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어떤 일이 있어도 화내지 않으리라

황령산산지기 2020. 2. 9. 05:48


흔히 연기법을 원인과 결과로 설명하기도 한다. 행위가 있으면 드시 과보가 뒤따른다고 한다. 그러나 과보가 즉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조건이 맞아 떨어졌을 때 과보로서 나타난다.


바로 지금 나타날 수도 있고, 내일이 될 수도 있고 모레가 될 수도 있다. 더 먼 훗날이 될 수 있다. 아니 이 생에서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업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음 생에 나타날 수 있고 더 먼 후생에 나타날 수 있다.

 

한번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로서 나타난다. 행위를 한 것에 대한 과보가 익었을 때 업보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업보를 업이숙(業異熟(kammavipaka)’이라고 한다. 업이 달리 익어서 나타난 것이다. 시기가 달리 나타남을 말한다. 그런데 행위를 하면 즉각적으로 과보를 산출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분노를 말한다.

 

분노에 대한 일곱 가지 유형의 과보

 

분노는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지금 그 사람에게 화를 내었을 때 그 사람도 즉각적인 반응을 한다. 그런데 화는 모든 것에 대하여 파괴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앙굿따라니까야 분노의 경’(A7.74)을 보면 모두 일곱 가지 불이익이 있다. 이를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분노에 지배되었기 때문에, 그는 추악해진다.

2) 분노에 지배되었기 때문에, 그는 괴롭게 잠을 잔다.

3) 분노에 지배되었기 때문에, 그는 오랜 세월 불익과 고통으로 이끌어진다.

4) 분노에 지배되었기 때문에, 정당한 재물을 얻더라도 왕들은 그것을 국고에 귀속시킨다.

5) 분노에 지배되었기 때문에, 명성이 있더라도 그는 명성에서 멀어진다.

6) 분노에 지배되었기 때문에, 친구와 동료와 친지와 친척을 지녔더라도 그들을 그를 멀리 회피한다.

7) 분노에 지배되었기 때문에,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하고,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일곱 가지 유형의 분노를 보면 한존재를 파멸시키게 충분하다. 그 끝은 악처에 태어나는 것이다. 왜 그런가? 분노하면 살인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분노야말로 아버지를 살해하고 분노야말로 어머니를 살해하고 분노야말로 성직자를 살해하고 분노는 또한 어리석은 범부를 살해하네.(A7.64)라는 게송이 있기 때문이다.

 

파괴적으로 작용하는 분노

 

부모를 살해하면 무간지옥에 떨어진다. 오역죄라 하여 1) 어머니의 생명을 빼앗은 경우, 2) 아버지의 생명을 빼앗은 경우, 3) 아라한의 생명을 빼앗은 경우, 4) 나쁜 의도를 가지고 여래의 피를 흘리게 한 경우, 5) 승가를 분열시키는 경우를 들 수 있다.


분노하면 어머니와 아버지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음을 말한다. 부모를 살해하면 일겁동안 어두컴컴한 사이지옥 (lokantarikā)’ 에서 보낸다고 한다. 한우주기가 지나도 구제받지 못하는 중죄를 짓는 것이다.

 

분노하면 인간관계가 파괴된다. 그래서 친지와 친구, 벗들은 분노하는 자를 피하네.”(A7.64)라고 했다. 고객에게 화를 내면 다시는 주문하지 않을 것이다. 분노하면 분노는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격분하여 살인을 했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분노하면 살인자가 될 수 있다.

 

분노하면 괴롭다. 분노를 표출함으로 인하여 스트레스는 해소되었을지 몰라도 인간관계가 파괴되고 모든 것이 파멸적으로 작용했을 때 괴로움은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시간을 두고 먼 훗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분노하는 순간 괴로움의 화염에 휩싸이게 된다. 그래서 나중에 분노가 떠난 후에 불에 연소된 것처럼 괴로워하네.”(A7.64)라고 했다.

 

분노하면 스스로 불에 타는 것과 같다. 분노하면 즉각적인 결과를 나오게 하는데 그것은 괴로움이다. 분노함으로 인하여 괴로워하는 것이다. 그런데 분노는 순간이지만 괴로움은 매우 길다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격분하여 살인을 저질렀을 때 그 괴로움은 평생 갈 것이다. 살인이라는 중업을 지었기 때문에 악처에 떨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현생에서 이미 업보를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순간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인하여 죄책감과 괴로움으로 살아야 한다. 지옥고를 현세에서 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분노하는 자는 자신을 살해하네.”(A7.64)라고 했다.

 


윤회하면서 흘린 눈물의 양은?

 

분노는 파멸적으로 작용한다. 분노는 괴로움이라는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이런 일을 수도 없이 겪고 있지만 그때뿐인 것 같다. 격분하면 살인도 저지를 수 있는데 윤회하면서 그런 일이 없었으리라고는 볼 수 없다. 전생을 알 수 없다. 숙명통을 가지고 있지 않는한 전생을 기억할 수 없다. 다만 경전의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상윳따니까야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의 모음’(S15)을 보면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라고 했다. 왜 그렇게 말 했을까? 이유는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S15.1)라고 했다. 윤회의 원인이 무명과 갈애임을 알 수 있다.

 

윤회하는 것은 모르기 때문이다. 또 갈애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원리를 안다면 더 이상 윤회하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해법이 있다. 그런데 윤회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이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도둑으로 살면서 마을을 약탈하다 사로잡혀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S15.13)라고 했다.


도둑으로 살다 마을 약탈한다는 것은 살인도 저질렀음을 말한다. 목이 잘릴 정도라면 살인을 저지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과거 전생에 무수한 살인을 저질렀을 수 있다. 그래서 인간으로 살면서 오계를 어겨 목이 잘려 흘린 피가 사대양의 물보다 더 많다는 것이다. 다시 인간으로 형성되기 까지는 참회가 있었을 것이다. 목이 잘릴 때마다 오계를 지키겠다고 맹세하여 인간이 된 것이다.

 

오계를 지켜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면 아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처음부터 다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기는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란다는 사실이다. 한량 없이 윤회하면서 얼마나 많은 젖을 먹었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거쳐서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어머니의 젖과 사대양의 물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많겠는가?”(S15.4)라며 물어본다.

 

윤회하면서 목이 잘려 피도 많이 흘렸고, 윤회하면서 아기로 태어나 어머니의 젖도 많이 먹었다. 그렇다면 눈물은?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거쳐서 유전하고 윤회하는 동안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서, 비탄해하고 울부짓으며 흘린 눈물의 양과 사대양에 있는 물의 양과 어느 쪽이 더 많겠는가?”(S15.3)라며 물어본다.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에서 흘린 피와 먹은 젖, 그리고 흘린 눈물은 사대양과 비할 바가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그대들은 고통을 경험하고 고뇌를 경험하고 재난을 경험하고 무덤을 증대시켰다.”(S15.3)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사실에 대하여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라지기에 충분하고, 해탈하기에 충분하다.”(S15.3) 라고 했다. 이제 윤회를 끝내자는 것이다.

 

더 괴로운 것은

 

분노는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분노는 모든 인간관계를 끊어 버린다. 분노는 결국 자신에게 향하게 되어 있다. 분노하는 순간 즉각적으로 결과를 가져오는데 그것은 괴로움으로 나타난다. 그것도 참을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이다.  그래서 분노에서 파멸이 생겨나네.”(A7.64)라고 한 것이다.

 

분노하면 분노하는 당사자가 괴롭다. 그런데 더 괴로운 것이 있다.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미안함이다. 분노함으로 인하여 이미 관계는 파괴되었다. 더구나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을 때 그때 조금만 참았을 걸라며 자책하게 된다. 그러나 엎질러진 물이다. 다시 관계를 회복하기 힘들다.

 

분노로 인하여 관계가 단절 되었을 때 다시 회복하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진심어린 사과를 해야 할 것이다. 먼저 참회를 해야 한다. 한순간의 격분으로 인하여 일이 벌어졌을 때 회복불능이 되는데 더 큰 잘못을 저지르기 전에 참회해야 한다.

 

잘못을 잘못인줄 알고 참회했을 때 조금은 덜 괴로워질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상대방이 받고 있을 마음의 상처에 대한 것이다. 내가 분노함으로 인하여 겪는 괴로움보다도 상대방이 나의 분노로 인하여 겪을 정신적 충격을 생각하면 그 괴로움이 훨씬 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분노에서 해당될 수 있을까?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화내지 않으리라

 

상윳따니까야에 서원의 경이 있다. 제석천의 일곱 가지 서원에 대한 경이다. 경을 보면 마지막 일곱 번째에 나는 살아있는 한 화내지 않으며 만약 나에게 화가 난다면 곧바로 그것을 제거하리라.”(S11.11)라고 되어 있다.


삼십삼천 신들의 제왕이라 불리우는 제석천은 사람으로 살 때 일곱 가지 서원을 세웠다. 일곱 가지 서원을 실천하여 신들의 제왕이 된 것이다. 서원 중에 백미가 화내지 않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화내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만일 화를 내었다면 즉각적으로 참회할 것이라고 했다.

 

분노하지 않으려면 일단 선언을 해야 할 것이다. 어느 경우에서라도 절대로 화를 내지 않겠노라고 자신과 약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쉽지 않을 것이다. 쌓았다가 허물어지기를 수도 없이 반복할 것이다. 그때 마다 잘못을 참회하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는 것이다.

 

분노는 인간관계를 단절시키고 모든 것에 있어서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무엇보다 분노하면 괴롭다. 분노는 즉각적인 과보를 가져오기 때문에 지옥불과 같은 괴로움을 맛본다. 무엇보다 상대방을 아프게 한 것이 더 큰 괴로움으로 다가온다. 제석천의 서원대로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화내지 않으리라.”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분노하는 자는 추악하고

고통스럽게 잠을 이룬다.

또한 이익을 취했지만

그는 불익을 얻는다네.

 

그러므로 분노하는 자는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파괴를 일삼고

분노에 정복되어

사람은 재산을 잃는다네.

 

분노의 취기에 취하여

그는 명성을 잃고

친지와 친구, 벗들은

분노하는 자를 피하네.

 

분노는 불익을 생겨나게 하고

분노는 마음을 동요시킨다.

안으로 생겨난 위험을

그 사람은 깨닫지 못한다.

 

분노하는 자는 이익을 알지 못하고

분노하는 자는 원리를 알지 못한다.

분노가 사람을 정복하니

그때 암흑과 맹목이 그를 지배하네.

 

분노하는 자가 파괴를 일삼으면

쉽게 부수든 어렵게 부수든

나중에 분노가 떠난 후에

불에 연소된 것처럼 괴로워하네.

 

분노가 폭발하여

젊은이가 질책하면

물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듯,

그는 당혹한 모습을 보인다.

 

부끄러움도 없이 창피함도 없이

공경도 없이 말을 지껄이니

분노에 정복되어

결코 섬을 발견하지 못하네.

 

가르침에서 멀리 떠난

고통스런 업들이 있는데

나는 그것을 가르치니

그것을 잘 들어야 하리.

 

분노야말로 아버지를 살해하고

분노야말로 어머니를 살해하고

분노야말로 성직자를 살해하고

분노는 또한 어리석은 범부를 살해하네.

 

어머니의 양육으로 사람은

이 세계에 태어났는데,

그 생명을 부여해준 존재를

분노한 어리석은 범부가 살해하네.

 

그 뭇삶들은 자신을 친구로 삼으니

자신이 가장 사랑스런 존재이기 때문이네.

그러나 많은 다양한 것에 미혹되어

분노하는 자는 자신을 살해하네.

 

미혹된 자들은

칼로 자신을 죽이고 독을 삼켜 죽고

밧줄에 묶어 죽거나

산의 협곡에 떨어져 죽는다.

 

존재를 살해하고

자신을 살해하는 업을 짓는 자들은

무엇을 하는지 깨닫지 못한다.

분노에서 파멸이 생겨나네.

 

분노에서 숨겨진

죽음과 밧줄이 생겨나니

자제와 지혜와 정진,

그리고 올바른 견해로 끊어야 하리.

 

현명한 자라면, 이 하나의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끊어버려야 하리.

이처럼 가르침을 배워야 하리.

결코 당혹해 하지 말라.

 

분노를 여의고 절망도 여의고

어리석음을 여의고 탐욕을 떠나

자제하는 자는 분노를 버리고

번뇌없이 완전한 열반에 드네. (A7.64)

 

 

2020-02-0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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