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슬퍼할 것인가
사람들 글을 읽어 보면 어떤 단어를 많이 쓰는 줄 알 수 있다. 페이스북에서 K선생은 ‘슬픔’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다. 나이가 많이 드신 선생은 4년전 재가불교운동을 하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시를 즐겨 쓰는 선생의 글을 보면 유독 슬픔이라는 말을 많이 접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상실에 대한 것이라고 본다. 늙어 가는 것, 떠나는 것, 헤어지는 것 등 사라져감에 대한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자신의 처지를 노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누구나 상실을 겪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늙어갈수록 상실은 커진다. 남는 것은 후회와 회환, 슬픔뿐일 것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슬퍼하고만 있을 것인가? 테라가타에 이런 게송이 있다.
“늙음을 늙지 않음으로
불타오르는 것을 불꺼짐으로
곧, 궁극적인 적정으로,
멍에로부터 위없는 안온으로 바꾸리라.”(Thag.32)
테라가타 32번 게송으로 쑵삐야(Suppiya)장로가 읊은 것이다. 첫번째 구절 “늙음을 늙지 않음으로”라는 말은 ‘열반’을 의미한다. 두번째 구절 “불타오르는 것을 불꺼짐으로”라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이럴 때는 주석을 보아야 한다.
테라가타주석을 보면 불타오르는 것에 대하여 열한 가지 불로 설명되어 있다. 그래서 “탐욕의 불, 분노의 불, 어리석음의 불, 태어남의 불, 늙음의 불, 죽음의 불, 슬픔의 불, 비탄의 불, 고통의 불, 근심의 불, 절망의 불”이라고 했다. 그런데 열한 가지 불에서 ‘슬픔의 불(sokaggi)’도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 생겨나는 원리
슬픔도 불이 될 수 있을까? 슬픔도 불꽃처럼 타오를 수 있을까?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표현이다. 그럼에도 굳이 ‘슬픔의 불’이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는 철저하게 경전을 근거로 한 것이다. 부처님의 세번째 설법으로 알려져 있는 ‘연소에 대한 법문의 경’(S35.28)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일체가 불타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일체가 불타고 있는가? 수행승들이여, 시각도 불타고 있고 형상도 불타고 있고 시각의식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불타고 있다. 어떻게 불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로, 성냄의 불로,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고 태어남-늙음-죽음-슬픔-비탄-고통-근심-절망으로 불타고 있다고 나는 말한다.”(S35.28)
부처님은 세상이 불타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고 삼라만상산천초목이 불타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여섯 가지 감역의 세계가 불타고 있음을 말한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상이란 다름 아닌 여섯 가지 감각영역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눈으로 형상을 보았을 시각의식이 생겨나는데 이를 인식했을 때 세상이 생겨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 세상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눈뿐만 아니라 귀, 코, 혀, 신체, 의식의 영역에서도 일어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세상은 인식하는 자의 세상과 같다. 그래서 “세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 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갤애가 생겨난다.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고,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것이 세상의 생겨남이다.”(S35.107)라고 했다.
부처님은 세상이 생겨나는 원리에 대하여 가장 첫번째로 접촉을 들었다. 삼사화합에 따른 접촉을 말한다. 이런 세상은 조물주가 만들어 놓은 것도 아니고 우연히 발생된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자신이 만든 세상이다. 그래서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라고 했는데, 이는 다름아닌 조건발생을 말한다.
삼사화합촉에 따라 인식하면 세상이 발생된다. 그런데 결말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내버려 두면 절망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연기가 회전하는대로, 되는대로 살면 그 끝은 항상 절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십이연기의 최종단계는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윤회의 땔감
연소의 경을 보면 열한 가지 불이 언급되어 있다. 그래서 “1)탐욕의 불로, 2)성냄의 불로, 3)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고 4)태어남-5)늙음-6)죽음-7)슬픔-8)비탄-9)고통-10)근심-11)절망으로 불타고 있다.”라고 했다. 여기서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은 이해가 간다. 불은 땔감이 있어야 타기 때문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땔감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탐욕을 내면 낼수록, 분노하면 할수록, 어리석으면 어리석을수록 악업이라는 땔감은 갈수록 많아져서 불은 거세게 타오를 것이다. 그래서 탐욕, 성냄, 어리석음은 윤회의 동력이 된다. 그래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윤회의 땔감’이라고 한다.
연소의 경에 따르면 이른바 삼독이외에 윤회의 땔감이 더 있다는 것이다. 이는 ‘4)태어남-5)늙음-6)죽음’을 말한다. 생, 노, 사도 불꽃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불꽃 같은 삶을 말하는 것 같다. 불꽃이 있다는 것은 재료를 필요로 한다. 생, 노, 사에 집착하는 것 자체가 윤회의 연료가 된다. 그래서 태어남의 불, 늙음의 불, 죽음의 불이라고 했을 것이다.
재생의 근거가 되는 집착에 대하여 우빠디(upadhī) 라고 한다. 그런데 윤회의 땔감으로 ‘7)슬픔-8)비탄-9)고통-10)근심-11)절망’도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라는 긴 복합어로 표현된다. 십이연기 정형구에 늘 붙어 다니는 말이다. 십이연기 대미를 장식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긴 빠알리 복합어는 슬픔(soka), 비탄(parideva), 고통(dukkha), 근심(domanassa), 절망(upāyāsā)이라는 말의 복합어이다.
우리말에 ‘애가 탄다’라는 말이 있다. 애는 신체의 내장기관인 창자를 일컫는 말이다. 그것이 불에 타듯이 뜨겁고 화끈거린다는 말이다. 또 ‘복장이 탄다’라는 말도 있다. 가슴한복판이 탄다는 말이다. 애간장이 탄다는 말도 있다. 울분따위로 몹시 답답하고 괴롭다는 것을 말한다.
불안이나 초조함을 표현할 때도 애간장이 탄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신체기관이 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불에 탄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슬픔의 불, 비탄의 불, 고통의 불, 근심의 불, 절망의 불”이라고 했을 것이다. 이 모두가 윤회의 땔감이 된다.
슬픔은 절망에 이르는 길
연소의 경에서는 열한 가지 불을 설명하고 있다. 열한 가지 중에서 탐, 진, 치 세 가지를 빼면 모두 여덟 가지 불이 있게 된다. 이는 태어남의 불, 늙음의 불, 죽음의 불, 슬픔의 불, 비탄의 불, 고통의 불, 근심의 불, 절망의 불을 말한다.
그래서 초전법륜경에서는 이 여덟 가지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S56.11)라고 했다. 여덟 가지 불은 여덟 가지 괴로움과 동의어인 것이다.
여덟 가지 불과 여덟 가지 괴로움은 절망으로 귀결된다. 우리의 삶은 절망이 종착지인 것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절망을 향해 달려 간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절망과 함께 하는 복합어는 항상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라고 표현된다는 것이다. 소까가 이끌고 우빠사야에서 끝난다. 슬픔에서 시작하여 절망으로 끝나는 것이다.
태어나서 늙어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라는 긴복합어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슬픔의 불, 비탄의 불, 고통의 불, 근심의 불, 절망의 불을 끌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슬퍼하고만 있다면 어떻게 될까? 절망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슬픔은 절망에 이르는 길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자들은 슬퍼하지 않는다
니까야를 보면 슬픔에 대한 것이 많다. 숫따니빠따 ‘화살의 경’(Sn.3.8)을 보면, 친지의 죽음에 대하여 “울고 슬퍼하는 것으로는 평안을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더욱 더 괴로움이 생겨나고 몸만 여읠 따름입니다.”(Stn.584)라고 했다. 게송에서 ‘슬퍼하는 것으로는 평안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이 말은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다면 걱정이 없어서 좋겠네.”라는 말을 연상케 한다. 실제로 경에서는 “미혹한 자가 자기를 해치며, 비탄해한다고 해서 무슨 이익이라도 생긴다면, 현명한 자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Stn.583)라고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현자들은 슬퍼하지 않는다. 슬퍼한다고 슬픔이 사라진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슬퍼한다고 하여 슬픔이 사라진다면 누구나 그렇게 할 것이다. 슬퍼하며 슬픈 표정을 짓는다면 자신만 해치는 것이라고 했다. 이익이 되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앙굿따라니까야에서 본 난다마따는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을 때도 슬퍼하지 않았다.
난다마따는 아들이 무자비한 폭력으로 살해되었을 때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했다.그래서 “존자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들이 붙잡힐 때나 붙잡혀 있을 때나 포박되었을 때나 상처받을 때나 살해될 때나 살해되었을 때 저는 저의 마음의 변화를 알지 못했습니다.”(A7.53)라고 말했다.
난다마따의 평정심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것은 다름아닌 수행의 힘으로 본다. 난다마따는 부처님의 재가여제자중에서 ‘선정을 닦는 님 가운데 제일(jhāyīnaṃ aggaṃ)’로 알려져 있다. 아나함의 경지에 오른 난다마따는 탐욕과 성냄이라는 오염원이 뿌리째 뽑혔기 때문에 더 이상 마음이 흔들리지 않은 것이다.
슬픔이란 무엇일까?
슬픔이란 무엇일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친지를 잃는 등을 경험한 자의 열뇌이다.”(Vism.16.48)라고 했다. 아마 청정도론의 편저자 붓다고사는 숫따니빠따의 화살의 경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썼는지 모른다.
슬픔은 기본적으로 상실에 근거한 것이다. 이런 슬픔은 초전법륜경 고성제에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결국 괴로움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슬픔에 대하여 네 가지로 분석해 놓았다.
1)의미에 있어서는 불만에 속한 것이고, 2)특징에 있어서는 내적인 화재이고, 3)기능에 있어서는 연소이고, 4)현상에 있어서는 애도라고 했다.
특히 세번째 ‘내적인 연소를 기능으로 삼는다’라고 했는데, 이는 ‘연소에 대한 법문의 경’에서 탐, 진, 치 등 열한 가지에 대하여 ‘불’로 표현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처럼 청정도론은 철저하게 니까야를 근거로 한다. 청정도론에서 슬픔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슬픔은 독화살처럼,
뭇삶의 심장을 찌르고
작열하는 쇠창처럼
더욱 강하게 불타오른다.
슬픔은 질병과 늙음과
죽음 등으로 구분되는
여러가지 괴로움을 가져오니
그래서 괴로움이라 불린다.”(Vism.16.48)
이 게송은 철저하게 니까야를 근거로 한 것이다. 구체적인 예로 든다면 숫따니빠따의 ‘화살의 경’(Sn.3.8)과 상윳따니까야 ‘연소의 경’(S35.28), 그리고 상윳따니까야 ‘초전법륜경’(S56.11)의 고성제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청정도론 게송에서“슬픔은 독화살처럼, 뭇삶의 심장을 찌르고” (Vism.16.48)라고 했다. 이 구절은 화살의 경에서 “사람이 슬픔을 버리지 않으면, 점점 더 고통에 빠져듭니다. 죽은 사람 때문에 울부짓는 자들은 슬픔에 정복당한 것입니다.”(Stn.586)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게송에서 “작열하는 쇠창처럼 더욱 강하게 불타오른다.” (Vism.16.48)라고 했다. 이 구절은 연소의 경에서 슬픔에 대하여 ‘슬픔의 불(sokaggi)’로 본 것과 같은 것이다.
게송에서 “여러가지 괴로움을 가져오니 그래서 괴로움이라 불린다.” (Vism.16.48)라고 했다. 이 구절은 초전법륜경 고성제에서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S56.11)라는 구절을 축약해 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슬픔을 즐기는 자
슬픔은 슬픔으로 끝나지 않는다. 빠알리복합어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가 의미하는 것처럼 항상 선두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라는 순서로 되어 있다. 그런 슬픔의 종착지는 절망이다.
부처님은 괴로움만 말하지 않았다. 괴로움의 소멸방법까지 제시한 것이다. 슬픔도 마찬가지이다. 숫따니빠따 화살의 경에서 친지를 잃는 등 상실에 대한 슬픔만을 말하지 않았다.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법도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했다.
숫따니빠따 화살의 경에서는 슬픔의 화살을 뽑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 화살을 맞은 상태에서 슬퍼하고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마치 독화살을 먼저 제거하듯이 슬픔의 화살을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괴로움은 결과로서 발생한 것이다. 괴로움은 원인이 아니다. 이는 고성제는 결과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갈애때문이다. 그런데 슬픔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마치 괴로움을 즐기는 것과 같다.
상실로 인하여 슬픔이 일어났을 때 슬퍼한다면 슬픔을 즐기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더구나 목놓아 통곡한다면 통곡 그 자체를 즐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슬퍼하면 할수록 더욱더 슬퍼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슬픔으로 시작하여 비탄, 고통, 근심, 절망 순으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슬픔은 절망에 이르는 길인 것이다.
슬픔이 일어날 때 어떻게 해야할까? 슬프다고 슬퍼한다면 배우지 못한 범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제자라면 가르침대로 따라야 할 것이다. 슬픔의 화살을 뽑아 버리는 것이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쉬워 한다면 애간장만 탈 뿐이다. 슬픔의 불로 인하여 자신의 몸과 마음을 태워버릴 것이다.
슬픔은 수행으로 극복해야
세상만사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생각처럼 되지 않습니다.”(Stn.588)라고 했다.
친지의 죽음 등 상실로 인한 슬픔으로 화살을 맞았을 때 더 이상 제2의 화살, 제3의 화살을 맞아서는 안된다. 첫번째 화살로 그쳐야 한다. 괴로움은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단지 괴로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마음의 평안을 얻으라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수행을 말한다.
슬픔은 수행으로 극복할 수 있다. 난다마따는 아들이 급작스럽게 죽었을 때도 태연했던 것도 수행의 힘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위빠사나16단계지혜 중에 11단계에 해당되는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Saṅkhārupekkhāñāṇa: 行舍智)’로도 설명될 수 있다.
모든 현상에 대하여 무상, 고, 무아로 관하면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일체의 형성에서 벗어나고자 성찰적 관찰로 형성을 파악하여 ‘나’라든가 ‘나의 것’이라고 붙잡아야 할 만한 것을 보지 못하고, 두려움과 환희를 버리고 일체의 형성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중립적이 된다.”(Vism.21.62)라고 했다.
슬픔이 생겨나는 것은 슬픔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슬픔에 대하여 “슬픔은 나의 것이고, 슬픔은 나이고, 슬픔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유신견이다. 몸과 마음을 나의 것, 나, 나의 자아라고 여겼을 때 슬픔도 역시 나의 것, 나, 나의 자아가 된다. 그래서 슬퍼도 내가 슬프고 기뻐도 내가 기쁜 것이다.
그러나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나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면 더 이상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절망으로 끝나는 유전연기와 함께 항상 절망은 사라진다는 환멸연기로 끝을 맺었다.
“단호하고 지혜롭고 잘 닦인 현명한 님이라면, 불난 보금자리를 물로 끄듯, 바람이 솜을 날리듯, 생겨난 슬픔을 없애야 합니다.”(Stn.591)
“자신을 위해 행복을 구하는 님이라면, 자신에게 있는 비탄과 애착과 근심과 자기 번뇌의 화살을 뽑아버려야 합니다.”(Stn.592)
“번뇌의 화살을 뽑아, 집착없이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면, 모든 슬픔을 뛰어넘어 슬픔 없는 님으로 열반에 들 것입니다.”(Stn.593)
2020-03-21
담마다사 이병욱
'비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일 수레에 남편을 태우는 아내 (0) | 2020.09.13 |
---|---|
간 밤의 비애 (0) | 2020.08.02 |
잊혀져 간다는 것은 (0) | 2020.02.16 |
그대를 위한 레퀴엠 (0) | 2020.02.16 |
현실을 꼬집는사진들" (0) | 2020.0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