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의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전혀 새로운 전염병과 전염매개층의 창궐, 감염성 질환의 증가 등을 걱정하고 있다.
2012년 파리기후변화협약의 핵심은 국제사회가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산업화 이전(1850~1900)보다 2도 이내로 제한하고, 1.5도가 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설혹 ‘1.5도 상승’ 목표가 지켜져도 지금까지의 역사기록을 감안한다면 보통 걱정거리가 아니다. 동북아 온도가 1.5~2도 떨어진 소빙하기의 명나라와 조선의 예를 타산지석으로 삼을 일이다.
각설하고 ‘사회적 거리 2m’를 강조한 작금의 ‘코로나19’ 대책을 보면서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언급을 떠올린다. “전염병은 콧구멍으로 그 병기운을 들이마셨기 때문에 생긴다. 전염병을 피하려면 마땅히 그 병기운을 들이마시지 않도록 환자과 일정한 거리를 지켜야 한다. 환자를 문병할 때는 바람을 등지고 서야 한다.”(<목민심서> ‘관질’)
이기환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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